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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희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돌베개 2018

장르를 넘어 ‘통합인문학’으로

 

 

유홍준 兪弘濬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hjyou1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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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의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書畵評釋)』(전2권) 은 18세기 영조시대 최고 가는 문인화가라 할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 60)의 그림 64점과 글씨 127점을 해석하고 평한 무려 2300여면의 역저이다. 제목만 보면 능호관의 낱낱 그림과 글씨에 대한 해설 같지만, 능호관의 작품에 그의 사상과 문학과 삶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까지 세세히 규명되어 있다. 조선시대 회화사를 전공하면서 일찍이 능호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나로서는 그 방대한 작업에 놀라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교차하였다.

능호관 이인상은 비록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같은 대중적 인지도는 없지만 동시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화가로 손꼽히며, 그가 이룩한 예술세계는 높이 평가되어왔다. 영정조 시대 명사들을 분야별로 증언한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서는 그의 그림과 글씨 모두가 ‘상승별품(上乘別品)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설송도」 내력을 이야기하면서 능호관 그림의 내재적 깊이를 말하였으며, 까다롭기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분은 능호관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우리 시대의 대안목이라 할 최순우, 이동주 또한 그는 진실로 문기(文氣) 넘치고 심의(心意)에 가득 찬 명화를 남긴 참된 의미의 문인화가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능호관 이인상은 격조 높은 문인화의 구현으로 조선시대 서화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바로 그 차원 높은 예술세계로 인하여 대중적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능호관의 예술세계는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상을 정확히 그리는 사실(寫實)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담은 사의(寫意)를 앞세웠고, 먹의 농담을 능숙하게 구사한 것이 아니라 담묵(淡墨)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어찌 보면 밋밋하고 싱겁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그의 글씨는 기교를 드러내지 않아 어디가 그의 장점인지 바로 알아차리기 힘든 면이 있다. 그래서 허주(虛舟)라는 분(혹 김재로라고 생각되는 동시대 문인)은 『능호필첩』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 사람 중에는 능호관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은 기(奇)해서 좋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허(虛)해서 싫다고 한다. 그러나 능호관이 귀(貴)한 바는 참됨〔眞〕에 있다.(…) 능호관의 묘처는 기름진 데〔濃〕 있지 않고 담담한 데〔淡〕 있으며 익은 맛〔熟〕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신선함〔生〕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알리라.

 

이처럼 능호관의 예술을 두고 ‘오직 아는 자만이 알리라’라고 한 것은 그의 서화가 단순히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문학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사철과 시서화가 어우러진 고차원의 문인화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여느 서화가와는 달리 그의 인간상 전체와 연계하여 고찰할 때만 그 진면목을 밝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능호관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은 일이나 한편으로는 도전해볼 만한 학문적 매력이 충분히 있고 문화사적 의의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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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능호관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98년에 『능호집』을 번역하기 시작해 삼년 뒤 마쳤다. 서화사에 대한 연구는 실 작품의 조사와 분리될 수 없는데 그는 능호관의 서화작품을 열정적으로 수집하여 이번에 출간한 『서화평석』에 총 191점을 실었다. 이는 그간 학계에 알려진 것의 거의 두배에 달한다. 또 그는 2005년 능호관의 후손이 소장한 『능호집』의 초고로 기왕에 간행된 것보다 두배가 넘는 양의 필사본인 『뇌상관고(雷象觀藁)』를 발굴하여 지금도 이를 번역 중에 있다고 한다.

박희병의 이러한 20여년간의 연구성과들은 근래에 와서 하나씩 결실을 맺기 시작하여 2016년에 『능호집』(전2권, 돌베개)을 완역 출간하였고, 이번에는 낱낱 서화작품을 분석하고 평을 가한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을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능호관 이인상 서화집』과 『능호관 이인상 연보』도 출간하고 『뇌상관고』도 번역 출간할 것으로 예고되어 있다. 참으로 긴 세월에 걸친 방대한 작업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의 능호관 연구가 『능호집』의 완역에서 출발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기존의 국학 연구는 제대로 번역을 펴내겠다는 생각 없이 기존의 부실한 번역본에만 의존한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문집의 완역은 그에 대한 수십편의 논문보다도 높은 가치가 있다. 저자 자신도 아마 『능호집』의 번역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20여년 그를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능호집』에 실려 있는 글의 대종은 시(詩)인바, 한문 독해능력과 함께 그의 전공이 국문학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능호관의 시 또한 그의 서화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높이 칭송되었다. 그의 시에는 개결한 선비의 고고한 정신이 맑게 드러나 있어 그의 벗인 단능 이윤영은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밭의 선명한 백로다’라고 평했다. 그래서 박희병은 『능호집』을 완역하고 권말에 「능호관 이인상: 그 인간과 문학」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장문의 논문은 마치 후대인들이 미처 알아주지 못했던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이 담긴 헌정사 같았다.

통상적인 학계의 관행에 의하면 국문학자로서 박희병 교수는 여기에서 얼마든지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우리 국학 연구가 장르별로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서서 총체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적 신념을 갖고 능호관의 인간상과 작가상 전체를 연구하는 길로 나섰다. 자신은 이를 ‘통합인문학’이라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저자는 열심히 능호관의 서화작품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이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가 능호관의 서화작품이 있다고 신고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막막하고 갑갑하지만 직접 찾아다니는 길밖에 없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모은 서화작품을 일일이 분석하고 평가를 내린 것이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이다. 저자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건 평소에 서화를 보는 안목과 서화사에 대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박희병 교수를 아직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얼핏 전해 듣기에 서예가인 부친(박성열)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익혀왔다고 한다.

『서화평석』의 작품 분석은 시서화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와 평이 아주 잘 살아 있다. 능호관의 그림에는 거의 다 제시(題詩)와 화제(畵題)가 들어 있다. 그리고 대개는 벗을 위해 그려준 부채 그림이 많다. 때문에 이 제시와 화제를 정확히 해석해야 그림의 뜻이 살아난다. 능호관에 대한 연구가 통합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서화평석』의 회화편과 서예편 각권에 「방법과 시각」이라는 글을 통하여 이 작업의 의의와 함께 그의 예술론을 피력했다.

 

 

3

 

저자의 능호관 이인상에 대한 연구는 예술작품에 머물지 않고 필연적으로 그의 삶과 친우들 전체로 확대하며 사회사상적 맥락까지 연장되었다. 능호관은 완산 이씨 명문 출신으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출이었기 때문에 원대서족(遠代庶族)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이 있었다. 그는 진사에 올랐지만 서출이었기 때문에 사근역 찰방과 음죽현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안이 아주 궁핍하였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북부참봉부터 여러 미관말직을 전전했지만 항시 올바른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능호관은 당대의 명류들과 교류하며 자기의 예술과 사상을 구현하였다. 환재 박규수가 말하기를 ‘능호관이 사귄 이는 모두 명공거유(名公巨儒)였다’고 했다. 이윤영, 오찬, 김무택, 김순택, 김상숙, 신소, 임매, 황경원, 김종수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다. 이들 중에는 환로에 오른 이도 있지만 대개는 고고한 선비를 지향하는 국중의 고사들이었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서 「고사편(高士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많다. 특히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과 단짝이었고 이 금단의 벗들은 단릉과 능호관에서 한자씩 따서 ‘단호(丹壺)그룹’을 형성하고 무수한 아회를 열며 그 속에서 사상과 문학과 예술을 펼쳐나갔다. 이 단호그룹은 노론계 일사(逸士)들로 여전히 숭명배청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박희병은 그래서 이들이 시대착오적인 아나크로니스트(anachronist)였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올곧은 선비의 자세를 지닐 수 있었고, 그것이 능호관을 비롯한 단호그룹의 문예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능호관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와 「장백산도(長白山圖)」 같은 명작은 이런 단호그룹의 분위기에서 이해할 때 그 뜻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리하여 박희병의 『서화평석』은 능호관 이인상이라는 인간상을 완벽하게 복원해놓았다. 이는 후지쯔까 치까시(藤塚隣)가 「청조문화의 동전(東傳)과 추사 김정희」 연구에 일생을 바친 것에 비견할 만한, 우리 국학 연구의 큰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한 시대의 인물에 자신의 일생을 거의 다 바치는 이런 연구를 보면 ‘도플갱어’라는 말이 떠오른다. 연구자는 결국 연구 대상과 닮아간다는 인상이다. 또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엄청난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진경산수화」 대신 「본국산수화」라거나 「송하관폭도」를 「송변청폭도」라 고쳐 부르며 통용되어온 이름을 바꾸는 등 자기주장에 고집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이것이 그의 업적에 큰 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박희병 교수의 저서들을 보면서 35년 전인 1983년에 ‘능호관 이인상의 삶과 예술’을 미술사 석사논문으로 썼을 때의 생각이 계속 따라왔다. 당시 나 이전에는 능호관에 관한 논문이 한편도 없었고 오직 임창순 선생이 번역한 「이인상 간찰」이 유일한 참고서목이었다. 능호관 이인상은 막연히 단양에 은거한 고고한 선비로만 생각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완산 이씨 밀성군파 족보』를 뒤져 그가 서출이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오희상이 쓴 능호관의 행장(行狀)과 황경원이 쓴 묘지(墓誌)를 찾아내어 그의 행적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능호집』을 복사하여 더듬거리며 읽으면서 단호그룹의 인사들과 교류한 자취를 찾아내고 그의 인간상과 작가상을 새롭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8인의 평전을 기록한 『화인열전』(역사비평사 2002)에서 능호관 이인상을 소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박희병 교수의 치밀한 연구를 보니 내 논문의 오류가 하나둘이 아니다. 남간(南間)이니 종강(鍾岡)이니 하는 위치 추정도 틀렸다. 나는 내심 옛 논문을 언젠가는 고쳐 쓸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폐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박희병 교수의 연구가 나로서는 마냥 고맙기만 하고 또 그의 업적이 더욱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