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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계속 학습되는 혁명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명예교수. 저서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사회인문학의 길』 등이 있음. baik2385@hanmail.net

 

 

1. 새롭게 묻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촛불의 시대정신은 3·1운동 인식에 어떤 새로운 빛을 투영할 것인가?

‘촛불혁명’으로 열린 새로운 정치공간과 남북화해의 움직임은 3·1운동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촉발한다. 때마침 올해로 100주년을 맞아 좀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대두되고 있다. 촛불혁명이라는 또다른 역사적 전환을 경험하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3·1혁명’이라는 용어까지 부각되면서 3·1운동(이하 3·1)이라는 익숙한 용법에 안주해온 기존 역사인식의 틀을 새롭게 점검해보기를 요구한다.1

3·1은 1920년대부터 사회역사적 변화 속에서 부단히 재의미화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분단상황이 고착되면서 남북 간에 달리 기억되었고, 남한 내부에서도 3·1의 의미부여를 둘러싸고 종종 기억투쟁을 겪어왔다. 박근혜정부 시기 건국절 문제를 둘러싸고 3·1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벌어진 논쟁이 기억에 생생하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중국의 5·4운동(이하 5·4)도 그간 재기억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란을 겪어왔다. 5·4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역사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실문제이다. 지금 대두되는 3·1의 새로운 의미화 방식—‘3·1혁명’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제안까지 나오는 움직임—역시 사회적·정치적 상황 변화에 반응한 것임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새로운 기억화가 얼마나 공유영역(commons)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필자는 이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3·1의 세계사적 의의 내지 문명전환의 의미를 검토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학계에서 그간 3·1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이 중국의 5·4를 비롯한 동시대 다른 민족운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해석이 ‘시간의 선도성’에 얽매인 것이고 ‘세계사적 의의’는 약소민족의 ‘동시성’(simultaneity)이라는 관점에서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도 나왔다.2 3·1과 5·4의 관계를 ‘역사적 동시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3

필자는 동시성이라는 시각을 적극 받아들여 3·1의 세계사적 의미를 해석하되, 3·1을 동시성을 지닌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개별성도 아울러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연동하는 동아시아’라는 시각에서 3·1을 다시 보려고 한다. 연동은 “서로 깊이 연관된 동아시아가 다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공간(곧 구조)을 서술하는 동시에 주체적인 연대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다.4 여기에 좀 덧붙이자면 연동은 구조적 연관과 행위주체의 상호참조를 의미하는데, 후자의 경우 운동뿐만 아니라 사상·제도 영역에 두루 걸쳐 나타난다. 세계체제에 접속되면서도 제국 일본, 반(半)식민지 중국, 식민지 한국 세 나라가 그 위계구조에서 다른 위치를 점한 채 상호작용하는 동아시아적 양상에 좀더 주목할 것이다. 서구 열강의 대리역인 일본제국의 팽창이 두 나라의 (반)식민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삼국의 사건을 일일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고, 반식민지였던 중국의 반일 민족운동인 5·4를 발견적 장치로 삼아 반식민지와 식민지라는 차이가 갖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5 3·1을 조명하려고 한다.

이 점을 중시하는 것은 ‘문명화’를 앞세운 제국주의가 조성한 (반)식민지 근대의 복잡성을 꿰뚫어 보고 거기 내재된 근대극복의 계기를 찾기 위해서이다. 이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동시수행을 의미하는 ‘이중과제론’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6 이를 통해 볼 때 중국은 1911년 공화혁명에 성공했으나 8년 만에 5·4가 일어나고, 한국은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당한 지 9년 만에 3·1이 일어나는 과정의 같고 다름이 지니는 구조적 의미가 좀더 또렷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이중과제론의 시각에서 3·1의 세계사적 의의 내지 문명전환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이 작업이 3·1을 새롭게 조명하는 하나의 방법적 모색이 되기를,7 그리고 촛불혁명의 역사적 근거를 다지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지난 100년, 특히 한국의 100년의 역사를 다시 보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2. 1919년, 새로운 시대의 도래: 개조와 해방의 큰 흐름

 

한중일 세 나라의 근대이행 경로는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십년간에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해 열강의 분할지배의 위협을 당함으로써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에 따라 세계체제의 반주변부로, 러일전쟁을 거치며 중심부로 상승했다. 이렇듯 분기가 형성된 관건은 조선이다.

그런데 중국은 반식민지라는 조건이 허용한 상대적인 자율성의 공간을 활용해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했다. 얼핏 보면 근대적응에 성공한 듯하나, 그것이 공화의 ‘형식’을 갖춘 데 그쳐 그 ‘실질’을 채우려는 5·4가 일어났다.8

이에 비해 조선은 1년 앞서 이미 일본제국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식민당국은 ‘문명화’ 정책을 시행한다 했으나, 재원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서구의 시선을 의식해 너무 조급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무단통치, 즉 헌병·경찰·관리를 매개로 총독부의 폭력적인 지배질서를 민중생활 일체에 관철하는 식민지 근대화 방식을 택한 것이다.9 지방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독특한 자치적 성격과 전통적인 중앙의 민에 대한 간접 규제 대신 향촌의 자율성을 해체하고 직접 규제를 강행함으로써 반감을 샀다. 또한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주세·가옥세· 연초세·영업세·인지세 같은 조세를 신설하고 번잡한 신고서 양식을 채택하면서 식민지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교육·행정·사법에서의 일상적인 차별이나 공동묘지령, 뽕나무 강제 재배, 화전 단속, 간척사업에의 부역동원 같은 미시적 통제정책에도 시달렸다. 게다가 물가의 살인적 급등 및 콜레라와 장티푸스, 스페인독감 같은 전염병의 창궐도 가세해, ‘폭발력을 내장’한 지경에 있었다. 문명화의 정당성에 현저한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강제병합된 지 겨우 9년 만에 3·1이라는 전민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난 것을 적개심과 반항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먼저 1919년을 ‘인류의 신기원, 해방의 신기운’으로 읽은 시대적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을 그렇게 인식하게 만든 시대적 사건은 다름 아닌 1차대전이었다. 비록 전쟁 자체는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정의와 인도 중심의 ‘신사회 건설’로 귀결되고 있다는 인식이 세계 전체에 확산되어 ‘개조’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신문이나 전보 같은 근대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에 가깝게 ‘경험’된” 세계대전은 “세계의 ‘세계성’을 자각하게 하고 ‘동시대성’의 감각을 형성하게 만든 사건”이었다.10 조선인은 세계대전을 통해 서구문명, 문명개화에 대한 개항 이래의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희망적 관점에서 일본을 포함한 현 세계질서의 근본적 개편과 개조를 전망하며, 그러한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민족의 미래를 꿈꾸기에 이르렀다.11 세계적 차원에서 동시대인에게 획기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특정 사건들이 발생한 ‘지구적 순간’(global moment)12을 공유하며 문명전환의 새 시대를 맞는 느낌을 처음으로 가졌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깊이 생각해볼 것은 조선인들이 세계에 대한 동시대적 감각을 가지면서도 조선이 그것과 어긋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적 전환에 (빠리강화회의에 공식 대표를 파견할 수 있던 중국과 달리) 식민지 조선이 참여할 여지가 있는가에 대한 초조감은 당시 조선인들의 사유와 실천에 중요 변수로 작용하였다.13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윤치호는 민족자결론에 낙관하는 풍조를 경계하면서 조선 문제는 베르사유협상에서 거론도 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3·1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최린은 결과에 대한 확신은 없더라도 각국이 소리 높여 평화를 제창할 때 조선민족도 동참하면 좋을 것으로 판단하고 3·1에 참여했다.14 아마도 상당수 사람들이 양자의 사이에 위치했을 터이나, 정확한 지식에 기초해 비관한 사람이 아니라 의지에 기대어 낙관하면서 나선 사람들이 국제질서 변동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 아니라) 틈새를 활용해 ‘지구적 순간’에 동참하며 자기 사회의 변혁과 일치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세계사적 자각은 당시 기독교와 천도교 같은 종교계 인사나 교사·학생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어 있었다. 천도교인이자 농민인 황해도의 문창환(당시 24세)이 신문하던 수사관에게 “바로 만국평화회의도 눈앞에 닥친 오늘 조선의 독립은 그 회의의 문제가 되어 좋은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 사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그 확산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생생한 예라 하겠다.15

「독립선언서」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었듯이 이제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리라는 기대 섞인 시대인식과 국제정세 파악은 식민당국의 억압의 강도와 더불어 3·1이라는 집단적 저항을 촉발한 요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항 주체의 형성이다.

 

 

3. 3·1에 나타난 민의 결집 경험: 주체·매체·목표

 

민의 결집 경험을 주체, 매체, 목표로 나눠 살펴보려 하는데, 이를 가로지르는 특징은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연유하는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혼재와 그 의미의 재구성이다. 이 조건은 일제의 ‘문명화’ 정책이 지향한 근대에 ‘부정적 특성’이 있음을 간파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래의 운동과 사상 경험을 살려 전민족적 저항을 이끌어내는 연료가 되었다.

먼저 주체의 측면부터 들여다보자. 1919년의 시위운동은 전국적인 지휘기구 없이 방방곡곡에서 3, 4월간 자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로 인한 운동의 분산성과 조직적 준비 부족이 일제의 무력탄압을 극복할 수 없게 한 내적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자발적 조직화, 전민족적 확산, 적극적 투쟁 양상 및 민중의 헌신성은 3·1의 중요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16

물론 시위운동을 동원할 수 있는 조선인의 조직적인 역량이 분산된 채로 존재했다.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공표한 33인의 대표 전부가 종교계 인사(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였다. 권유받은 명망가들이 거절했기에 불가피한 면도 있었겠지만, 자국 정부가 없는 식민지 조건에서 종교가 사실상 민족의 대변(代辯)체 구실을 자임한 이례적 특징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17 특히 신도 수가 300만에 달하고, 일제의 정교분리정책에 협력한 기독교와 달리 당분간 교정일치의 노선을 유지하고자 한 천도교(1905년 동학에서 개칭)는 민족대표의 구성과 자금 조달은 물론이고 지방의 시위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식민지배라는 엄혹한 여건에서 민족주의교육에 의해 성장한 청년학생층, 그리고 향촌사회에 대한 일제의 조직적 해체정책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향촌공동체의 양반유생 및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운동의 흐름이 작동했다.

그들의 활동상은 흔히 ‘도시형-평화형’ 시위에서 ‘농촌형-공세형’ 봉기로 변화해간 것으로 이해된다.18 그러나 전체상을 보면 처음부터 양자가 혼재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3·1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주역인 농민의 참여는 ‘내란’을 방불케 하는 만세시위의 양상을 보였다는 사실도 최근 지방사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드러나고 있다.19 폭력적 시위의 양상이 나타났고, 처음부터 폭력행동을 불사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의 폭력행동이란 비대칭적 폭력 진압에 대응한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였다. 게다가 나름의 자율성에 따라 일본제국의 식민주의 체제폭력의 대리기구와 그 대리인으로 대상이 한정된 것이었다.20 이것은 민족대표가 당초 요구한 전술적 고려사항인 ‘비폭력’과 배치된다기보다 민족자결, 민권 및 평등의 실현을 담은 적극적인 평화, ‘아래로부터의 평화’21라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3·1 주체의 양상은 5·4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5·4는 근대지식인과 청년들의 주도 아래 상인과 노동자가 참여하여 삼파(三罷)투쟁(철시·파업·동맹휴교)을 벌인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각계(직능별) 민중연합의 민족운동이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상인과 노동자의 참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인들이 조선시대 국정 항의 수단이었던 철시라는 재래 방식을 활용해 가담했다. 또한 노동자와 직공은 파업을 감행했고, 학생들은 3개월 이상 동맹휴교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 이것은 반식민지 상태에서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제약된 정부이긴 하나 자체의 힘으로 근대에 적응하면서, (1차대전으로 서구 열강이 제 문제에 몰두하느라 상대적으로 중국에 틈새가 생긴 시기를 활용해) 민족산업이 활황을 이룬 중국과 식민지 조선의 차이이다.

여기에서 3·1의 독특성인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혼재와 재구성이 또렷해진다. 위에서 보았듯이 종교세력, 청년학생, 양반유생이 참여했고, 여기에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운동의 흐름이 민란의 투쟁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가세한 것이다. 이 점은 5·4의 주체인 각계 민중연합보다 더 다층적인 주체의 (범계급적·범민족적) 연대운동이라 할 만하다.(종교세력과 농민이 직접적인 원동력이었음은 두드러진 차이다. 이들은 근대극복의 촉매 역할을 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이 특징은 그들이 운동을 확산하는 데 활용한 각종 매체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국상이라는 의례와 만세라는 결집 매체부터 살펴보자. 3·1은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는 광무황제(고종)의 국상으로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황제에 대한 애도·추모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유희이자 축제로서의 만세에 대한 호응이 혼재한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었다.22 이 점은 ‘만세’라는 구호에서 좀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조에서 ‘천세(千歲)’와 혼용되던 ‘만세’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일원화되었고, 독립협회운동을 거쳐 애국계몽운동기에 일반화되어 근대적 지식인에 의해 계몽적으로 확산된 정치문화였다. 그런데 3·1에 이르러 그것이 “민란의 정치문화를 매개로” 하여 “민족의 일체감을 양성해 일본에 대한 저항을 전국적으로 표상하는 민중의 발성장치”가 되었다.23

민중동원의 주요 매체였던 태극기와 깃발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잘 드러난다. 대한제국 황제의 통치권을 표상한 태극기는 3·1 지도부가 제국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불러일으킬까 우려해 조직적으로 활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국가와 국민의 일체화를 표상하는 쪽으로 의미가 바뀌었다.24 또한 동학농민운동에서 이미 수없이 등장했던 깃발을 통해 시위 참여자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의를 밝히는 사례들이 종종 나타났다. 이제 깃발들은 개인과 집단의 정치성을 표방하는 수단이요 투쟁과 저항의 근대적 상징이 되었다. 만세가 지역으로 확산될수록 선언서보다 깃발과 통문이나 격문이 더 많이 활용되었다.25

그밖에 공론장으로 학교, 교회 등 종교시설 및 장터가 활용되었던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정기시가 열리는 장터는 운동에 관한 소문이 구전되는 폭발적 매개공간이었다. 19세기 말 농민운동에서 불리었던 현실비판가사와 1900년대 신문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해서 실현된 소통방식인 계몽가사26가 각종 애국운동가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또한 봉화시위나 등불행진(山呼) 같은 재래의 방식을 활용한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27 그밖에 기차를 이용해 재래적인 방식인 소문과 방문(訪問)이 증폭되고 근대적 인쇄매체(등사기 등) 덕에 3·1의 ‘전국화’가 이뤄진 것도 주목된다.28

이와 같이 재래적 비문자미디어와 근대적 문자미디어가 운동의 필요에 따라 두루 동원된 매체의 다층성은 3·1로 형성된 저항문화의 특성이라 하겠다. 신해혁명 때는 재래적 결집 매체가 더러 동원되었지만, 5·4 시기 자본주의가 한층 더 진전되어 주요 도시에서 조직된 동아리〔社團〕와 신문과 잡지 및 전보 같은 근대적 인쇄매체가 주로 활용되었던 사실과 대조된다. 이 역시 반식민지와 식민지의 차이가 빚은 특성이다.

이어서 3·1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표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현장에서 불린 ‘만세’에는 개인과 민족의 해방 욕구, 그리고 새나라에 대한 기대가 담겼다. 그렇다면 그들은 새나라를 공화정으로 표상했을까. 이와 관련해 애국이 곧 충군이라는 관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역량을 과시한 3·1의 “시위자들은 고종과 함께 왕조적 질서에 대한 역사의 장례를 치렀던 셈”이다.29 1919년 전후해 복벽운동도 없지는 않았지만, 신해혁명으로 황제제도와 형식적으로 단절해 5·4를 거쳐 공화의 실질을 다진 중국과 달리, 강제병합으로 사실상 군주제가 폐기되다시피 한 공백에서 과거와의 단절은 쉽게 공화정에 대한 전망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확산시켰다. 여기에 신해혁명 소식도 작용했다.

공화주의라는 쟁점과 관련해, 필자는 3·1 전개과정에서 대두된 ‘국민대표’라는 구호의 사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국민국가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국민들이 주권을 대표에게 위임했다는 사상이 국민대표라는 인식에 잘 드러난다. 4월 23일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벌어진 시위가 ‘국민대회’였다. 여기에서 지역의 대표가 국민대표를 구성한다는 발상이 나타났다.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화국이라는 이상은 민중 사이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3·1의 과정에서 단체나 조직을 만들지 않고 스스로 민족대표 혹은 국민대표로 자처하는 개인들도 출현했다.

5·4에서 톈안먼광장에 모인 민중들이 연 것이 ‘국민대회’였고, 이 경험으로부터 각계연합의 권력체인 ‘국민회의’ 구상과 이를 실천하려는 ‘국민회의운동’이 1920년대로 이어져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에도 영향을 미쳤다. 선거를 통해 지역대표를 제대로 뽑을 수 없었던 당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제기된 것이다. 여기 담긴 대표성과 직접성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3·1과 5·4에서 이들 대표가 선거와 같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선출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다. ‘대표’의 정당성은 잇따른 민중시위에 의해 사후적으로 추인되고,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거부하고 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때 인정되는 것이다.30 식민지 조선에서 후자가 좀더 두드러졌다고 판단된다.

3·1에서 표출된 공화제에 대한 열망을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3·1의 정신은 이날 선포된, 10개 조항으로 이뤄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반영됐다. 임정의 법통성이 갖는 정치적 함의, 그리고 임정에 대한 과잉기대감과 맞물린 과잉대표성에 대한 논란이 학계에 존재하는 모양이다.31 이 논의에 개입하기보다는 임정의 지향을 포함해 3·1이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가 자유와 평등을 매개로 민족자결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점,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상하는 원천으로서 의미가 있음32을 새겨두는 데 그치겠다.

이와 함께 필자는 새나라에 대한 열망을 단순히 제도적으로 공화정이 실현되었는가에 축소해 이해할 일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3·1에 나타난 ‘종교적 열망’이라 부름직한 유토피아에의 열망, 즉 개인의 이익과 민족의 독립과 세계 해방이 융합된 ‘현세적 유토피아니즘’,33 또는 억눌리고 잠재해 있던 민중의 변혁의식이 일거에 폭발한 ‘해방주체의식’34에 주목해야 한다.

동학을 비롯한 여러 민중신앙을 통해 전승된 후천개벽의 소망과 대동사상35이 새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힘을 실어줘, 3, 4월간 계속된 3·1이 계급과 계층, 도시와 농촌을 망라한 전민족적 항쟁으로 거듭났으며, 전국을 “인민자치의 해방구”36로 만들었다. 1911년과 1919년 두단계 공화혁명을 거친 중국과 달리 압축된 에너지가 한번에 불붙어 그만큼 파급력이 컸던 것이 아닐까. 훗날 ‘그 위대한 정신의 비약’으로, 또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37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3·1로 얻어진 해방의 체험은 사회적·개인적인 영역 전반에 걸쳐 시간관념에 미친 영향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기미 이후(己未以後)’라는 관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는 “전에 보지 못하던 새 현상”, 즉 “전에 듣지 못하던 새말이 많이 생기고 전에 쓰지 못하던 새 문자도 많이 쓰게 된” 상황을 의미했다. 3·1은 당대 민족운동 혹은 ‘사회운동’을 시기구분하는 중요한 단위이자 개인 시간을 재는 한 척도, ‘시간적’ 기준점 역할을 맡았다.38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기에 3·1로 인해 이전에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조선인의 민족성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39

이 자신감이야말로 ‘3·1세대’라는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켰다. 이 변혁의 사건을 경험한 그들이 바로 ‘하늘을 본’ 사람들이다.40

 

 

4. 3·1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운동과 사상의 누적적 성취

 

베르사유조약 체결 과정에서 미해결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워싱턴회의(1921~22)에서 미국·영국·일본의 협조체제(곧 워싱턴체제)가 성립되어 열강의 동아시아에 대한 기득권이 보장되는 ‘상대적 안정기’에 들어갔다. 일부 독립운동가의 전망과 달리 일본의 입지는 굳어졌다. 1922년을 전후한 시점의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3·1로 분출된 독립에의 기대는 약화되었다. 3·1이 수그러들면서 민중은 일상생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3·1 직후와 비교하면 비관적인 분위기가 짙어졌다.

이러한 국면이 초래된 것은 일차적으로 1919년의 민족봉기가 식민당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억압된 탓이다. 그런데 1919년에 분출된 해방의 열망 속에 든 다양성이 공화의 지향으로 수렴되긴 하였으나 그 제도화의 길이 제약된 식민체제 아래 그 실질을 둘러싸고 곧 분화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민족운동세력이 좌우익으로 갈라졌다. 그렇다면 3·1은 실패한 것인가.

근대성의 지표인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제도화의 기준에서 볼 때 단기적인 성취에 실패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하다. 당장 독립하여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고, 공화정을 채택한 임시정부 설립의 의의는 높이 평가되나 파벌과 갈등에 시달려 한반도 안팎의 민족운동 전체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같은 시기 반식민지 중국에서 5·4를 경험하고 새로운 주체로 각성한 청년학생들이 ‘사회개혁적 자아’의 형성 경험을 거쳐 직업혁명가로 전환하며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해 추진한 반제반군벌의 국민혁명에 참여한 양상과 분명 차이가 있다.41

물론 당시 일본내각이 제국 경영전략을 수정하는 데 추진력을 제공해 식민지가 본국의 질서 변동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된 것을 정치제도화 측면에서 3·1의 효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일환으로 조선에 대한 통치정책도 문화통치로 바뀌어 한반도에서 민족운동이 활력을 띨 제도적 공간을 확보한 것도 중요한 성취이다.

그러나 3·1의 의미를 제도화의 측면에서만 좁게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를 넘어 사상과 운동 경험이 계속 학습되는 ‘점진적·누적적 성취’(incremental achievement)42로서의 3·1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이래 각지에 청년회는 물론이고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노동자·여성 단체도 결성되었다. 또한 중국으로 떠난 이주자들의 국경횡단적 단체들(특히 항일 무장투쟁조직)도 출현했다. 그래서 해외 독립운동가 단체들이 ‘대혁명’으로 지칭해왔고, 1941년 (좌우합작의) 임시정부가 ‘3·1대혁명운동’이라 불러 「건국강령」에도 그렇게 적혔다. 해방 직후에도 좌우익 모두에게 (분기된 채로) 중시되었다. 또한 1950년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3·1을 남북통일과 결부시켜 기억하는 관습을 확립한 동시에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3·1을 민주주의와도 결합시킨 과정은 이미 상당히 밝혀졌다. 그러니 여기서는 문명론적인 차원의 성취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겠다.

우선 3·1 당시 조선인들이 3·1의 세계사적 동시성을 꿰뚫어 보았음은 뜻깊다. 3·1이 5·4에 미친 영향에 대한 1920년대의 인식을 보여주는 동아일보의 한 사설을 인용해보자. “기미년 우리 3·1운동에 곧이어 일어난 모든 민족운동 중에는 중국의 5·4운동도 그 하나이니”(1925.3.2)라고 5·4와의 연관을 언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난 서민의 ‘쌀소동’도 조선인들은 연동된 것으로 파악했다. 1차대전의 호경기 이래 갑자기 식생활이 풍부해져 쌀밥을 먹게 된 일본의 도시 빈곤층이 쌀값 폭등으로 타격받자 분노한 나머지 1918년 저 유명한 ‘쌀소동’을 일으킨 데 비해, 조선인은 쌀값 폭등에 덜 민감해 쌀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강제합병 이후 쌀 공출이 증가하면서 잡곡을 더욱더 주식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43 그런데 당시 염상섭은 “쌀폭동과 유학생의 행동은 그 표면은 달라도 그 생존의 보장을 얻으려는 진지한 내면의 요구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다”44고 보았다.

이같은 ‘연동하는 동아시아’에 대한 자각은 ‘지구적 순간’을 지역적으로 전유한 새로운 시대인식·세계인식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이 ‘영미본위의 평화주의’를 비판하며 자신을 축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것을 주장하는 모순을 폭로하고, ‘이중적 주변’인 조선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에 꼭 있어야 할 단계”임을 짚어낸(「독립선언서」) 동아시아 인식도 나타났다. 그런데 3·1을 경험한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서 근대극복의 계기를 찾았다.

식민지 시기 일제가 강조했던 ‘선진문명기술’을 기준으로, 즉 근대적응의 시각에서만 보았을 때는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지니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 세계사적 조류인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개조’의 시대에 부합하는가 여부가 우열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 기준에 비춰보면, 일본은 남녀불평등, 관존민비, 노동자·농민의 열악한 생활환경 등이 존재하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조선, 중국을 침략한 ‘불의’의 존재가 된다. 요컨대 일본이 서구문화보다 후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식틀을 확보한 것이다.45 그런데 근대의 ‘성취할 만한 특성’을 기준으로 일본이 그에 미달함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면 근대극복의 계기로 부족하나, 이같은 문명비판론이 조선에 밀착해 식민지 현실을 천착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 세계체제의 위계구조에서 하위인 식민지에 처한 조선인은 세계의 시간과 조선의 시간 사이에 놓인 불일치에 민감하기 때문에46 오히려 조선이 근대적응에 매몰되지 않고 대안적 문명에 도달할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이른 사례를 보자. “현대문명이 최후의 표준이라 하면 말할 것이 없지마는 현대문명 이상에 현대문명을 파괴하고 나아갈 그 어떤 경지가 있”어 인류가 미리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한의 노력을 힘쓴다 하면 우리들에게 이만한 행복이 다시없을 것”이니, “조선사람 된 자—또는 조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민족으로서는 낙심 말고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한 문장이 그에 해당한다.47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나, 당시 천도교가 주도해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종합지 『개벽』(1920.6~1926.8)의 주요 논조에 닿아 있다. 이는 세계사적 조류인 문명비판론(특히 자본주의 병폐를 비판한 개조론)과 결합된 천도교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의) 개벽사상, 곧 문명전환운동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 내용이 당대의 조선민족이 꾸려가던 일상적 삶의 곤궁에서 비롯되는 실감에 잘 부합되었기 때문에 1920년대에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48

조선이 다른 피억압 민족들과 더불어 추구해야 할 대안적 문명의 길에 대한 자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연동되는 열띤 쟁점인 동서문화논쟁의 구도에 비춰보면 도드라진 의미를 갖는다. 1920년대 중국에서 ‘중서문화논쟁’이 대두했는데, 서양문명은 몰락했고 중국문명이 인류의 대안이라는 문화보수주의와 그에 저항하여 중국은 아직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주장한 후 스(胡適)로 대표되는 서화론자(西化論者), 여기에 맑스주의자 진영들이 가세했다. 그런데 중국의 문화 논쟁을 일본의 『카이조오(改造)』지에 관통된 문명론과 비교한 논자는 일본 논의의 왜소함이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카이조오』에는 중국 지식계에서 보였던 근대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보이지 않고, 서양의 새로운 지적 흐름을 순수한 이론으로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중국 지식인에게서는 서양문명에 대한 근원적 회의가 보이지만 문화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면이 있다.49 이 관점에 비춰 당시 조선의 사상계를 보면, 조선은 근대문명의 가치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을 분리시킴으로써 자유, 평등, 정의, 인도와 같은 보편적 근대가치를 통해 근대화에 매몰된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사상적으로 상대화하고 비판할 기반을 갖게 되었다.50 ‘이중과제’의 관점에서 말하면, 제국주의 일본은 근대의 적응, 아니 추종에 치우쳤고, 반식민지 중국은 근대극복에 관심이 미쳤으나 근대적응에 치중하면서 중국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민족주의로 보완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식민지 근대의 ‘부정적 특성’을 체감하며 근대극복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조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긴장을 유지할 계기를 발견하면서 일국을 넘어 피압박민족들과의 연대의 길을 열 가능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대안문명론을 당시의 사상계 구도 속에 놓고 보면 그 의미가 한층 더 선명해진다. 19세기 말 이래 개화파의 흐름이 근대적응에 치중한 나머지 3·1 쇠퇴기에 식민성을 도외시한 타협적 자치론으로 기울기 쉬웠다면, 척사파의 흐름은 근대의 ‘성취할 만한 특성’조차 간과하다가 해외무장투쟁으로 그 일부 명맥을 유지했다. 이 두 흐름에 비한다면 동학이 주도한 개벽파가 ‘이중과제’의 수행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흐름이다.51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뒤 식민지배 아래 개화파를 일부 수용하는 동시에 천도교라는 종교단체로 전환해 3·1에 크게 기여하고, 대안문명론을 제기하면서 사상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대안문명론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일상의 생활세계로 돌아간 민중에게도 일정 부분 공유되었다. 3·1 때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해방에 대한 경험을 내연(內燃) 상태로 품고 있던 일부는 민족종교에서 그 염원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세계시장에 더 깊이 얽혀 들어가는 식민지 조건에서 주술성에 의존해 초월적인 정신세계로의 비약을 선택한 위험은 없는지 각 종교를 유형별로 분별해볼 필요가 있다.52

이 기준에서 보면 그 지도부가 1920년대 후반 분열되어 일부가 근대적응에 치중한 나머지 점차 식민당국의 근대화정책에 순응하다 끝내 교단 자체가 전쟁협력 단체로 변질하고 만 천도교의 한계도 설명된다. 이에 비해 동학의 개벽론을 계승하는 동시에 불교와도 결합한 불법연구회(해방 후 원불교의 전신)가 개인수양과 사회변혁을 동시수행하면서 물질개벽(곧 물질문명시대)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제창한 문명전환운동은 당시 민족종교 가운데 이중과제의 기준에 어울리는 것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53 이것이 식민지 조건에서 영향력이 크지도 않았을뿐더러 자주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제도적 차원의 절실한 과제와 바로 연결되지 않는 한계가 지적될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8·15 뒤 두달 만에 2대 종법사의 『건국론』이 발표된 것으로 미뤄보면 그에 대한 경륜이 내재했던 것 같다는 짐작을 덧붙이고 싶다.54 단, 식민체제를 감당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이중과제를 수행하는 긴장을 얼마나 실행했는지는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물론 원불교 이외의 다른 사례들(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갈래의 사상과 운동 경험들)도 같은 기준에서 더 검토해볼 여지가 있겠지만, 앞으로의 일감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암흑기라 할 1910년대 혹독한 상황에서 새로운 지적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된 지식인들의 치열한 사상적 고투와 민중의 ‘새세상’을 향한 오랜 열망이 3·1로 합류해 솟구쳤다가 자신감과 좌절감을 잇달아 경험한 뒤에 거둔 결실이다. 공화정이 형식상 들어섰으나 곧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복벽(1915)이라는 막간극을 겪을 정도로 그 혁명의 성과가 굴절되는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반전통과 서구화에 몰두했던 중국과는 다른 경로의 ‘신문화운동’을 겪은 셈이다.

그러한 고투와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3·1의 사상과 운동 경험은 계속 학습되는 원천이 되어왔다. 서로 다른 시기의 다음 두 인용에 귀 기울여보자. 소설가 안회남은 해방 직후, 28년 전의 3·1보다 “더 크고 더 힘찬 새로운 3월 1일을 가져와야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보다 한참 뒤 생명운동가 장일순은 민족의 자주를 천명하는 속에도 “비폭력이라고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데 “그건 바로 동학의 정신”임을 지적하며 ‘반생명적인 일체’의 것과 싸우는 정신으로서의 3·1을 노래한다.55 3월 1일이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부단히 시대의 과제에 대응해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일깨우는 자원임을 보여준다.

 

 

5. 1919년과 2019년의 대화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이른 것 같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고쳐 불러야 하는가이다.

사실 혁명과 시위 사이 ‘운동’이라는 용어로 낙착된 것은 해방 이후이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면 3·1을 전후해 언론·출판 공간의 제한으로 ‘혁명’을 제대로 거론할 수 없던 시절에도 조선 청년들이 1910년 이후 신해혁명을 동시대적 사건으로 겪고 타이쇼오(大正)데모크라시의 문화적 환경에 영향받은 가운데 혁명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이 곧 왕조 교체라는 오랜 해석에서 벗어나 “구세계의 파괴라는 한층 더 보편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56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제강점기 ‘3·1대혁명’으로 부른 것에서 시작해 최근에도 그런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57 ‘3·1혁명’이라는 용어가 그 나름의 인식의 계보를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새삼 이목을 끈 것은, 문재인정부와 여당에서 직접 거론하면서부터이다. 그 배후에는 지난 박근혜정부 시절의 건국절 논란을 둘러싼 논의가 뜨거웠던 사정도 있다. 그러나 3·1 기억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당대의 주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재구성’되어왔다는 더 큰 맥락을 놓쳐서는 안 된다.

좀더 시야를 넓혀 오늘날의 동아시아 맥락에서 이 문제의식을 보면 그 의의가 한층 더 심대하다. 중국도 일본도 지난 100년간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하려 애쓰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심화된 위기로 기존의 세계질서와 발전모델이 혼미해진 또 한번의 문명전환의 국면에서 각국의 역사적 경로를 돌아보며 발전모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표출된 것이다. 우리가 1919년과 2019년의 대화를 적극 시도하는 것은 이러한 추세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여기에 기여할 것인가를 묻는 일로 이어진다. 이 큰 과제를 염두에 두되 지금은 3·1이 ‘혁명’인지에 대해 필자 나름의 견해를 짧게 밝혀보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이 문제를 다룰 때 먼저 교과서적(또는 사전 항목의) 혁명 개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혁명이라는 개념을 확장하고 3·1을 과대포장하는 역사의 남용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을 세계사 차원에서 사례비교하며 재규정할 필요가 있으려니와 한반도 차원에서 혁명을 “구세계의 파괴라는 한층 더 보편적인” 의미로 인식한 당시의 실감과 더불어 3·1혁명의 현재성을 복합적으로 시야에 넣기 위해 적극 논의해볼 필요는 있다. 여기서 필자는 정권의 전복에 그치지 않는 사회 전체의 대대적인 전환을 혁명이라 보고 그 결과가 ‘점진적·누적적 성취’로 드러난다는 뜻에서 ‘계속 학습되는 혁명’ 또는 ‘현재 진행 중인 혁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럴 경우 충족되어야 할 세가지 요건이 있다.58

첫째, 3·1혁명의 목표와 오늘 우리들의 역사적 과제 사이에 뚜렷한 연속성이 있는가. 민족의 자주와 통합 그리고 민주주의의 과제는 식민과 냉전을 거쳐온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남북화해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한반도공동체를 구상하려 할수록 절실하다.

둘째, 그러한 목표에는 역사의 흐름을 근본부터 바꾸어놓으려는 ‘혁명적 차원’이 있는가. “구세계의 파괴”나 “새로운 시대”로 표현된 군주제와의 급격한 단절과 공화정의 추구, 그리고 문명전환 인식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변혁의 의미를 갖는다. 식민지 조건에 직핍한 ‘근대의 이중과제’에 부합하는 자원으로서의 의의도 종요롭다. 이 의의는 일본과 연동하는 양상에서 잘 드러나지 싶다. “3·1운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일본의 “운동과 체제 쌍방의 장래를 결정하는 시금석”이었다.59 그런데 3·1(및 5·4)에 타이쇼오데모크라시 시대(1905~32) 운동 측도 체제 측도 적극 대응하지 못한 채, 일본의 대세는 “밖으로 제국주의, 안으로 입헌주의”로 응결되고 말았다.60 이렇듯 3·1은 한반도를 포함한 연동하는 동아시아의 지난 100년사를 다시 보게 하는 발본적 의미를 갖는다. 중심부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에 힘입어)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3·1을 겪고 조선 지배에 약간의 양보를 함으로써 근대적응에 성공한 듯하나 그 극복과제에 소홀함으로써 길게 보면 국익조차도 일본인 전체를 위한 것이 되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가. 이에 비해 반식민지 중국은 3·1에 지지를 보내며 5·4를 일으켜 역사 변혁의 획을 그으며 ‘지구적 순간’에 동참했다.

마지막으로 3·1에서 시작된 근원적인 움직임이 오늘날까지 그 실질을 꾸준히 확보해온 사실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동학운동에 내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혁의 노력은 3·1로 결실을 본 이래 4·19와 5·18, 6월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점진적·누적적 성취’의 양상을 갖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동성을 지속시켰다(“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며61 반전이 거듭되는 굴곡을 감당한 점증하는 과정으로서의 변혁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두드러진다). 이 역사를 이끈 주체는 식민지의 절망을 넘어 3·1의 빛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 곧 ‘하늘을 본’ 사람들이다. 정치제도의 혁신에 그치지 않는 더 깊은 ‘새세상’에 대한 열망은 1919년과 2019년을 관통한다.

이렇게 볼 때 3·1이 ‘혁명의 요건’을 상당 정도 갖춘 셈이니, ‘계속 학습되는 혁명’이나 ‘현재 진행 중인 혁명’에 합당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합의가 잘 안 된다면 ‘3·1운동’이라 불러도 좋은데 최소한 혁명적 현상이요 혁명적 성격을 가진 것임은 이번에 함께 확인해둘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인식이 남북화해와 통합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공유될 수 있을까. 주체사관에 입각한 북쪽의 3·1관과 남쪽의 그것 사이에는 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특히 임정 평가가 그렇다). 그러나 역사인식의 차이를 ‘생산적 자극물’로 적극 활용하면서, 낮은 수준의 ‘차이의 공존’을 거쳐 높은 수준의 ‘인식의 공유’로 향상해가는 역사화해의 여정에 민족과 민주라는 공통 화두를 제공하는 3·1의 기억은 유용하다.

3·1의 경험은 아직도 학습이 계속되는 현재적인 역사이다. 이 새로운 기억화를 (특정 정권의 법통 논란에 휘둘리지 않고) 공유영역으로 전환하는 일은, 촛불혁명으로 또다시 ‘하늘을 본’ 일반 시민과 역사연구자가 공동주체로서 문명전환기에 함께 이룩해나갈 세계사적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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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지의 이 특집도 그러하거니와, 이기훈 엮음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창비 2019)도 이러한 시대 요구에 대응한 것이다.
  2. 한승훈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의 불완전한 정립과 균열」, 『역사와 현실』 108호(2018) 238~39면.
  3. 임형택 「1919년 동아시아, 3·1운동과 5·4운동: 동아시아 근대 읽기의 방법론적 서설」, 박헌호·류준필 엮음 『1919년 3월 1일에 묻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35면.
  4. 졸저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318면.
  5. 식민지가 어느 한 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아 주권을 상실한 것이라면, 반식민지는 직접 지배를 받지 않으나 불평등조약과 세력권의 분할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열강들에 의해 주권이 제약받는 것을 의미한다.
  6. 이중과제론은 근대다운 특성을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긍정적 가치로 보는 태도(예컨대 근대주의)나 폐기해야 하는 낡은 유산으로 보는 태도(탈근대주의)의 이분법의 덫을 넘어서려는 창의적 이론이다. 이에 힘입어 ‘침략과 저항’의 단선적 역사 이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송호근 외 『시민사회의 기획과 도전』(민음사 2016) 및 백낙청 외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창비 2018) 참조.
  7. 70주년을 맞은 역사학계는 민중사관에 입각해 3·1을 해석한 총결산을 출간한 바 있다(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 민족해방운동 연구』, 청년사 1989).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탈민족·탈근대 인식틀이 역사와 문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3·1 연구에도 큰 변화가 이뤄졌다. 흔히 ‘문화사적 전환’이라 지칭되는 것인데, 민중의 개별화되고 다성적인 주체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고, 생활세계나 그것을 전승하거나 재현하는 매체 및 형식 등 주관적 측면이 주로 다뤄졌다(허영란 「한국 근대사 연구의 “문화사적 전환”: 역사 대중화, 식민지 근대성, 경험세계의 역사화」, 『민족문화연구』 53호, 2010, 92~93면). 필자는 이러한 조류가 3·1의 이해를 다채롭게 만든 성과를 활용하면서도, 식민주의의 규정성 그리고 재래의 운동과 사상 경험의 재구성에 둔감한 구조적 인식의 결여를 경계한다.
  8. 신해혁명과 5·4를 제1,2차 공화혁명의 연속체로 보는 해석은 민두기 『중국의 공화혁명』(지식산업사 1999) 참조(특히 결론).
  9. 권태억 「1910년대 일제의 ’문명화’ 통치와 한국인들의 인식: 3·1운동의 ‘거족성’ 원인 규명을 위한 하나의 시론」, 『한국문화』 61권(2013) 357~59면.
  10. 차승기 「폐허의 사상: ‘세계 전쟁’과 식민지 조선, 혹은 ‘부재 의식’에 대하여」,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411면.
  11. 이태훈 「1910~20년대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소개양상과 논의지형」, 『사학연구』 105호(2012) 213면.
  12. Sebastian Conrad and Dominic Sachsenmaier, Competing Visions of World Order: Global Moments and Movements, 1880s-1930s, Palgrave Macmillan 2007, 9, 13면.
  13. 차승기, 앞의 글 411면.
  14. 송지예 「“민족자결”의 수용과 2·8 독립운동」, 『동양정치사상사』 11권 1호(2012) 199면.
  15. 「文昌煥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3권, 국사편찬위원회 1990, 158면.
  16. 정용욱 「3·1운동사 연구의 최근 동향과 방향성」, 『역사와 현실』 110호(2018) 295면.
  17. 장석만 「3·1운동에서 종교는 무엇인가」, 박헌호·류준필 엮음, 앞의 책 211면.
  18. 이정은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국학자료원 2009, 340면. 대개의 고등 국사 교과서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 배성준 「3·1운동의 농민봉기적 양상」, 박헌호·류준필 엮음, 앞의 책 297면.
  20. 김영범 「3·1운동에서의 폭력과 그 함의」, 『정신문화연구』 제41권 4호(2018) 86, 93면.
  21. 열강국가 지도자 중심으로 논의된 ‘위로부터의 평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평화’라는 발상은 권헌익 인터뷰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 연구’ 필요」(한겨레신문 2018.9.20) 참조.
  22. 권보드래 「3·1운동의 밤」, 박경석 엮음 『동아시아의 ‘근대’체감』, 한울 2018, 102면.
  23. 조경달 『민중과 유토피아』, 허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2009, 243면.
  24. 권보드래 「‘만세’의 유토피아: 3·1운동에 있어 복국(復國)과 신세계」, 『한국학연구』 38집(2015) 204면.
  25. 이기훈 「3·1운동과 깃발」, 이기훈 엮음, 앞의 책 참고.
  26. 임형택 「한국문학사를 사고하는 하나의 길: 민중운동·공론장」, 『한국고전문학연구』 54권(2018).
  27. 조경달, 앞의 책 240면; 배성준, 앞의 글 310면.
  28. 천정환 「소문所聞·방문訪問·신문新聞·격문檄文: 3·1운동 시기의 미디어와 주체성」, 박헌호·류준필 엮음, 앞의 책 259면.
  29. 김흥규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 창비 2013, 179면.
  30. 이기훈 「일제 시기 공화담론의 확장: ‘(민족)대표’의 관념을 중심으로」,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소천한국학센터 주관 학술대회 ‘근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공화(Republic)의 담론과 진화’(2018.11.30) 자료집.
  31. 김정인 「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성 인식의 정치성과 학문성」, 『서울과 역사』 99호(2018) 234면; 공임순 「3·1운동의 역사적 기억과 배반, 그리고 계승을 둘러싼 이념정치: 3·1운동의 보편(주의)적 지평과 과소/과잉의 대표성」, 『한국근대문학연구』 24호(2011) 221면.
  32. 김정인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책과함께 2019, 202~208면.
  33. 권보드래 「‘만세’의 유토피아: 3·1운동에 있어 복국(復國)과 신세계」 212면.
  34. 조경달, 앞의 책 230면.
  35. 이상사회로서의 대동사회 사상을 밑바탕에 둔 유교적 보편주의, 곧 ‘문명주의’와 민족자결주의가 결합한 것을 3·1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 「민족주의와 문명주의: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박헌호·류준필 엮음, 앞의 책 67면.
  36. 김정인 「3·1운동의 민주주의 혁명성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주관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2014.2.26) 자료집 139면.
  37. 김진호 「3·1절과 ‘태극기 집회’: 잃어버린 민중의 기억」, 이기훈 엮음, 앞의 책 참고.
  38. 류시현 「1920년대 삼일운동에 관한 기억: 시간, 장소 그리고 ‘민족/민중’」, 『역사와 현실』 74호(2009) 183~85면.
  39. 「일본 친구여(상)」, 동아일보 1921.3.4; 『일제하 동아일보 압수 논설집』, 동아일보사 1978, 30면; 류시현, 앞의 글 191면에서 재인용.
  40. 동학에 4·19를 겹쳐 본 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착안해 촛불혁명의 주체를 “하늘을 본 시민”으로 지칭한 백낙청의 표현 참고. 백낙청 「하늘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창비주간논평 2018.12.27.
  41. 졸저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일조각 1994 참고(특히 결론).
  42. Nak-chung Paik, “South Korea’s Candlelight Revolution and the Future of the Korean Peninsula,” The Asia-Pacific Journal Vol.16 No.3(2018.12.1) 6면.
  43. 趙景達 「シベリア出兵と米騒動」, 『歴史地理教育』 2018년 6월호 6~8면.
  44. 염상섭 「조야의 제공에게 호소함」, 한기형·이혜령 엮음 『염상섭 문장 전집 1: 1918-1928』, 소명출판 2013, 48면.
  45. 류시현, 앞의 글 192면.
  46. 허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개조론의 확산과 한국 지식인」, 박헌호·류준필 엮음, 앞의 책 151면.
  47. 저자 미상 「問題의 解決은 自決이냐 他決이냐」, 『開闢』 제33호(1923.3). 인용문은 현대 표기로 바꿈.
  48. 최수일 『‘개벽’ 연구』, 소명출판 2008, 399~403면.
  49. 백지운 「문명의 전환과 세계의 개조: 1차대전 직후 『카이조오(改造)』의 문명론」, 『동방학지』 173집(2016) 156면.
  50. 이태훈, 앞의 글 225면.
  51. 삼자구도에 대해서는 백낙청 외, 앞의 책 242면 및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 모시는사람들 2018, 109~110면.
  52. 趙景達 「植民地朝鮮における佛法硏究會の敎理と活動」, 武内房司 編 『戰爭·災害と近代東アジアの民衆宗敎』, 有志社 2014. 그는 당시 종교를 대부흥운동, 종말적 미신 강화, 종교의 정치운동화 및 내면세계 구제와 사회공헌의 동시 수행이라는 네가지 유형으로 구별한다.
  53. 백낙청 외, 앞의 책 243, 245~48면.
  54. 백낙청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모시는사람들 2016.
  55. 안회남 「폭풍의 역사」(1947.4), 『한국소설문학대계』 24권, 동아출판사 1995, 527면; 장일순 「상대를 변화시키며 함께」, 김익록 엮음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2, 113면.
  56. 권보드래 「1910년대의 ‘혁명’: 3·1운동 전야의 개념과 용법을 중심으로」, 『개념과 소통』 15호(2015) 68~69, 76면.
  57. 이준식 「‘운동’인가 ‘혁명’인가: ‘3·1혁명’의 재인식」,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42~56면.
  58. 이 발상은 4·19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호칭을 택하면서 그 근거로 세가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는 백낙청에게서 시사받았다. 백낙청 「4·19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성」,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53~54면.
  59.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3·1 독립운동」, 겅윈즈 외 『3·1운동과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 동북아역사재단 2010, 126면.
  60. 趙景達 「シベリア出兵と米騒動」 8면.
  61. 孟眞(傅斯年)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1권 4호(1919.4.1). 당시 베이징대학 학생운동 지도자인 그는 ‘혁명의 신기원’을 연 3·1운동이 비폭력혁명이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한 혁명이며 순수한 학생혁명이라는 세가지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