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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변혁적 중도주의와 자유주의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분단체제와 87년체제』, 편서 『87년체제론』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80년대』 등이 있음. jykim@hs.ac.kr

 

 

1

 

누군가의 사유를 구조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사유의 변형생성문법 같은 것을 밝혀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내 보기에 백낙청 사유의 변형생성문법의 한 특징은 두 개념을 마주 세움으로써 둘 사이에 하나의 장(場)을 생성하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으로 휘어진 이 공간으로부터 담론이 풀려나온다. 창작과 비평,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세계체제와 분단체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 같은 켤레에서 보듯이, 그의 사유의 근본 개념들은 홀로 서 있지 않다. 짝을 이룬 개념들 사이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리얼리즘론, 민족문학론, 세계문학론, 분단체제론, 이중과제론 등이 펼쳐지는 것이다. 변혁적 중도주의도 이런 일련의 담론 가운데 하나이며, 여기에서도 ‘변혁’과 ‘중도’라는 두 개념이 짝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개념적 켤레 속에 내장된 긴장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적 의미에서 ‘가족 유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차(種差)는 물론이고 긴장의 강도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어떤 켤레는 개념들의 관계 설정이 비교적 쉽지만, 역설로 보일 정도로 까다로운 것도 있다. 아마도 그런 긴장이 가장 강렬한 경우는 근대 적응과 극복의 관계이겠지만, 변혁적 중도주의 또한 그 못지않게 높은 수준의 긴장을 품고 있다. 왜 ‘변혁’이라는 정치적·경제적 급진성은 ‘중도주의’라는 온건한 또는 온건해 보이는 노선으로 귀결되는가? 왜 중도적인 것이 변혁적이며, 변혁적이고자 한다면 중도적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중도주의가 급진적 동기로 충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급진적이고 변혁적이라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백낙청은 변혁적 중도주의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대체로 두가지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나는 우리 사회 변화의 방향을 지휘하고자 했던 노선들의 결함을 비판하면서 변혁적 중도주의가 가진 합리성과 가치를 부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혁과 중도의 의미를 ‘오래된 미래’를 거쳐 심화하는 것이다. 관련해서 그는 불교적인 중도의 의미나 개벽을 추구한 한국 근대 종교사상의 의의를 탐색해왔다.1 이런 시도들은 진지한 토의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글은 같은 의도를 다른 경로로 탐색해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과 분단체제론을 논쟁적으로 대면시키는 것이다. 월러스틴과 백낙청 사이의 지적 협력관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이런저런 이견과 논쟁점이 제기되어왔다는 점에서 이런 작업이 지금까지의 논의와 연속선상에 있으며, 이 글은 단지 그것을 좀더 명시적으로 다루어 변혁적 중도주의의 역설적 측면을 해소하고, 세계체제와 지구문화(geoculture)2의 지평에서 그것이 어떤 위상을 갖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세계체제론과 분단체제론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두가지 표상이 가능하다. 하나는 양자 사이에 지적 분업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시공간적으로 더 제한된 영역을 다루는 이론으로 설정하고 더 포괄적인 이론의 역할을 세계체제론에 이양하는 것이다. 그 경우 둘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또는 보편과 특수 같은 이분법에 의해 서술될 수 있다. 이런 관계 설정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상식이 한반도 상황 설명에 가하는 제약을 탈피하는(unthinking) 작업이 필요했던 분단체제론이 그 문제와 관련해 선행 이론인 세계체제론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3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체제론이 분단체제의 작동을 해명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세계체제 수준의 설명을 세계체제론에 위임함으로써 이론적 부담을 상당 정도 덜어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를 이렇게 표상하는 것이 두 이론의 발전에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실제로 두 이론이 맺어온 논쟁적인 상호작용과도 잘 부합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두 이론의 실제 관계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와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 백낙청은 괴테-맑스적 세계문학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괴테가 ‘세계문학’이란 용어로 뜻한 바가 세계의 위대한 문학고전들을 한데 모아놓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당시로서는 당연히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지만)의 지성인들이 개인적인 접촉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을 읽고 중요한 정기간행물들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대의 그물망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 용어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차라리 세계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4

 

같은 선상에서 세계체제론을 국지적으로 제기되고 발전된 이론들의 유대 속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세계체제론은 분단체제론이 제기되고 발전되는 만큼 신빙성과 설명력을 높여갈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교정하는 열린 기획이 된다. 다시 말해 두 이론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나 장기와 중단기의 관계 또는 상위수준과 하위수준의 위계적 관계를 맺고 있다기보다 논쟁을 경유한 이론적 협업과 상호구성적인 연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이론 사이의 더 높은 수준의 협업을 견인할 만한 논쟁점들은 이미 다수 제기되었다.5 그 가운데 변혁적 중도주의와 관련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쟁점은 냉전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 문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반체제운동의 전략적 원칙 문제이다. 전자가 분단체제의 작동이 세계체제의 운행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런 중에 한반도가 가진 위상과 의의를 판단하는 문제라면, 후자는 그런 조건 아래서 적합성 높은 실천전략과 그것을 뒷받침할 인지적 토대가 무엇인지 살피는 문제이다.

먼저 냉전의 성격 규정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 문제에 대해 분단체제론의 관점에서 명료한 주장을 펼친 이는 유재건이다.6 그의 논의는 세단계를 걸쳐 확장되는 모습을 보이는데,7 첫 단계는 월러스틴의 냉전 인식의 수용이다. 그는 월러스틴의 해석 노선을 따라서 냉전을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미소 간의 암묵적 묵계와 봉쇄가 하나가 된 체제”였으며, 미국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다중적 효과를 가진 전략적 장치로 파악한다. 우선 냉전은 공산권 봉쇄를 통해서 미국의 부담을 줄이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팽창을 주도하고, 다음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서 양진영 내부를 통제함으로써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억압하고 세계 전역에 안보국가체제를 형성하며, 또한 세계체제에 대한 제3세계의 저항과 도전을 봉쇄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끝으로 미국 국내의 자본/노동의 투쟁이나 인종갈등을 통제함으로써 자본축적을 순조롭게 하는 장치였다. 이런 판단의 선상에서 월러스틴은 1989년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을 미국의 최종적 승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는 일반적 인식에 맞서서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했다. 왜냐하면 냉전은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춤추어야 할 미뉴에트였기 때문이다”8라고 주장했다.

유재건은 이런 월러스틴의 논의를 디딤돌로 다음 단계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앞서 언급한 냉전의 네가지 효과를 대폭 강화하여 미국 헤게모니하의 세계체제 안정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으며, 커밍스(B. Cumings)가 주장했듯이 “한국전쟁이 세계사적으로 베트남전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자 미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냉전의 본질이 미국 패권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고화에 있다면, 한반도 분단체제는 냉전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그 본질적 면모를 현재적으로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이제 후진성의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유럽 냉전의 해체로 그 존재이유가 더 뚜렷해진 것일 수도 있다”(강조는 인용자)고 주장한다.9

월러스틴에 대해 명시적인 비판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런 유재건의 주장은 월러스틴 관점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것이다. 한반도 분단체제가 냉전의 본질이라면, 동구 사회주의 몰락을 기점으로 “세계체제의 미국 헤게모니 시기(1945~1990)에서 벗어나 포스트 헤게모니 시기에 돌입했다”10는 월러스틴의 시대 진단의 설득력은 크게 약화되며, 그의 주장과 달리 냉전의 미뉴에트가 끝났기는커녕 남북한은 물론이고 미·중·러·일이 함께 추는 복잡한 군무(群舞) 형태로 지속하고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같은 선상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포스트 헤게모니 시대로 밀어붙일 핵심적 추진력도 분단체제의 변혁으로부터 발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어서 유재건은 냉전의 본질이 “미국 패권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고화”라는 두번째 단계의 논의를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이 시도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적용한다. 테러와의 전쟁도 또 하나의 냉전전략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패권주의 기획과 동맹국 통제, 그리고 국내 억압체제의 유지 시도는 냉전전략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미국의 “매파집단이 테러와의 전쟁에 유혹을 느낄 만한 결정적인 이유는 (…) 테러와의 전쟁은 아예 궁극적 승리의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게임이기에 아프간이든 이라크든 북한이든 아무나 골라잡아 계속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재건의 주장은 테러와의 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냉전이라는 용어 자체를 탈피할(unthinking) 필요성 또한 제기한다. 그가 냉전의 본질로 규정한 (미국 헤게모니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이중적 봉쇄전략(반체제운동을 경계 너머에 봉쇄하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반체제운동을 순치하는 전략)을 술어가 아니라 주어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냉전을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의 유럽 경계면에서 이루어진 이중적 봉쇄로 규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럽 냉전을 이중적 봉쇄전략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따라 아시아 경계에서 일어난 이중적 봉쇄를 또다른 유형으로 설정하고 냉전과 다른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명칭이 어떤 것이 될지 모르지만, 그 경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두번의 ‘뜨거운’ 전쟁을 겪었던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차가운’ 전쟁이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내디딘다면, 미국 헤게모니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봉쇄전략을 유럽형, 동아시아형, 중동형, 중남미형, 더 나아가서 남아시아형이나 아세안(ASEAN)형 등으로 확장해서 구분해볼 수 있다.11

이런 유형론 또는 형태론이 필요한 이유는 ‘냉전’이라는 말로 포괄하기에는 세계가 너무 복잡하고 그 복잡성을 제어하려는 미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도 상대에 따라서 다양한 종차를 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헤게모니 아래 포섭되거나 봉쇄되는 지역들은 각기 서로 다른 역사적 체험과 자본축적 역량 그리고 정치적 응집성 및 저항능력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1945년 이래로 예컨대 유럽과 동아시아와 아랍세계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남미가 모두 미국의 이중적 봉쇄 아래 잠겼다 하더라도, 또한 여전히 제1세계에 속했던 서유럽과 유럽 제국주의 침탈을 받았다 하더라도, 식민화를 겪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세기 이전까지는 유럽 경제를 능가하는 규모를 가졌던 동아시아12와 식민화를 겪었던 아랍세계나 아프리카 그리고 15세기 이래로 유럽 그리고 19세기 이후로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중남미세계에서 봉쇄의 양태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기조차 하다.

이렇게 보면 분단체제는 미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한반도 주민들의 정치적 선택과 투쟁이 결합하여 형성된 특수한 체제이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13 예컨대 우리에게 여전히 휴전선이 버티고 있다면, 미국에서는 3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높이 9미터의 장벽을 세우기 위해 5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둘러싼 투쟁이 미국 행정부와 의회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미국 헤게모니 경계면은 특수한 봉쇄 형태와 그것의 역사들로 채워져 있으며, 영토적 지배 논리에 더해 자본축적의 논리 그리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경제적 선택(이 선택은 당연히 집단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의 총합 모두 해당된다)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세계체제론이 분단체제론 같은 국지적 이론에 의해 교정되고 재조정되어야 하는 개방적 프로젝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거니와, 앞서 세계체제론과 분단체제론 사이에 존재하는 또다른 쟁점으로 지적했던 반체제운동의 전략과 관련해서도 이런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두번째 쟁점을 다룰 차례인데, 그것을 위해 먼저 월러스틴의 자유주의 분석과 그것에 깃든 모호성을 살펴보자.

 

 

3

 

반체제운동에 대한 월러스틴의 분석과 전략적 제안을 다루기 위해서 프랑스혁명과 그것의 효과, 근대의 세가지 정치 이데올로기들—즉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각각의 지향과 기능, 그리고 중도적 자유주의14의 승리와 몰락이라는 세 주제에 대한 그의 해석을 살펴보자. 월러스틴은 토대, 정치적 상부구조,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같은 맑스(K. Marx)의 기본 개념에 은밀히 전제되었던 국민국가 모델을 깨기 위해서 그것들을 각기 자본주의 세계체제, 국가 간 체제 그리고 지구문화 같은 개념으로 확장한 바 있다. 그런데 “세계체제 전체에서 널리 수용되고 그 뒤 사회적 행위에 제약을 가한 일련의 사상, 가치, 규범”15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문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형성된 장기 16세기(1450~1640)에 함께 출현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장기의 19세기까지는 세계체제의 정치경제학과 그것의 산만한 수사학 사이에 괴리가 존재”16했지만,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영향으로 이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노력이 확산되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문화 형성의 핵심적 추진력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은 정치적 변화의 정상 상태라는 개념과 주권이 군주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정당화했다. 이런 한쌍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지만, 그 첫번째 결과는 그런 관념과 그것의 확산에 대한 반응형태로 세가지 근대적 이데올로기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또는 급진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한 보수주의는 대혁명이 야기한 변화를 가능한 한 억제하는 동시에 인민 개념을 전통적 사회집단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자유주의는 변화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적절한 수준과 속도로 조절하기를 바랐으며, 인민을 개인들로 환원하고자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변화를 가속하기를 원했고, 단일한 인민의 존재를 주장했다.

이런 세 이데올로기는 모두 반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주의는 전통적 신분질서와 조합적 집단들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했고,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을 주장했고, 사회주의는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그래서 맑스주의 또한 국가사멸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연, 조절, 가속화 가운데 무엇이든 변화의 양상을 결정하고 그 고삐를 쥐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세 이데올로기는 모두 내면적으로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언제나 개인적 자유를 강조했던 자유주의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긴 했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항상 개인주의라는 양의 가죽을 쓴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17였다.

세 이데올로기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는 때로는 사회주의와 제휴했고(예컨대 프랑스혁명에서 1830년 7월혁명까지), 때로는 보수주의와 동맹을 맺었다(예컨대 프랑스 제2제정기).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체제가 스스로를 개혁할 능력을 잃을 정도로 지나치게 체제의 부담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고,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변화의 불가피성을 수용할 것을 설득했다. 자유주의를 우회한 사회주의와 보수주의의 제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둘 간의 동맹은 “원래 일시적 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머지 두 이데올로기를 순치하고 설득할 힘(이 힘은 무엇보다 체제의 수호자들이 가진 정치적·경제적 권력에 의해서 뒷받침된 것이다)을 가졌던 자유주의가 “1848년 이후 (…) 세계체제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지구문화의 근본적 핵심을 구성하게”18 된다.

승리한 자유주의가 처음엔 유럽의 인민(또는 체제 도전적인 ‘위험한 계급’) 그리고 나중에는 세계 인민(또는 유럽 바깥 세계의 ‘위험한 계급’)이 요구한 권력과 부의 분배에 대응해 제시한 양보 프로그램은 “선거권, 복지국가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의 보증이었다.19 헤게모니 교체기였던 1914~45년 사이에 엄청난 격변이 있기는 했지만, 1945년 이후 세 프로그램은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는 잘 작동했다. 보통선거권은 어디에서나 확장을 거듭했고, 식민지 해방 투쟁은 자유주의(윌슨주의)와 사회주의(레닌주의)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중심부 국가에서는 복지국가가 수립되었다. “1914년 이전의 몇십 년간 자유주의가 유럽에서 승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1945~1970년은 자유주의가 전 세계에서 승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20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상황이 변한다. 지구적 자유주의가 약속한 성취가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질서의 보증자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제국주의적인 종주(宗主)로, 하지만”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가 보여주듯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한 나머지 취약성을 드러내는 종주로” 드러났고, 소련은 “미국 헤게모니에 한패가 된 파트너”로 비난받았다. 또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적 좌파는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약속한 진보를 성취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인종, 젠더, 민족성, 성적 취향, 그밖에 가능한 모든 면에서의 타자성 때문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구좌파는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기다릴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것이었다.21

월러스틴이 보기에 이런 지구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폭로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헤게모니를 종식시킨 것은 1968년 혁명이다.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또는 사민주의) 그리고 제3세계와 동구 사회주의 등, 자유주의 헤게모니 아래 있던 모든 정치세력이 근본적 회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성과 면에서 보면 68혁명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해체하기는커녕 여러 나라에서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그런데도 월러스틴이 여느 사회이론가보다 68혁명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반체제운동이 제대로 된 길을 잡아나가기 위해서는 지구문화로서의 자유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핵심 관건이며, 그 면에서 선명한 분기점을 형성한 것은 68혁명이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68혁명의 교훈, 즉 자유주의에서 탈피한 새로운 반체제운동이 갖추어야 할 전략적 지침에 대해 월러스틴은 다양한 제안을 해왔다. 그중에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국가권력 쟁취를 반체제운동의 주요한 전략으로 삼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한가지 요소는 분명히 국가권력 쟁취를 통해 사회변혁을 성취하려는 과거 전략과의 확연한 단절이다. 정부의 권위를 떠맡는 것은 유용할 수는 있지만 대체로 전혀 변혁적이지 못하다. 국가권력이 당장은 극우의 억압적 힘을 밀어내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요긴한 방어전술로 간주되어야 한다. 국가권력은 응급처방(pis aller)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세계질서를 재정당화할 위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분석해온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단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반체제세력이 내디디기 가장 어려운 발걸음이다.22

 

이런 주장은 월러스틴의 자유주의 분석에서 나올 수 있는 일관성 있는 귀결이다. 하지만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은 월러스틴의 그런 주장에 곧장 단서조항처럼 따라붙은 “특정한 상황”이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반체제운동가들은 국가권력을 아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은 극우의 억압적 힘을 밀어내기 위해서 사용할 만한 방어전술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입장을 월러스틴은 반복적으로 표명한다. 그는 『미국 패권의 몰락』에서도 반체제운동의 전략을 논의하면서 “방어적 선거전술을 활용하자”며 “국가 선거들은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중요한 51퍼센트의 표를 얻기 위해 이런 전통들을 존중하는 연합세력을 창출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23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월러스틴의 말은 즉각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방어적으로만 국가권력 또는 선거제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방어적인 것과 공세적인 것의 선을 선명하게 긋는 것은 가능한가? 현재의 사회복지를 축소하자거나 난민을 추방하자는 극우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복지를 더 확장하거나 난민에 대해 더 포용적인 정책을 택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않고 현재 수준을 지키는 데 머물러야만 하는가? 또한 국가권력을 쟁취해서는 안 되지만 51% 다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정확히 겨냥하는 바는 무엇인가? 많은 경우 51% 다수는 곧 국가권력의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가? 월러스틴은 특정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51%를 형성하는 연합에 참여하더라도, 방어가 성취되면 연합에서 이탈하는 식으로 국가권력에 참여하는 것을 회피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일정 기간 51%를 유지해야 방어가 가능하다면, 월러스틴식의 제안이 현실정치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월러스틴이 제안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의 단절 방안에 깃든 모호성은 좀더 일반적인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복합적이고 내적으로 민주적인 여러 집단들이 복수의 전선에서 펼칠 전략 중에는 현상유지의 방어자들을 능가할 만한 한 가지 전술적 무기가 있다. 그것은 구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보편적인 완수를 요구하는 것이다.”24 반체제운동가는 “자유주의자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일”, 즉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슬로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체제에 ‘과부하를 주는’(overloading) 전략”25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곤경을 자초한다. 자유주의의 약속은 가짜라고 폭로하며 그것과 단절하자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어떻게 동시에 성취될 수 있는가? 자유주의자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월러스틴이 의도한 과부하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에 대한 ‘과부하전략’이란 자유주의자가 자유주의를 고수하려고 해야 하고, 반체제운동가 자신도 어느 정도는 자유주의자여야 가능한 전략이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외관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와 단절하면서 자유주의자이기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월러스틴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언제나 포함을 통해 배제를 정당화해왔다고 말했다. 포함 없는 배제로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인민의 권리 주장을 자유주의가 진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어두운 이면은 그 포함 자체가 배제를 위한 것이라는 점, 즉 그들이 원한 바는 (월러스틴이 ‘디 람뻬두사 원칙’이라고 부른)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무의식이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반체제운동가가 지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고 배제 없는 포함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어두운 이면이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 무의식 없는 자유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추론이 어떤 당혹스러운 역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사회주의/급진주의가, 더 정확히는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로부터 풀려나온 사회주의/급진주의 또는 반체제운동이 ‘진정한’ 자유주의와 다름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러스틴이 사회주의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왔는지 생각하면 이것이 그렇게 이상한 추론은 아니다. 월러스틴에게 사회주의는 계획경제체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민주권의 선포로부터 발원하는 배제 없는 사회적 포함을 가속하려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그어진 선은 자유주의의 약속이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선은 그 약속이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가능하면 포함을 유예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사이에 그어져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을 받아들일 때도 여전히 월러스틴의 반체제운동론에는 모호함이 남아 있다. 변화의 가속화가 언제나 급진주의의 요건인지도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러스틴의 이야기를 미국 헤게모니 체제의 경계면으로 가져가 논쟁적으로 다뤄볼 필요가 있다. 경계의 경험과 그것에 기초한 담론을 통해 월러스틴의 반체제운동론의 모호성을 좀더 제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작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는 분단체제론이다.

 

 

4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26 마찬가지로 분단체제론과 그것에 근거해 제기된 변혁적 중도주의의 편에서 사태를 조명하면 세계체제론의 자유주의 분석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으며, 연장선상에 있는 반체제운동전략 또한 참조 대상 이상은 될 수 없다. 분단체제론과 세계체제론을 대조해보자마자 우리는 금세 월러스틴이 공들여 비판한 자유주의가 변혁적 중도주의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첫번째 요소는 분단체제 변혁을 위한 실천의 중심 층위가 국민국가 수준이라는 것이다. 분단체제는 물론 표준적인 의미에서 국민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분단체제의 규모나 국가 간 체제 내에서의 위상은 국민국가 ‘수준’이다. 분단체제 변혁을 위한 노력은 국민국가 이하의 시민사회 수준의 실천과 그런 시민사회의 여러 집단 사이의 초국가적 연대를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남북 정부 간 협상 및 국가 간 체제 수준의 협상이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분단체제론이 그런 협상을 통해서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해온 국가연합이 국가주의를 벗어나 탈국민국가적인 정치체를 실현하는 역사적 실험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실험을 통해 기존의 국가 간 체제에 균열을 내고 다른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적 과제가 남북한 국가권력을 개조하는 것인 만큼27 “현재의 세계적 이행기 동안에는 지역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국민국가 수준에서 작업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그 유용성이 제한되어 있다”28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한반도에서는 전혀 정치적 현실성이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백낙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시대를 맞아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구호가 한창 매력을 더하고 있지만, 이때 ‘국지’가 개개인의 생활현장과 지역사회에서 출발하되 소속국가와 주변지역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다층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빠진다면 ‘국지적 행동’은 책임있는 ‘전지구적 사고’의 표현이 못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러 층위 중에서도 민족 및 국가의 층위가 특히 중요한 까닭은, 근대세계가 만들어낸 것 가운데 그리스적 의미의 정치적 공동체(polis)에 그나마 방불한 것이 (왕년의 몇몇 제대로 된) 국민국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제까지의 근대인들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자신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이미 소속했거나 소속코자 하거나 이탈 또는 변형코자 하는 국민국가의 문제와 이에 직결된 민족(nationality 또는 ethnicity) 문제에 대한 실천적 대응을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29

 

국가 활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조정하려는 실천은 생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월러스틴식의 어법을 빌리면 반체제운동에서 관건적 중요성을 지닐 수도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자본의 탈영토적 지배전략이 원하는 만큼 평탄하지 않다. 울퉁불퉁한 세계에서 전역적으로(globally) 타당한 실천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국가가 반체제운동전략에서 차지하는 의미 또한 미국 헤게모니의 경계면에서는 극적으로 전환을 겪을 수 있다.

같은 문제를 시간 지평에서 변혁전략을 조명할 때도 마주치게 된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전쟁에 의존하는 변혁을 거부한다. 미증유의 폭력수단이 축적된 한반도에서 전쟁이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것이며, 그런 전쟁에 의한 변혁의 승리에는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조차 쓰기 부끄러울 것이다. 당연히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변혁, “상당 기간에 걸친 지속적 과정으로서의 통일”만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의 핵심 주장이다. 그런데 점진적 변화란 자유주의가 보수주의를 설득하고 사회주의적인 요구를 순치하기 위해서 사용해온 기본적 레퍼토리이다. 그런데 변혁적 중도주의는 바로 그런 점진주의가 변혁적임을 주장하며 민족해방을 외치고 통일과정을 가속하려는 급진적 시도들이 오히려 수구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라고 비판한다.30 국지적 조건으로 인해 변화와 사회적 진보를 가속하려는 노력의 의미가 보수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점진주의의 동기와 기능 또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다. 자유주의에서 점진주의와 개량주의란 사회적 포함 요구를 지연하기 위한 것, 즉 현재의 배제를 미래의 포함을 통해 순치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변혁적 중도주의의 점진주의는 분단체제라는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걸리는 시간 자체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즉 이 점진주의는 지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체 편에서의 인내와 자제라는 적극적 요소를 함축한 것이다. 분단체제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한반도 주변 강국들이 함께 추는 군무 속에서 재생산된다. 따라서 분단체제의 변혁은 이 군무 속의 행위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결정적 손실이 없다고 생각하며 선택한 행위들의 결합 효과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분단체제의 변혁과 지정학적 현상변경은 춤곡의 조를 조용히 바꾸는 것 같은 신중하고 끈기있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요구 수위를 스스로 조절하는 자제와 인내가 필요하며, 변혁적 중도주의는 자신의 열정의 일부를 자기제어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 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실천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치적 다수형성의 논리 자체의 혁신이 필요하거니와, 변혁적 중도주의는 그런 과제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정치적 다수형성을 위해 변혁적 중도주의는 (필자의 용어로 하면) 자주파, 평등파 그리고 자유파(자유주의자)를 아우르는 민주파를 형성할 것을 주장하는데, 현재 상황이라면 그것이 실제로 정치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더불어민주당의 집권과 동반 성장하는 정의당에 의한 견제와 견인 정도에 그친다. 그런 정도의 자유주의적 개혁으로는 “치열한 갈등과 분열이 정당체제로 수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재확인할 뿐일 수도 있지만, “정당체제가 잘 발전되어 있다고 하는 서구에서 사회주의정당과 보수주의정당 간의 정권교체는 상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교체가 사회 지배체제의 변화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 것과 달리, 남한의 현실에서는 보수 중도 정당간의 정권교체만으로도 강고했던 지배체제의 균열에 따르는 사회적 파장이 더 컸다”31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월러스틴이 생각한 것처럼 ‘극우의 억압적 힘’을 밀어내야 하는 일이 ‘특정한 상황’의 일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된 항상적 과제인 것이 분단체제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이런 세력 연합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적 ‘중도’ 개념을 활성화함으로써 연합 내부의 구조적 혁신에 대해서도 제안하는데, 그 혁신의 성격을 월러스틴과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보면 변혁적 중도주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급진주의 사이의 제휴와 같은 것인데, 그는 양자의 제휴에서는 언제나 자유주의 헤게모니가 관철된다고 본다. 따라서 변혁적 중도주의는 다시 한번 자유주의와 동일시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월러스틴의 논의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급진주의 사이의 분기점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둘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프로그램의 내용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것과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것 사이의 구별인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가르는 선이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월러스틴이라면 양자를 구별하는 한 지표를 ‘포함의 지연’에서 찾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변혁적 중도주의는 포함의 지연 자체가 내적 자제의 소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가 보기에 변혁적 중도주의가 자유주의와 다른 점은 월러스틴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즉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의 헤게모니 아래서 포섭되는 것에 있다. 월러스틴은 이데올로기들의 관계를 규정할 때는 언제나 헤게모니 개념을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라는 맥락에서 사용한다. 하지만 자유주의가 “1789년 이래 세 가지 주요한 변형 속에서 색깔을 드러낸 단 하나의 진정한 이데올로기”32라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역사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일 뿐이다. 즉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라는 역사적으로 실현된 지배적 형태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다른 형태의 헤게모니를 지향할 수 있으며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니 월러스틴 또한 부지불식간에 그럴 가능성에 희망을 품은 바가 있다. 가령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자들을 따라야 할 때이다. 만일 그들이 이렇게 한다면, 여전히 유익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어리석고 조급한 다수의 위험들을 계속해서 상기시킬 수 있겠지만, 집단적 결정을 내릴 때 다수의 근본적 우위를 인정하는 맥락 속에서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33

그런데 그 민주주의와 관련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1848년 이후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던) 마찌니(G. Mazzini)가 사회주의자들과 중요한 싸움에 빠져들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구호에다 ‘사회적’이라는 용어를 덧붙였으며, ‘보편적인 민주사회공화국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것이 아마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아닐까 싶다. 좀더 중도주의적인 정치를 표방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민주주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더이상 그것만으로는 급진주의자임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사회적’이라는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4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그 말을 자신에게 덧대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어리석게도) 떼어내려고 했던 단어였다. 그러니 이제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따라야 할 때라는 월러스틴의 말이 뜻하는 것은 본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아래, 즉 (월러스틴이 규정한바) 사회주의의 헤게모니 아래 자유주의가 포섭된 상태를 말한다. 그럴 때 월러스틴의 말에 동의할 만하게도 자유주의는 유용성을 발견한다. 그러니 변혁적일 때만 “원래의 중도에 다시 가까워지는 것”35이라는 백낙청의 주장은 전혀 역설이 아닐뿐더러, 근대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지형 일반에서도 확인되는 일이다. 여기서도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할 때만 비로소 진정한 자유주의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5

 

세계체제론과 분단체제론의 지적 분업을 염두에 둔다면, 분단체제론에서 도출된 변혁적 중도주의가 월러스틴이 격렬하게 비판한 자유주의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지속적인 협업관계에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 문제와 더 분명하게 대결할 필요가 있으며, 분단체제의 관점에서 세계체제론을 교정할 수도 있다. 분석 단위를 세계로 확장할 것을 역설해온 세계체제론이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체제론이 주목해온 중심/주변의 위계적인 구조란 체계 전반의 구조를 규정하는 권력 자원의 면에서 중심과 주변 사이에 큰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심부는 체제의 구조에 대해 주변보다 더 설명력이 높다. 그런 점 때문에 세계체제론이 주변부보다 중심부를 더 분석의 중심에 놓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론 구성의 전략적 선택은 불가피하게 맹점을 내포하게 된다. 그런 맹점은 입지점과 전망을 교체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으며, 바로 그 지점이 우리를 지적 협력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맹점 가운데 하나가 ‘냉전’ 이해 문제인데, 앞서 보았듯이 동아시아 그리고 분단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냉전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세계체제론조차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유럽적 경계면을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단지 중심부 중심의 분석을 해온 세계체제론의 국지적 상황에 대한 둔감함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지구문화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분석 내부에 어떤 맹점을 유발하고 있음을 추적하게 해준다.

그는 지구문화라는 표현을 통해 일반화 가능한 문화적 전제가 세계체제 전반에 퍼져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체제의 경계에서 조망해보면 지구문화는 그렇게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월러스틴이 지구문화의 핵심으로 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도 발 디딘 곳에 따라 각기 기능하며, 68혁명으로 인해 우리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했다는 것도 확실치 않다. 68혁명의 교훈에 힘입어 국민국가 수준의 정치적 실천에 더는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반적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분단체제에서는 국민국가 수준의 정치적 실천은 변혁의 중심적 무대라는 지위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분단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실천에서도 월러스틴이 사회주의/급진주의의 특징으로 규정한 변화의 가속은 적합성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를 닮은 신중한 조절이다. 그러나 그 조절은 자유주의에서 그렇듯이 사회적 포함을 지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포함 또는 평등의 확장과 자유의 제도화를 위한 내적 자제에 비롯된다. 외관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이한 의도와 사회적 귀결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내적 자제에 의해 조절된 변혁을 촛불혁명을 통해서도 경험한 바 있다. 촛불혁명은 평화적이고 끈기있고 자제심 깊으며 투쟁과정 속에 이미 해방된 경험의 유쾌함을 당겨오는 자세의 변혁성을 풍부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우리는 월러스틴의 자유주의 분석이 드러낸 모호성을 더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이 월러스틴의 이론에서는 이론적 아포리아로 등장한다. 하지만 2018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와 북미협상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의 핵심에 있는 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꾸려는 세력과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세력 간의 긴장 어린 대결 과정이라는 것을 직관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실천적 난제일 수는 있어도 이론적 아포리아는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꾸려는 이들과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이들은 외관상 유사한 목표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 분할선은 은밀하고 모호할 수도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는 이들이 그 모호한 분할선을 명료하게 자각하고 적합하게 행동하기 위한 준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혁적 중도주의자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려는 이들을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꾸는 데까지 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뻗대는 세력도 있고,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세력과의 싸움마저 간단치 않은 것이 분단체제의 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전선이 복잡하기 때문에 변혁적 중도주의를 ‘공부’할 필요는 더 커지는 듯하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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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백낙청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정현곤 엮음 『변혁적 중도론』, 창비 2016;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박윤철 엮음, 모시는사람들 2016; 백낙청 외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창비 2018 참조.
  2. 월러스틴의 조어인 geoculture는 지구문화, 지문화, 지리문화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지구문화를 택했고, 따라서 번역서를 인용할 때도 지문화나 지리문화는 지구문화로 바꾸었다.
  3.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참조.
  4. 백낙청 「지구화시대의 민족과 문학」, 김영희·유희석 엮음 『세계문학론』, 창비 2010, 37면. 강조는 원문 그대로.
  5.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텍스트로 백낙청·월러스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백낙청회화록』 4, 창비 2007, 115~60면)과 백낙청·월러스틴·이수훈·김성민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통일」(『백낙청회화록』 6, 창비 2010, 355~91면) 참조.
  6. 유재건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제2절 참조. 이하 유재건의 인용은 이 절의 여러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유재건의 입장에 대한 백낙청의 공감 표명은 백낙청 외, 앞의 책 140~41면 참조.
  7. 세번째 단계는 유재건 자신이 개진했다기보다 그의 논의로부터 필자가 읽어낸 측면이 강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그의 논의 안에 잠복해 있었다고 본다.
  8.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266면. 번역은 필자 수정.
  9. 이런 주장은 베트남전쟁 평가를 둘러싸고 분단체제론과 세계체제론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월러스틴은 1968년 혁명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것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던 베트남전쟁 또한 주요하게 생각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과는 꽤 다른 유형이었다. 그것은 비유럽세계를 통틀어 민족해방투쟁의 상징적인(그러나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닌) 지역이었다. 한국전쟁과 베를린 봉쇄가 냉전 세계체제의 일부이자 한 덩어리였다면, (알제리와 다른 많은 사례와 같이) 베트남전쟁은 이 냉전 세계체제의 제약과 구조에 대항한 투쟁이었다”(같은 책 362면). 이에 비해 백낙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이 어떤 의미에서는 베트남전쟁보다도 더 미국에 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분단만은 미국이 끝까지 지켜왔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사실 베트남전쟁은 미국으로서 뼈아픈 패배였지만 양보할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 패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아니고 원래가 반식민지 전쟁이었잖아요.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 민중의 민족해방전쟁이었는데, 프랑스를 거의 다 꺾어놓으니까 미국이 들어와서 대신 그 자리에 있다가 미국도 쫓겨났지만 그것은 냉전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베트남전쟁 패배라는 것은 미국이 세계의 큰 질서를 유지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패배였어요”(백낙청 외, 앞의 책 140~41면).
  10.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21면.
  11. 이런 유형들 사이에는 당연히 구조적 복잡성의 차이, 그리고 세계체제의 변동 속에서 가지는 정세적 중요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컨대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는 놀라운 수준의 경제성장과 엄청난 군사력의 축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를 가진 분단체제가 동아시아 구조 형성의 중심축이라는 점에서 여느 경계면과 다르다. 그리고 동아시아와 분단체제가 세계체제 전반의 운행과 관련해서 가지는 중요성 또한 증가일로에 있다.
  12. 케네스 포메란츠 『대분기』, 김규태 외 옮김, 에코리브르 2016 참조.
  13. 이 경우 주변부의 특수성이 뜻하는 바는 엄격히 규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변부의 특수성이란 중심부의 일반성 내지 보편성과 대조할 때 그런 것인데, 중심부의 일반성도 일반성으로 격상된 특수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4. 월러스틴은 『근대세계체제 IV: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박구병 옮김, 까치 2017)를 출간하면서부터 자유주의보다는 중도적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의 내포와 외연에 대해 일반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행한 기능을 강조하는 표현을 덧붙여 자유주의 규정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는 중도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15.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V』 16면.
  16. 같은 책 413면.
  17. 같은 책 33면.
  18. 같은 곳.
  19.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185면.
  20. 같은 책 220면.
  21.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성백용 옮김, 창비 2014, 57~59면.
  22.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344~45면. 번역은 필자 수정.
  23.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국 패권의 몰락』, 정범진·한기욱 옮김, 창비 2004, 342~43면.
  24.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346면. 번역은 필자 수정.
  25. 같은 책 302면.
  26. 최규석 『송곳』 1, 창비 2015, 205면.
  27. 백낙청 「국가주의 극복과 한반도에서의 국가개조 작업」,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95~112면.
  28.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14~15면.
  29.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37~38면. 백낙청은 월러스틴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1968년 이후의 반체제운동은 국가 차원의 정치활동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단순한 반국가주의에서 벗어나 더 적합한 국가구조의 창안으로 나아가야 한다.”(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23면).
  30.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75면 이하.
  31. 유재건, 앞의 글 289면.
  32.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V』 46면.
  33. 이매뉴얼 월러스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백승욱 옮김, 창비 2001, 148면.
  34.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국 패권의 몰락』 205면.
  35. 정현곤 엮음, 앞의 책 91면.
  36. 추신처럼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이 글이 자유주의를 거론했지만, 아쉽게도 한국의 자유주의는 전혀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는 보수주의를 달래고 사회주의를 순치시키는 위력을 가졌기는커녕 1953년 이전에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그 이후에는 보수주의에 겁먹은 허약한 자유주의였다. 강건한 자유주의적 사상가와 실천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이들이 자유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벌였던 투쟁은 그 자체로 매우 높은 진보적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는 보수파의 하위 파트너 역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자유주의는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민주화 이행 덕분에 비로소 체제 운행의 헤게모니를 간헐적으로 쥘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매우 취약한 것이어서 보수파의 공세에 자주 굴복했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의 다양한 양상(아마도 특히 문학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다루는 일은 흥미로운 작업이지만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