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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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경숙 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이 있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너의 작별인사가 담긴 이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지금 너한테 가겠다고 했다. 너를 보러 가야겠다,고. 그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의 청은 너에게 닿지 않은 모양으로 너에게서는 답변이 없었다. 이틀을 기다리다가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전화번호를 찾느라 그동안 너와 내가 주고받은 이메일들을 살펴보기 위해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한 앨범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듯 너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클릭한 이메일 앞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마당에 일이 많아서 도와주는 분을 구했는데 서른여덟살 된 러시아 남자가 왔어, 두 아이를 두고 이혼을 했다는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커피만 마시면서 너무 열심히 일해서 좀 쉬고 해요, 했더니 쉬는 건 부자나 하는 거예요, 하더라. 이메일을 읽다가 너에게서 손편지를 받았던 때가 떠올라 서랍 속을 뒤져 몇통을 찾아내기도 했다. 손편지는 주로 발굴지에서 쓴 것들이었다. 인근의 큰 시장에 가서 버섯도 사고 홍합도 사서 숙소로 돌아와 밥해 먹고 나른하게 앉아 있어. 비가 내려서 쉴 수밖에 없는 날이야. 비가 내리는 시장엔 사람이 많았는데 채소나 허브 생선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말고기로 만든 소시지를 파는 가게도 있었어. 말고기 파는 가게 앞에 살아 있는 말 한마리가 매여 있어서 한참 쳐다봤어. 결혼 후 너는 자주 앞으로 얼마간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고 쓰고 있었다. 터키의 발굴지로 팀을 꾸려 떠나는데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칠흑같이 어두우면 별무리는 더 빛나 보이고 달도 더 환하겠지, 불편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대장인 팀이고 모두 결속력이 좋은 사람들이라 염려는 안 한다고. 그렇게 몇년 사이에 한달 두달 길게는 한계절씩 너는 너의 스승이며 남편인 대장이 꾸린 발굴팀의 팀원이 되어 시리아로 이라크로 물이 사라진 폐허의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떠나곤 했다. 예전에 분명 읽었겠으나 처음 읽는 듯 여겨지는 이메일도 있었다. 나 독일로 올 때 십년쯤 공부라는 걸 하고 나면 훨씬 좋은 글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 어리석게도 말이야. 십년이 지나고 박사과정이 끝나고 나니 찾아온 건 무기력과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와의 조우였어. 너의 체념과 다짐이 서린 문구에 서늘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한국을 오래 떠나 있어서 시를 망쳤다고 하더라. 그런 말을 어딘가에서 읽을 때면 마음이 스산해지기는 하지만 읽고 쓰면서 사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 박사과정을 마치고 너가 결혼을 하고 집이라는 곳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너의 마음도 거기 있었다. 너가 살게 된 집은 마당이 아주 넓다고 했다. 전나무도 많고, 꽃도 많다고. 그곳에선 집이 한국처럼 재산목록의 첫 순위로 들어가는 대상이 아니어서 집값이 비싸지 않아 마당 넓은 집에 살 수 있는 거라며 서울에서 살았던 작은 옥탑방, 광화문 스튜디오, 지하 방들을 생각하면 지금이 거짓말 같다고 했다. 나이가 든 집이라서 그런지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생기긴 한다고도 했다. 수도관이 고장 나서 물이 지하실에 고이기에 사람을 불러 고치고 있는데 큰 공사는 끝나고 이곳저곳 작은 수리들이 남았다고도. 너가 전화를 여러번 한 날도 메일에 적혀 있었다. 전화를 여러번 했어, 네 생일이랑 주소 좀 알려고, 내년부터 네 생일을 챙기려고 해. 너 물병자리 아니니? 곧 생일인 거 같은데… 우리가 언제부터 전화가 아니라 이메일로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 헤아려봤으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의 전화번호를 폰의 연락처에 입력하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메일을 썼다. 너에게 가고 싶다고 그냥 너의 곁에 가만히 있다가 오겠다고. 너의 집 근처의 호텔에 방을 얻고 너를 하루에 한번, 두번, 혹은 세번만 보고 오겠다고. 작별인사 이후로 너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나는 또 이메일을 썼다. 오늘은 일요일 밤이고 내일이 월요일이네. 날이 밝으면 가능한 빠른 날로 비행기표를 끊으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기차를 타고 너의 집이 있는 도시의 역에서 내리겠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너에게 갈게. 내가 가도 되는지만 알려줘. 점점 말이 짧아졌다. 너의 집에도 봄이 왔겠구나. 너가 좋아하는 마당에도 나무에도. 그것들 곁에서 잠깐씩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줘.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아. 한번은 봐야지,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냥 얼굴이나 서로 보게,라고 썼다가 지웠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고 남아 있는 말 너를 한번만 볼 수 있게 해줘 한 문장만 써서 보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신호음뿐이었다. 나는 작년 가을 전에 너에게서 받은 이메일을 찾아보았다.

 

해가 가기 전에 너에게 다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혹 연락이 닿지 않으면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해주렴.

 

그때 나는 그 문구를 한참 들여다보며 아직 가을도 전인데… 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긴 했다. 너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부에서 꽤 오래전부터 주택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태양열로 대체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너도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 시기에 맞춰 미처 못한 집수리도 더 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인가, 넘겨짚어보다가 너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내가 하면 되지, 생각하며 끼어든 걱정을 접어두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사는 일은 때로 전화 한통 이메일 한통 보낼 틈이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너에게서 정말 연락이 없네, 오늘 밤엔 이메일을 써야지, 하면서 시간이 또 흘러갔다. 그러다가 너에게서 먼저 이메일을 받았다. 오랜만에 해가 바뀌고 난 뒤에 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연락이 끊긴 건 처음이었다. E가 아이슬란드에 왔다가 너가 사는 곳에 들렀다는 것이 첫 문장이어서 E는 또 너를 만났겠구나, 부러움이 일었다. E를 반가워했을 너를 생각하니 금세 좋아져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함께 밥도 먹었겠지. 너의 시를 번역하는 분이 빠리에서 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너의 시를 불어로 옮기는 번역자는 어떤 사람일까? 잠깐 생각도 해보았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꽤 오랫동안 나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고, 아직도 내가 걱정할까 망설이고 있다고 할 때까지도 내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그대로였다. 작년 6월에 나는 위암을 진단받았단다,라고 쓴 너의 문장을 읽었다. 불시에 누가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배가 너무 아파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며칠 이런저런 검사를 하더니 위암이라고 하더구나. 수술 전에 네번의 항암치료를 받았고, 수술은 여덟시간이 걸렸는데 위 전체와 식도의 한 부분과 임파선 몇개를 잘라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네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그 기간이 육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그사이 나는 많이 말랐어… 나 자신도 놀란 마음과 함께여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라고 쓰여 있었다. 병원에는 두달 반 정도 있었으며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많은 날들이었다고. 이런 일들은 지나간 것이고 지금 현재는 이렇다라면서 1월 23일 다시 CT 촬영을 받아야 하고 그걸 통해 정말 종양이 현재 너의 몸에서 사라졌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의사들은 낙관적이고 너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고 만일 종양이 남아 있다면 항암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고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계속 삶은 살아야 하니까 잘 견디려고 한다,고 쓰여 있었다. 낙관적인 마음이 병을 좀더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기를 바라기에 산책도 하고 작은 일들을 조금씩 하고 있고 다행히 남편이 잘 견뎌주고 있다면서도 남편도 그사이 아파서 병원에 삼주 입원해 있다가 11월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담담히 알렸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 좋지 못한 소식을 꼭 이렇게 전해야 하는가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면서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차마 더 빨리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소식 또 전하겠다고 끝을 맺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낮의 바람 소리도 골목으로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도 다 끊기고 내 책상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나는 적막이 불러일으킨 긴장을 깨기 위해 목울대를 억지로 움직여 음, 소리를 내보았다. 내가 방금 읽은 것들은 무엇인가. 어떤 책의 문장을 읽은 것인가, 아니면 혹 내가 방금 어떤 문장을 쓴 것인가. 너의 소식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내가 글을 쓰는 중이거나 혹은 책을 읽는 중인 것 같은 혼란을 불러왔다. 너가 암이라고? 다시 골목의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세면장의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창 쪽을 보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가 심은 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한밤 폭풍에 부러지고 찢겨나가고 두 발을 딛고 있던 모든 땅이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릴 때 절벽에 서서 저 아래 묶여 있는 배를 내려다본 적이 있다. 검푸른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를.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그것은 마치 한걸음만 옮기면 내가 쉴 수 있다고 고통과 불면의 밤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순간 마음에서 물결처럼 인 생각이 한쪽 발을 붙잡았다.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러니 견디자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그런데 너가 암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앞집 담장 안의 소나무 위에 내려앉아 있던 까치가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는 게 보였다.

 

아이슬란드로 가는 길목인지 아니면 돌아오는 길목인지에서 너를 찾아갔다는 E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 E가 곧 너의 연락을 받았느냐고 물어왔다. 받았지만 믿을 수가 없네,라고 답을 보냈다. 저녁에 마주 앉은 E가 놀랐지요? 물었을 때도 실감이 나야 놀라지, 했다. E는 예, 그럴 거예요,라고 했다.

—선배 책 불어로 번역하는 분을 제가 좀 알아요. 여행 중에 그분과 연락이 닿았고 선배도 보고 싶고 해서 그분과 선배를 만나러 가기로 했죠. 예전에 우리가 같이 갔던 그 기차역까지 선배가 나왔어요. 저만큼 선배가 걸어오는데 한눈에도 사람이 너무 작아진 거예요.

—원래 작았잖아?

—예, 그래도 더 작아져서 날아갈 것 같이 작아져서… 제가 별일 있지요? 물었더니 나 위암 수술했어… 남의 말 하듯이 툭 그러더라구요. 어젯밤에 폭풍이 좀 있었어, 하는 투였어요. 좀 멍해져서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묻지도 못하고 있다가 돌아올 때 어느 틈에 선배에게 좀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선배 상태를 알릴 사람한텐 알려야 하는 거라구요. 낯선 타국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혼자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요. 딱 집어서 선배에겐 꼭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뭐라고 해?

—여기가 나한테 왜 타국이야? 하더니 알지, 알아… 그랬어요.

E와 나는 저녁을 먹는 대신 어두워진 성곽 길을 따라 걸었다. E는 번역가하고 너를 만나서 너의 남편이랑 너의 책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고 했다. 너는 아주 작아진 채로 그래도 많이 웃었고 아주 작은 양이지만 하루에 음식을 여러번에 나눠서 먹기도 했다고. 나는 E에게 너가 서울을 떠난 지 이십오년이 되었다는 것, 그사이 너는 서울에 겨우 세번 왔다는 것, 세번째 왔었을 때 너가 얼마나 단단해 보였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E와 나는 그렇게 오년 전 함께 너를 만나러 가서 보았던 너의 모습들 중 좋은 것들만 회상했다. 너가 해준 음식들과 너와 함께했던 긴 산책들과 너의 안내를 받아 오래오래 걸어다녔던 너의 집 근처의 성당, 도서관, 학교로 이어지는 길들에 대해. 그러면서도 E와 나는 우리가 서로 한사코 어떤 이야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너의 집에 사흘 동안 머물렀을 때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무기력과 슬픔. 그래도 E와 걷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너의 지난 몇개월에 대해 얼마간 안도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좀 있었고 그 폭풍은 어제의 일이지 오늘 것도 내일 일도 아니리라고. 지나간 것, 더구나 나쁜 일들은 더이상 상기하지 말자고. E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 책상의 흐트러진 것들을 바르게 놓고 먼지를 닦고 너의 책들을 책꽂이에서 꺼내 앞에 놓고 너에게 이메일을 썼다. 혼자 그렇게 아프고 수술받고 잘 견디었네. 잘했어. 다만 1월 23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그때는 바로 그대로 알려줘. 그리고 썼다. 뭐라고 자꾸 말을 해. 내가 이렇다…라고 얘기를 해야 해. 서로 살고 있는 거리도 너무나 먼데 너가 아무 말도 안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라고 쓰다가 울적해졌다. 너가 아픈 것만 모르는 게 아니지, 싶었다. 우리가 서른을 앞두고 있을 때 독일로 너가 왜 떠났는지조차 나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항상 너가 곧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너가 그곳에서 공부에 빠져 있을 때도, 너가 결혼을 했을 때도, 너가 고고학자로서 남편과 함께 발굴을 하러 유적지로 떠나는 삶을 오랫동안 보낼 때도 나에게 너의 집은 여기에 있지,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집이 여기 있으니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했다. 내게 너는 지금까지도 떠나서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서울을 떠나고 이십오년 동안에 너에게 생긴 일들 중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일들이 있긴 한 것일까. 내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해도 나는 알고 싶어,라고 썼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있는 그대로 알려줘,라고. 말하는 순간이라도 너가 나은 기분이 들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을 해,라고 했다. 혼자서 그거까지 참지는 마, 나도 너가 아픈 것까지 모르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네,라고 쓰면서 아픈 사람을 두고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생각했다.

 

다시 CT 촬영을 받아야 한다는 1월 23일이 하루 지난 후에 너는 소식을 전했다.

 

어제 진단을 받으러 갔는데 오늘에야 결과가 나왔어. 결과는 좋고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종양이 없다는구나. 다음주부터 재활치료를 하러 가게 돼. 차근차근 몸을 추스를 준비를 해야지. 지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고 어떤 문턱에 서 있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그런 것 같아. 어제 거의 삼개월 동안 있었던 병원 건물을 다시 보니 덜컥 겁이 나기도 하더라.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내 의지랑은 아무 상관 없이 지낸 시간이었으니… 다음 진단은 삼개월 후 그때까지 잘 지내야지 하는 마음. 운동도 많이 하고 잘 먹고… 걱정 끼쳐서 마음이 아리네. 사랑하는 마음, 더 소중하게 가져야지, 하는 마음만 든다.

 

나는 왜 그때 너에게로 가겠다,라고 하지 못했을까? 그때 너에게 가겠다고 했으면 너는 그러면 좋지… 했을 텐데.

 

1월 23일과 너가 다시 병원에 있다는 메일을 보내온 사이에 설이 있었다. 설 하루 전날 떡국의 고명으로 쓰기 위해 삶은 사태를 찢다가 말고 책상으로 가서 너에게 메일을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가 혼자 겪은 일은 그야말로 지나간 폭풍이겠지, 생각했다. 삼개월에 한번씩 체크를 받아야 하는 일은 계속되겠지만, 우리는 아직 죽음 앞에 서로를 잃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서울은 설날 하루 전이라며 설날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썼다. 너가 서울에 살았을 때 평소에도 명절에나 만들 음식들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차려내곤 하던 기억이 나서였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명절날에나 먹을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어 같은 식탁에 앉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너가 어디에 있든 따뜻한 떡국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고, 새해에는 우리 건강하자, 써서 보낸 내 이메일에 너는 다시 병원에 있다,는 답을 보내왔다.

 

다시 병원에 있구나.

지난번에 의사가 분명 몸속의 종양들이 없다고 했는데 그후에 복통이 와서 병원에 다시 왔다. 의사들은 항암치료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췌장에 염증이 생겼다고 한다. 병원에 다시 온 지 열흘이 지났고 지금은 아침이다. 간호사가 와서 혈압 체온 등을 재고 피를 뽑고 곧 의사들이 아침 방문을 하겠지. 내가 있는 병동은 대학병원에서 조금 외진 곳인데 조용해서 좋긴 하다. 언제 퇴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병원에 입원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다시 받았다. 암이 재발한 걸 의사들이 지난번 검진에서 못 보았나, 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리고 종양이 아니라 점막이 헐고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종양이 아닌 것에 안심하는 나를 보면서 아직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은 모양이구나, 싶었단다. 네 메일을 읽고서야 설인 걸 알았어. 네 메일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네가 만든 설음식이 참 맛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설음식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루 종일 했구나. 병원에서 나가면 또 쓸게.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나는 그때 너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놓쳤다. 너가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이라고 쓴 것은 보고 싶다는 다른 말이었을 텐데. 상황이 더 나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후에야 행간을 읽는 내 어리석음. 너가 병원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3월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니 봄,이라고 했다. 이 메일 받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의사들은 나에게 삼개월 더 살 수 있다 한다. 암이 복막에 다 퍼졌다고. 더이상 메일을 쓸 수도 없기 전에 쓴다며 너와 만나서 행복했고 잊지 않을 거고 더 오랜 시간 같이 못해주어 미안하다고.

 

나는 기억한다. 너가 서울에 왔던 때 어느날의 늦은 밤을. 자정 근처에 너가 전화를 해서 우리는 옛날 우리들의 각자의 방이 있던 거리에서 만나 밤길을 걸었다. 이곳에서 아직 물소리가 난다, 너는 발밑의 하수도관을 가리켰다. 그곳에 살 적에도 너가 하던 말이었다. 대단하지 않아? 이 대도시의 지하에 저런 하수관들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뭔가 흐른다는 것이. 너는 울적한 얼굴로 남편과 마을의 묘지를 산책 나가는 날들에 대해서 말했다. 이제 남편은 발굴지로 갈 수가 없어, 파킨슨병을 앓고 있거든, 했다. 남편은 지층 단면도를 정말 잘 그려 작품 같아라며 웃었다. 우리가 발굴해서 박물관으로 보낸 도자기들 생각이 나네, 너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기도 했다. 발굴일지를 쓰는 날이 다시 올까? 너가 슬퍼 보여서 나는 올 거야, 병은 나으면 되는 거지, 했더니 너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네가 파킨슨병을 만만히 보는구나… 하면서. 시리아로 발굴을 가서 지낼 때는 거기 분쟁 때문에 위험할 때도 있었어, 그런데 신기하지, 남편은 그곳을 그리워해, 건강 때문에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되어서 더 그런 것 같아. 너는 남편이 먼 나라로 발굴을 떠나는 대신 병원에 다니는 날이 많아져서 바람이라도 쐬어주기 위해 마을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도자기 대신 많은 오솔길들을 발굴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람쥐들이 도망도 안 가고 빤히 쳐다보는 잡목이 우거진 한 오솔길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는데 가장 많이 걷는 길은 그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비석만 남아 있는 묘지들 사이를 걷다가 어느날부터인가 너의 남편이 비석에 새겨진 연도를 읽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 사람 1890년에 태어나서 1960년에 죽었군, 이 사람은 1857년 그리고 1899년… 묘지 사이를 걷다가 남편이 비문을 처음 읽던 날 너는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서울로 정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저 사람 나 없이 못 살겠구나, 이제 나의 집은 이곳이구나, 실감이 났어. 나는 손을 뻗어 너의 작은 손을 잡았다. 너의 손은 여전히 내 큰 손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앞으로도 나는 독일에 살게 될 거야. 낮에 누굴 만났는지 술을 마신 것도 같았다. 너는 글을 쓰는 한 인간으로서 두 발을 단단하게 두고 있어야 할 현실이 너에게서 너무 먼 것 같다,고 했다.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걷다가 정육점에 생고기 판다는 붉은 글씨를 읽으면 움찔하게 돼. 생고기라니. 전에는 그런 말 안 썼는데… 너는 담배 연기를 어둠 속에 내뿜다가 깊은 숨을 쉬며 너가 쓸 수 있는 내용이 너에게는 너무 먼 것 같고 자꾸 서울이 낯설어지고 이해가 잘되지 않고 앞으로 몇년이 지나면 그 괴리감이 더 심해지겠지?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의 목소리가 저음으로 낮아졌다. 새 시집을 내고 난 뒤 사람들이 내 시 안에 구체적인 현실이 없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이라 하더라. 남들이 하는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겠지만 조금은 찔끔했어.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장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 걸까?

 

그때 너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서 미안하다. 너는 다른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세계에 다다른 것이고 그것이 너의 현실이지 너는 지금 너의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실험적인 언어를 탄생시키는 중이라는 말을 해주지 못해서. 독일로 돌아간 너는 동백 화분을 하나 샀다고 했다. 독일에서 동백 화분을 다 살 수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면서 꽃봉오리들이 하나씩 둘씩 터지는 것을 바라보면 순간순간들이 사무친다고.

 

내가 삼개월 더 살 수 있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듣는다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제는 남은 시간을 혼자 감당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너를 보러 가게 해달라고 메일을 보내고 혹여 통화할 수 있을까 싶어 전화를 걸어보는 것뿐이다. 너의 마음도 모르면서 이제 너가 집으로 돌아와야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 너가 와도 좋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때를 다 놓치고 나서야 지금 너에게 가겠다고 이러는 것이 지랄 같다고 느껴.

 

대부분 통화가 되지 않았으나 아주 드물게 너의 남편이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경우였다. 벨소리만 듣고 있다가 끊으려고 했을 때 너의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너를 찾자 너의 남편이 너는 자고 있다고 했다. 너의 남편은 나의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을 말하자 너의 남편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떨림이 섞인 너의 남편 목소리를 듣자 목이 메어왔다. 고맙다고 했다. 너의 곁에 당신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너의 남편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어 왜냐면 자기는 너의 남편이니까. 지금 너의 곁에 유일하게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너의 남편뿐이었다. 너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한 유일한 사람. 언제나 너가 건강을 걱정했던 사람. 너로 하여금 그곳에서 운전을 배우게 한 사람. 내가 남편의 안부를 물으면 너는 그는 여전해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 나가고 나는 운전을 해서 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직 다리가 완치되지 않아서 매일 새 붕대를 갈아주고 있어,라거나 의사가 사해에서 온 소금으로 다리 목욕을 하라고 해서 매일 그걸 해주고 있어,라고 했다. 매일 너의 손길이 필요했던 너의 남편과 너의 위치가 바뀌어 있겠다. 나는 너의 남편에게 내가 전화를 했다고, 전화통화를 꼭 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꼭 통화하고 싶다고. 너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자주 전화를 했다. 그래야 어느날 간신히 너와 연결이 되니까. 작별인사가 담긴 메일을 받고 너와 처음으로 통화가 된 그때 너의 목소리는 웃는 것도 아니고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라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는

—이제 곧 귤을 먹을 수 없을 거라고 해.

라고 했다. 귤? 너가 귤을 좋아했었나?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귤을 먹을 수 없게 될 거라는 너의 말을 듣자마자 귤의 얇은 껍질을 벗길 때 맡아지는 향이 그대로 코끝에 전해졌다. 껍질을 벗겨내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귤알을 하나씩 떼어내 세로로 하얗게 붙어 있는 거스러미를 없애고 입에 넣었을 때 퍼지는 달콤하고 새콤한 향. 너가 그 귤을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얼마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지금 가도 되지? 물었다. 너가 어떤지 한번만 보고 오겠다고 했다. 너는 오지 않아도 돼, 멀잖아, 괜찮아, 지금은 사실 실감이 잘 안 나. 여기 친구들이 있고 바로 아래층에 남편 친구가 세 들어 있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남편 친구가 이사 오면서 데리고 온 큰 개도 한마리 있다,고 하다가 내가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 나도 혼자 생각을 좀 해야 되지 않겠니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잠깐 톤이 높아졌던 너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이후로 통화가 될 때마다 나는 그 끝에 너에게 가겠다,고만 했다. 오라고만 해달라고. 결국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너 보고 싶지. 봐야지… 그런데 지금 내가 작은 수술 하나를 앞두고 있는데 그 수술을 해야 내 장기들이 음식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수술인데 그 생각만으로도 벅차고 언제 또 다른 상황이 발생할지… 내가 생각을 좀더 한 뒤에 병원 일이며 다른 것도 좀 살펴보고 네가 언제 오면 좋겠는지… 알려줄게.

—꼭!

—그래 꼭…

꼭이라는 약속은 부질없었다. 너는 내 메일을 체크조차 못했다. 메일함에는 수신 확인되지 않은 내가 보낸 메일들이 쌓여갔다. 오늘은 너에게 이메일을 쓰고 내일은 너가 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들. 통화가 되는 날도 드물어졌다. 열흘에 한번, 보름에 한번 간신히 전화통화가 되어 내가 가겠다고 하면 너는 내가 지금 힘이 너무 없어,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너의 작별인사가 담긴 이메일을 나 혼자만 간직해야 되는 것인지도 판단이 서질 않아 가만히 있던 어느날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라면서 너에 대한 글을 나에게 캡처해 보냈다. 지인이 너의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너를 회상하는 글이었다. 거기에 서울을 떠나기 전의 너의 모습이 있었다. 캡처해 보낸 사람이 너와 연락은 하고 있느냐 묻는데 나무라는 말처럼 들렸다.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후배가 너가 너의 일을 지인들에게 알려도 좋다고 했다는 전언을 듣고 나도 너와 함께 중국식당에 갔던 어른에게 이메일을 쓰고 너와 자주 만났던 선배와는 만나서 너의 상황을 전하며 너를 아는 다른 선배에겐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한달째 너와 전화통화가 안 되었어도 의사가 너에게 말했다는 삼개월이 지나고 또 한달이 지나자 내 안에서는 다시 너를 한번 봐야겠다,는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의사의 판단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희망.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 있는 것으로 너의 허락을 얻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가 그래, 와 했을 때 바로 갈 수 있는 도시가 어디인지를 매일 한곳씩 찾아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너에게 가는 법, 암스테르담에서 너에게 가는 법. 베를린에서 너에게 가는 법. 휴대폰에 독일 기차 시간표가 나와 있는 앱을 깔고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너의 집 쪽으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알아보다가 너의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도시의 비행기표를 끊고 나는 그곳에 가 있겠다고 너가 오라고만 하면 곧장 너에게 가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읽지 않음. 날마다 보낸메일함을 확인해봤으나 읽지 않음 표시는 변함이 없었다. 너에게 갈 수 있는 때를 놓치고 나니 너를 한번 봐야겠다는 것은 이제 나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는 그마저도 생각할 수 없는 너머로 이미 가버린 듯해서 막상 너와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는 침묵이 발생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너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야 나, 빠리에 왔어,라고 얼른 말했다.

—빠리에?

—응.

—무슨 일이 있어?

—아니… 너 보러 왔어.

나는 서 있다가 휴대폰을 귀에 바싹 대고 쭈그려 앉았다.

—여기에서 기차를 타고 네시간만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어.

이제 너가 침묵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두어번 부르자 너는 겨우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응.

—혼자 왔어? 너 길눈도 어두운데…

—찾아갈 수 있어 지금이라도.

—왜 미안하게 만드니.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내가 견디려고 이러는 거… 오래 만나지 않아도 우린 멀어지는 느낌 없이 지냈는데 왜…

나는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나며 말했다.

—네가 언젠가 내가 빠리에 있다가 왔다고 했을 때 그랬잖아. 네가 빠리에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갔을 텐데… 65유로면 너에게 갈 수 있었는데, 했잖아. 그런 거야 이것도.

—……

—비행기가 아니고 기차야. 여기서 북역은 가까워. 동역에서도 거기 가는 기차가 있어. 어디서든 한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어.

나의 너무 빠른 말 때문인지 아니면 말을 이을 힘조차 없어서인지 너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북역에서는 급행열차 탈리스를 타고 쾰른에서 내려 너의 집으로 가는 느린 열차로 갈아타면 되지, 동역에서는 떼제베를 타고 만하임에서… 나는 기차 생각을 멈추고 용기를 내어 말한다.

—한번만 봤으면 해.

—왜 한번만이라고 해? 이미 정해놓고 있는 거지? 한번만이라니. 한번 보고 나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

거절당할까봐 떨고 있던 나는 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오는 게 좋겠어.

너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출발해 내게 당도했다. 나를 향해 해본 적이 없는 말이라 너가 뱉어놓고도 낯설었겠지. 그래서 곧 내가 많이 힘들어,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나지도 않아 내가 그래,라고 이어 말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전화를 끊을까봐서 다급하게 또 너의 이름을 부른 뒤에 알아, 알아…그랬다. 뭘 안다는 것인지 나도 모른 채로 뙤약볕 위의 메마른 길을 10킬로는 걸은 뒤에 갈증 때문에 목구멍에 물을 들이켜듯이 서둘러서 말했다.

—나 도착해서 너의 집 근처에 호텔을 얻을게. 그때 E랑 너의 집 갔을 때 봐둔 호텔도 있어. 도착해서 한번 보고…

나는 왜 한번만이라고 하느냐고 했던 너의 말에 걸려 말을 멈추었다가 얼른 이어 말했다.

—호텔에서 자고 한번 더 보고 오후에 가서 또 보고 그리고 올게. 너는 지금처럼 집에 있으면 돼. 내가 가.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내가 너의 집에 바로 가지 못하는 날이 올 줄을. 너의 집으로 갈 수 있는 기차역이 있는 도시까지 와서 너에게로 가겠다고 말하는데 너가 나에게 안 오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이런 상황이 우리 사이에 발생하다니.

—여기 오면 너도 힘들어.

—나는 괜찮아.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한번만 봐.

나는 또 한번만이라고 말하고 말았다. 너의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나도 너 보고 싶지.

—……

—그런데 정말 정신이 사나워. 이제 내가 병원에 갈 수조차 없는 상태이고… 음식도 먹을 수 없고 나는 누워만 있고 의사와 간호사가 온다. 병원에서 오는 사람들도 매일 다르고… 낯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도 싫고 내가 이렇게…

점점 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너를 봐야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가 또 서둘러 말했다.

—그럼 내일 내가 전화 다시 할게, 혹시 알아? 내일은 다른 마음일지도.

 

오년 전 서울에서 E와 나는 각자의 볼일을 마치고 너가 있는 도시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역이었을까?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너가 일생에서 처음으로 도착해본 외국 공항이라고 했었지. 너가 독일에 사는 동안 그 공항은 서울로 향하는 출구였겠지. 언젠가 한번 떠나오니 가기가 힘들었던 서울인데 가려고 마음먹으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내리는 게 다더라,며 웃던 너.

나는 너와 걸어서 십분 거리에 살던 때의 내가 아니지만 지도를 보고도 방향을 잡을 줄 모르는 길치인 것은 그대로야. 그런 내가 런던 북페어에 참가한 동료들과 헤어져 너에게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한번 더 타고 암스테르담인지 프랑크푸르트인지로 먼저 E를 만나러 갔었다. E는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을 알게 된 E가 무심히 서로의 일을 마치고 너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내가 그러자,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메일로 E와 내가 너에게 갈 계획을 세워봤는데 너는 어때? 물었을 때 너는 단박에 그러면 좋지, 했었지. 정말 좋아, 믿기지 않네, 그거 정말이야? 몇번이나 물었지. 너의 환대는 언제 어디서나 늘 그렇게 당연한 것이었다. 너와 E가 나를 만나러 온다니 믿을 수 없이 즐거운 마음,이라고 느낌표를 두개씩 찍곤 했다. 너의 집은 이층에 손님방이 두개가 있고 욕실과 화장실이 이층에도 있으니 그리 불편하진 않을 거라고 했다. 너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같이 암스테르담에 다녀오자고도 했다. 암스테르담은 너의 집에서 기차를 타면 두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아니면 옛 동독 도시 드레스덴은 어떠냐고도 물었다. 그곳은 독일의 피렌체라고도 부르는 곳이니 함께 가도 좋을 것 같다고. 너는 언제나 그랬다. 서울에 있을 때도 달래장 만들었는데 먹으러 오라고 했다. 사직동 길에 활터를 발견했는데 그 길을 같이 걷자고 했다. 신해철 공연 티켓이 두장 있는데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그게 내가 들었던 너의 말들이었는데 지금 너는 안 오는 게 좋겠다고 한다.

 

낯선 이국의 도시 역에서 기차를 타고 너에게로 가면서 E와 나는 너를 얼마 만에 만나는지 서로 헤아려보았다. 기억들이 막 엉켜서 정확하게 얼마 만인지 헤아릴 수 없었으나 삼년 만인지 이년 만인지 그랬다. 그렇게 서른이 지나고 마흔도 지났다. 기차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달리고 있을 때 나는 E에게 너가 서울을 떠나던 때 스물아홉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갑작스런 내 웅얼거림 같은 말을 E는 놓치지 않고 왜 너는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간 것인지 물었다. 그게 늦은 나이야? 내가 반문하자 E는 새로운 언어로 공부를 하기에는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지요, 했다. 그런가. 늦은 나이였던가. 그 늦은 나이에 너는 서울을 떠났다. 그 무렵의 너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다. 중앙기상청과 서울시 교육청이 있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는 사직동 쪽에 너는 광화문 쪽에 각각 방을 얻어 살고 있던 때였다. 나의 방이 있는 곳에서 너의 방이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십분이면 되었다. 너가 나에게 오는 때도 있었고 내가 너에게 가기도 했으며 중간쯤에서 만나 같이 걷기도 했다. 우리는 젊어서 외로웠고 각자의 태생지를 두고 기차를 타고 떠나온 사람들이라 도시에 집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매달 다가오는 월세 내는 일은 벅차고 고되었다. 결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은 이유 없이 잡을 손이 필요했다. 나에겐 너의 손이 거기에 있었고 너에겐 나의 손이 거기 있었겠지. 어느날 너가 나는 독일로 갈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으응, 독일? 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나도 자주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더는 못 견디겠어서 어딘가로 확 처박히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그런 마음을 너는 그 순간 독일에 갈 거야,로 쏘아붙인 것이려니, 했다. 젊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불안정한 것들. 나는 독일로 가겠다는 너의 말이 그것들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독일이라니, 그곳은 너무 낯설고 먼 곳이라 상상이 되지 않아 왜 하필 그곳인지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가 독일어 학원에 등록하고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도 나는 너가 실제로 독일로 떠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숨통 같은 것이려니 여겼다. 어딘가로 가겠다,는 것은 머물고 있는 지금 이곳을 얼마간 견디게 해주니까. 가겠다,에서 갈 수 있다,가 되고 가게 되었다…로 바뀔 때까지도 나는 너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너도 나처럼 혹은 우리처럼 여기를 떠나고 싶어할 뿐 정작 떠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설령 떠난다고 해도 곧 돌아오는 형식일 것이라고. 독일로 떠나는 날짜가 바로 내일이 되었어도 그랬다. 그날 너의 재킷이 허름해 보여서 내 옷장을 열고 그중 가장 값나가고 단정해 보이는 것을 너에게 입히면서도 말이다. 너는 그렇게 독일의 마르부르크로 가서 그때까지 너와 함께했던 한국어 대신 독일어 앞에 섰다. 날마다 뚱뚱해지고 있다,고 했다.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가 학생식당에서 주로 버거를 사서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다보니 매일 체중이 늘어난다고. 가끔 너는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을까?를 생각할 때도 있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어 다행이라고도 했다. 한시간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 여섯시간씩 미리 예습을 해가야 겨우 좇아갈 수 있다고. 어쩌면 내가 독일에 온 이유는 유학생이라 해도 학비를 따로 받지 않는 이 나라 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어,라고도 했다. 어디든 다른 곳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거든. 너는 그 나라 날씨는 햇볕 드는 날이 별로 없는데 그것도 다행이라고 했다. 날이 좋으면 산보라도 하고 싶을 텐데 그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날씨가 이어지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 날씨 때문에 어떤 유학생은 우울증에 걸려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거나 이마를 부딪쳐 피를 흘리기도 한다고. 기숙사에서 미역국을 끓였다가 노크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국적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눈동자가 파란 여학생이 제발 부탁이니 그 음식만은 만들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이 말하더라고. 미역국을 끓일 때 풍기는 냄새는 너가 좋아하는 냄새 중의 하나였지.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을 때 미역을 건져 올리며 어쩌면 이렇게 생긴 것에서 이렇게 한가득 바다 냄새가 나는 거냐고 감탄을 하곤 했지. 너가 떠나고 몇년째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때에야 나는 아, 너는 정말로 독일에 갔구나, 했다. 너는 전공을 고고학으로 정했고 그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마르부르크에서 지금 너가 있는 도시로 옮겼다. 나는 북페어나 포럼이나 낭독회에 참여하는 일로 가끔 너가 있는 나라나 근처의 나라에 가게 되었다. 때론 혼자 때론 동료들과 함께. 나에겐 너가 있는 대륙으로 가는 일은 너를 만나러 가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사직동에서 너는 광화문에서 살 때처럼 나는 서울의 내 집을 떠나고 너는 독일의 너의 집을 떠나 어느 도시에서 만나곤 했다. 너는 언제든 나, 혹은 우리에게 왔다. 밥을 좀 해먹고 싶어서 기숙사에서 나와 방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오징어를 굽다가 주인에게 내쫓길 뻔한 얘기를 낯선 도시의 호텔방에 누워서 나누었다. 오징어 냄새가 왜? 내가 물었을 때 너는 그 냄새가 사람 태우는 냄새 같다고 하더라,며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는 웃기까지 했다. 주인으로서야 얼마나 놀랐겠냐, 동양에서 온 쪼그만 여자애가 있는 방에서 사람 태우는 것 같은 이상한 냄새가 났으니. 나는 너에게로 가는 기차 안에서 드문드문 너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들을 E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순간 E도 나도 조용히 차창 바깥을 내다보았다. 기차는 모르는 나무들, 모르는 집들, 모르는 들판들을 지나고 있었다.

 

너와 E와 나는 암스테르담도 드레스덴도 가지 못했지. 우리가 너의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너는 우리가 묵는 이층으로 올라와 이상한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내려와보라고 했었어. E와 내가 너의 집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독일 방송뉴스에 진도의 바다가 보였다. 화면 한켠에 팽목항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커다란 배가 반 이상 바다에 가라앉아 있었다. 세찬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은 독일 여성 아나운서의 말을 E와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이 시어서 화면의 푸른 바다를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너는 점점 얼이 빠진 모습이 되어갔다. 왜 그래? 뭐라는 거야? 내가 재촉해 물으니 배가 침몰했는데… 그 배에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 수백명이 타고 있는데 그들이 구조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네, 통역을 해줄 때면 늘 앞에 붙이던 잠깐만,이 없이 너는 독일 여성 아나운서의 말을 E와 나에게 전했다. 떨리던 너의 목소리. 긴 정적이 실내를 메우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너의 남편이 근심스럽게 우리를 건너보았다. 구조할 거예요, E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아직 뒤집어진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이른 아침에 독일의 너의 집에서 한국의 바다를, 반은 기울어진 커다란 배를, 이 세상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고 맥이 풀렸다. 그렇게 서 있다가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바닥에 깔린 카펫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수백명이라니… 아직 다 크지도 않은 학생들이 그 배에 타고 있다니.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앉은 자세가 곧아졌다. 결국 우리는 처음 방문한 너의 집에서 학생들을 비롯한 배에 탄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한 채 배가 가라앉는 걸 지켜봤다. 우리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너의 집 근처만 서성거렸다. 어디에서든 너는 자주 울었다. 길을 걷다가 너가 돌아서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그게 울고 있는 거였다. 마당에 풀을 뽑는 듯이 앉아 있어 다가가보면 울고 있었다. 꽃이 피었네, 하면서도. 붉어진 눈과 마주치면 전쟁통도 아닌데 아이들이 너무 아까워서… E도 나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너의 집 뒤를 돌아서 너른 들길로 이어지는 길들을 걸었다. 성당 바깥의 돌의자에 앉아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진 평야를 묵묵히 바라보기도 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우리 주위로 옅은 건초 냄새가 대기 속을 떠다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 시리고 떨렸다. 너의 집을 떠나는 날 아침에 너가 내 방으로 올라와 내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거 마음에 드니? 반짝이는 것을 내밀었다. 이거 너에게 주고 싶어서. 나는 고개를 들고 큐빅이 얌전히 박혀 있는 반지를 받아 너가 보는 앞에서 내 손가락에 끼었다. 예쁘네, 잘 간직할게, 하면서.

 

오늘은 너와 통화할 수 있었다. 너의 남편은 이제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너가 전해오는 소식에는 너가 아니라 늘 남편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지. 한참 소식이 없으면 너의 남편이 아픈가보다 여겨질 정도였다. 지난 몇달 동안 조금은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17층 병실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때가 많았다고 지금은 괜찮고 이렇게 오래 괜찮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마음은 조심스럽다고 할 때도 있었고 남편에게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좋은 일은 파킨슨병이 느리게 진행되어 손도 떨지 않고 걸음도 느리지만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이고 좋지 않은 일은 심장 기능이 약화되어 몸에 물이 차는데 물을 빼는 약을 먹으면서 알러지 반응으로 다리에 상처가 생기고 속살이 벗겨져서 매일 새 붕대를 감아줘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너의 일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질 뿐 실감이 나질 않았다. 너의 남편에게 좋은 일은 그러니까 병이 낫는 게 아니라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구나. 운전을 배워야 할 것 같아, 지금은 남편이 운전을 해서 다니지만 곧 운전을 못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걱정할 일은 아니야, 내가 운전을 익혀서 태우고 병원에 다니면 되는 거니까. 너는 어때?라고 물으면 너는 항상 나는 좋아, 괜찮아… 했었다. 너의 말이 그리워진다. 나는 괜찮다고 했던 너의 말, 나는 좋다고 했던 너의 말. 너는 괜찮을 뿐 아니라 강해 보이기도 했지. 남편은 조기퇴직을 결코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래서 너는 남편과 함께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거라고 했다. 그곳은 꽂아만 두어도 장미가 핀다면서 5월이 되고 장미들이 정원을 가득 채우면 그때 시 몇편 쓸 수 있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언제나 너에게서는 남편을 깊이 아끼는 게 느껴졌다. 너의 삶은 너의 남편과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 같아 나는 그것이 좋았다.

 

너에게 어떤 평화가 깃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 그곳엔 붉은 단풍이 없어서 언젠가 캐나다에서 온 단풍나무를 심어두었더니 잎사귀에서 제법 붉은빛이 나서 한국에서 보던 단풍 같아 좋다고. 십오년 동안 씌어진 카프카 전기 세권 중에 마지막 권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내가 전기를 읽을 때면 끝으로 가는 게 겁나, 결국 죽음과 만나게 되니까, 했을 때 너도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지. 카프카가 약혼녀인 펠리스랑 결별을 하고 폐렴을 앓는 중에 일차대전이 끝나고 체코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에서 독립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아직 중간밖에 읽지 않았지만 모든 전기의 끝이 그러듯이 그 책도 카프카의 죽음을 다루게 될 테니 계속 읽어나가는 걸 늦추고 싶다고. 나는 죽음 너머에서도 사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그의 죽음이 씌어진 장을 잘 읽어내봐, 독서의 기쁨이란 그런 거 아니겠냐, 싱거운 대답을 했었다. 동물원에 갔다 왔다고도 했었지. 아주 오랜만에 코끼리를 보고 나니 살 것 같다고 해 나를 좀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너와 코끼리라니, 코끼리를 보니 살 것 같았다니 무슨 말일까? 궁금했었다. 너가 서울에 왔을 때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신간과 함께 깻잎 씨를 보내주어서 며칠 전에 뿌렸더니 벌써 싹이 나왔다고 반가워도 했다. 떡잎이 나고 또 잎이 나는 거 지켜보면서 이렇게 또 봄이 오는구나 생각한다고도. 너는 일이 있어 베를린에 갔다가 수보드 굽타라는 인도 출신 설치미술가의 전시회를 봤는데 내 생각이 났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인도의 중산층이나 서민층의 부엌에서 쓰이는 주방도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많은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니 어디서든 내가 그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도 그즈음 제주에 갔다가 탑동에 새로 생긴 아라리오,라는 갤러리를 발견했다. 표를 끊어 오래된 영화관을 리모델링했다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느 층에선가 엄청나게 큰 배를 보게 되었다. 전시장 한켠을 통째로 차지한 배는 밧줄로 천장을 향해 비스듬히 매여 있었고 그 안은 온갖 낡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찌그러진 냄비, 주걱, 물주전자, 솥, 항아리, 우유병, 짝이 맞지 않는 신발…들을 살펴보느라 배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때 나도 무심코 너가 어디에 있더라도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퇴락한 기다란 목선 안에 빈틈없이 실린 남루한 살림살이들은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다. 너와 계속 얘기하면서 너와 연결되어 있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 극심한 통증에 허덕이고 있는 너의 근처에 가닿지도 못할 쓸모없는 것이어도 나는 너와 단절되지 않게 계속 너에게 말을 걸고 싶다. 힘들어도 너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 너에게 작별인사의 이메일을 받았던 때로부터 나는 그저 계속해서 너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려고만 하고 있었지. 사실은 얘기가 잘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워. 너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사실 나도 어떤 형태의 이야기인지, 내 의식이 끈질기게 너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다. 나를 기다려줄 줄 알았어,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나로서는 짐작도 못할 통증에 사로잡혀 있는 너에게 어느 모로도 소용없는 말일 텐데도, 나는 계속해서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읽던 책을 덮고, 웃던 웃음을 거둔다. 너에게 닿지 못한 나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나의 불규칙한 잠을 깨우고 갑작스런 가슴 통증을 일으키고 부주의로 발톱이 문에 끼이게 한다. 너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 욕망조차 결국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만 분명한 일이라 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계절이 순환하듯이 시간이 원으로 말리듯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 속에 접혀져 있는 이야기들을 너에게 하고 싶다.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너와 나 사이에 단절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를 나는 바라지. 너에게서 오지 않는 게 좋겠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느덧 문장으로 살아나서 한순간 생기를 갖고 솟아오르며 너가 처음 쓴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게 했다. 나는 내 모국어로 처음 무슨 글을 썼는지도. 하지만 너에게 가지 못하는 무기력함이 강의 물방울들처럼 일어난 문장들을 짓밟고 덧없이 사라진다. 너에게 가지 못하는 틈 속에서 운전을 하다가, 장을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너에게 가닿지 못한 말들이 웅얼거림이 되어 흩어지는 것을 느껴.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응, 대답하는 너의 대답을 듣기라도 한 듯이 나는 혼자 웅얼거린다. 너 기억하고 있니? P 기억해? 나는 느닷없이 P에 대해서 너에게 웅얼거릴 때도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동무 P를 너가 알기나 할는지. 내가 너의 어린 시절을 모르는데. 오지 않는 게 좋겠어,라는 너의 말은 P가 나에게 이제 너와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아 내 연락처에서 너를 지워야겠어,라고 했던 말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한다. P로부터 메일 주소도 없애야겠다는 말을 들었던 시간이 있었어. 그때는 P가 말은 그렇게 해도 우리가 정말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 했어. 그때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칼이 놓여 있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같이 나는 진정되지 않고 팔딱거리고 있었어. 내가 P를 향해 내뱉는 말의 파장이 P를 어떻게 후벼 팔 것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고통을 마치 P가 데려와 내 앞에 부려놓기라도 했다는 듯 나에게 오겠다는 수화기 저편의 P에게 나를 내버려둬, 고함을 쳤다. 고통에 빠진 내 곁에 있기 위해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왔던 P가 글이 쓰이지 않아 좌절에 빠진 피츠제럴드에게 헤밍웨이가 쓴 편지 한구절을 읽어주려고 했을 때 나는 다 듣지도 않고 너도 똑같아,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질렀다. P를 잃는 것은 내 어린 시절을 잃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내 기억 속의 P는 일곱살일 때도 있고 더 어린 모습일 때도 있다. 우리가 십대 후반이 되고 내가 그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던 때 P는 나에게 열다섯살 남자애의 팔 길이만 한 나무 한그루를 주었다. 어둠 속이어서 나무에 잎사귀가 달려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도 잊었다. 어리고 작은 나무 밑동은 교과서를 찢은 듯한 종이로 감싸여 있었다. 그 밤의 어둠을 기억하지. 나무를 주는 손과 나무를 받는 손을 기억해. 우리는 무슨 약속 같은 것을 하고 싶었을 거야. 겁이 나서 차마 말로는 할 수 없는 지킬 수 없는 약속. 나는 그 나무를 들고 기차를 탔고 내가 도시에서 처음 살게 된 동네의 남의 빈 땅에 몰래 심었다,는 이런 얘기들을 너에게 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차마 언어로 포착하지 않고 숨긴 삶의 순간들에 대해 너에게 얘기할 시간이 우리에게 있을 거라고. 딛고 있던 나의 모든 바탕이 비난 속에 균열이 지고 흔들리는 것을 목도하느라 내가 P에게 폭언을 퍼부었다는 것을 이년이 지나서 깨달았다. 달의 주기처럼 차오르는 꺼져버리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느라 P에게 내뱉은 나의 말들을 다시 상기할 여유가 없었다. 정말 P는 나와 헤어졌을까? 나의 이메일 주소조차 없애버렸을까? 용기를 내어 P에게 메일을 썼으나 다시 일년도 넘게 나는 전송을 못하고 임시보관함에 넣어두고 있다고 너에게 얘기하고 싶어. P가 생각날 때면 그 이메일을 꺼내 몇마디를 덧붙이거나 썼던 말들을 지우고 있는 나에 대해.

 

너에게 가지 못한 채 나는 이 모르는 도시를 배회한다. 숙소에서 어느날은 직선으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고 어느날은 그 반대 길을 무릎이 꺾일 때까지 걷다가 돌아온다. 숙소가 있는 레비스 거리에는 시장이 펼쳐져 온갖 군것질거리가 있었다. 까페와 상점들과 레스토랑들 사이에 오래된 서점이 있기도 했다. 17세기부터 있었다는 거리. 빠리에 속하지 않았다가 몽소 공원으로 가는 길목이라 뒤늦게 빠리로 편입된 거리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신발가게 앞에 나는 서 있었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지하철역이 세군데나 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가게가 많고 장사하기 좋아 유대인이 많이 살게 된 거리인지, 유대인이 많이 살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생긴 것인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한낮의 낯선 광장에 서 있기도 했다. 더위에 인적이 끊긴 텅 빈 광장에 서 있다가 너가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기도 했다. 빠리에서 지내던 K선생이 내가 이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걸 전해 듣고 안부를 물으며 시간이 되면 가보라고 전시회 팸플릿을 사진 찍어 보내온 것은 하릴없이 빌리에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북역엘 가보았던 날이었다. 지하철 입구의 전광판에 새로 출간된 씨몬느 드 보부아르의 회고록과 사진집 광고가 한낮인데도 조명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얼른 지하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너가 또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여름볕이 눈을 찔렀다. 너가 오라고 하면 언제든 나는 북역으로 가서 혹은 동역으로 가서 너의 집이 있는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탈 것이다.

 

모르는 도시를 배회하고 돌아오면 맥이 빠지고 공허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너와 헤어지던 어느 공항에선가 수속을 밟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너의 뒷모습이, 탑승을 위해 들어가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짧게 손을 흔들던 너의 실루엣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떠오르며 내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 순간적으로 끼어든 생각, 저 비행기가 사고가 나면? 갑자기 예상치 못한 불안에 막 달려가서 너를 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 공허해진 내 마음은 너에게 찾아든 이 고통이 내가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도 했다. 신이 보고 있다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 하면서 복수를 하는 것인지도. 나는 낙담해서 숙소의 침대 끝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있어본다. 아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집을 떠날 때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하는 생각. 비행기가 사고가 난다면? 하는 상상은 처음이 아니었어. 나는 자주 생각했다. 만약 내가 탄 비행기가 사고가 난다면? 노트를 하나 마련해서 내가 없을 경우 남은 가족이 해야 할 일이 무엇무엇인지 적어둬야지 싶어 노트 앞에 앉아본 적도 있어. 무엇을 적나? 작정하고 기록을 해보려니 내가 없다고 가족이 하지 못할 일은 없어서 허무할 지경이었다. 나는 허탈해져 침대 끝에서 이마를 들고 바닥에 퍼지듯 몸을 뉜다. 눅눅한 실내 공기, 시들어가는 여름꽃, 너무 익어 물러진 체리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 아침에 바스러뜨리다가 흘린 바게뜨의 부서진 가루들. 나는 아침이면 호주머니에 쩔렁이는 유로 동전의 감촉을 느끼며 거리로 나가서 갓 나온 바게뜨를 사왔다. 이 나라는 매년 어느 빵집이 바게뜨를 가장 맛있게 만드는지를 선정한다며 몇년 이어서 1위를 한 빵집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이는 누구였는지. 아침마다 바게뜨를 사러 그곳엘 갔다. 어제 것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오늘 다시 나갔다.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일 구실이 필요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시장은 생기로웠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자전거와 트럭 사이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빨리 걷는 사람들, 벌써 닭요리를 만들어 내놓은 식료품 가게들, 여름 트러플을 넣은 라비올리가 풍기는 흙 냄새, 아니 나무나 풀 냄새 같기도.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치즈 냄새들 속에 섞인 아침 풍경을 휴대폰으로 찍어서 서울로 보내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선글라스를 끼고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여자, 막 문을 연 생선가게, 아직은 비어 있는 진열대에 납작복숭아를 펼쳐놓고 있는 과일가게 남자의 등, 저울에 가득 올려진 색색의 베리들, 모노프리 앞에 늘어져 자고 있는 노숙자. 바게뜨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개를 데리고 나온 남자의 뒷모습을 찍을 때도 있었다. 다정하게 서로의 팔을 부축하듯 잡고 걸어가는 머리가 센 할머니 둘. 함께 늙은 친구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할머니들 뒤를 따라가다 멈춰 서서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방금 나 혼자 있는 숙소의 문으로 누군가 들어설 것 같아서 문 쪽을 자주 돌아보았다. 문은 닫혀 있다. 조용하다. 매일 조금씩 더위가 더 짙어지고 있다. 나는 울적해져 바닥에서 일어나 소파에 얼굴을 묻고 길게 엎드린다.

 

P를 찾아봐야겠지, 나는 너에게 묻고 싶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서져버리겠지? 너와 머리를 맞대고 내가 P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듣고 싶다. 이를테면 P와 단절되는 일은 너의 어린 시절과도 단절되는 일인데 그래도 괜찮아? 같은 말. 괜찮지 않다,고 너에게 얘기하고 싶다. P에게 걱정을 끼치고 함께 간직한 것들을 훼손시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강을 사이에 두고 P는 저편에 나는 이편에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비추고 있어서 P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P의 얼굴을 깨진 유리조각으로 깊게 파버린 것 같아,라고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이제 어디로도 나가지 않는다. 숙소에서 나흘째 잠만 자고 있다. 침대에 엎드린 채 오후 세시쯤에 너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가 되어 내가 갈까? 물으면 너는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또 내일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는다. 너에게 전화를 거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잠 속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자도 자도 잠이 남아 있다. 여름날의 끈적한 공기가 잠 속에까지 침입해 있다. 오래된 소나무는 죽은 후에 가지가 부러지고 둥치가 잘려서 위로 솟아나갈 수 없을 때 에너지를 뿌리 밑 주변에 저장시켜 복령이라 불리는 덩어리를 만드는데 큰 것은 어린애 머리만 하다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어떤 사람들이 통화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는 것도 같은데 불현듯 그것이 혹시 너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잠을 밀어내려고 허우적거린다. 어쩌면 저 통화하는 목소리는 너에게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청하는 내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래?라고 따져 묻고 싶은 건지도. 왜 나를 보려고도 하질 않아? 그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 같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한 목소리가 저 여자는 왜 잠만 자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목소리가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아는 목소리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 목소리가 저 여자는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여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귀 기울여보라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지 않느냐고 기척이 없다고 출근할 때도 귀 기울였고 퇴근해서도 귀 기울였으나 저 여자는 움직임이 없다고…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인지 현실에서인지 분간이 안 갔다. 며칠째 그래요. 문을 열고 들어가봐야 할까요? 나는 잠 속에서 내가 스스로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들이 나를 깨우러 오기 전에 내가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고.

 

작년 여름에 너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고 느껴서 안부를 묻는 나의 이메일에 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바닷가에서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지금 프랑스 서중부에 자리한 작은 바닷가 마을에 와 있어. 남편이 천식이 악화되고 심장 기능이 약해져서 내내 골골거리니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며 바닷가에서 지내다 오는 것을 권유해 여기까지 왔어. 이 마을에는 작은 항구가 있는데 매일매일 장이 서는구나. 어제 항구에 들러서 작은 시장바구니를 하나 샀는데 마음에 들어서 오늘 하나 더 사려고 갔더니 그 장바구니를 파는 아가씨가 나오지 않아서 헛걸음만 하고 말았네. 어제는 그 장바구니에 어부가 직접 건져온 조개와 생선을 사서 담아왔는데… 생선은 구워 먹고 조개는 스파게티 해서 먹었어. 모레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바닷가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어. 몇몇들과는 친구가 된 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평생을 같이할 거라는 생각도 했어. 남편은 낙천적인 환자라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쉬고 자고 쓰던 글도 쓰고 그런다. 유쾌하게 농담도 하고. 이런 시간이 감사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걷고 하늘 보고 그런다. 오랜만에 쉬는 것이라서 좋아. 이제 이 휴식을 취하고 나면 좀 나아지길 바라본다.

 

오늘은 뭐 했어? 너가 묻는다.

—수보드 굽타 전시회에 갔었어.

—신은 부엌에 있다고 한 사람.

—응.

—좋았어?

—지금 오라고 하면 가서 얘기해줄게.

너의 침묵에 나는 너에게 해주려던 얘기를 삼켰다. 너를 만나면 얘기하겠지. 수보드 굽타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다고 해. 인도이니 힌두교였을까? 어린 시절의 그에게 어머니가 지키고 있는 부엌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신성한 장소였대. 기도실만큼이나 중요한 장소가 그에겐 부엌이었다네.

—나는 이제 네가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운이 좋게 너에게 아침에 전화를 했을 때 연결이 되었다. 내가 오늘 너에게 갈까? 했을 때 너는 여기는 오지 않는 게 좋아, 나를 위해서… 했다. 이제 입으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될 거야,라고도. 이제 음식은 코나 목에 구멍을 내어 호스로 주입을 시키게 될지도 몰라. 귤만이 아니라 어떤 것도 먹을 수 없게 된 너는 오지 않는 게 좋아,라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나는 전화를 끊고 힘을 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너가 마음이 바뀌어 오라고 할 때 얼른 너에게 갈 수 있는 힘. 침대를 바라보다가 움직여야 된다고 여겨져 K선생이 가보라고 했던 전시를 떠올려 문자를 다시 불러서 보다가 그 전시가 수보드 굽타 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우연도 있구나, 생각하며 숙소를 나섰다. 제주에서 남루한 세간살이들을 한가득 싣고 있는 배를 본 이후 수보드 굽타라는 이름이 잊히지 않았다. 물론 너 때문에 더. 언젠가 너와 내가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며 각자 다른 공간에서 만났던 작가의 빠리 전시회장은 화폐박물관이었다. 구글 지도를 작동시켜 찾아간 화폐박물관은 쎈 강변 프랑스 한림원 건물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티켓을 사서 원형으로 된 야외 전시장에 먼저 들어섰을 때 맨 먼저 보인 것은 수백개의 스테인리스스틸 주방기구로 만들어진 해골이었다. 여름빛은 그 위에서 강렬하게 튀었다. 나는 되쏘는 빛에 찔려가며 해골을 올려다보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신(Insatiable God). 어두운 눈구멍과 쩍 벌어진 구강 안의 금속이빨들과 튀어나온 두개골 속에 채워진 양동이와 접시와 밥그릇과 컵들. 전시장 여기저기에 광이 번쩍이는 짐 나르는 수레, 우유통, 쟁반, 물주전자, 주걱들이 흩어져 있었고 은빛 스테인리스 웍들과 기이한 형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거나 나무줄기를 이끌고 내려와 땅에 박혀 있었다. 주방기구들은 염주처럼 늘어선 기둥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거나 신전에 놓인 것 같은 항아리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수백가지 번쩍이는 주방도구로 이루어진 굶주린 신, 배고픈 신, 절대로 만족을 모르는 신들의 형상이 내뿜는 에너지는 인자함이나 자비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의 가혹함과 잔인함이 음침하게 뒤섞인 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위로는 없었다. 잡을 손도 없었다. 막을 수 없는 과식과 위험한 굶주림만이 줄줄 넘쳐흘렀다. 번득이는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들어진 신, 양철깡통의 신… 제주에서 봤던 배가 싣고 있는 남루한 세간살이들과는 생판 다른 느낌 때문에 나는 기진맥진해 돌아와 너에게 전화를 건 것인데 너는 나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기억하니? 그날들을. 그 도시 이름들을.

너가 떠난 후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국의 도시에서 짧은 만남을 갖곤 했지. 하루일 때도 있었고 사흘일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은 되지 않았지. 너도 너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나도 나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우리가 묵었던 낯선 도시의 호텔 방들. 그곳에서 우리가 불렀던 노래들. 내가 서울에서 가방을 꾸리며 너에게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물으면 너는 한결같이 노래책,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언제부턴가는 묻지도 않고 노래책을 가방에 넣어갔다. 노래책을 사본 일이 없어서 처음에 나는 노래책은 어디에서 사느냐고 너에게 물었다.

—서점에서 사지 어디서 사?

—서점에서 노래책도 팔아?

—그럼 서점에서 소설책만 파는 줄 알았어?

너는 더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왜 노래책을 서점에서 팔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 너무 당연해서 질문을 가지지 않고 지내던 것들을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열여섯이 되기 전의 단발머리의 나, 중학생이었으니 단발머리가 당연한데 문득 왜 단발머리를? 골똘히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숟가락 옆의 젓가락이나 문에 달려 있는 열쇠고리나 오른쪽 운동화 옆의 왼쪽 운동화나 달 하면 함께 연상되는 별 같은 거… 그리고 우리들 앞에 놓인 시간. 다가올 시간은 지나온 날 같지도 않고 지금 같지도 않겠지. 다만 그 시간들을 함께 맞이하리라는 것을, 밤이 지나면 찾아드는 아침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오늘 절박하게 너를 보지 않아도 우리 앞에는 타래 같은 시간들이 있어 우리는 오래 함께할 것이기에 바로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것들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관계에 집중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일은 빛 속에서뿐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왼손 옆의 오른손처럼 당연한 일이어서 질문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남은 시간들이 하루하루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에 식은땀을 흘리지만 그때에도 함께 있을 몇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겐 너였다. 뒤척이다가 눈을 뜬다. 눈꺼풀이 두겹으로 말려서 눈두덩에 올라붙을 때 빗소리 같은 차가운 질문이 나를 일어나 앉게 한다.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때 너는 여기에 있을까?

 

너가 독일말을 구사할 줄 안다는 건 나에게 힘이었다. 너가 그 나라 말을 잘 읽고 쓸 줄 알아서 나도 그 나라가 두렵지 않았다. 그 나라에 너가 있어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 나라의 호텔에 묵으며 그 나라의 신문을 들추며, 그 나라의 상가에서, 기차역에서, 나는 계속해 너에게 말했다. 철학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줘, 우연히 앞에 놓인 신문을 보며 이 사람은 페터 한트케 아니야?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여기에서 빈에 갈 수 있는 기차 시간은 몇시야? 어느 역에서 타야 되는 거야… 너는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대답을 해주었다. 대답 앞에 항상 잠깐만, 하면서. 잠깐만, 잠깐만, 너의 뺨은 붉어져 있었다. 나는 곧 너의 잠깐만을 잊어버리고 또 질문했다. 너의 모든 대답 앞에 잠깐만,이 붙었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항상 내가 너무나 빨리 여러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한 거 미안해. 나조차 너가 모국어가 아닌 말을 통역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곤 했어. 이제야 너의 막막함이 쓰라리게 다가온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잠깐만,이라고 붙이는 게 너의 언어 습관인 줄 알았구나. 나는 때때로 너의 느린 대답을 기다리다가 하품을 하기도 했겠지. 참 미웠겠다. 이제 너의 잠깐만,이 무엇인지 안다. 그 잠깐만의 틈에 너는 내가 모국어로 발음한 질문을 그 나라 말로 바꿔서 알아보고 조사하고 걸러냈겠지. 그 잠.깐.만 사이에 바삐 생각을 해야 했을 너의 뇌. 무엇을 질문했는지 나는 잊어버리고 있는데 너는 밤에 호텔방에서 생각난 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낮에 네가 신문을 보며 물었던 거, 하면서 보충 답변을 성실하게 해주었다. 페터 한트케가 세르비아 쪽에 서서 발언한 것에 대해 반발이 심해서 나온 기사였어. 유고전에서 세르비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니. 세르비아를 두고 발칸의 학살자라고 하잖아. 그런데 페터 한트케가 세르비아를 위한 정의라는 것도 있다,고 발언했어. 낮에 네가 본 것은 페터 한트케의 그런 주장에 대한 비판 기사였어… 나는 너의 설명을 들으며 『왼손잡이 여인』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관객모독』을 쓴 페터 한트케의 유니크한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언어들에 대해 이제 그 의미를 달리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뭔가를 상실한 울적함이 찾아와 물끄러미 너를 바라보기도 했다.

 

언젠가 너는 지금 나는 동화 한편을 쓰고 있단다,라고 했다. 어느날 잠을 자다가 문득 동화의 마음이야말로 시적 발상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래전에 사둔 안데르센과 오스카 와일드를 다시 읽었는데 엉뚱하게도 동화를 읽는 동안 아일랜드 시인이 쓴 “내가 만일 시가 어디에서 오는지 안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어라”라는 한구절이 생각났다고 했다. 나는 너가 언젠가 나에게 했던 말에 대답해주고 싶다. 그래, 너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너의 시로 가는 길이었다고.

 

나는 오늘 너에게서 또 한번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허탈해져 숙소를 빠져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배회했다.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고 화재를 당해 그을린 듯이 보이는 긴 담벼락을 따라 걷기도 했다. 내 발길이 마지막에 닿았던 곳은 지난번 와본 적이 있는 화폐박물관 앞이었다. 전시는 계속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티케팅을 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굶주린 신, 배고픈 신, 만족을 모르는 신들을 오늘은 담담히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슬몃 냉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마음이 뒤집히고 몸은 급히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게 하던 형상들이 오늘은 그저 한낱 내 얼굴 같았다.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진 후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남은 것들은 무엇이 될까? 나는 박물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거기 돌벽에 기대어 있었다.

 

—오늘은 뭐 했어?

오늘은 너가 상냥하다. 그러니 나에게 또 희망이 생긴다.

—샹젤리제 거리에 나갔어. 오늘이 월드컵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거든.

—월드컵?

—응. 프랑스와 크로아티아가 결승에 올라서 프랑스가 이겼어. 4대 2로.

—그랬구나.

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경기를 빠리에서 한 거야?

—아니…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사람들 좋아했겠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폭동이 나는 줄 알았어.

—폭동?

—응.

—사람들이 어땠길래?

—승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샹젤리제 거리로 쏟아져나와 깃발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대고 폭죽을 터뜨려대는 게 혁명군이 입성하는 것 같았어.

사나운 가장무도회 같기도 했지.

—K선생님 가족이 빠리에 와 계셔. 따님 가족도 와 있더라. 아침에 사모님이 문자를 하셨어. 이 시기에 빠리에 함께 있는 것도 뜻이 있는 거니 결승전을 함께 보자고. 오래전 한국에서 월드컵이 있었을 때 네덜란드의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이 4강에 올랐던 일 기억이 나니?

—기억나.

 

그 열광의 기억들. 벌써 희미해졌고 어느날엔가는 사라지겠지. 그때 한국팀은 너가 살고 있는 이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꺾었지. 그 환호 소리 속에서 문득 너를 생각했었다. 너는 누구랑 이 경기를 보고 있을까? 오프사이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 같은 이도 그 열기에 빠져 한국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아는 사람과 패를 이루어 거리로 나갔던 기억. 사모님이 보내준 문자의 주소에 나와 있는 아파트는 샹젤리제에 있었다. 샹젤리제에 아파트가? 늘 관광객으로 그 거리를 지날 때면 대로를 따라 가로수를 따라 명품 브랜드 간판을 따라 그것도 인파에 섞여 걸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 사이 어디에 아파트가 있었나? 떠오르지 않았지만 서울의 명동에도 아파트가 있으니까, 생각하면서 길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샹젤리제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역에 내려서 지도앱을 작동시켜 선생이 알려준 주소의 안내를 들여다보며 골목을 돌 때 기시감이 들었다. 서울도 아닌 빠리에서 월드컵 결승전을 같이 보겠다고 어떤 집을 찾고 있자니 오래전 갑자기 찾아든 열광을 함께 나누고 싶어 강북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넘어가던 생각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를 이해하는 수준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남의 나라에서 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게 코미디 속의 지나가는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길을 못 찾을까봐 렌트한 아파트로 접어드는 코너에서 K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이 저만큼 오가는 프랑스인들 사이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데 예기치 못한 반가운 감정이 왈칵 솟아올랐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나려고도 했다. 무엇에 눌려 있던 감정이 그 순간 터져나온 듯했다. 누군가 물청소를 해놓은 꽃집 앞을, 그 후더운 대기 속을 K선생을 향해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너에게도 이렇게 달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지. 지금 내 마음의 모든 시간은 이렇게 너와 닿아 있어.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의 낯선 시장에서 크루아상을 사거나 포도며 망고를 고르거나 오후의 더위 속에서 땀에 젖은 낮잠 속을 허우적거리는 모든 시간 속에 너가 있다. 끈질기게 너를 생각하는 이 시간들이 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를 바라. 사모님이 미리 차갑게 해놓은 유리잔에 시원한 맥주를 따라주었다. 우리는 맥주잔을 한잔씩 앞에 놓고 축구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파트의 크고 작은 창문들은 모두 열려 있고 대로 쪽으로 한패의 젊은이들이 몰려가며 함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그곳은 빠리이고 처음 방문한 아파트인데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느낌이었어. 여름의 열기, 축구경기, 함성, 맥주.

경기가 시작되려고 할 때 K선생 손자가 우리 모두를 향해 물었어.

—어느 쪽을 응원해요?

아이가 붉은 수박을 베어 문 채 우리의 대답을 기다렸어.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우리는 비밀을 발설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쭈뼛거리며 웃기만 했어.

—응? 어느 쪽?

K선생과 사모님과 나 그리고 아이의 부모까지 어른 다섯은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어.

—왜 그랬어?

너가 희미하게 묻는다.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답답해진 아이가 사모님 단 한 사람을 향해 다시 질문했지.

—할머닌 어느 쪽이에요?

—그냥 보는 거야. 나는 아무 쪽도 아니야. 너는 어느 쪽을 응원하니?

아이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프랑스! 하고 외치듯 말했어.

—왜 프랑스를 응원해?

—내가 지금 여기 있으니까요.

아이의 대답은 명쾌했어.

경기가 시작되기 몇시간 전부터 이미 샹젤리제 거리와 에펠탑엔 구만명도 넘는 인파가 운집되어 있었어.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앞서갔어. 아이는 신이 났지. 프랑스가 유리해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시무룩한 어른 다섯을 의아하게 봤어. 크로아티아가 자책골을 넣을 때면 한숨을 쉬는 우리를, 프랑스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킬 때 아이 혼자 환호를 하고 그 환호는 열어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함성과 만나 퍼져나갔지. 전반전 28분쯤 지났을 때 크로아티아의 선수가, 그 선수 이름은 페리시치라고 하더라, 발리 슈팅을 날렸어. 그때 어른 다섯이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거나 창가에 서 있다가 TV 앞으로 다가오며 일제히 와아, 소리를 질렀어. 그로써 1:1이 되었거든. 어른 다섯은 기뻐 웃느라 잠깐 잊고 있던 아이를 나중에 바라봤어. 그 아이의 표정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먹고 있던 빵을 든 채로 이상한 나라의 어른들이 여기 모여 있네, 하는 표정이었단다. 우리는 아이에게 미안해져서 곧 자기 앞에 놓인 맥주를 마시거나, 멜론을 한조각 포크에 찍어 먹거나 했다. 우리가 사실은 모두 크로아티아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들켰지. 크로아티아는 경기를 뒤집지는 못하고 프랑스에 2:4로 패했어. 프랑스 골키퍼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을 때가 생각나네. 어른 다섯이 또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하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며 이상해! 소리치며 우리를 보았단다. 어느 편도 아니라면서요!! 아이는 정말 의아한 표정을 지었어. 알고 보니 저 어른들이 모두 한패였네, 싶은지 아이는 거의 울 듯했단다.

 

—내 말 들어?

—응.

—나 내일 너에게 갈까?

—이렇게 통화하잖아.

—이건 너를 보는 게 아니잖아.

—서운해?

—응.

—나는 알아. 이미 너는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있는 거.

—……

—나중에 네가 나 기억할 때 여기까지만이면 좋겠어. 너 아니고 누구라도. 오늘은 이상하네. 머리가 좀 맑아. 이런 말 할 수 있어서 좋네. 통증이 시작되면 내가 어떤 모습인지 나도 몰라. 그냥 덩어리가 된 거 같아. 나도 모르는 고통스러워하는 나 말고, 너무 작아져서 없는 것 같은 나 말고… 그래 여기까지만.

 

너에게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퍼지던 거리를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까. 쏟아져나온 군중들의 얼굴과 팔과 다리에는 프랑스 국기의 삼색이 어지럽게 칠해져 있었어. 각양각색의 보디페인팅은 어지럽고 눈이 부셔 올려다볼 수가 없었어. 사자처럼 호랑이처럼 분장하고는 질주하던 이들. 상반신을 드러낸 채 트럭에 올라탄 젊은이들. 목쉰 외침들, 자동차의 경적 소리, 오토바이들이 내지르는 클랙슨 소리. 세상은 그런 것이다. 너가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고통과 대결하며 순간순간 까무러치고 있을 때도 어디에선가는 이런 기쁨의 함성 소리를 내지르며 질주하는 사람들이 있지. 이렇게 시간은 제각각이야. 나는 인파 속에 섞여 떠밀리고 나아가고 돌려지며 샹젤리제 거리에 서 있었다. 너에게 가겠다고 억지를 쓰지만 허락하지 않는 너의 마음은 이미 알아,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나라는 거 너도 알겠지. 열광과 기쁨으로 흥분한 사람들 속에 섞여서 오늘은 너가 어떤 통증에 뭉개졌을지를 막막하게 떠올려봤어. 이 거리가 나에겐 막막한 기차역 같다. 기차는 출발했는데 도착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어둠 속의 철로를 매일 내다보고만 있는 것 같아. 이미 기차가 출발했다지만 나는 기차가 영원히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어. 인파 때문에 지하철을 탈 수 없어 지도앱의 안내를 받아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중에도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밤도 그들의 기쁨을 가로막지 못했다. 오토바이의 빵빵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모르는 나를 향해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무심코 올리려다 멈춰져 있는 내 손바닥을 강탈하듯 부딪치며 소리치고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기쁨에 겨운 외침들, 발작에 가까운 몸짓들, 더 열광하기 위해 더 기뻐하기 위해 흥분한 군중들은 더 더 더…를 향해 나아가다가 닫힌 상가들의 유리창을 깨고 술병을 꺼내고 뚜껑을 따 바닥에 팽개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오늘은 너가 나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한다.

—노래?

—너 잘하는 노래 있잖아 중얼중얼거리는 거.

—뭐?

—높낮이도 없고 경 읽는 거처럼 웅얼웅얼거리는 거.

너의 말에 나는 웃는다. 내가 웅얼웅얼대면서 그걸 노래라고 불렀나보구나.

—너 자주 부르는 거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목도 모른 채 듣기만 했네. 생각나는 대로 시작해봐.

—무슨 노랜지도 모르겠고 가사 다 잊어버렸어.

—다 잊었다 해도 생각나는 거가 있을 거야.

다 잊었다 해도 생각나는 거? 나는 휴대폰에 대고 너의 말대로 무슨 노래든 생각나는 대목을 불러보려고 노력한다. 잊히고 남아 있는 것들은 한 소절도 이어지지 못하고 자꾸만 잘려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한다. 노래가 끊기는 어느 틈에 너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미안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네가 절망에 빠졌을 때 바로 연락하지 못한 것. 그때 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나이 들고 있는 게 실감 나고 힘들더라. 네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게… 이어지지 않던 노래의 어느 대목이 불현듯 또렷이 생각이 났다.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들에 저 들에 눈 내리기 전에. 너는 말한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르겠어. 나는 가만히 너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 외딴 집 굴뚝 위로 흰 연기 오르니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그 아이네 집 하늘 위로. 나 열여섯살 때 체중이 얼마였는지 알아? 갑자기 체중 이야기에 나는 응? 휴대폰을 귀에 바싹 대었다. 너에게도 얘기 안 했지? 내가 그때 68킬로그램이었어. 이 작은 키에 68킬로그램의 뚱뚱한 여자애를 상상할 수 있겠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점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있을 너이기에 더욱. 그래도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어. 봐, 서울을 떠나 이곳까지 왔잖아. 너가 말을 멈추고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매일 조금씩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들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다행히도. 이렇게 주저앉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거든. 나는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거 같아. 예상치 않은 곳이라 두렵긴 하지… 하루에 열한시간씩 발굴을 할 때도 있었어. 내 손이 작잖아, 그래서 너가 항상 아기 손 같다고 했잖아. 그래 내 작은 손. 한때는 작은 게 부끄러워서 주머니에서 빼지 않기도 했어. 너는 그랬구나. 나는 내 손이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너는 가만히 말한다. 내 작은 손이 발굴할 때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단다. 내 손은 그 오랜 시간을 묻힌 채 버텨온 유물들이 더이상 훼손되지 않게 흙먼지 속에서 온전히 집어낼 수 있었어. 팀원 중에서 나만이 그걸 할 수 있었다구. 이 손이 정말 많은 일을 했더라.

 

통화가 되면 항상 너가 물었던 오늘은 어땠어?라는 말을 오늘은 내가 묻는다.

—굴참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과 했어.

—굴참나무?

—처음엔 우리 집 마당 전나무 아래를 생각했는데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숲속의 굴참나무 밑으로 정했어. 집은 팔 수도 있는 거고. 남편이랑 산책할 때 가끔 가서 잘 아는 숲이야. 숲속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누구도 줍지 않아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연년세세 쌓여서 바닥에 두껍게 깔려 있어. 걸으면 도토리들이 바스락거려.

굴참나무,라고 나는 발음해본다.

—집에서 가까워.

나는 이제야 너가 있는 그곳이 너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그동안 너의 집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10월쯤에는 마당에 튤립 뿌리를 묻어두라고도 했다. 그래야 봄에 꽃을 볼 수 있으니까. 흙이 산성이고 많이 줄어들었으니 흙을 한 차 주문하라고도.

무슨 생각이 나는지 너가 가만히 웃는다.

—나무들이 해나 물만 아니고 흙도 슬금슬금 먹나봐. 매해 흙이 줄어들어.

—……

—내 말 듣니?

 

동료들과 아마존에 간 적이 있었어. 거기 어디에 반딧불이 서식지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깊은 밤중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반딧불이들을 보러 갔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 우리를 태운 배는 수풀과 나뭇가지들 때문에 멈췄다가 다시 얼마쯤 앞으로 나아갔어. 물살이 노에 갈라지는 소리만 귀에 들렸지. 배가 강의 안쪽으로 밀려들수록 수로가 점점 좁아지고 어둠은 더 깊어졌어. 반딧불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눈에는 어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바람이 불 적마다 물살이 일어 쏴아 대는 물소리만 예민해진 귀에 쌓여갔어. 배가 침몰하게 되면 누구도 우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둠만이 우리를 에워쌌어. 왜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움직이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반딧불이를 찾아 물살을 타고 밀어내면 다시 밀려드는 어둠 속으로 나아갔어. 떠나온 곳으로부터 아주 멀어졌는데도 물소리와 노 젓는 소리와 어둠뿐이었다. 반딧불이를 보겠다고 한밤중에 배를 탄 우리가 소리 없는 어둠에 멱살을 잡힌 기분이었다. 급기야 나는 배가 뒤집어지고 노가 물살에 밀려 어둠 속으로 떠내려가고 나 혼자 물속으로 가라앉는 환영을 보았다. 물달팽이들이 온몸에 들러붙는 것 같았어. 반딧불이들은 어디 있는 거야, 물지렁이들에게 발가락 틈새를 파먹히며 나는 점점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자맥질치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물컹거리는 물풀들이 눈 속으로 콧속으로 입속으로 온몸의 구멍을 쑤시고 침입하는 것 같았을 때 보트에 탔던 누군가 짧은 외마디 소리를 냈어. 저거 봐, 반딧불이야, 물밑으로 가라앉는 환영 속에 눈을 떴어. 눈앞에 가득 찬 빛. 와아, 와아 소리치듯 어둠과 어둠 사이를 흘러다니는 빛의 뭉텅이들. 나무도 나무와 나무 사이도 나뭇잎도 나무둥치도 반짝이는 덩어리들에 에워싸였어. 저게 반딧불이 맞아? 어떻게 저렇게 크지? 눈앞의 반딧불이는 청년의 주먹만 했어. 빛의 덩어리들이 어둠을 뚫고 날아올랐다. 수백마리를 모아놓아도 저런 덩어리는 아니었는데? 잠시 소란스러웠으나 우리는 곧 조용해졌다. 모두들 반딧불이가 날아오르는 곳을 바라보며 하나둘, 말을 잃었어. 보트가 뒤집어져 물밑으로 가라앉는 환영을 보던 나도 물을 툭 차고 보트의 난간에 매달려 그 빛을 응시했어. 빛의 덩어리가 내 눈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어. 나는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너에게 갈 수 없으니 나는 여기 있을게. 오늘은 어땠어? 내일도 물을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하지. 반짝이는 눈망울을 한 아이들, 모든 것을 잃고 멀리 떠나는 사람들, 남루한 세간살이들, 누군가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 이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대면할게. 사랑하고도 너를 더 알지 못해서 미안해. 그 강에서 내 눈 속으로 들어왔던 반딧불이 한덩어리가 너에게 날아가기를 바라. 통증 때문에 점액질이 되어버렸을지라도 너의 눈이 단 일초라도 그 빛의 덩어리와 마주치기를. 신은 늘 굶주려 있는 것 같아, 잡아먹힌다 해도 앞으로 나아갈게. 내일 다시 연락할게.

 

 

작가노트

젊은 날 내게서 멀리 떠난 친구가 더 멀리 떠났다. 친구를 기억하며 완성시킨 작품 안에 교신한 이메일, 함께 나눈 대화들이 일부 변형되어 들어왔다. 친구가 남긴 것들이 소설이란 허구 속에 이렇게 존재함을 공감해준 그의 가족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