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

 

공동세계를 향한 시의 모험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분열하는 감각 너머의 리얼리티」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인간다운 삶과 공동의 문제, 그리고 시

 

최소한의 삶이라는 왜소하고 위축된 전망이 아니라 좀더 나은 미래를 향한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변과 어떻게 갈등하고 또 어떻게 협업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는 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것과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공정성의 문제 역시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이 가질 만한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이 심화된 오늘의 세계는 평등을 감각하는 일 또한 꽤나 복잡해졌다.1 자신이 차별 없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마음과 남들도 차별 없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마음 사이에 분열이 있으며, 저 ‘누구나’의 외연을 감각하는 방식에도 제각각 차이가 있다. 문제는 차별과 소외가 있는 현실이 공동의 세계를 불신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공동의 문제를 더욱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제 너무나 공공연하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발생한 불평등은 확실히 ‘사회적 무대의 소실과 세계 상실’의 감각2을 확산시키는 중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처럼 보편적 가치와 접속된 문제야말로 삶의 현장에서 공동의 해결을 필요로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문제는 타자를 배척하지 않는 주체화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와도 관련이 있고, ‘나’와 ‘우리’ 사이에는 단번에 도약하기 힘든 거리가 내재한다는 사실과도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다. 타자를 부정항으로 내세우며 자신을 주체화하지 않으려는 노력, 공동세계의 주체로서 책임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 자본주의의 물화와 대항하며 사회적 관계성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는 노력 등등. 더불어 저 노력들을 심드렁해하며 모든 것이 이미 파탄에 이른 것처럼 여기는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도 말해야겠다. 앞서 나열한 노력들을 종합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공동의 감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노력이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문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시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기운을 감지할 때 우리는 보통 그 시의 언어에서 강렬함을 느낀다. 이 움직임은 평균적이거나 절충적인 상태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력으로 집중하는 운동성을 띤다. 때때로 우리가 시에서 감지하는 어떤 고집스러움, 가령 반복적인 언어의 운용과 거듭되는 이미지의 변주 같은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를 비타협적으로 추구하는 운동성이다. 그래서 시는 어중간한 것을 싫어하고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성격을 지닌다. 이 성격은 얼핏 공동의 감각을 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과는 거리감 있게 느껴지지만, 편향된 집중력이 통합된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동시에 문제 삼는 기능을 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의 목소리는 구성된 현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묻고 또 이 세계가 상실한 무엇인가에 끈질기게 집착하기도 하며 그렇게 공동의 세계가 재구성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이끈다. 어쩌면 시는 공동의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결속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떨어져 나온 날카로운 조각을 꼭 움켜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권의 시집3을 살펴보겠다. 이것들이 움켜쥔 조각들이 우리가 살아갈 공동세계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구성해내는지 파악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어떤 가치를 향해 한발 더 옮겨가야 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2. 밥의 감수성과 노동의 자기실현

 

김사이의 시집은 밥 먹는 일에 대해 자주 말한다. 그런데 시에 그려진 밥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마주하게 되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배고픔이다. 이는 시인이 밥 먹는 일을 단지 식욕을 채우는 일로 그리지 않아서일 텐데, 그렇다고 저 배고픔을 ‘존재론적 허기’ 같은 용어로 포장할 수도 없는 일이다. 김사이가 말하는 배고픔은 말 그대로 육체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감각이자 현실 속에 부재하는 어떤 가치로 인해 빚어진 고통이다. 그런데 저 처절한 감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로가 필요하다.

 

불행의 눈동자에 갇히니 삶이 대기발령이다

 

(…)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저항의 방식」 부분

 

불행의 눈동자에 갇혔다는 표현과 나를 걸어 잠갔다는 구절이 부정적 양태의 삶을 떠올리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불행한 눈동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시선이 있으며, 나를 걸어 잠그는 결단이 서야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상대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두 구절의 결합은 어떤 최후의 저항에 나서는 사람의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선언의 목소리는 여성이자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결합된 자리에서 퍼져 나온다. 시인은 거기에 어떤 분열을 더하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고 바로 그 정체성만으로 겪게 되는 싸움에 집중한다. 김사이는 분열을 과중화시켜 ‘나’를 알 듯 모를 듯한 존재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현실에 대해서도 그것의 깊이를 애써 찾기보다, 적대적인 두 힘의 공존이 객관적 현실이라는 인식으로 상대한다. 이러한 전략하에 형성된 명징하고 또렷한 주체성과 세계관은 현실 속에서 주체를 압박하고 상호갈등을 일으키는 세력과 그것의 술수에 대해 선 굵게 대응한다.

가령, 세상은 노동을 뒷골목의 일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애려 들지만 시인은 그것을 전면화한다(「탈 탈」). 김사이가 보기에는 현실의 뒷골목이 우리 삶의 전면부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늘 뒷골목으로 강제이주되는 것들에 주목한다. 노동의 현장뿐 아니라 노동하며 싸우는 사람만이 감각할 수 있는 통증까지도 어느새 이주의 목록에 포함된다. 이를 안타까워하며 시인은 자본과 갈등하는 싸움에서 얻은 통증만이 자본의 욕망으로 마비된 삶을 중단시킨다고 소리 높이기도 한다(「잠 못 드는 밤」). 또한 이 시인은 내면을 감싸는 분열적 언어 또한 현실의 실감을 둔화한다고 보는 듯하다. 시의 목소리가 그리는 통증의 언어는 그래서 때때로 아주 낯설게 직정적이다. 이 에두름 없는 직접적 발화가 가끔은 시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나, 그건 아마도 세상의 뒷골목 내지 세상의 밖으로 우수수 밀려나는 삶(「세상 밖으로 우수수」)들을 지켜보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조급증이 아닐까 싶다.

이제 밥 이야기를 할 때다.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노동을 말할 때도,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당하는 폭력을 말할 때도 김사이는 밥의 형상을 경유하고, 그 밥을 먹는 육체를 시적 전개의 매개로 활용한다. 불안정한 노동은 불안정한 밥으로, 남성의 폭력은 여성이 차린 밥상을 뒤엎는 남성의 모습으로, 가진 것 없는 자에 대한 세상의 괄시는 밥을 훔쳐 먹었다고 오해를 산 경험으로. 이를 두고 김사이 시인이 우리의 삶을 먹고사는 문제로만 한정한다고 오해해선 곤란하다. 삶이 곧 먹고사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히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된 문제이지 않던가. 우리 삶의 최소 조건인 저 밥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을 시는 이렇게 말한다.

 

밥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밥은 나누는 것이다

밥은 살아가는 시간을 나누는 것

밥은 삶의 감수성이다

밥은 태도다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만국의 밥

그것이 밥의 감수성이다

—「밥」 부분

 

저 군더더기 없는 말의 형식은 저 말을 군더더기처럼 여기는 세상의 압력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시의 명징한 말 저편에 그 명징한 말을 뒤집어버리는 사악하고 간교한 세상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밥을 빼앗고, 누군가와 동등하게 밥을 나누지 않으며, 누군가에게는 밥 대신 치욕만을 제공하는 세상, 누구나의 밥이 아니라 누군가만을 위한 밥을 만드는 세상에 대해 질문하는 이 시는 사실 저 밥의 자리에 ‘노동’을 넣어도 전체적인 구조가 크게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 역시 노동시다. 꼭 노동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시가 가장 애쓰고 또 아껴 그리는 형상이 노동의 실감과 가치를 상상하게 한다면 노동시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여기 또 하나의 노동시로 분류할 만한 작품이 있다. 전략적으로 불행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어둔 채 힘찬 저항을 행사하던 목소리가 잠시 고요한 아름다움에 젖어드는 순간을 묘사한다.

 

춤을 추는 어머니

처음 본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시간 속으로

붉게 붉게 물들어간다

 

하늘을 우러르는 굽은 팔놀림

두 다리는 부지런히 땅을 다지고

귀밑머리에 말간 땀방울이 맺혔다

고독이 찬찬히 하늘거린다

물멍울이 툭툭 터진 자리에

푸른 수액이 차오른다

 

(…)

 

어머니가 춤을 춘다

춤은 밤이 깊어가도록 멈추지 않는다

—「춤추는 어머니」 부분

 

이 작품을 노동 스스로가 자기실현을 이룬 시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여기에는 피로를 유발하고 누군가의 피눈물이 된 노동이 없다. 대신에 부지런한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활기로 이어지고 말간 땀방울이 소외나 고립과는 무관하게 아름다운 고독의 빛을 불러온다. 이 빛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감각과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아우라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노동의 의미 내지 뜻도 함께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김사이의 시세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시의 목소리가 매번 시에서 그려지는 사태와 관련하여 자신이 그 일에 무관한 사람인가를 강박적으로 묻는 데 있다. 그런데 「춤추는 어머니」에는 쓸쓸하게도 그것이 없다. 어머니의 춤이 매개한 저 아름다운 형상을 나와는 무관하거나 혹은 너무나 먼 모습으로만 느끼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시인은 어머니의 춤이 펼쳐내는 생생한 가치에 한없이 몰입하며 그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마음을 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밖으로 떠밀리는 노동의 가치를 다시 한번 붙잡고 새롭게 형상해보는 일이어서 의미가 깊다.

 

 

3. ‘창조적 협업’으로서의 상상과 연대

 

얼핏 보면 김해자의 『해자네 점집』은 모순적인 상황을 동시에 그린다. 가령 현시대를 독생대라고 표현하는 「독생대(獨生代) 인류세(人類世)」나 이웃과의 단절 속에 벌어진 비극을 그리는 「벽 너머 남자」는 고립의 심화가 이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시집은 이웃과 함께하며 이웃 속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날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런 모습 또한 공평하게 담아낸다(「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여기가 광화문이다」 등). 이 모순된 장면들을 이어놓고 보면 시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둘 중의 한쪽은 진실이고 나머지 한쪽은 허구일까. 혹은 어느 한쪽이 일반이고 또다른 한쪽은 예외일까. 흥미롭게도 「늙은 꼬마」에서 시인은 “살기 위해선 시 같은 거짓말과 허구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저 말은 표면적으로 시를 거짓말과 허구라고 여기며 그것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시를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개입하고 있다. 시인에게는 고립도 현실이고 그 황폐화된 현실을 뒤집는 연대의 모습 역시 현실이다. 그렇지만 뒤의 현실은 고립적 현실이 강요하는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 가치가 조금은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해자의 상상력은 절박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며 자주 현실의 메마름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어낸다. 이 시집에는 “눈물을 다 말리기엔 정의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염무웅 선생의 눈물」)는 말과, 또 “울고 있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아직”(「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같은 표현, 그리고 “고통 속에서 말은 완성되지 않는다”(「불구의 말」)는 구절이 등장한다. 세 표현의 공통점은 어떤 ‘여지’의 상상력이 작동한다는 점이 아닐까. 단순화하자면 김해자의 시는 어떤 황폐화된 상황에서도 남아 있는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한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하자면 불의와 슬픔과 고통이 한 사람의 삶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시인은 저 부정적 양태 뒤에 언제나 필히 더 오는 것이 있다고 믿으며 시에 아직 종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늘 자리하도록 애쓴다. 그러니까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남겨놓고 그 자리를 사건과 기다림이 채우는 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굳이 편을 가르자면 ‘억울하고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 쪽에 선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말하기에 염려스러운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기대하는 시기에 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온다’ ‘우는 사람은 아직 최악의 사태에 이르지 않았다’ ‘우리들의 언어는 고통을 통과해서 고통 이후에 비로소 빚어진다’와 같이 김해자의 시에서 유추할 수 있는 말들은 모두 억울하고 고달픈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고문을 빚어낼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해자라면 저 문장들이 희망고문과는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장을 구성하는 힘은 저 사람들의 외부에 초월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정확히 그들의 관계 안에서 빚어진다.

 

도리깨질하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

수월하다는 앞집 임명자 씨 말 듣고

저짝에서 하나 넘기고 이짝에서 하나 제치고

둘이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잘 넘어간다는

아랫집 맹대열 씨 말 듣고

쌀방아 보리방아 매기미질도

둘이서 셋이서 하면 재미나대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양승분 씨 밭에 가서

가만히 서 있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부분

 

김해자의 개방적 사고는 삶의 구체적 국면들을 독특하게 결합시킨다. 가령 이 시인에게 노동은 우정의 일이기도 하다.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시행의 연결처럼, 이 시에 그려진 노동은 앞집과 아랫집을, 임명자와 맹대열, 그리고 양승분이라는 이름을 외따로 두지 않고 긴밀한 관계 안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 관계가 여러 변화를 이끈다. 가령 시 속의 화자인 나는 다른 이들 곁에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경험을 하며, 동시에 이들 관계망 속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질적인 측면도 변화한다. 우정이 새로운 노동의 양식을 만들고, 다시 노동이 새롭게 우정의 관계를 확장시키는 저 유쾌한 장면들을 보라. 김해자의 시가 펼쳐놓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늘 ‘나’가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들’이 있다. 그래서 김해자가 시화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관계 속에서 새롭게 출현하고 형성되는 가치들이다. 이른바 관계들이 펼치는 ‘창조적 협업’은 저항의 현장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형성한다. 김해자에게 저항은 배우는 일이면서 또한 즐거운 일이다.

 

사드 들오게 해주먼 지하철도 주고 공항도 맹글어준다 카던데. 그라믄 참외밭에 뱅기 타고 가까? 주디를 꿰매부릴라, 그기 암까무군지 숫까마군지 알끼 머고? “참외 사 먹겠다 헛소리 말고 사드 배치 참회해라!”

 

떡도 주제 감빵도 주제 노래도 하제 머라 외치쌋제, 얼매나 재밌노. 집이 있으모 깜깜하니 혼차 테리비만 보고 심심한데 여그 나오니 얼매나 좋노. 야야 떡도 참말로 맛있대이, 살 값이 개사료 값만 모하다 아이가, 참말로 개누리라 카이.

—「성주군청 앞마당에서」 부분

 

유희와 신명을 동반한 저항이 유쾌하게 펼쳐지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저 입말의 성격이 저항의 언어를 의외의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단지 사투리로 쓰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자기 바깥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는 대화적 성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저 목소리와 충돌하거나 동의하는 주변의 목소리 또한 같은 현장에서 동시에 끓어넘쳤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른바 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욕망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출연하는 순간이 포착된 셈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목소리는 “깜깜하니 혼차 테리비만 보”는 상황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며, 집합적 주체화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집합적 주체 내부의 공간에 유희적 감각을 심어놓는 김해자의 시적 형식은 주목받을 만하다. 전복적 사고를 일삼는 유희적 감각은 집합적 주체 내부의 지성을 늘 날카롭게 긴장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이 집합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경험할 만한 불안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분노를 아교로 삼아 발생하는 집합적 주체화의 과정과 비교해보면 뚜렷이 알 수 있는 차이이다. 김해자의 시에도 사람들 속에서 움츠러들어 자기 안으로 도망가는 듯한 내용의 작품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시인이 쓰는 좋은 시의 대부분은 사람들 속에서 말문을 열고 사람들 속에서 활로를 얻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해자의 작품은 이른바 광장 태생의 시들로 좋은 표본이 될 만하다.

 

 

4. 응답의 윤리를 넘어서

 

눈앞에 드러난 현재는 우리에게 자신과 얽혀 있는 맥락을 순순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드러난 현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시선에 다른 렌즈를 끼워줄 필요를 느낀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어쩌면 저 렌즈를 발명하는 일과 가까울 것이다. 역사는 과거라는 렌즈를 투과해서만 초점이 잡히는 현재가 있다고 말하고 또 거꾸로 현재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발굴되는 과거의 형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설야의 시를 보면 저 렌즈에 대한 집착이 역사가의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날 정류장은 여인숙이 되었고

여인숙은 눈송이들이 되었다

 

돌멩이들은 아이들을 낳고 낳아

재가 되었다

 

먼 눈송이들은 기차가 되었고

너는 연기가 되었다

 

아무 이름도 되지 않았다

 

부르지 않았다

—「눈사람을 찾아서」 전문

 

이설야의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는 명명을 시도하는 시집이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 시인이 그려내는 사물과 풍경은 애초의 상태에서 벗어나 무수히 많은 것들이 되었지만 결국 “아무 이름도 되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는 표현은 그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말일 텐데, 시집에 그려진 풍경의 장소들을 둘러보면 그 욕망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방직공장과 보육원, 비릿한 냄새가 나는 다방과 썩은 물이 흐르는 하천 등의 장소가 환기하는 어느 변두리 도시의 모습에서 우리는 가난과 폭력 그리고 차별이나 착취의 흔적은 물론이거니와 저 자리를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쉬이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엄연한 삶의 터전이었던 장소들이 현실로 지칭되지 않는 상황은 그곳을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모욕이 될 것이다. 모욕감뿐이겠는가. 자신이 떠나온 자리가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여 수치라는 감정을 동반하기도 할 테니, 자신의 태생지를 굳이 드러내야 할까 주저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말해도 되겠다. 시인 역시도 저 비루한 풍경 속에서 빠져나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을 만하다. 그런데 시인은 그 일에 실패한다. 이설야의 시는 돌아보지 말라는 세상의 명령을 어기고 기어코 돌아본다. 왜일까. 모욕감과 수치심보다도 힘이 센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의 목소리를 대변해 말하자면, 그것은 시인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시에서 시인이 “아직도 자르다 만 귀가 남아 있다”(「어제 자르다 만 귀가 있다」)고 말할 때 그 귀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저 이름이 되지 못한 존재와 풍경의 소리를 듣고 있었던 귀이며, 또 한 시에서 “썩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꽁치통조림」) 말하며 ‘어려운 것은 생활’이라고 적었을 때, 시인에게 저 거친 생활의 터전은 썩지 않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세상은 저 과거를 현실에서 도려내려 했지만 그것은 이미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며 그곳을 지나온 사람을 불러 세우고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과거의 목소리에 붙들린 시의 목소리가 종국에 선택한 방법은 응답이다.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의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 속에서 배고픈 쥐들이 내 얼굴을 조금씩 갉아 먹었다. 쥐들의 이빨 자국이 지나간 내 얼굴이 날마다 종소리와 함께 시궁창 속으로 빠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버지 별명은 생쥐」 부분

 

이 시는 마치 유년의 시선이 현재를 향해 전하는 뒤늦은 항변처럼 읽힌다. 왜 아무도 이 비참한 모습에 응답하지 않았느냐고, 이 비참이 당신과는 완벽히 무관한 일이었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라는 구절은 무응답의 결과에 대한 낙담의 표현일까. 아니, 한편으로는 이제 그 늦은 말을 내가 걸겠다는 시인의 선언이 스며든 표현처럼도 읽힌다. 가난과 폭력으로 훼손된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모종의 책임감을 회피하고 침묵한 시선을 제공했던 자리에 시인은 자신을 세워놓는다. 그러자 드디어 저 사물과 풍경들은 응답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시선을 획득하게 되고, 소문처럼 떠돌기만 하던 사물과 풍경의 이야기가 언어적 관계망 속에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들은 현실적 맥락을 얻게 된다. 현실적 맥락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식이 가동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인식을 치욕과 수치를 이겨낸 떳떳하고 당당한 시선의 윤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시인은 시를 통해 불우했던 세상의 반경을 점진적으로 넓혀나가며 시에 그려진 훼손된 삶의 풍경들과 시선을 주고받는 응답을 수행한다. 그 결과 불우했던 삶의 장소에서 살아갔던 사람들, 가령 ‘엄마’ ‘이모’ ‘언니’들의 삶은 훼손된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되었어야 마땅했을지를 같이 떠올리게 된다.4 또한 묘사는 불우함의 차원에 집중된 듯도 보이지만 시인의 묘사 속에는 불우라는 표현으로 사로잡히지 않는, 그곳을 살아낸 사람들의 생활하는 힘이 담겨 있다. 「눈 내리는, 양키시장」의 “죽은 엄마가 가끔 항아리 속에서 울었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건조한 묘사를 찢고 나오는 비명 같은 ‘울음소리’들이 그것이다. 울음으로 종종 이미지화되는 저 힘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선을 초과하는 지점에 자리한다. 시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름 불리지 않은 존재와 풍경들을 말하지만, 저 힘의 자리에서 보자면 이름이 불리고 불리지 않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훼손당했으되 끝끝내 훼손당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동시에 남아 있다는 말인데, 이를 자주적 행위를 불러올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 이름 붙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존엄성이야말로 이설야의 시가 ‘명명하기의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최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꽃은 시들고

나비는 죽었다

 

내가 인생의 꽃등 하나 달려고

바삐 길을 가는 동안

사람들은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사랑한 순서대로

지는 꽃잎

나는 조등을 달까부다

—「조등(弔燈)」 전문

 

조등 아래 화자의 반성이 환하다. 이 반성이 현실의 외곽에 불을 밝히고 그곳의 삶을 끊임없이 현실 속으로 기입할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가 잊었던 혹은 잊으려 했던 현실의 주소지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 시는 그런 맥락에서 응답의 윤리를 그려내는 듯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이 묘하다. “먼저 사랑한 순서대로/지는 꽃잎”이라는 구절에는 앞선 연들의 전개와 달리 주어가 부재한다. 이 사랑은 ‘내’가 혹은 시가 응답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볼 만하다. 응답 이전에 이루어진 이 사건의 출현에 시의 목소리는 응답을 또 한번 주저하는 듯한 뉘앙스의 술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응답의 무효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울음소리’와 함께 생각해본다면, 그 울음과 저 사랑을 응축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변화와 관련한 좀더 근본적인 이미지의 출현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설야의 시는 응답의 윤리를 넘어 자신이 응답하는 삶과 장소의 기운을 어떻게 정치화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인지도 모르겠다.

 

 

5. 적대와 연대 그리고 응답 이후

 

김사이의 시쓰기는 자신의 현실적 좌표를 또렷하게 만드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 위해 그는 조화롭게 화합하는 시적 감각을 폐기하고, 분쟁하고 적대하는 시적 감각을 고집스럽게 유지한다. 이 날 선 언어는 외부로 한없이 확산되는 유연한 감각의 운동에도 별반 관심이 없다. 대신에 나의 삶에 압력을 가하는 상대들을 직시하고 그것과 갈등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를 최대한 협소하게 만들려 애쓴다. 그 협소한 자리가 실질적인 현실의 좌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언어가 그려내는 협애화된 삶의 공간에서 더 긴장하고 더 깊은 한숨을 내쉬게도 된다. 누군가는 김사이의 시를 읽고 자본과 노동의 대립구도가 뻔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고, 같은 맥락에서 폭력적 남성의 모습 또한 오래된 상징의 언어가 아닌지 물을 수도 있다. 일리있는 질문이고 의심이다. 하지만 대립구도의 상투성을 지적하기 이전에 그것의 실효성을 점검해볼 필요는 있다. 시인이 구성한 이 또렷한 시선은 적어도 무자비한 자본의 힘에 의해 현실의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또 세상 밖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존재와 가치를 문제 삼는 기능을 하며, 사회 변화의 속도에서 지체된 채 사회의 저층에서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는 남성중심의 문화를 확인시켜줌으로써 어디서 변화를 시작해야 할지 좀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만든다.

김해자의 시쓰기는 결합하는 실험이다. 이 시인은 노동과 우정을 결합하고, 저항과 유희를 결합한다. 자칫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결합이 김해자의 시에서는 자연스럽다.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늘 시적 결합의 시도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중심의 사유가 시에 새로운 가치를 형성하는 데 동력으로 작용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시가 형성되는 과정은 더 복잡할 것이다. 추측건대 저 사유의 원활한 가동에는 그가 공동의 문제와 결부된 현장에 긴밀하게 접속하고 반응하는 실천이 뒷받침할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우리 사회의 광장들이 생생하게 접속되어 있으며, 그 광장 위에 흘러들었던 말들의 흔적이 배어 있기도 하다. 현장의 역동적 기운 내지 운동감이 시 속에 작용해서일까. 시인의 상상력은 메마른 현실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 하지만 이미 오고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 역시 현실의 일부로 만드는 데 능하다. 결국 김해자의 시는 광장을 언어화하고 언어를 광장화하는 실험인 셈이다. 시인은 그렇게 광장과 시를 결합한다.

이설야의 시쓰기는 일종의 응답하기에 가깝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현실로 지칭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삶의 영역이 어떻게 훼손되어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독특하게도 이 묘사에는 감정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불우해 보였던 과거의 장소들을 마주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드러날 법한 슬픔 내지 환멸의 정서가 시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시인이 저 장소와 시간들을 감정으로 해소하는 대신에 그곳을 엄연한 현실의 맥락 속으로 들여놓는 데 집중해서일 것이다. 그곳을 현실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작업은 우리의 삶과 연결되고 또 연루되어 있는 훼손된 삶의 목소리에 응당 답하는 일이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일이다. 또한 이설야의 시는 흥미롭게도 응답 이후의 과제를 응답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기도 한다. 응답하는 시선에 앞서 그것을 초과해 생생하게 활동 중인 이미지들은 이설야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를 예감하게 한다.

세권의 시집을 읽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노동, 광장, 민중 등의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적대, 연대, 그리고 응답의 윤리 등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개념의 지층들을 시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리에서 좀더 활발히 논의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이들의 시적 모험이 우리 시대 공동의 세계를 향한 저 매개항들을 구체적 감각과 이미지로 발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우리 시의 성취이다. 이 진전이 형성하는 서사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고 비평하는 일은 인간다운 삶과 접속하는 분명한 계기가 될 것이다.

 

 

  1. 다양한 층위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 분석한 지난호 특집 ‘지금, 어떤 불평등인가’ 참조. 그중에서도 불평등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평등의 리얼리즘을 주제화한 황정아의 글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2.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정신분석적 용어에 빗대, 사회적 무대와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묘사한 바 있다. 인디고 연구소 기획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2012, 102면 참조.
  3. 김사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창비 2018), 김해자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 이설야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 2016).
  4. 「못, 자국」 같은 시의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서야/여자의 마맛자국이 보였다/못 자국 같은 생(生)의 숨구멍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