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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위풍당당한 언어 혹은 싸움의 자세

성석제 장편 『위풍당당』

 

 

정혜경 鄭惠瓊

문학평론가. 순천향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매혹과 곤혹』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현대문학의 서사와 서술』 등이 있음. kornovel21@hanmail.net

 

 

2031성석제(成碩濟)의 장편 『위풍당당』(문학동네 2012)은 우리가 잊고 있던 단어 하나를 유쾌하게 상기시킨다. ‘위풍당당’. 그래, 그런 감동적인 단어가 있었다. ‘나꼼수’의 ‘쫄지 마’ 프로젝트가 무기력에 빠져 있던 우리를 번쩍 정신 들게 하고 기운나게 했다면,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다음에 이어질 우리의 자세에 대해 신명나게 이야기한다.

사실 성석제의 개성적인 ‘위풍당당’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야기꾼’과 ‘웃음’을 들고 등장했던 그의 작가적 자세가 줄곧 그러했고, 또 그의 인물들이 그랬다. 전작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가출의 대선배”이자 “상소에 일가견이 있었”던 시골 선비 ‘채동구’의 “늠름하고도 도도”했던 파란만장 일대기를 떠올려봐도 금방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위풍당당』 역시 굽이굽이 천연덕스러운 입담과 삼천포로 빠지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오길 거듭하는 이야기의 무수한 곁가지들이 그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뚜렷하게 확인시켜준다.

『위풍당당』은 두메산골 강마을 사람들과 일명 ‘전국구 건달’ 조폭들의 한바탕 싸움 이야기이다. 소동 모티프라면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창비 2002)과의 유사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에서 계원과 깡패의 싸움 소동이 결과적으로 두 집단 모두 어리석고 속물적이어서 우스꽝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보여줬다면, 이번 장편의 경우 강마을 사람들의 희생양적 내력을 부각하여 윤리적인 무게중심을 선택함으로써 이 싸움이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우연한 계기로 작동하게끔 한다. 원래 드라마 세트장이었다가 버려진 “마을 같지 않은 마을” “집 같지 않은 집”으로 흘러들어와 삶을 이어가게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려진 존재라는 것이다. 버려진 그곳에서 작가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우연한 사고 때문에 깡패들이 마을을 ‘접수’하러 온 위기상황에서 두메산골의 지형과 자원을 활용한 고추 폭탄, 똥 폭탄, 벌집 폭탄 등으로 강마을 사람들이 깡패들을 물리치게 되는 좌충우돌 과정이 이 소설의 서사다. 삶의 끝으로 내몰려 도망쳐온 사람들, 세상의 중심질서와는 거리가 먼 노인, 장애인, 미성년, 여자들로부터 이 시대 타자들의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동시대에 대한 자세와 장편을 대하는 고민을 보여준다. 엄숙주의를 전복하는 행위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1990년대와 달리, 지금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하는 형국이고 그 압도적인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하는 경쾌한 이야기들이 만연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석제는 장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기본덕목, 즉 세계와 자아의 대결구도 혹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다시 확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마을의 여산, 소희, 영필, 이령, 새미, 준호 들이 예상치 못한 위기상황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연대하면서 세상에 ‘맞서는’ 의식을 체득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의 대결의식은 이른바 ‘강 정비사업’으로 짐작되는 장면, 즉 “강의 모든 것을 때려엎을 기계 군단”이 강 상류에 출현하는 국면에까지 확장된다. “나는 또 싸운다. 급하다. (…) 저 숭악하고 못생기고 개돼지만도 못한 불한당 또라이 쫄따구 빙신 쪼다 늑대 호랑말코들하고”(221면), “그놈들 잘못, 가르쳐줌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침다. 우리는 세금 낸 적 없지만 저쪽은 세금 가지고 맘대로 쓴다? (…) 우리 가족이 가는 데는 어디나 우리 무대가 됨다”(226~27면)에서 텁석부리 여산 등이 보여주는 분노의 표출은 질펀하고 어눌하지만 ‘위풍당당’하다.

한편 성석제의 선택은 이야기를 이루는 다른 축의 질감을 내어놓음으로써 이뤄진 것이며, 이는 『위풍당당』에서 예전만큼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른 축이란 건달들의 이야기와 영필 등의 전사(前史)를 뜻한다. 건달들의 이야기는 실감은 있으되 강마을 사람들의 타자성을 부각시키거나 여산 등이 ‘기계군단’이라는 더 완강한 적대세력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징검다리 기능에 머물고 있다. 또 강마을로 떠내려오기 전의 영필, 소희, 이령, 새미와 준호의 내력은 구체적인 실감 없이 요약됨으로써 비극성만이 강조되어 타자들의 연대에 계기가 되는 데 그친다. 그 대신 선량한 타자들의 공동체가 강조되는데, 이는 작가의 열망 혹은 일종의 ‘선취(先取)된 전망’처럼 보인다. 수렵채집시대의 남성적 감각을 가진 여산과 농경시대의 대모신 같은 소희를 선두로 하여 우뚝 선 대안공동체 앞에서 웃음이 터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조폭과는 차원이 다른 ‘기계군단’을 상대로 싸우는 한(이는 결말에서 여산의 말로만 예고된다), 대상을 포용하는 해학적 웃음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성석제의 문학적 선택이 완성되려면 웃음의 질적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