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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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중편소설 『어제는 봄』 등이 있음.

alfmrlal@naver.com

 

 

 

장편연재 3

마주

 

 

스텐 냄비의 바닥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냄비 바닥에 어른거리는 미네랄 얼룩을 보기 위해서. 내 손님 중 한명은 그걸 무지개 얼룩이라고 불렀다. 물기가 마른 빈 냄비를 기울여보면 그 안에서 정말로 무지개가 형태를 바꾸면서 얼룩지는 게 보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뒤로는 공방에 있을 때도 종종 스텐 비커를 창가로 가져가 빛에 이리저리 기울여보곤 했다.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또다른 어떤 손님은 싱싱한 버섯이 품고 있는 색에 대해 얘기했다. 느타리버섯의 회청색 갓에서 푸른빛이 언뜻 비칠 때에 대해서. 비둘기색을 싫어하거나 버섯을 싫어하는 사람도 비둘기빛이 나는 버섯은 싫어할 수가 없다고, 그건 어떤 꽃보다도 특별한 색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 손님은 어쩌면 별주씨나 별은씨나 별선씨 중에 한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봄에 수미와 함께 왔던 나의 취미반 수강생들.

별선씨는 비누에 스누피 도장 찍는 걸 좋아했다. 별주씨는 내가 스타벅스 아이스 음료 컵을 붓 헹굼통으로 쓰는 걸 보고 올 때마다 재활용할 투명 컵들을 들고 왔다. 별은씨가 자몽청을 담아 왔던 보르미올리 유리병에는 캔들을 만들어두었다. 자몽향이 은은히 남아 있던 병에 흰 소이왁스를 채우고 얇은 나무 심지를 심었다.

어떤 모양의 용기에도 캔들을 만들 수 있었다. 머그잔, 와인잔, 고블릿, 종지, 사발, 꽃병. 어느 날 꿈에서 나는 26센티미터 지름의 통5중 스텐 냄비에 왁스를 가득 부어 초를 만들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량의 왁스를 태워 올릴 심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꿈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기세라면 만조 아줌마의 항아리에도 초를 만들 수 있겠다고. 항아리 크기의 초를 태울 만큼 큰 심지를 찾아 방산시장을 누비는가 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왁스가 다 타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지를 계산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름에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멘톨비누를 만들거나 모기 기피 오일을 넣은 석고방향제를 만들었다. 한낮에 블라인드를 반쯤 내리고 공방에 앉아 있으면 건물 밖에서 배달 오토바이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구 쪽 상가 복도는 어두웠고 창가 쪽 번화가엔 늘 크고 작은 소음들이 깔려 있었다. 창가에 말려둔 몰드를 걷어 오다 기정로를 내려다보면 맞은편 상가건물 1층의 휴대폰 대리점 앞에서 행사 입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려 풍경을 차단하고 실내로 몸을 돌리면 기정로의 소리들은 잦아들고 오래 고여 있던 공방의 소리들이 살아났다.

가장 먼저 들리는 건 손소독제를 짜 넣고서 몇몇이 동시에 손바닥을 비비던 소리였다. 누군가 테이블에서 일어나려고 의자를 빼는 소리. 유리막대가 종이컵 바닥을 긁는 소리. 비누 커팅기가 움직이는 소리. 심지에 불을 붙이려고 캔들라이터를 켜는 딱, 소리. 화분 모양의 세라믹 용기에 선인장 캔들을 만들 때 나는 수강생들한테 이 말을 꼭 했다. 선인장 캔들은 용기 빼고 다 태울 수 있어요. 작게 올라가 있는 선인장은 물론이고요, 화분 위에 깔려 있는 이 모래알갱이도 다 왁스예요. 전부 태울 수 있어요.

수강생들이 캔들을 다 완성하면 포토존으로 가기 전 나는 마스킹테이프가 들어 있는 트레이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동네의 문구점을 방문할 때마다 골라 모은 것들이라 트레이를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나올 때가 있었다. 태우지 않고 방향제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놓아둘 사람들한테는 캔들 심지 끝에 마스킹테이프를 깃발처럼 붙여주는 게 마지막 순서였다. 나는 수강생들한테 묻곤 했다.

“마스킹테이프 붙여드릴까요?”

취미반 수업 중에 내가 그녀들한테도 깃발을 만들어줄지 물었나는 모르겠다. 기억에 이런 장면이 남아 있으니 어쩌면 물었을 것이다. 별주씨와 별선씨와 별은씨가 트레이 위로 상체를 숙이고 마스킹테이프를 고르는.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수미가 나리샘, 하면서 나한테로 걸어온다.

“나리샘.”

수미가 말한다.

“왜 나한테는 마스킹테이프 안 물어보는데?”

그러면서 수미가 나를 막 쫓아오는 것이다.

“응? 왜 내 거엔 안 붙여주는데?”

나는 테이블을 한바퀴 돌아 도망을 가는데 참지를 못한다. 참지 못하고 무언가를 쏟거나 웃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어쩌면 창문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길 너머 맞은편 건물의 3층엔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눈꽃빙수를 먹던 빙수 까페가 있었다. 공방 창문을 열면 같은 눈높이로 까페의 창가 테이블이 건너다보였다. 아마도 은채가 3학년, 서하가 4학년 즈음이었을 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코스가 다이소와 빙수 까페였다. 수미와 나는 아이들을 다이소에 풀어놓고 각자 볼일을 보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을 근처의 빙수 까페로 데리고 갔다. 넷이 같이 빙수를 먹고, 한낮의 열기가 좀 수그러들면 분수대가 있는 중앙공원을 지나 집으로 걸어오는 게 아이와 둘이 있게 되는 주말에 수미와 내가 오후의 몇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다행히 은채와 서하는 성향이 안 맞는 편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같은 학년이 아닌 것이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수미와 나에게도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준 점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외동인 은채가 서하를 언니 언니 하고 부르는 것이, 서하가 은채와 키득거리고 웃는 것이, 그러다가도 빙수떡을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쟁탈전을 하는 것이 좋았다.

홈공방을 하고 있던 내 집에 수미가 서하를 처음 보낸 건 아이들이 그보다 서너살 더 어렸을 때였다. 은채가 아직 유치원생이고 서하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초등학교 저학년은 유치원보다 하교 시간이 훨씬 빨랐고 부모가 둘 다 일을 하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돌봄교실로 가거나 학원과 학습지 교습센터를 돌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학원과 학원 사이에 시간이 빌 때, 아이가 학원에서 또다른 학원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안타까울 때 엄마들은 내 공방으로 아이들을 보냈다. 그렇게 초등 저학년에서 중학년 사이의 아이들이 이 학원과 저 학원 사이에 내 집에 들러 캔들을 만들거나 석고에 색칠을 하다 갔다. 서하도 처음엔 그렇게 온 아이들 중 하나였다.

수미와 말을 좀더 많이 섞게 된 건 수미가 그때 은채가 다니던 미술학원의 차량 기사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수미도 나도 일 속에서 서로의 아이를 일정 시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하가 공방에 오래 남아 있게 되는 날은 은채와 함께 놀이터로 내보내곤 했는데 수업이 비는 짬에 놀이터로 나가보면 둘은 늘 그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늦은 오후 놀이터의 그네는 특히 경쟁률이 높았다. 초등 고학년생 아이 둘이 그네에 앉아 줄을 비비 꼬면서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꼬마애들이 다음 차례를 잡기 위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고학년생들은 엄마와 함께 나와 있는 애들한테는 적당선에서 양보를 했지만 아이들끼리만 나와 있으면 그네를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은채한테 말하곤 했다.

“은채야, 언니들이 그네를 타고 있으면 일단 미끄럼틀이나 시소를 타면서 놀아. 그러다 자리가 나면 후다닥 달려가서 잡으면 되지.”

하지만 은채는 그러지 않았다. 고학년생 애들이 그네에서 물러날 때까지 옆에서 턱을 괴고 기다렸다. 언니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바로 양보하지 않으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할 만한 그런 눈망울로 말이다. 은채는 흔히 말하는 외탁이었다. 오종수보다는 나를 빼다 박았다고 할 수 있었다. 얼굴부터 체형까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오은채가 이나리 딸이라는 걸 그냥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은채의 눈망울을 슬쩍슬쩍 쳐다보면서도 자리를 고수하던 고학년 애들은 서하가 은채 옆으로 걸어와 같이 쳐다보기 시작하면 조금씩 흔들렸다. 그중 마음이 약한 애가 “야, 가자”라고 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서하는 얼핏 보면 수미와도 수미의 남편과도 크게 닮지 않았는데, 여덟살인 그때도 입을 꼭 다물고 눈을 정면으로 뜨면 굉장히 다부져 보이는 데가 있었다.

은채는 턱을 괴고, 서하는 팔짱을 끼고 그네에 앉아 있는 고학년 언니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고학년 애들이 실제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저만치에서 내가 은채야! 서하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그네가 드디어 자기들 차지가 됐을 때의 아이들 표정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은채와 서하는 놀이터에서 놀지 않는다. 다이소보다는 아마도 올리브영을 더 좋아하는 것 같고. 하지만 나는 은채와 서하가 각각 열세살, 열네살이 된 뒤에도 그 아이들의 일곱살, 여덟살 모습이 남아 있는 길들을 매일 지나다녔다.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산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일상적으로 마주치며 지나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은채를 유모차에 태우고 내가 매일 산책하던 길을 지나 이제 은채는 학원에 간다. 은채가 처음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던 축구장을 지나 나는 공방에 가고. 이젠 은채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어느 벤치에서, 다섯살의 은채가 나를 오래 기다린 적이 있다. 나는 여전히 그 벤치 앞을 일상적으로 지나다니지만 순간적으로 촉발된 작은 감정 하나로 그 앞에서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 은채의 구름빵 헬륨 풍선이 날아가 걸려버렸던 맞은편 동 옥상을 보다가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는 순간에 눈물을 쏟아버릴 수도 있다. 한밤중에 맨발로 뛰쳐나가 옥상 문을 두드릴 수도 있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몇년 후 맞은편 건물의 3층으로 매일 드나들게 될 줄 모르는 채로 앉아 눈꽃빙수를 먹는 것이었다. 안쪽에 무엇을 넣어놓게 될지 모르는 채로 공간을 가르는 커튼을 치는 것이었다. 그 동네로 다시 돌아올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채로 하루를 건너는 것이기도 했다.

별주씨와 별은씨와 별선씨가 마스킹테이프를 고르던 때는 봄이었지만 이제는 여름이다. 맞은편 빙수 까페의 폴딩 창문이 군데군데 접힌 채로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에어컨을 켠 실내에서 집단감염이 생긴 뒤로 냉방 중이어도 창문을 열어놓는 곳이 많았다.

나는 공방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몇년 전과 키가 다르지 않은 가로수를 쳐다보았다. 빙수 까페의 창가 테이블에 앉아 빙수 하나를 같이 먹고 있는 아이와 여자를 건너다보았고, 그러다 중얼거렸다.

“매미가 들어갔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방금 매미가 들어갔는데.”

내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창턱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 엄마, 매미가 들어왔어! 매미! 여자가 두리번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이어 직원이 총채를 들고 창가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총채로 창턱을 살살 쓸어가던 직원이 폴딩 창문의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창문이 더 열렸다. 아이는 시합을 응원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방방 뛰고 거리에선 입간판 사이에 서 있던 휴대폰 대리점 직원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숨을 내쉬며 다시 중얼거렸다.

“매미가 나갔어.”

테이블에 다시 앉아 빙수를 먹는 아이와 여자를 보다가 나는 창에서 몸을 돌렸다. 햇빛에 익었던 눈 때문인지 실내의 사물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수미의 초 심지에 끝까지 마스킹테이프를 붙여주지 않았다.

 

*

 

공방을 상가로 이전하면서 새로 생긴 것 중 하나가 나리공방의 로고였다. 동글동글한 서체의 ‘나리공방’이라는 상호 위로 간단한 그림이 스케치돼 있었는데 꽁지머리의 여자가 초 하나를 들고 탁자에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노란 니트에 회청색 앞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는 이마에 마치 고양이 수염처럼 앞머리 네가닥이 내려와 있었는데, 그건 누가 봐도 이나리를 그린 것이었다. 나리공방의 그 나리. 물론 내 앞머리는 네가닥보다는 좀 많지만 약간 좁은 이마에 처진 반달눈, 이름만 불러도 강아지처럼 달려올 것 같은 표정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었다. 간단한 선 몇개로 누가 봐도 이나리인 인상을 담아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상가 이전 준비가 한창이던 그해 2월이었다. 은채 생일파티가 끝나고 며칠 뒤였을 것이다.

‘이모, 대박 나세요.’

그 말과 함께 서하가 카톡으로 이미지를 하나 보내왔다. 보자마자 나는 그걸 나리공방의 로고로 삼고 싶다고 서하한테 연락을 했고 지금 서하의 그림은 나리공방의 SNS와 판매 페이지뿐 아니라 공방의 포장박스와 안내엽서에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림에 깨알같이 담긴 디테일들을 보면서 나리공방을 오갔던 서하의 초등학생 시절과 그때 서하에게 남았을 인상들을 짐작해보곤 했다. 그림 속에서 나리는 올리브색 크레용 캔들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엔 미니 전자저울과 쓰러진 종이컵, 엎질러진 오일이 그려져 있었고(아이들 수업 땐 툭하면 뭔가가 엎질러지곤 했다) 상체 주위론 꽃 이파리 몇개가 둥글게 흩뿌려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탕이었다(아이들이 오는 오후 시간에 나는 늘 사탕 바구니를 꺼내놓았다). 아이들이 선생님, 귀걸이 너무 예뻐요, 하면 나는 며칠 동안 그 귀걸이만 했고 선생님, 옷 너무 예뻐요, 하면 또 그 옷만 내리 입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중단발을 늘 하나로 묶고서 수업을 했고 말을 하다 숨이 차면 후, 하고 앞머리로 입김을 뿜어 올리는 약간은 연극적인 버릇이 있었다.

무심히 그렸을 수도 있는 그림의 디테일들이 그래서인지 내겐 하나하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서하는 아마도 노란 니트를 입고 있는 나를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올리브색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것이고. 하지만 내가 서하에게 사과 얘기를 한 적이 있었을까?

그림에서 가장 내 눈을 끈 것은 ‘나리공방’이라는 글자 옆에 그려진 사과 한알이었다. 그것은 새싹이나 하트처럼 흔히 쓰이는 이미지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서하가 거기에 새싹도 하트도 아닌, 하다못해 촛불 이미지도 아닌 사과를 그려넣은 것에 대해서, 올리브색 캔들이나 회청색 앞치마나 네가닥의 앞머리 못지않게 왠지 그게 나리가 나리임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 같다는 생각을, 여름내 공방에 혼자 나와 앉아서 하고는 했던 것이다.

 

*

 

포장박스의 로고를 보다 오랜만에 서하의 카톡 프로필을 열어보았다. 프로필 창 상단에 디데이가 몇개 설정돼 있었다.

‘내가 태어난 지 D+4626. 방탄소년단 데뷔 D+2580. 아미 된 지 D+1215.’

그 숫자들을 보고 있는데 오래전 과수원에서 만조 아줌마가 옆 사다리의 누군가한테 하던 말이 떠올랐다.

“백년을 다 살아야 삼만육천일이야.”

그러곤 한바탕 웃음소리.

 

다행히 나는 나의 디데이를 세고 싶은 마음은 없다.

 

*

 

그림이 아닌 사진도 있다. 사실 사진이 대부분이다.

수강생들이 작품을 만들고 있으면 나는 한두 컷씩 그 모습을 찍었다가 각자에게 전송해주곤 했는데 단골들 중에는 가끔 나를 찍은 사진을 답례처럼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대개 수강생들의 작품을 포토존에 놓고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해 있거나 앞치마를 입고 계산기를 든 채 비누화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비누 대패를 들고 있었고 어떤 날은 가성소다를 섞기 위해 창문 아래에 쭈그려 앉아 있기도 했다.

수미가 찍어준 사진도 있다.

역시나 중단발을 짧게 묶고, 나는 스포이트를 손에 든 채 테이블 위로 상체를 숙이고 있다. 조색 테스트를 위해 유산지 위로 딱 한방울, 왁스를 떨궈 보려는 참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의 GPS 경위도 좌푯값은 북위 37.652도, 동경 126.777도. 그곳은 기정시 349번길 25, 내가 십년 넘게 살아온 동네의 어느 한곳이다. 한방울을 머금은 스포이트에서 손힘을 풀기 직전인 그 사진은, 얼핏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조마조마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나는 그즈음 공방에 혼자 나와서 했다.

사진 안엔 이런 것들도 있다.

앞치마와 팔토시가 걸린 행어.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

별 모양의 티라이트 초.

출입문에 달아놓은 자개 모빌.

가림막용 광목 커튼.

커튼 위엔 그해 봄 ‘탈-홈공방’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수미가 나한테 주었던 햇살장미가 잘 마른 채 걸려 있다.

그리고 커튼 뒤에는, 비누 건조대와 함께 크고 작은 수납함들이 놓여 있다. 종류와 크기별로 사 모아놓은 심지와 왁스함. 포장끈과 시약통. 비즈와 보석알. 시나몬스틱과 석고가루. 글리세린.

그중 하나의 함엔 비누 거품망과 함께 자투리 비누들이 모여 있다. 그 비누들의 이름은 모유비누. 집에서 상가로 나오면서 그대로 갖고 나온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함을 열어볼 때마다 가장 먼저 불려오는 것은 여름이다. 홈공방이 시작되기 전의 어떤 여름.

은채는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젖먹이고 나는 은채와 비슷한 개월수의 아기를 안고 있는 어떤 여자 두명과 함께 누군가의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저층이라 거실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는데 언뜻 봐도 그것은 이파리가 무성한 한여름 나무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복도식 아파트의 끝집이라 출입문도 활짝 열려 있다. 유모차 세대를 현관과 문 앞과 복도까지 줄을 지어 놓아둔 채 여자들은 말한다. 문을 열어놓을 수 있어서 좋다고. 자연 바람이 제일이라고.

여자들은 어쨌든 아기와 함께 하루를 보내야 하고, 오후의 몇시간을 같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이 하루를 조금이라도 금방 가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한 참이다. 여름 내복을 입은 아기들을 놀이매트 위에 풀어놓았다가 점보 의자에 앉혀 무언가를 먹이고, 누군가는 매트 옆에 놓아둔 노트북 앞으로 가 기저귀 발진크림을 검색한다. 출출해지면 피자 한판을 시켜 먹고, 그러다 각자 때가 되면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들은 궁금해진다. 다른 아기에게 젖을 물려도 그애가 내 젖을 먹을지, 아니면 안 먹겠다고 고개를 돌릴지. 그러니까 아기들은 자기 엄마의 모유 맛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크게 상관이 없는 건지, 그게 너무 궁금해졌던 것이다.

한번 궁금증이 일자 여자들은 참을 수가 없어져서 당장 시험해보기로 한다. 둘러앉아서 다른 아기들에게 차례로 젖을 물려보기로 한 것이다. 세 아기가 다 같은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아기마다 다를까? 세 여자의 의견은 모두 다르고, 그래서 발진크림을 걸고 내기를 한다.

그러고는 그날 오후에 정말로 실행을 해본다.

 

*

 

결과가 어땠는지는 왠지 아직 말하고 싶지 않다.

그녀들은 아이가 유치원생이 되기 전에 모두 이 동네를 떠났고 나도 평수를 조금 넓혀 옆 단지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이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우리가 서로의 아기한테 젖을 물려본 몇개월 뒤, 그녀들 각자의 이름이 적힌 유축 모유 한팩씩이 내 집에 와 있었다. 나는 주문해두었던 비누베이스를 녹이고 거기에 모유를 섞은 뒤 이것이 정말 비누가 될 것인지 궁금해하며 레시피에 적힌 대로 비누액을 젓고 섞고 붓고 굳혔다. 몰드에서 빼내 적당한 크기로 자르자 그것은 정말로 비누같이 보였다. 각자의 이름을 적어 그녀들한테 건네자 다음 날 바로 반응이 왔다.

‘이거 진짜 쫀쫀해!’

아이의 목욕비누로는 물론이고, 폼클렌징보다도 훨씬 촉촉해 여자들은 세안용으로도 모유비누를 많이 썼다. 아기의 피부가 안 좋다는 여자들한테는 다른 오일 대신 은채가 피부과에서도 처방을 받았던 달맞이꽃종자유를 첨가해 비누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만들어 썼을 때 은채 아토피에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수유 중인 여자들이 냉동 유축팩을 들고 내 집으로 오기 시작했다. 모유비누는 자기 몸에서 모유가 나올 때만 만들어 쓸 수 있는 비누였다. 쓰고 싶다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만 만들어 쓸 수 있는 비누인 것이다.

하지만 내 몸에서 모유가 안 나온 지 십년이 넘었어도 나는 언제든 모유비누를 쓸 수 있었다. 여자들이 모유를 들고 와 만들고 간 비누 자투리를 모아 세수를 하고 있으면 오종수는 그런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

“자기 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남의 몸에서 나온 걸로 어떻게 몸을 씻어? 그게 가능해?”

나는 가능했다. 생각보다 비위가 좋았나보았다.

공방에 오는 여자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의 모유로 만든 비누에 대한 호불호는 많이 나뉘는 편이었다. 잘게 부스러진 것들은 주로 내가 모아서 썼고 비누를 크기대로 자른 뒤 남은 것들은 소포장을 해 수강생들한테 건네곤 했는데, 어떤 여자들은 이 귀한 걸 줘서 너무 고맙다며 좋아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로 사양했다. 수미는 어떤 편이었냐 하면 기겁이나 질색까지는 아니어도 찝찝하다는 걸 굳이 감추지 않았다.

나는 곤충을 싫어하는 친구의 눈앞에 곤충을 흔드는 아이처럼 그런 수미한테 모유비누를 끈질기게 권했다. 그러다 권유를 멈추게 된 날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거품망에 넣은 자투리 모유비누로 거품을 잔뜩 낸 뒤 세안을 한 참이었다. 보습, 탄력, 재생, 진정…… 마스크팩에 쓰이던 문구를 다 집어넣은 것처럼 피부가 뭔가로 차오르는 느낌이어서 나는 좀 들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아직 홈공방 중이던 내 집의 거실이었고 은채와 서하가 놀이터에서 곧 돌아올 참인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반장난처럼 수미한테 또 비누 얘기를 꺼내다가 말했다.

“언니 같은 건성 피부에는 말이야,”

그러면서 무심코 수미의 볼로 손등을 가져갔다. 그때였을 것이다. 내 손등이 수미의 볼에 아주 잠깐 닿았을 때. 그때 수미가 순간적으로 보였던 반응을 나는 그후로도 오래 기억했다.

눈앞에서 손등을 탁 쳐내거나 하지 말라고 소리 내 말했다면 못 알아챌 수도 있었을까.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혀와 살갗으로 맛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살아 있는 것들, 살아 있으면서 아름다운 것들, 누군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 의논이 아닌 대화를 하는 것, 대등한 존재와 눈동자를 맞추는 것, 자잘한 오감에 나를 맡기는 것……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그러니까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을 더는 못 견딜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누군가를 죽이러 출발하게 될 수도 있다.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두렵고 피곤해서, ‘그냥 산다’. ‘이렇게 살다 죽겠지’ 생각하면서. ‘사는 낙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

 

*

 

그러니까 그 여름에 나는 어떤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은채와 서하가 놀이터에서 곧 돌아올 참이던 몇해 전 저녁, 홈공방 중이던 내 집 거실에서 수미와 잠깐 닿았던 때에 대해서. 내 손을 쳐내지도, 몸을 뒤로 빼거나 얼굴을 돌리지도 않은 채 그냥 서 있었지만 거부와 경계가 분명했던 수미의 눈빛, 수미의 호흡에 대해서.

수미는 어쩌면 그때 직감적으로 알아챘는지도 몰랐다. 뜻하지 않게 촉발된 자극으로 도미노 조각 하나가 넘어져버리면 자신이 눈을 감은 채 세상으로 돌진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수미와 알고 지내온 지난 칠년 정도의 시간을 떠올리면 그중 반 넘게 이런 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언니! 하고 수미를 부르면서 수미 쪽으로 반쯤 몸을 튼다. 수미는 대답도 하고 나와 얘기도 하지만 몸을 틀거나 눈을 보지 않는다. 마치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처럼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채 대답을 하고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게 마치 자신이 오랫동안 행해온 바깥과의 상호작용 패턴인 것처럼.

그 건조함과 차단감의 강도만큼, 무언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차라리 화를 내는 표정을 짓기도 했던 그 세월만큼, 감각 하나가 열려버린 뒤의 수미는 앞도 뒤도 안 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직행하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수미가 무언가를 더는 견디지 않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나도 내가 있는 곳을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치워두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그만큼 수미와 서하는 나와 은채의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수미가 스포이트를 든 내 모습에서 조마조마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나 또한 그날 내 손목에 와닿던 수미의 호흡에서 불안을 느꼈다. 그뒤로 다시는 장난으로라도 수미의 신체에 나를 닿게 하지 않았다. 점선 대신 실선을 그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내게 실선과 점선에 대해 알려준 것은 수미였다.

면허를 따고 별도로 운전 연수를 받는 중에도 머리에 넣어두지 않았던 그 단순한 규칙, 점선이면 차선을 바꿔도 되지만 실선이면 차선을 바꾸면 안 된다, 점선은 넘어가도 되는 선이지만 실선은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이다, 운전을 몇년 하고도 주차가 늘지 않던 내게 주차 연수를 해주면서 수미는 그 규칙에 대해 말해주었다. 주말 이른 아침이었고 수미는 내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가 운전에 대해서 알려주는 말이라면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수미는 몇시간 동안 내 운전 습관을 점검하며 주차 연습을 시켜주었고 막바지엔 조수석에 머리를 기대며 약간 한숨을 쉬었다.

“우리 나리.”

그러곤 말했다.

“감도 없고, 겁도 없고.”

 

*

 

이것은 내 현생 때의 일이다.

감도 없고 겁도 없는 내가 감도 없고 겁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마을에 살던 때의 이야기다.

그이는 내가 현생 때 만난 사람.

기다란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매콤한 멸치김밥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쌀 수 있는 사람이고

중학생 때까지 학교 대표 탁구선수였던 사람이다.

나와는 아직 오타를 트지 않은 사이.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 때마저 ‘네’를 ‘sp’로 보내는 일 따위는 없었다.

독하고 달콤한 것들, 달콤하고 차가운 것들을 좋아한다.

브랜디와 탄산수. 라임과 얼음.

그리고 겨울.

그때 너는 내게 얼음 트래킹을 하자고 했다.

내가 너를 찾아 북쪽의 어느 마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언 강 위를 걷고 있었다.

너는 1990년에 첫눈이 얼마나 극적으로 왔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그로부터 삼십년 뒤의 겨울에 얼음 위를 걷게 될 사람.

세상에서 가장 긴 겨울, 그 겨울 속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너에게 호수에 가자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짧았던 가을에, 그 겨울이 오기 전에,

그래서 우리는 양조장이 있는 과수원에 갔다.

하지만 아직은 가을도 겨울도 오기 전이다.

여름이다.

객담이 균 배양실에 들어가 있고

장기 입원자의 PCR 검사가 계속 양성으로 나오는 여름.

저녁을 먹은 사람들이 공원으로 산책을 나오는 여름.

 

*

 

“넌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구나.”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던 한겨울 한낮의 식당에서 당신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여름이다.

 

*

 

오래전 내게 여름은 예초기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었다.

날이 더워지고 사과밭에 잡초가 무성히 올라오기 시작하면 창고에 들어 있던 예초기가 밖으로 나왔다. 과수원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새벽같이 예초기를 들고 나가 풀 깎는 작업을 했고 해가 뜨거운 한낮엔 잠시 쉬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다시 밭에 나가 적과 작업을 했다.

이른 아침 사과밭에 나가면 예초기가 훑고 간 자리마다 잘려나간 풀들이 수북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밭엔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예초기가 막 풀을 베어냈을 때의 그 냄새가 내겐 곧 여름을 알리는 냄새였다.

여름은 홍로가 아직 파랄 때였고 오후 세시의 새참이 잠깐 뜸해지는 때였다. 마을 여자들 중 가장 덩치가 좋은 엄마가 사과밭 한쪽에서 열리는 가지와 깻잎 같은 것들을 미워하는 때.

오이와 호박과 상추와 고추로 이어지는 그 야채들은 모두 할머니가 심은 것이었는데 사과밭 한쪽의 밭에서 자잘하게 크고 있던 그것들을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두달 전까지도 직접 돌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오이와 호박과 가지들은 때가 되면 주렁주렁 열렸다. 사려면 다 돈인 것들. 아빠는 종일 사과밭에 매달려 있었으므로 야채밭을 거두는 것은 자연스럽게 엄마 몫이 되었는데 엄마는 어느 한해에 그것들을 따지 않고 모두 방치했다.

그게 엄마가 나를 만조 아줌마에게 맡기기 시작한 해였는지 그만 맡기기 시작한 해였는지는 조금 헷갈린다. 엄마는 보이는 것만큼 건강한 여자가 아니었다. 보기엔 쌀가마니 하나는 거뜬히 둘러멜 것처럼 튼실해 보였지만 어딘가가 늘 안 좋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병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이 너무 안 좋았다.’

누가 봐도 여리여리한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것과 밥 두그릇은 먹고 나온 것 같은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꽤 큰 차이가 있었다. 엄마는 두시간 이상은 과수원 밭일을 버티지 못했는데 엄마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거나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납득하거나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과수원 주인 여자가 밭일을 못한다는 건 그만큼의 일당을 날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밭에 나가는 대신 일꾼들을 위해 아침과 점심과 저녁, 오전 새참과 오후 새참을 도맡았지만 밥을 차리고 치우다 하루가 다 가도 동네에서 엄마가 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성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면 이런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보다 몸집이 작고 열살 이상은 많은 여자들(만조 아줌마와 그 팀들)이 새벽부터 종일 과수원 일을 하고 오후 새참을 먹으러 들어오면 엄마가 둔한 몸으로 슬리퍼를 직직 끌고 걸어가 끙, 하고 국수 육수통을 내려놓는다. 살만 빼도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말에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아빠와 대화인지 싸움인지 모를 말을 오래 한다. 아빠를 설득한 건지 아빠한테 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존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쟤, 쟤 말이야, 나리, 우리 나리.”

엄마는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내가 십대 내내 기억하고 있어야 할 말을 나도 들어야 한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한다.

“쟤, 예성에 계속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돼.”

그러니까 엄마의 바람대로 우리 집이 예성을 떠나게 된다면 나는 무조건 죽이나 밥 이상의 것이 되어야 했다.

중일회에 들어갈 즈음 엄마는 실제로 살을 많이 뺐는데 살을 뺐기 때문인지 예성을 떠나서인지 예성 시절만큼 아프다는 소리를 달고 살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임영웅을 좋아한다. 임영웅 팬까페 ‘영웅시대’의 초기 멤버이며 코로나 때문에 「미스터트롯」 멤버들이 행사를 못 뛰는 것을 매일매일 안타까워한다. 엄마 또래의 여자들이 임영웅 또래의 남자들한테 내보이는 호의는 너무도 너그럽고 무조건적이어서 나는 엄마가 임영웅의 엄마가 아니라 내 엄마라는 게 의아할 정도이다.

하지만 내게도 박순천 엄마가 있다.

「근심과 슬픔으로 무너지는 박순천—‘기막힌 유산’ 119화」

「자책하며 오열하는 박순천, 친딸 못 알아봐—‘내 사위의 여자’ 51화」

「박순천 “저는 그냥 엄마이고만 싶어요”—드라마 ‘빠스껫 볼’ 제작발표회」

박순천 배우가 실제 딸과 함께 출연한 다큐도 있지만 그건 한번도 보지 않았다. 나는 오직 박순천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만을 본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드라마에서 그녀는 연기 변신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팬 입장에서 솔직히 그리 반가운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박순천 배우가 연기 변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이 모습 이대로셨으면 좋겠고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하시는 일이 다 잘되셨으면 좋겠다.

 

*

 

그날이 오기 며칠 전에, 아침부터 알 듯 모를 듯 한 일들이 연이어 이어지다 두달 만에 다시 기정병원 선별진료소를 통과해야 했던 그날이 오기 전에 나는 공방 창문을 열고 중앙공원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을 열고 ‘비탈사과’와 ‘민들레’를 같이 검색했다.

예초기가 고장 나 사과나무 아래로 개망초며 갖가지 풀들이 웃자라 올라왔을 때 만조 아줌마가 내 부모한테 민들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과나무 아래에 민들레를 빼곡히 심어놓으면 다른 잡초들이 올라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민들레는 아무리 자라도 키가 커지지 않는데다 꽃을 여러번 피우고 이파리는 뜯어서 무쳐 먹을 수도 있다고. 잡초 제거 효과가 더 클지 꽃을 피우느라 사과나무의 영양분을 가져가는 게 더 클지 아직 검증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보면 어떻겠냐고.

공방 창문 앞에 서서 검색을 하다가 나는 이런 해시태그와 함께 올라와 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비탈사과밭민들레 #비탈사과민들레밭 #예성야외촬영명소 #봄웨딩촬영. 사과나무꽃이 줄지어 만개한 나무들 아래로 민들레가 샛노랗게 깔려 있었다. 비탈밭 전체에 노란 융단이 깔린 것 같았다. 아빠는 민들레보단 예초기를 믿은 채 과수원을 떠났으니 민들레를 심은 사람은 아마도 만조 아줌마일 것이다.

사람들이 올린 사진 중 가장 최근의 것은 2020년 봄 사진이었다. 어디에도 만조 아줌마의 모습은 없었지만 사과꽃과 민들레꽃이 함께 피어 있는 불과 몇달 전의 사진을 보고 나서야 나는 삼십년 전의 만조 아줌마가 나처럼 지금을 계속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

 

하얀 꽃과 노란 꽃으로 들어찼던 휴대폰 창을 끄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날은 좀더 어두워져 있었고 공원 바닥에 로고라이트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몇초마다 이미지가 바뀌며 보도블록 위로 그림과 글자들이 새겨졌고 색을 바꾸는 조명빛이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맨다리에 어른거렸다.

사람들이 LED 플라잉을 쏘아올리는지 지하철역 광장 쪽 허공에 간간이 빛 덩어리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상가로 나온 뒤 처음 맞는 여름이었다. 클래스도 외부 출강도, 여름방학 할인 이벤트도 잠시 멈춰진 여름이었지만 공원 바닥의 빛과 광장 허공의 빛은 공방이 새로 얻은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야광 낙하산이라고 부르는 LED 플라잉은 아파트에 야시장이 설 때마다 은채가 꼭 사달라고 조르던 것 중 하나였다. 일년에 한번 한여름 밤이 되면 단지를 돌며 대규모 야시장이 섰는데 장이 서는 날은 아이들도 학교에서부터 약속을 잡고 동네 사람들도 삼삼오오 시간을 맞춰 모였다.

옆 단지에 야시장이 섰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일찍 퇴근한 오종수와 함께 은채를 데리고 장이 선 단지로 산책을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나온 듯 호황이었다. 한껏 부풀어올라 있는 에어바운스 미끄럼틀, 노래가 흘러나오는 키즈 바이킹(‘도중 하차 환불 없음’), 맥주 테이블과 곱창 철판, 문어숙회와 골뱅이, 타꼬야끼와 솜사탕.

셋이서 와플 하나씩을 들고 불이 환하게 달린 천막 사이를 거닐다가 우리처럼 산책을 나온 수미네 가족을 보았다. 그날 처음으로 수미의 남편을 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체구에 만조 아줌마가 ‘깎아놓은 밤톨’ 같다고 할 만한 반듯한 두상을 가진 남자였다. 굉장히 깔끔하게 떨어지는 무쌍꺼풀 눈에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차가워 보일 인상이었다. 손석구 배우의 몇년 뒤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은 분위기랄까. 나는 수미가 잘생긴 남편과 산다는 것에 좀 놀라고 말았다.

서하와 은채가 야광 낙하산을 하나씩 쏘아올리는 동안 오종수와 나는 수미 부부와 서서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옆 천막에서 양꼬치가 지글거리고 있었는데 야시장에 오면서부터 나는 동네의 편한 여자들 몇몇과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왁자지껄 마셔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야시장 먹자판은 그렇게 모여 먹기에 최적이었다.

시간이 맞을 땐 수미와 둘이서도 종종 술을 마시곤 했는데 아무리 단지 상가 내에서 조용히 마셔도 여자들끼리만 마시면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말이 나곤 했다. 하지만 남편들을 끼고 마시면 말이 나지 않았다. 잊을 만할 때 남편들을 한번씩 대동해주면 몇달은 또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수미와 내가 남편들을 불러낸 건 야시장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고도 몇 계절이 더 지났을 때였다. 수미네 단지 쪽에 있던 한 맥줏집이었다. 아이들 얘기로 시작하며 맥주 오백 한잔씩을 비우고 났을 때 수미의 남편이 말했다. 맥줏집 이름(‘오늘은 술요일’)을 자기가 지어줬다고. 오, 그러시냐고, 맞장구를 친 뒤 나도 말했다. 은채가 졸업한 유치원 텃밭 이름(‘보리동산’)을 내가 지었다고. 그러시냐고, 수미의 남편이 말했고, 그러다보니 얘기는 주로 수미의 남편과 내가 이어가고 있었다. 수미의 남편은 첫인상과 달리 말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그사이 오종수는 먹태만 뜯고 수미는 술만 마셨다.

그때 나는 아파트단지 내의 탁구장에서 탁구를 막 배우기 시작한 참이었다. 수미한테 탁구 얘기나 좀 들어볼까 하고 탁구 배운다는 얘기를 꺼내자 수미의 남편이 말했다. 자신은 처음 탁구채를 잡고 한시간 만에 스매싱 감을 터득했다고. 어쩜, 그러시냐고, 나는 말했고 분위기를 탄 김에 상가와 오피스텔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다. 그 주제에 대해서라면 나는 동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미가 문제였다. 내 남편과 수미의 남편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수미의 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꽁. 수미는 꽁을 잘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수미의 남편은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은채 어머니! 또 봬요!”

저만치에서 수미의 남편이 외쳤고

“네! 서하 아버지!”

나도 외쳤다.

돌아서는데 정말 너무 피곤했다.

수미 부부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몇번, 주말이 되었을 때 나는 오종수한테 말했다.

“자기야,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서하 아빠랑 인사도 텄는데 애들 데리고 같이 공원에라도 좀 다녀와.”

그러면 오종수는 말했다.

“싫어.”

다음주에도 나는 말했다.

“자기야, 이번주도 날씨 너무 좋다. 나 주말에 캔들 출강 잡힌 거 알지? 서하 엄마도 일이 있대. 애들끼리만 보내기 그러니까 자기가 서하 아빠랑 같이 애들 데리고 좀 나갔다와.”

“싫어.”

“왜 싫어?”

“딱 보면 모르겠어? 서하 아빠랑 나랑은 안 맞아. 그리고 남자 둘이 앉아서 뭘 하겠어?”

그러게. 남자 둘이 앉아서 뭘 할까.

근데 사실 나도 수미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툭 하면 술을 마셨던 건 그래서였을까.

수미는 뭐랄까, 수미는,

수미도 동의한 사실인데 수미와 내가 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만났다면 학년이 끝날 때까지 두어마디밖에는 안 나눠보는 그런 사이였을 것이다.

수미는 내게 좀, 어려웠다.

수미와 어느정도 편해지기 전까지 내겐 그야말로 견디며 앉아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를 또래와 놀게 해주겠다는 이유 하나로.

수미를 견뎌야 할 때 나는 오종수를 생각하곤 했다. 오종수를 그리워했다. 편하고 만만하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내 남편 종수.

종수랑 결혼을 해서 평생 단짝이 되면 나는 지겹고 불편했던 여자들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맛집에 가는 것들을 종수랑 평생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종수가 나를 사랑해주는데 다른 여자들이 내게 뭐라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종수랑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자 내 앞에 펼쳐진 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한 여자들의 세계였다. 나는 이제 내 아이까지 옆에 세운 채 다시 그 세계를 뚫고 들어가 자리를 틀어야 했다. 여자들한테서 탈출하고 싶어 종수와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게 빼도 박도 못하도록 나를 다시 여자들한테로 데려갔던 것이다. 종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종수랑 있고 싶어서 종수랑 살기로 한 건데, 종수는 간 데 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키 크고 눈을 잘 안 맞추고 슬랙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어떤 어려운 여자와 롯데월드 투썸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종수랑 둘이 자이로드롭 타고 쌀국수 먹고 모텔 갈 때가 좋았는데.

 

*

 

오종수는 요새 나한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너는 무슨 말만 하면 내 탓이냐.”

이런 말도 한다.

“거기서 남녀 문제가 왜 나와.”

곧 다가올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선 내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니가 아주 미쳤구나.”

 

*

 

그날 나는 은채한테 점심을 먹으러 나오라고 말했다.

특별한 조짐이랄 것도 없던 날이었다. 은채가 점심에 꺼내 먹을 국과 반찬을 만들어놓은 뒤 여느 때처럼 오전에 공방으로 나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무언가를 찾으러 커튼 뒤로 갔다.

가림막용 광목 커튼 뒤에는 나의 재료함들과 자투리 비누함뿐만 아니라 분실물함도 있었다. 홈공방을 할 때 주로 아이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었다. 그중엔 서하가 두고 간 것도 있었다. 네 귀퉁이가 거뭇거뭇하게 닳은 지우개였는데 한 면에 굵은 네임펜으로 ‘김서하’라고 쓰여 있었다. 주인 이름이 분명하게 쓰여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서하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미한테 건네주지도 않았다. 가림막용 광목 커튼 뒤에 숨겨두었다.

하도 지워서 연필 때가 반들반들하고 사방이 동글동글하게 닳아버린, 나 또한 오래전에 필통에 넣어 다닌 적이 있던 그런 지우개를, 커튼 뒤로 갔다가 문득 꺼내보았던 것뿐이었다.

그러다 은채한테 전화를 했다.

“은채야, 나와서 엄마랑 같이 점심 먹자.”

새경프라자 근처의 초밥집에 가 판모밀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은채는 스마트폰을 안 할수록 캐시가 쌓이는 앱에 대해 얘기했다. 15분을 안 하면 1캐시가 쌓이는데 많이 쌓이면 그걸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다고 했다. 서하가 네이버 도전만화에 만화를 올리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제목이 ‘초등학생 관람불가’야.”

“그럼 넌 못 보는 거야?”

“아니, 제목이 그렇다고.”

은채는 밥 먹으러 나오는 게 못내 번거로웠다는 표정이었다. 집에서 혼자 유튜브 보면서 먹는 게 더 재미있고 좋지만 엄마를 위해서 나와주었다는 듯한 표정. 오종수한테서도 종종 보이는 표정이었다.

오종수는 주말 나들이와 외식이 내가 꿈꾸는 최상의 즐거움인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피곤해서 쉬고 싶지만 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봉사한다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내가 주말에 하고 싶은 건 남편과 아이와 함께 수목원을 거닐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수미와 눈꽃빙수를 먹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주말에 가장 하고 싶은 건 휴대폰을 옆구리에 끼고 소파에서 늘어지게 뒹구는 것이었다. 연예인들의 공항 패션 사진을 넘겨보다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하나 정주행하면서 롤케이크를 통째로 해치우는 거.

이상한 것은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소파와 한 몸이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늘 아이를 데리고 어디 좀 나갔다 오자고 말하는 게 나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식당에 가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오종수와 오은채는 자연스럽게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휴대폰을 보다가 오종수가 슬쩍 내 눈치를 본다. 그러곤 우리가 엄마 소원 좀 들어주자는 듯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오은채와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한다. 엄마를 위해 우리의 즐거움은 잠시 접어놓고 가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듯이.

베푸는 자 오종수, 오은채. 바라는 자 이나리.

근데 나는 오종수 오은채 너네 얼굴 보면서 밥 먹는 것보다 휴대폰에 얼굴 박고 공방 인스타그램에 답글 다는 게 더 즐겁다. 너네랑만 있으면 손쉽게 전형적인 여자가 되어버리는 게 지겹다.

지겨워. 너무. 너무너무너무!

은채의 퉁명스러운 대답 하나에서 갑자기 생각이 여기까지 몰려오자 뭔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종수 없이 오은채하고만 있을 때 오종수에 대한 감정까지 함께 올라오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은채가 지금보다 어렸다면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냥 대답 한번 툭 했는데 엄마의 눈빛이 갑자기 이글거리는 것이다.

“서하는 잘 지낸대?”

그래서 나는 올라오는 뭔가를 누르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돌렸다. 눈빛은 이글거리더라도 말투만은 상냥해보려고 하면서. 하지만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수미의 퇴원 소식을 은채를 통해 듣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메밀사리 옆에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

바로 연락을 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

수미보다 늦게 확진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완치되어 나올 때도 수미는 PCR 검사에서 계속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나왔으니까.

사람들은 오늘도 궁금해하니까.

‘확진되었던 지인 만나도 되나요?’

‘확진되었던 지인 몇주 지나고 만나야 안전할까요?’

인터넷 까페에 질문이 올라오면 이런 답글이 달렸다.

‘저라면 당분간 안 만나요.’

‘개념 있는 확진자라면 약속을 안 잡겠죠.’

휴대폰을 집으려다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 은채가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면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렸다. 초밥집 벽에 걸린 메뉴를 읽으려는 것 같았는데 한 글자도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나는 가슴이 내려앉아서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은채야. 저 글씨가 안 보여?”

은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몇십분 뒤 안과 대기실에 앉아 있기까지 은채와 내가 나눈 대화는 이렇다.

“저게 왜 안 보여? 언제부터 안 보였어?”

“저번 겨울에 왔을 때도 안 보였어.”

“안 보이면 얘기를 해야지! 왜 얘기 안 했어?”

“얘기했는데.”

“언제?”

“계속 얘기했는데. 과학실 칠판 글씨도 안 보인다고 작년에도 얘기했는데. 나랑 시력 비슷하게 나온 수빈이도 안경 맞췄다고, 그것도 작년에 얘기했어.”

그러니까 열달의 시간이 있었다. 열달 전 나는 은채 학교에서 건강 검진 결과서를 받았고 은채의 시력이 안 좋으니 안과 검진을 권고한다는 소견을 읽었다.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목록의 빽빽한 슬래시 안에 분명히 ‘은채 안과’라고 적어놓았다. 그랬는데, 그 열달은 지나갔고 그사이 은채 시력은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안과 처방전을 들고 은채와 안경점으로 가는 동안 지난 열달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공방 이전 준비와 상가 계약, 인테리어 공사와 공방 이사. 곧이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내게 와서 재난지원금을 쓰던 수미가 확진자가 되었다. 자가격리 뒤에 찾아온 흉통과 잠복결핵. 만조 아줌마와 엄마. 그리고 스포이트가 머금고 있던 한방울.

안경테를 고르느라 들떠 있는 은채를 보면서 나는 공방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 두려워졌다. 몇시간 전까지 내가 당당하게 앉아 있던 곳. 출입문 손잡이에서 조명 하나까지 모두 이나리의 손이 간 공간. 그곳에서 다시 웃을 자신이 없어졌다. 열달의 시간도 은채의 시력도 결코 되돌릴 수가 없다는 걸 공방에 혼자 앉아 실감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 싶었을까. 안경점에서 나와서 은채와 아이스초코라떼를 하나씩 사 들고는 은채의 수학학원까지 같이 걸었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학원 건물 쪽으로 이어지는 긴 보도를 걸었고, 그렇게 걷다가, 은채에게 불쑥 어떤 얘기를 했다.

그건 1990년의 일화였다.

내가 예성에서 대전으로 갔을 때. 딱 은채 나이였을 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짧은 얘기였는데 보도를 걸으며 은채한테 들려주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얘기를 아무에게도, 일기장에조차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오후에, 삼십년 전 내가 했던 어떤 일을 삼십년 만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얘기한 것이었다. 그걸 떠올릴 만한 어떤 맥락도 없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뜬금없이. 아이스초코라떼를 들고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얘기를 들으며 은채는 이런 말들을 했다.

“정말?” “엄마가?” “대박.”

그러자 나는 좀 창피해졌고 아빠한테는 얘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수 높은 동그란 안경을 쓰게 된 열세살 은채가 학원으로 들어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알았어, 엄마. 얘기 안 할게. 이불한테도 말 안 할게.”

 

*

 

그리고 나는 다시 기정로의 새경프라자 앞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어둡고 습한 비상계단을 올랐다. 새경프라자는 밤이 되면 본격적으로 북적이는 곳이어서 오전에는 물론이고 오후에도 복도가 어둑어둑할 때가 많았다.

점심 전에 문을 여는 곳은 공방과 같은 층의 네일숍 정도였다. 마사지숍으로 출근하는 여자가 유치원생 아이를 데리고 나올 때가 있어서 오후엔 그 아이가 3층 복도를 내달려 공방을 기웃거리다 간 적이 몇번 있었고 ‘대화까페’라는 곳엔 아직 누군가가 드나드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지하의 노래주점, 1층의 족발집, 윗층의 레이싱 게임방과 당구장. 그리고 임대인님.

나는 그들 모두에게 조금씩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난봄 긴급재난문자에 새경프라자가 이름을 올렸으니까.

‘5.8~5.22 기정로 새경프라자 3층 방문자는 유증상 시 가까운 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19 검사 바랍니다.’

그게 나리공방에서 촉발된 문자라는 걸 상가 사람들은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가게마다 문을 두드려 음료수라도 돌리고 싶은 마음과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하는 채로 나는 비상계단에서 나와 3층 복도로 걸어나갔다. 자개 모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리공방의 문을 열었고 커튼을 젖히지도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수업 테이블로 가 의자 하나를 빼고 앉았다. 공방에 있는 어떤 것들도 그날 오후에만은 사랑하지 않기로 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두워지고 거리와 상가가 조명 빛에 살아날 때까지 계속 앉아 있었다.

저녁 여덟시경 새경프라자 앞으로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한 건 두통의 전화를 받은 것과 세캔의 맥주를 마신 것뿐이었다.

“나리샘, 집에서 수박비누를 만들어봤는데 빨간 물이 너무 빠져.”

나는 말했다.

“다음엔 옥사이드를 좀 줄여서 넣어보세요.”

전화를 끊고는 맥주를 마셨고,

“나리샘, 에센셜 오일을 넣었는데 왜 향이 안 나죠?”

“너무 고온일 때 넣으셔서 그래요. 온도계로 재면서 40도 이하일 때 넣어보세요.”

전화를 끊고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더는 전화가 안 왔고 그래서 그뒤론 맥주를 마시기만 했다.

잊히지 않는다. 그것이 오던 느낌이.

나는 이전까지 그것을 겪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내가 곧 숨을 쉴 수 없을 거라는 걸. 그것이, 손끝과 발끝에서 그 느낌이 왔다. 호흡이 곤란해지고 있는 느낌이. 흉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건 통증이 미리 전해주는 경고도 없이 죽음과 바로 직결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곧바로 오종수가 떠올랐지만 종수가 연락을 받고 공방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수분 내에 죽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공방 문을 열고 뛰쳐나가 옆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KF94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있었음에도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자 엘사네일 사장이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걸 알 수 있었다. ‘호흡 곤란’은 코로나19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였다. 내가 전염체가 아니라는 법이 없었고 새경프라자가 또다시 재난문자에 등장하는 상황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결핵균의 존재가 떠오른 건. 예성에서 내게 심어진 채 내내 잠자고 있던 결핵균. 그게 오늘 밤 드디어 기지개를 켠 것이다. 라바가 깨어난 것이다. 라바가 활동을 시작했다. 잠복기는 끝났다. 삼십년의 잠복기 끝에, 나는 이제 발병했다. 누가 봐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채로 나는 네일숍의 테이블보를 쥐어뜯으며 사정했다.

“119 좀…… 불러주세요.”

그뒤의 일들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새경프라자 앞으로 구급차가 도착했고 흰 방호복을 입은 여자 구급대원 한명과 남자 구급대원 한명이 3층으로 뛰어올라왔다.

기정병원 응급실에 도착하기까지의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구급차 안에서 이런 말을 들은 것 같다.

“울지 마세요.”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호흡 곤란을 예감한 순간부터, 엘사네일로 달려가기 전, 공방에서부터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울면 호흡이 더 힘들어져요.”

천천히, 깊게 숨을 내쉬라고 말하면서 구급대원이 내 손을 잡았다. 나 같은 증상의 사람을 많이 태워본 것처럼, 산소를 과하게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도움이 필요한 다른 상황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고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맥주를 세캔 마셨다는 것밖에는.

병원에 도착한 뒤 그들은 나를 휠체어에 태워 기정병원 선별진료소 앞에 내려놓았고, 떠나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잡아준 손에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채로 나는 허허벌판 같은 한밤의 선별진료소 앞에 앉아 그곳이 두달 전 수미가 확진 판정을 받았던 곳이라는 것을, 수미가 기정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

 

그리고 나는 너무 춥다는 생각을 한다. 한여름 밤의 응급실 냉기가 너무 춥다. 무언가로 발만이라도 덮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에어컨 냉기가 사정없이 뿜어져나오는 사각 공간에 혼자 누워 있다. 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오가는 응급실이 내다보인다. 그러니까 저 밖이 진짜 응급실이고 나는 별도의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확증이 나오기 전까진 이 유리실을 나갈 수 없다.

천장에 매달린 링거 걸이를 한참 쳐다보다가, 나는 내가 어느 순간부터 숨을 자연스럽게 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손에는 몇시간 전 네일숍 테이블보를 움켜쥐던 악력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수액을 맞으며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난 순간에 나는 오래전 내가 그와 같은 강도로 무언가를 움켜쥐던 순간을 기억해낸다.

돗자리와 새참 보자기. 뙤약볕과 라디오.

엄마와 아빠는 돌이 되기 전의 나를 사과나무 밑에 재워놓고 적과 작업을 한다. 엄마와 아빠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다음 나무로 옮겨가는 사이 나는 돗자리 위에서 혼자 깨어난다. 아직 걷지는 못하지만 기어다닐 수는 있다. 나는 빽빽 울면서 돗자리 밖으로, 토끼풀 위로, 또다른 나무 밑으로 기어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엄마가 내게 해준 이야기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이야기. 엄마의 아기에 대한 이야기. 엄마의 그이에 대한 이야기. 사과밭을 기어가던 내가 작고 둥근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입에 집어넣는 이야기. 기도가 막히는 이야기.

엄마의 아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엄마의 앞섶을 막 쥐어뜯는다.

그것은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내가 엄마한테 매달리는 이야기다. 달려온 엄마의 그이가 엄마의 아기를 잡아채는 이야기.

그날 기정병원 응급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내가 기억해낸 것은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숱하게 반복되던 풍경들이 아니었다. 내 손의 악력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살고자 했던 어떤 힘이었다.

응급실 침대에서 그 손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는 생각했다. 엄마를 통해서 만조 아줌마 얘기를 듣는 걸 이제는 그만두어야겠다고.

수액이 떨어지는 걸 쳐다보면서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에.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엄마한테 나는 말했다.

“수미가 집에 왔어, 엄마.”

“수미?”

나는 더 말했다.

“걔들이 깨어났어, 엄마.”

“무슨 소리야.”

나는 더 말했다.

“만조 아줌마 연락처 좀 알려줘, 엄마.”

“……”

“엄마.”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그건 응급실 의사한테 내가 물은 말인지도 모른다.

“음성이 나왔습니다. 의사가 그랬어요.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요.”

하지만 그건 내가 받은 질문이 맞았고 나는 나를 에워싼 사람들한테 다시 무언가를 대답하고 있었다. 맨발에 공방 실내화를 신고 앞치마까지 하고 있는 채로. 구급차에 탈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적어도 새벽 세시는 넘었을 텐데 사람들은 선별진료소 앞 허허벌판에 조명을 밝힌 채로 진을 치고 있었다. 아니다. 응급실에 다녀온 다음 날 나는 바로 호흡기내과 송미림 의사를 찾아갔으므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병원 정문인 회전문 앞인 것도 같았다.

어디가 되었든 병원에 갔다 올 때마다 사람을 포토라인 앞에 세우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단순히 병원에 간 건 아니죠. 구급차에 실려 가지 않았습니까?”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새경프라자로 들어가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물은 사람은 매미를 창밖으로 내보내던 빙수 까페 직원이었다. 저 사람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나는 이번에도 최대한 솔직하게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응급실 의사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환자분, 다음에도 숨이 안 쉬어지면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숨을 쉬어보세요. 사실 비닐봉지보단 종이봉투를 더 권해드리긴 합니다. 파리바게뜨에서 주는 그런 종이봉투 아시죠? 비상시를 위해 그걸 옆에 몇개 챙겨놓으세요.”

“아, 저 그거 뭔지 알아요.”

누군가 손을 들며 말했다.

“드라마에서 본 적 있어요. 주인공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가슴을 틀어쥐고 숨을 못 쉬잖아요. 그러면 주인공 친구가 비닐봉지를 건네요. 여기다 숨을 뱉었다 마셔봐, 하면서요.”

“그건 과호흡증인데.”

그렇게 말하며 누군가 나를 보았다.

“나리샘,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거 말고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지 않았어요? 팔이랑 다리가 엄청 저려서 바로 쓰러질 것 같고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요, 맞아요!”

내가 외치자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부정맥일 수도 있어요.”

“아니에요. 갑상선이 안 좋아도 그런 증상 옵니다.”

“술 먹고 그랬으면 저혈당일 수도 있어요.”

“제가 볼 땐 부신종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심장 검사부터 받으세요. 저 심장이 안 좋았는데 한방치료로 효과 진짜 많이 봤어요.”

“그만 좀 하시죠!”

누군가 말을 끊었고, 내게 물었다.

“송미림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솔직히 폐 문제일 가능성이 가장 큰 거 아닙니까? 당신한텐 언제든지 활동성으로 바뀔 결핵균도 있잖아요?”

하지만 응급실에선 코로나 PCR 검사 말고도 피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했고 모두 이상이 없었다. 그게 더 답답했다. 객담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나는 바로 송미림 의사를 찾아갔다. 송미림 의사가 다른 무언가를 더 발견해주길 바라면서. 라바 외에 또 뭐가 있든, 그게 훗날 내 사인(死因)이 될 무언가라 해도 나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송미림 의사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응급실에 실려 왔다 나가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그래서요? 그래서 송교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송미림 의사는 내 말을 끝까지 들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말했다. 아래층의 신경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주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어. 내 예감이 맞았어.”

“그거 공황 발작 온 거예요.”

“제가 볼 땐 백퍼 공황이에요.”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말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들한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제가 대체 왜요? 제가 무엇 때문에요?”

그때 누군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리샘한텐 1초 수심이 있죠.”

“1초 수심요?”

“나리샘 너무 귀여우시고 하야시고 완전 친절하시고 웃는 모습 자체로 저한테 힐링을 주시지만 1초 수심이 있어요. 그 1초 안에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좀더 덧붙이고 싶다는 듯 어떤 여자가 뒤에서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목선이 우아했는데 내가 예전에 다니다 말았던 요가센터 원장을 연상시켰다. 여자가 말했다.

“공황장애는 단절이 일어날 때 나타납니다. 내 안의 미해결된 감정과 단절될 때, 내가 나한테 벽을 쳐버릴 때, 몸으로 그게 나타나는 거예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질환이죠.”

여자가 좀더 가까이 걸어와 나를 보았다.

“당신한텐 뭔가가 있는 겁니다. 1초든 한방울이든 뭔가가 있어요. 당신은 그걸 찾아야 될 거예요.”

나는 여자를 보았다.

“안 찾으면 안 될까요? 전 너무 바쁘고 만사가 귀찮아요.”

여자가 우아하고 인자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엄마잖아요. 뭐든 할 수 있어요.”

“저 엄마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엌마예요. 엄마가 아니라 엌마라고요.”

여자가 조금 웃다가 다시 나를 봤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딸을 키워본 엄마 입장에서,”

“잠시만요.”

나는 갑자기 어떤 감정이 일어 여자의 말을 끊었다.

“지금 제 말을 이해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전 엄마가 아니라 엌마라니까요? 엌마. 엌마 모르세요?”

진정시키려는 듯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이제 길 좀 터주시죠. 나리샘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게 길 좀 열어주세요.”

나는 누군가(아마도 나의 수강생)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갔다. 택시에 막 올랐을 때 차 창문을 두드리며 나의 수강생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말했다.

“치료 시작하시게 되면 후기 좀 꼭 남겨주세요. 네? 정말 부탁드려요.”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치료든 뭐든 뭔가를 시작할 기력이 이미 다 빠져나가버린 기분이었다.

송미림 의사가 소개해준 의사를 찾아가게 된 건 파리바게뜨 종이봉투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을 두어번 정도 더 겪고 난 뒤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