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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24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성혜령 成慧玲

1989년 경기 광명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소설 전공 수료.

eve_adam@naver.com

 

 

 

윤 소 정

 

 

정이 오년 만에 나타나 윤과 소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윤은 코끝을 쏘는 나프탈렌 냄새로 정의 집을 기억했다. 정의 집 옷장과 화장실에 몇개씩 놓여 있던 곰팡이 방지제 냄새였다. 정의 어머니는 수도권 신도시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에서 정을 혼자 키웠다. 윤과 소가 늦은 저녁까지 정의 집에서 놀던 날이면, 정의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보고 청소기부터 돌렸다. 어떤 날에는 거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듯 말없이 청소기부터 켤 때도 있었다. 소는 정의 집에 있던 러시아 도자기 인형이 떠올랐다고 했다.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 선반엔 섬세하게 채색된 마뜨료시까가 화병처럼 큰 것에서부터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것까지 일렬로 놓여 있었다. 모두 똑같이 생겼지만 어쩐지 큰 인형은 엄마, 가장 작은 인형은 막내딸처럼 보였다. 그들은 막내부터 시작해 하나씩 옆에 있는 인형 안에 넣어가며 놀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인형을 전부 다시 꺼내놓아야 했다. 엄마가 큰 애 안에 작은 애들이 들어 있는 걸 싫어해. 정이 말했다. 다들 숨 쉬게 꺼내줘야 해.

정과 윤, 소는 열두살 겨울, 대형 입시학원의 버스에서 처음 만났다. 셋이 살던 동네가 학원 버스의 마지막 운행지였다. 주위가 조용해져서 둘러보면 삼십이인용 버스 안에 셋뿐이었다. 셋은 침묵과 어둠과 갑자기 켜진 기독교방송 라디오 소리를 견디려고 서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셋은 학원 버스의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졸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날에는 학원에 가지 않고 동네 공원을 함께 걸었다. 입시를 끝내고 대학에 가면 자유로워질 거라는 선생들의 말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서울로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셋은 평범한 학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하며 함께 밤의 공원을 걸었다. 졸업 후에는 정이 가장 먼저 지방 공공기관에 연구직으로 취직했고, 뒤이어 윤이 대기업 계열사에 들어갔다. 일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소가 가장 늦게 광고대행사 마케팅부로 들어갔다. 그들은 가을마다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주말에 제주도나 일본, 대만을 다녀오기도 했다. 애인이 있을 때도 셋이 가는 휴가는 빠지지 않았다. 셋은 서른이 되는 해를 기념해 조금 특별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예산을 넉넉하게 잡고 좋은 호텔에서, 좋은 음식만 먹으면서 유럽을 돌다 올 계획이었다. 항상 그랬듯 정이 예산을 맡았다. 그들은 스물여덟살 겨울부터 시작해 매달 이십오만원씩 꼬박 스무개월간 정의 통장에 돈을 모았다. 비행기표 예매와 숙소 예약으로 얼마의 금액이 빠지긴 했지만, 여행을 떠나기 한달 전 그 통장에는 천만원이 훨씬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은 사라졌다. 정은 자기도 왜 그 남자의 말을 믿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자의 발음, 억양에는 조금의 떨림도, 이상한 점도 없었다. 차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전화 속의 남자는 자신을 검찰청 금융사기 전담반의 사무관이라고 소개했다. 남자는 정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정에게 정의 계좌가 현재 압수 직전에 있으며 본인 명의 계좌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자기가 알려준 사이트로 접속해보라고 했다. 사이트 주소에는 정부기관 도메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계좌를 조회해보니 대포통장으로 신고가 들어와 압수 절차 준비 중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정은 계좌에 든 돈을 전부 남자가 알려준 계좌로 이체했다. 남자는 그 계좌가 정의 이름으로 만든 임시 계좌라고 했고 정밖에는 돈을 꺼낼 수 없다고 했다. 계좌주 이름도 정말 정의 이름이었다. 돈을 이체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정은 말했다.

정은 경찰서를 다녀오고 보이스피싱 피해자 모임에 가입해 집단 소송에도 참여했지만,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취소하면서 수수료도 꽤 많이 물었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날 저녁 셋은 오랜만에 함께 공원을 걸었다. 거리의 모든 음식점과 까페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공원은 한적했다. 이상할 정도로 춥지 않은 겨울이었다. 벚나무가 많은 공원이어서 겨울에는 가늘고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깊게 찔러보지도 못하고 말라갔다. 정은 말없이 땅만 보고 걸었다. 정을 가운데 두고 윤과 소가 나란히 걸었다. 그 돈 없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 윤은 정에게 말했다. 여행 못 간다고 안 죽어. 우린 괜찮아. 그 ‘우리’에 정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윤은 알지 못했다. 소는 정에게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정에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정이 처음 한 말은 내가 정말 미친년이야,였다. 내가 모자라서 그래.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정은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윤과 소가 달래봤지만 정은 고개를 젓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괜히 나서서 피해만 끼쳤어. 내가 미친년이야. 윤이 다소 짜증 난 어투로 우리는 괜찮으니까 너나 잘 추스르라고 말할 때도, 정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공원에는 넓고 둥근 잔디밭이 있었는데 셋은 자정이 넘을 때까지 그 주위를 뱅뱅 돌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우리 한번도 잔디밭에 안 들어가지? 잔디밭을 돌아 나오는 길에 소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셋은 그 이후로 함께 여행을 가지 않았다. 정은 지방에서 잘 올라오지 않았고, 올라오더라도 윤과 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간간이 문자로 주고받던 소식마저 완전히 끊겼다. 윤과 소는 정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과 아무 연락 없이 오년이 지나는 동안 윤은 저축을 약간 늘리고 주식을 시작했고, 소는 코에 필러를 넣었고 어떤 남자를 소개받았다고 하더니 만난 지 일년도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신혼집은 소가 살던 집 근처 아파트에 얻었다. 소의 남편은 신도시 근교 혁신사업 단지에 있는 바이오테크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소와 마찬가지로 그 도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소는 정에게 청첩장을 보냈지만, 정은 소의 계좌로 부조만 하고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소는 윤에게 정이 부담스러울 만큼 큰 금액을 보냈다고 전했다.

 

*

 

윤과 소가 정의 집에 가기로 한 날 저녁에는 눈이 쏟아졌다. 정의 집은 다소 가파른 오르막길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의 가장 뒤쪽이었다. 오르막길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소는 내려갈 일이 걱정이라고 말하며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윤은 레드향 한 박스를 들고 말없이 걸었다. 낮에 항상 비어 있던 정의 집은 윤과 소의 집이기도 했다. 정의 어머니가 출장을 가면, 학원을 마친 셋은 정의 집으로 가서 같이 잤다. 정의 집에는 부엌 크기에 맞지 않게 터무니없이 커 보이는 육인용 식탁이 있었다. 셋은 그 식탁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고 정의 어머니 방 욕실의 작은 욕조에서 함께 목욕했다. 윤은 그 집에 있던 서재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책에는 한글보다 영어나 숫자가 많았지만, 서가 한 귀퉁이에 양귀자나 은희경의 소설이 꽂혀 있었다. 윤은 소와 정이 잠들길 기다렸다 서재로 가 『모순』이나 『마이너리그』 같은 소설을 읽었다. 왜 우리 집에는 서재가 없을까, 왜 우리 엄마는 책을 읽지 않을까.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윤은 생각했다. 윤은 정의 집 호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소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자꾸만 여기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자기 기억에 정이 살던 아파트는 이렇게 외진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더 큰길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그들은 문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 전까지 아주 잠시, 윤은 전혀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윤의 예감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다. 문이 열리고 정이 나타났다. 정은 어딘가 달라진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정은 항상 안경을 쓰고 머리는 짧게 유지했었다. 문을 연 정은 웃는 얼굴에 윤기가 돌았고, 굵게 웨이브진 머리를 늘어트린 채 입술에 버건디색 립스틱을 깔끔하게 바르고 있었다. 어서 와. 정이 말했다. 정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윤은 미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정의 집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거실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베젤도 없는 얇은 평면 스크린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길이 든 가죽 소파와 나무무늬 장판, 희미한 꽃무늬가 있는 벽지, 부엌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육인용 식탁까지 예전과 똑같았다. 변하지 않아서 오히려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현관에서 마주 보이는 정의 어머니 방문이 닫혀 있었다. 어머니는 안 계셔? 윤이 물었는데 정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정은 윤과 소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윤이 레드향 박스를 소파 앞 협탁에 내려놓았다. 같이 샀어. 윤이 말했다. 고마워. 정은 또 활짝 웃었다. 별로 준비한 것도 없는데. 정은 윤과 소에게 잠깐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소와 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윤은 문득 셋이 서로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 처음으로 여자의 나체가 나오는 영화를 봤던 것이 생각났다. 화면 속 남자가 여자의 스타킹을 찢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팬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은 화장실에 갔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기억 때문인지, 정이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밤을 보낸 날 윤은 그 쾌감도 불쾌감도 아닌 생경한 감각, 낯선 생물과 처음으로 접촉한 것 같은 느낌을 소에게만 털어놓았다.

소가 리모컨을 찾아서 텔레비전을 켰다. 골프 채널이 나왔다. 웬 골프? 소가 중얼거리고 채널을 돌렸다. 스포츠 채널을 지나고 나니 여행 채널이었다. 셋이 한때 여행을 계획할 때 자주 보던 프로그램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태국의 한 휴양지 풍경이었다. 저기 우리 갔던 데 아냐? 소가 물었다. 우리가 태국을 언제 갔었더라? 윤이 물었다. 왜, 나 캐나다 가기 전에, 추운 데 간다고 너네가 더운 데로 갔다 오자고. 그때 정이 그들을 불렀다. 둘은 텔레비전을 그대로 켜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는 스테이크와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방울토마토가 정갈하게 담긴 흰 도자기 접시가 올려져 있었고 홀그레인소스와 그레이비소스가 작은 그릇에 따로 담겨 있었다. 윤과 소가 나란히 앉았고 정은 맞은편 자리에 앉다가 아, 와인,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정이 부엌에 딸린 다용도실로 들어가 와인 한병을 가지고 나왔고, 식탁 서랍에서 와인 오프너를 꺼내 코르크 마개에 능숙하게 찔러 넣었다. 오프너 손잡이를 당기자 코르크 마개가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윤은 왠지 코르크가 빠져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식탁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정은 윤과 소의 자리 옆으로 와서 와인을 따라주었다. 정의 긴 머리카락이 윤과 소의 어깨에 스쳤다. 정에게서 짙고 달큼한 향이 났다. 정이 자리로 돌아가 자기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정이 잔을 들어올리자 윤과 소도 잔을 올렸다. 맛있게 먹자. 정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셋은 잔을 부딪쳤다.

그들은 태국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와인을 두잔씩 비웠고 스테이크를 반 넘게 먹었다. 그때, 우리 리조트 파티에서 만나서 같이 수영하고 놀았던 호주 애들 매너 좋았는데. 소가 말했다. 윤은 그중 한 남자애의 날개뼈 근처에 거의 주먹만 한 사마귀가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그게 정말 사마귀인지, 더 무서운,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 궁금했었다. 묵묵히 소의 말을 듣고 있던 정이 새의 섬에 갔던 날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윤은 그악스러웠던 새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갔던 휴양지 근처에 새의 섬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라며 리조트에서 투어를 신청할 수 있어서 셋은 투숙객 몇몇과 함께 배를 타고 다녀왔다. 거기서 깃털로 된 목걸이 같이 산 거 기억나? 그거 색 빠지더라. 소가 말했다. 난 잃어버렸어. 윤이 말했다. 나 그때, 정말 큰 새를 봤어. 정이 말했다. 너무 커서 비현실적인 그런 거 알아? 그 새가 저 멀리서 날아와 내 앞 나무에 앉았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야. 계속,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감시하는 것처럼. 고개 한번 안 까딱이고 나를 계속 보고 있는데 왠지 무서운 거 있지. 아, 나도 새 가끔 무서워. 비둘기 눈 너무 징그럽지 않아? 소가 말했다. 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은 소도 윤도 아닌, 둘 사이의 어딘가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후로, 가끔 그 새가 나오는 꿈을 꿔. 정이 말했다. 윤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고, 소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고였다. 직장까지 정리하고 온 거야? 윤이 침묵을 잘라내듯 물었다. 정이 오년 만에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올래?라고 물었을 때, 윤은 점심시간에 혼자 샐러드를 사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리 집? 윤이 되묻자 정은 응, 우리 집,이라고 말했다. 나 자취방 정리했어. 우리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윤은 그때 자세한 사정을 묻지 못했다. 그 안정적인 일자리를 왜? 소가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찍으면서 물었다. 토마토즙이 푹 튀었다. 정은 다시 와인을 한모금 마시며 웃었다. 엄마가 조금 안 좋으셔. 윤이 자기도 모르게 정의 어머니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가 안 좋으신데? 소가 물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흰 약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타 왔어? 정이 물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신발을 벗고 약봉지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정이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무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식탁으로 다가왔다. 내 남자친구야. 여기 내 제일 친한 친구들. 남자는 소와 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거실로 돌아갔다. 남자는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아서 채널을 골프 중계로 돌렸다. 남자친구 여기 살아? 소가 물었고,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 정이 말했다. 윤은 남자를 뒤돌아봤다. 남자는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고 있었고 그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편안해 보였다. 약은 어머니 약? 윤이 물었다. 응, 남자친구가 어머니한테 잘해. 정이 말했다. 어떻게 안 좋으신데? 소가 다시 물었다. 정은 와인을 한모금 더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많이 안 좋으셔. 어디가? 소가 말을 다시 꺼낼 때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거실에서 바로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 골프 중계 소리가 크게 새어 나왔다. 바람이 심하게 부네요, 변수가 되겠어요.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잔뜩 깔아놓은 곳에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 그리고 가는 비명 소리. 하으으, 하는 듯한, 잘 들으면 울음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윤은 소를 봤다. 소도 같은 소리를 들었을까? 소는 식탁 밑으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남편하고 대화 중인 듯했다.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윤이 정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 소가 여전히 핸드폰을 하면서 되물었다. 우리 엄마, 치매야. 약 때 되면 항상 전쟁이야. 정이 말했다. 방문 너머에서 한동안 무언가 뒤척이고, 부딪히고, 또 아주 가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골프 중계가 큰 소리로 계속되고 있었다. 깔끔하게 뻗어나갑니다. 곧 방문이 열리고 닫혔다. 남자의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남자는 부엌으로 와서 윤과 소가 앉은 자리를 지나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내 갔다. 남자가 다가올 때 들큼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고 윤은 생각했다. 윤은 남자 쪽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오래된 소파의 스프링이 맥없이 눌리는 소리, 구겨지는 가죽 소리, 그리고 곧 맥주 캔 따개를 따고 맥주를 목에 넘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소는 주위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윤은 고집스럽게 정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정의 말이 많아졌다.

“연구소 선배 소개로 만났어. 그 근처에 왜 군부대 하나 있잖아. 직업군인이야. 지금은 훈련 중에 무릎을 다쳐서 쉬고 있고. 자취방 정리할 때도 오빠가 많이 도와줬어. 우리 엄마 깔끔한 성격 아직 남아 있거든. 남의 손 타는 거 너무 싫어하는데, 오빠는 괜찮아하셔. 오빠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오빠도 우리 엄마 너무 좋아하고…… 치매는 진행된 지 좀 오래됐어. 내가 그동안 정신이 없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 돌보느라. 너네한테 연락도 못했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처음엔 괜찮았어. 엄마도 약 잘 챙겨 먹고, 이삼년은, 일도 다니셨어. 최근 들어 갑자기 나빠졌어. 오빠 아니면 어떻게 견뎠을지 모르겠어……”

식사를 마무리하고 와인 한병을 다 비우는 동안 정은 내내 남자에 대해 말했다. 와인 한병을 더 따려는 정을 윤과 소가 말렸고 그들은 아홉시가 되기 전에 정의 집을 나왔다. 정과 남자가 나란히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소의 남편이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는 남편 차를 타고 갔고, 윤은 눈이 쌓인 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날 저녁, 정이 오년 전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날 통장에 정의 이름으로 오백만원이 입금된 것을 보고 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돈이 입금된 시간은 새벽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윤이 은행앱의 알림을 보고 소에게 전화했다. 소는 윤보다 먼저 돈을 확인했고 바로 정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난 좀 기분이 그래. 소가 말했다. 우리가 돈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 일에 대해 그후로 뭐라고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얘 왜 이래? 소가 말했다. 뭔가 이상했어. 윤이 말했다. 어제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 어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비명 소리 같은 거 났잖아. 너도 들었지? 윤이 물었다. 무슨 소리? 소가 되물었다. 정말 못 들었다고? 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걸 어떻게 못 들어? 잘 생각해봐.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비명이 났으면 내가 들었겠지. 소가 말했다. 윤은 소와 전화를 끊고 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의 말대로 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은 정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주말이 끝날 때까지 정은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처음에 소는 별일 아닐 거라고 말했다. 또 잠수 탄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제 돈 줬으니까 볼일 끝났다는 거 아니냐고. 이전에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갑자기 남자친구를 소개해주고, 어머니 치매도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우리한테 말 못했던 건데? 속 얘기를 안 하니까, 우리만 눈치 없는 사람 만들잖아.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에게서 연락이 없자 윤과 소는 불안해졌다. 금요일 저녁 일을 마친 윤은 정의 집으로 갔다. 소가 아파트 공동 현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볼 때 정의 집 거실은 어두웠다. 사람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초인종을 눌러봤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혹시 어떤 소리가 들릴까 문에 귀를 대보기도 했다. 복도에는 오래된 아파트 특유의 냉기가 흘렀다. 윤과 소는 번갈아 가면서 정의 핸드폰에 전화를 해봤다. 신호는 계속 갔지만 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이 걱정되니 연락을 달라고 정에게 메시지를 쓰는 동안 소가 혹시, 하면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예전에 쓰던 비밀번호를 윤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과 정의 어머니 생년월일을 섞어 만든 번호였다. 십년도 더 된 건데 아직 안 바꿨을까? 여자 둘이 살면서…… 윤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현관으로 들어가자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현관 등이 켜지면서 익숙한 집 안 내부가 잠깐 드러났다. 거실은 커튼이 쳐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 골프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소파에는 남자가 자고 있었다. 남자는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소파에 깊숙이 묻은 몸을 까딱하지도 않았다. 정의 어머니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윤은 신발을 벗고 방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어야 한다. 윤은 생각했다. 거기 정의 어머니가, 치매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갇혀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정도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은 조심히 들여야 하는데. 윤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중얼거렸다. 윤이 방문을 열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방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냉기가 돌았고,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뒤에서 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좀 일어나보세요. 윤은 닫힌 방문을 모두 열어보기로 했다. 어머니 방 옆에 있던 서재는 윤이 기억하는 것보다 좁았다. 그동안 책이 계속 늘어서인지도 몰랐다. 책상에 마치 방금 누군가 보고 간 것처럼 책이 펼쳐져 있었다. 정의 어머니가 항상 읽던 책처럼 영어와 숫자가 많아 보였다. 윤은 표지를 들춰보았다. 영어 제목이었지만 해석이 어렵지 않았다. 최신 치매 치료 동향.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소설책은 보이지 않았다. 서재 옆 화장실은 창문이 없고 환기 시설이 부족해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윤이 기억하기로 정의 자취방 욕실은 샤워용품 및 청소용품으로 꽉 차 있었는데 이곳은 최소한의 세면도구만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윤은 부엌을 지나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정의 방을 열었다. 방 안에는 풀지 못한 짐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자취방에서 가져온 캐리어, 박스, 쇼핑백, 비닐봉지들. 누군가 급하게 와서 짐을 대충 던져놓고 나간 것 같았다.

소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일어나? 윤이 물었다. 소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언제더라, 중3 때인가 고1 때인가, 옷 산다고 역 안에 엄청 넓은 지하상가 갔던 거 기억나? 소가 물었다. 윤은 언제를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왜, 그때 엄청 추운 겨울이었고, 우리가 길 잘못 들어서 사람도 없고 빈 상가만 있는 데로 갔다가 잠들어 있는 노숙자 봤잖아. 냄새도 나고, 맨발에 발바닥도 더럽고. 그때 정이 자기가 산 목도리 그 남자한테 덮어주고 왔잖아. 우리가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윤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소가 하는 말을 믿었다. 정은 그런 애였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조심성이 별로 없었다.

소는 다시 남자를 흔들어보았다. 저기요, 그러고 보니 정은 그들에게 남자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윤이 방마다 켜놓은 불들로 거실까지 빛이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은 모든 부위가 작았다. 눈도 코도 입술도 작고 이마도 좁았다. 윤이 거실 불까지 켜자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남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몇번 쓸더니 한발짝 떨어져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윤과 소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는 그들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정이 연락이 안 돼서요. 소가 말했다. 남자는 아, 하고 눈을 꾹 누르더니 여행 갔습니다, 하고 답했다. 여행이요? 소가 되물었다. 어디로요? 언제 갔는데요? 저희한테는 연락이 없었는데요? 남자는 소의 질문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전쯤 갔고 저도 어디로 갔는지 잘 모릅니다. 어머니는요? 윤이 묻자 남자는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하고 즉각 답했다. 소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행을 갔더라도 연락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윤이 묻자 남자는 말했다. 종종 혼자 여행을 가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연락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머니 때문에 몇년간 고생했으니 잠시 쉬고 싶겠죠. 남자가 하는 말은 묘하게 강압적이었다. 그래도, 연락이 일주일이나 안 되는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윤이 말했다. 남자는 잠시 윤과 정 너머로 골프 채널을 보면서 말했다. 신고하시게요? 연락이 계속 안 되면 해야죠. 윤이 말했다.

“그러실 것 같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남자가 걸음을 뗐다. 윤과 소는 한발짝 더 물러섰다. 남자는 부엌을 지나 다용도실로 들어가서 품에 단지를 안고 나왔다. 윤은 몸을 곧추세웠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소는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단지를 본 듯했다. 이게 뭐예요? 소가 물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앞에 정의 한자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일자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주일 전, 그들이 정과 함께 밥을 먹고 돌아간 다음 날이었다.

정은 남자의 차에서 자살했다. 유서에는 시신은 화장하고, 훗날 엄마와 같이 납골당에 들어갔으면 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누가 안부를 물어보면 여행 갔다고 대답해주면 좋겠다는 당부가 여러번 적혀 있었다고 남자는 말했다. 남자는 정과 사실혼 관계였으며 자기가 어머니를 돌볼 것이라고 했다. 왜요? 윤이 물었다. 그게 도리니까요. 남자가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 윤은 더이상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단지를 품에 단단히 안고 있었다. 윤은 남자가 이 아파트에서 오래도록 머무르겠구나 생각했다. 윤은 남자에게 요양원이 어딘지 물었다. 어머니를 한번 뵙고 와야 할 것 같아요. 윤이 말하자 남자는 순순히 요양원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었다. 소는 남자가 안고 있는 단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정말, 정이라고요? 소는 여러번 물었다. 남자는 원하면 증명서를 가져다줄까요?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정의 집을 나와서 각자 조용히 울다가 헤어졌다.

 

*

 

남자가 정의 어머니를 모셨다는 요양원은 한시간 반 정도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서 마을버스로 삼십분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위성도시에 있었다. 타야 할 버스와 시간대를 여러번 검색해본 뒤 윤과 소는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맑은 주말이었다. 버스 타기 전에 화장실을 갔다 오는 게 좋겠다고 윤이 말하자 소가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은 지저분해서 쓰기 싫다고, 자기는 물을 많이 안 마셔서 괜찮다고 했다. 윤은 화장실을 다녀온 뒤 매점에서 물과 초콜릿을 샀고 쇼핑백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소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중간쯤 빈자리에 윤이 앉으려는데 소가 뒤에 앉자고 말했다. 뒷자리 위험해서 싫은데. 윤이 말했다. 왜, 옛날 같고 좋잖아. 소가 말했다. 어릴 때는, 버스 뒷자리에 앉는 게 좋았다. 높고, 더 많이 흔들렸으니까. 셋이 함께 나란히 앉을 수 있었으니까. 윤은 고개를 저었다. 멀미 나. 그러고 나서 앉으려던 자리로 들어갔다. 소가 옆자리에 앉아서 쇼핑백을 발밑에 내려놓았다.

처음에 소는 정의 어머니를 보러 가자는 윤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의 어머니를 만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고. 정에게 받은 돈을, 어떻게든 어머니께 돌려드리면 좋겠다고 윤이 말했다. 철마다 좋은 옷이라도 사서 넣어드리면 좋겠다고. 환자에게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소가 물었다. 그런 게 어머니한테 무슨 도움이 돼?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가야 한다고 윤은 말했다. 어머니가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예쁜 옷을 사드리고 싶었다. 윤의 기억 속에 정의 어머니는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 집으로 들어오던, 옷차림새가 완벽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윤이 백화점에서 옷을 골랐다. 울과 캐시미어 혼방의 스웨터를 하나 사서 포장했다. 소는 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버스가 출발한 뒤 윤과 소는 각자 이어폰을 끼고 창밖 풍경이나 핸드폰을 보면서 시간을 견뎠다. 주말이라 고속도로 진입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소가 핸드폰을 한참 보다가 윤을 툭 쳤다. 창밖을 보고 있던 윤이 고개를 돌리자 소가 화면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공유 드라이브가 열려 있었다. 셋이 여행을 다닐 때 각자 찍은 사진을 모아서 올려놓던 드라이브였다. 여행별로 폴더가 정리되어 있었고 소는 윤에게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윤은 목록을 보다가 그들이 마지막으로 갔던 여행을 골랐다. 육년 전, 12월에 갔던 제주도였다. 지금처럼 겨울이었고, 두달을 매일같이 야근하던 소가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쌓인 연차를 쓰고 싶다고 해서 가게 된 여행이었다. 서둘러 계획을 잡느라 가까운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윤이 폴더를 열고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기억이 사진만큼 생생하지 않았다. 우리가 여기도 갔었나? 윤이 자꾸 물었고 소는 이때 우리 진짜 젊었다고 중얼거렸다. 한참 사진을 넘기던 중에 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과 소가 함께 찍힌 사진, 윤이나 소가 각자 찍힌 사진은 많았는데, 정이 나오는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윤이 정이 안 보인다고 말하자 소는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말했다. 소는 셋이 함께 사진을 많이 찍었었다고, 자기가 모두 여기 올려놓았었다고 했다. 소는 모든 폴더를 하나씩 전부 열어보았다. 십여개가 넘는 폴더에 만 칠천장이 넘는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정의 그림자나, 정의 머리카락이라도 스친 사진은 한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은 사진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삭제했나보다. 나쁜 년. 소가 말했다.

윤은 여행을 가지 못하고 셋이 함께 공원을 걷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은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윤은 정에게 왜 그렇게까지 말하느냐고 반문했다. 왜 그렇게까지 자책하느냐고. 사기를 친 사람이 나쁘지, 네가 왜 나쁘냐고. 왜 그렇게까지 미안해하느냐고.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소가 말했다. 소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다시 이어폰을 꼈다. 윤은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윤은 버스의 엔진 소리와 도로의 소음, 주변 사람들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는 시트가 쓸리는 소리, 희미한 말소리 등을 묵묵히 들었다. 윤도 정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 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정에게 그때 다른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시외버스에서 내려서 작은 터미널을 빠져나와 마을버스를 기다릴 때에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윤이 초콜릿을 꺼내 잘라서 소에게 내밀자 소는 말없이 초콜릿을 받았다. 해가 높았다. 소는 손바닥에 올려진 초콜릿 조각이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녹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 옷 버스에 두고 내렸다,라고 말했다. 어떡하지. 미안해, 나 정말 왜 이러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소는 발을 구르며 차 한대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를 연신 둘러보았다. 소는 초콜릿이 녹고 있는 손바닥을 그대로 펼친 채로, 도로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쇼핑백을 싣고 떠난 버스가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윤은 남은 초콜릿을 천천히 입속에서 녹이면서 소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로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