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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나’는 왜 ‘너’인가

 

 

박소란 朴笑蘭

시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얼마 전 이연주(1953~92)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꼭 30년 전인 1991년 10월에 발간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세계사). 이 시집을 아끼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면 언제나 묘한 열기를 감지하게 된다는 것. “거리마다 화농한 살덩어리/불그스름한 피고름이 질펀하오.”(「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와 같은 적나라한 현실 인식 때문인지, “배가 고파요 내 죽음을 도마에 올려 놓고 실제 한번 토막내 보시라구요”(「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 2」) 등 도처에 산적한 죽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어쨌든 시집을 채운 여러 강렬한 시편들 가운데 유독 마음을 붙드는 시는 이런 것이다.

 

달아오른 한 대의 석유 난로를 지나

진찰대 옆에서 익숙하게 아랫도리를 벗는다.

양다리가 벌려지고

고름 섞인 누런 체액이 면봉에 둘둘 감겨

유리관 속에 담아진다.

꽝꽝 얼어붙은 창 바깥에서

흠뻑 눈을 뒤집어쓴 나무 잔가지들이 키들키들

그녀를 웃는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

그날도 함박눈 내렸다.

 

검진실, 이층 계단을 오르며

그녀의 마르고 주린 손가락들은 호주머니 속에서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아 꼬물거린다.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몇 번의 마른기침 뒤 뱉어내는

된가래에 추억들이 엉겨 붙는다.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매음녀 4」 부분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매음녀’ 연작 중에서도 이 시는 여러모로 놀라운데, 지금에 와 특히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시의 후반이다. 마지막 두 연, 매음녀인 ‘그녀’가 쉼표(,)를 남기고 불쑥 자취를 감춘 순간.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주어를 잃고 부유하듯 이어지는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쉬고 싶다.//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어떤 사람들일까……”라는 아픈 독백은 누구의 육성일까. 표면적으로는 분명 생략된 ‘그녀’의 것이겠으나, 여러번 들여다볼수록 이는 왠지 시인의 것에 가까워 보인다. 어느 틈엔가 불쑥 ‘그녀’가 시인이자 화자로 전이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그녀’라는 타인을 향한 시인의 이입 혹은 몰입이라고 한다면.

시집 전반을 통해 이런 광경을 거듭 마주하다보면 시인의 생애가 왜 그다지도 짧을 수밖에 없었는지 감히 짐작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그 형편을 세세히 파고들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순간 ‘그녀’를 ‘나’로 받아 안은 시와 시인의 진정(眞情) 앞에 한 사람의 독자인 나는 어떤 신비와 경이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감정에 진정으로 감응하는 시. 타인과의 교통을 이끄는 시. 문학의 본령을 상기하도록 하는 이런 시가 지닌 힘은 실로 강력할 수밖에. 그러나 이런 시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대체로 자신 속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으니까. 어떤 경우 이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라기보다 세계와의 재빠른 ‘손절’로 읽힌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는 지워지고 ‘나’만 남아 부유하는. 자신을 타인과는 다른 특별한 주체로 규정한 뒤 그 비대해진 자의식을 고스란히 노출하기도 한다. 자기중심의 여느 유아적 유희가 그렇듯 이는 결국 현실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한층 깊은 고립으로 이어진다. (나의 시 쓰기 역시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안다.)

세계와의 유기성을 구축하고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은 분명 일정한 수고와 에너지를 요한다. 복잡한 현실의 면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패배감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 손쉬운 허무와 감상에의 유혹을 이긴 결과일 테니까. 이런 에너지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최근의 몇몇 시는 여전히 이같은 질문을 가능하게 했다.

 

먼저, 유병록. 두번째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를 즈음한 유병록은 한창 ‘고통’의 시인이다. 스스로 “슬픔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다행이다 비극이다」)임을 숨기지 않고 자신만의 내밀한 시적 풍경을 그려낸다. 이야기의 초점은 대체로 한 ‘죽음’에 맞춰져 있다. 시인은 그것을 “죽은 이의 몸을 태워 한줌의 가루로 만든” ‘불’의 사건이라 명명한다. 죽은 이는 “이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지도 않”는데, 졸지에 “남은 자”가 된 그는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불의 노동」)곤 하는 것.

이 결정적 사건을 두고 취하는 시인의 자세는 조금 특별하다. 그는 “산 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가”(「질문들」) 자문하고, “고통을 연주하는 음악이 아름다워도 될까”(「악공이 떠나고」) 회의한다. 일반의 작가적 검열이라기보다, 죽음의 위력 앞에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과 자책 등의 감정이 합쳐진 일종의 결벽적 산물로 보인다. 동시에 그 고통이 정련되고 원숙해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거듭된 자문과 회의는 결과적으로 일정한 균형감을 조형해내는데, 덕분에 그의 화자는 자기 자신에 빠져 막무가내로 허우적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생활의 현장을 묵묵히 지키며 본연의 실물감을 유지한다. “솟구치는 울음을 밀어넣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인사를 하”고, “밥을 꼭꼭 씹어 먹”는다. “말끔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한다(「사기」). 이 모두가 당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척’의 태도일지라도 나름의 절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남은 자”인 자신은 결코 ‘불’의 사건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 나아가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눈물도 대꾸도 없이」)는 점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리고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이, 자신과 타인의 사정이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지점으로 뻗어가는데 바로 여기서 하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일찍이 혼자만의 방에서 나온 시인은 눈길과 발길이 닿는 도처에서 다양한 상실을 목도하고 또 체험한다.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 앞에서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메모를 읽게 되었을 때, 가만히 헤아려본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슬픈 일이 있었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더는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결심하는 사람.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 사람(「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생활 가장자리 작고 평범한 ‘이별’에서도 한 세계의 멸망을 본다. 그리고 최선으로 그 멸망을 기린다.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물에게는 영혼이 없다/쓸모가 다한 물건을 간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면서도 폐차되는 자신의 중고차를 못내 안타까워한다. “이름을 지어주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한다”(「52수6934」)라는 말과 달리 이 시의 제목은 얼마나 견고한가. 삶과 죽음이 버무려진 매 순간 애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시에 닿게 된다. 시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시다.

 

가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녀오는 일 있다

그곳은 대개 상중(喪中)이다

 

나는 짐작한다

그들이 지닌 고통의 무게를

(…)

 

바람에 휩쓸려가지 않는 기운이 있다

망토처럼 나를 둘러싸고 물러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데리고 내 마음으로 돌아온다

 

짐작을 넘어

불길함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쓴다

일인칭으로 쓴다

조문객이 아니라 상주가 될 때까지

—「짐작을 넘어」 부분(『시산맥』 2019년 봄호)

 

‘그들’의 고통을 “짐작한다”에서 “짐작을 넘어”로 나아간다는 것. “일인칭”, 즉 “상주”가 된다는 것. 이같은 확장의 동력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통이다. 그의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한 고통. 스스로가 “상중(喪中)”이 아닌 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상중”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지도, 겪지도 못하는 법이므로. 그러나 시인은 ‘상주’를 자처하는 일조차 감히 지나치다 경계한 듯하다. 그런 이유로 이 시는 시집에 수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또한 시인 특유의 균형감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끝내 이야기한다. 아픈 자신이 아픈 ‘당신’과 얼마나 진심으로, 얼마나 오래 함께 울 수 있는지. 울며, 울음을 훔치며 힘주어 말한다. “비가 내리고/당신이 우산을 펼쳤으면 좋겠다”(「우산」)고. 우리가 함께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채길우의 시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한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이제 막 첫 시집 『매듭법』(문학동네 2020)을 낸 이 시인의 시선은 어째서 줄곧 ‘작은’ 존재들을 향해 있을까. “똥 더미에서조차 싹을 터뜨리는/헐겁고 흥건한 풀”(「적상추」)이나 “날개 다친 새”(「지하철의 앉은뱅이」), 또는 “늙은 손과 갈라진 손톱들”(「기타」). “스무 살의 계약직 신입 사원들”도 있다. “사무실 콘센트마다 경쟁적으로/포스트잇을 붙여놓”는 이들. 거기에 적힌 “오늘도 화이팅/내일은 단결/힘 내세요/그치만 괜찮습니다”와 같은 글귀들(「민들레」). “하염없이 메마르고 작은 것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하는 시인은 아무래도 “작은 것들”의 힘을 굳게 믿는 듯하다. 작고 보잘것없는 씨가 머지않은 어느 때에 이르러 “움튼 싹이 넓어지고 파란 줄기가 단단해져” 나무가 될 것을. 그 믿음으로 “씨앗을 입안에서 굴”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매미 체리」).

그러다보면 어느 날은 이런 식의 진전이 가능해진다. 스스로가 바로 그 작은 것 자체임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깃털 없이 기낭도 꼬리도 없이 타인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그렇게 시인은 “다시 태어난”다. 「탁란」에서 화자는 “검은 털로 덮인 둥지에는 형제들의 냄새가 가득하고/울창한 수풀에 가려진 빛 속에서/아직은 내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이내 “나는 내가 부끄러워/목놓아 우는 법을 배우고//울면, 나는 자라날 것 같다.”라고 조심스레 선언한다. “나보다 작은 것들”, 그 “형제들”에 둘러싸여 “관심을 받으며” 스스로가 이 세계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감각한다는 것. 작은 존재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자신 역시 작은 존재의 일원임을 깨닫는다는 것. 작고 사소한 주변의 것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귀한 발견이 채길우의 시에는 있다.

이는 ‘나’와 ‘너’, 우리의 긴밀한 관계를 자각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흐른다.

 

네가, 를 니가, 로 부르지 않고

내가, 로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해

나와 구별되지 않으려는 너에게

춤을 청하기 위해 다가갑니다.

손을 맞잡는다면 수줍겠지요.

(…)

심장은 박자를 타고

땀방울이 미끄러지기 시작하겠죠.

그러다 몸이 마음에 섞여

방금 나라고 하지 않았어?

너라고 하지 않았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울 앞의 연습생처럼 두려움 없이

내가 행간을 크게 내디뎌 뛰어오르려 할 때

너를 주어로 부르는 일은

사투리 같은 이유와 몸짓이지만

긍정에 대한 서투름을 서두르지 않도록

내가 사랑해도 좋겠습니까? 물으면

한참을 머물다 얼굴을 들며

네, 라고 문장을 고쳐주는 사람이 좋겠습니다.

—「맞춤법」 부분

 

이 시를 읽고 나면 ‘내’와 ‘네’를 다시금 발음해보게 된다. 유사한 발음이 불러온 묘한 감흥을 곱씹게 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일상의 습관이나 규칙에 위트있게 저항함으로써 시인은 ‘나’와 ‘너’ 사이의 벽을 가볍게 허문다. “두려움 없이” 행간을 내디뎌 뛰어오른다. 그것이 기실 “사투리 같은 이유와 몸짓”, “긍정에 대한 서투름”이라 해도. ‘나’와 ‘너’ 사이의 근본적 동일성을 전제로 관계를 모색한다. “조금 더 가까이/하나로 나뉘지 않는 둘처럼” 우리의 모습을 정립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예감한다. 지금이라도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한다면 “우리도 서로를 향해 어깨를 기울인 채” “녹을 듯 이어지며 끊임없이 타오르는/뜨겁고 흔들리는 빛이 될 수 있”(「촛불」)지 않을까 하고.

시인이 지닌 이같은 건강성은 결코 생래적인 것이 아니다. “역 앞의/노숙자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본다”면서도 “그러나 나는 진정 그들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그들에 대해 쓴다”라는 시인의 자백은 너무 정직해서 아프다. 적당히 취한 연민이 아닌 치밀한 성찰의 흔적이므로. “내 삶이 세상에서 가장 엉망진창일 때조차/나는 광장을 지나쳐 걸으며/종착역의 가장자리보다 더 먼 곳에서 살아왔다”는 ‘나’는 “역 앞의/노숙자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볼 때 “나는 정말인가,”(「수원역」) 묻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정말인가, 나는 정말인가 되뇜으로써 ‘그들’에게로, 당신에게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김은지는 누가 뭐래도 ‘마음’의 시인이다. 사전에서 ‘마음’을 찾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어떤 일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호의(好意)의 감정’ 등의 풀이가 나오는데, 모두 그의 시를 일컫는 말인 것만 같다. 잇달아 낸 첫 시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디자인이음 2019, 이하 『책방』)와 두번째 시집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걷는사람 2019, 이하 『고구마』)는 이같은 마음의 작용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결을 지닌다. 일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윳빛으로 소박하게 떠다니는”(「별자리」 『고구마』) 각각의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여념이 없는 것.

처음,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책방』)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로 시작된다. “비가 와서 산에 안 가고/서점엘 갔다”는 화자는 “다랑다랑/빗방울 꽃 피는”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껏 “나는 너무 내 마음을 몰랐다”는 것을. “내 마음은/비 오는 날을 위해/만들어졌다”는 것을.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비 내리는 풍경에 눈과 귀를 빼앗긴 사람의 얼굴처럼 시는 내내 고요하지만, 어떤 유난도 없지만 어느새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그런 그의 시에는 아픈 개를 돌보며 “빈틈없이 이불을 꼭꼭 덮어 줄 수 있는/겨울 고마움”이 있고(「고구마」 『고구마』, 이하 이 시집에서 인용),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기 위해 “겨우 찾은 단어”인 “보고픔”이(「픔」) 있다. 호감에서 우러난 맑고 순한 마음의 동작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런 마음이 뭇 상심을 회복하도록 돕는 쪽으로 기운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수시로 아픈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한다. 괜찮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달래고 감싸는 일을 반복한다. “하얀 어둠/길이 보이지 않”는 이에게 그의 화자가 건네는 말은 “빛을 찾아요/무섭고/심심하니까”. 이어 “이렇게 추워도/나중에 오늘은/기억 안 나겠지”. “오늘 여는 약국이/왜인지 닫혀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어이 ‘약’을 건네고 싶어하는 마음, 또 마음(「오늘 여는 약국」). 그의 심성은 “야구부의 함성”이 들리는 한낮의 공원에 앉아서도 빛이 아닌 그늘 쪽을, 공원 옆 병원의 앓는 사람 쪽을 더듬는다(「야구 연습」).

시인이 즐기는 표현을 빌려 이를 ‘경청’의 방식이라 칭해도 좋겠다. “소리를 만”지는 행위. “상처 입은 것에 예민한 상어의 반응처럼/잎사귀의 바삭한 진동을/등뼈로 듣는” 일. 시인은 좀처럼 관심을 거둘 수 없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크고 작은 현상들에. “상처 입은” 모든 것에. 때문에 언제나 “어떤 것일까/안녕이라는 소리의 감촉은” 하고 바짝 귀를 세운다. 그 “아주 아주 작은”(「상어」) 것들의 기색을 헤아리는 일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아울러 가늠하는 것인데, 이처럼 마음을 살피는 일이야말로 곧 사는 일임을, 참으로 살아가는 일임을 시인은 익히 알고 있다.

 

바쁘시죠,

내가 먼저 묻는 건

기꺼이 외로움을 선택하고 싶어서

 

혼자 밥을 잘 먹고

일기장을 버릴 수 있고

책에서 가붓하다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땐

메모장에 적어두었지만

 

오늘은 듣고 싶었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담담하게 엄마가 돌아가신 얘기를 하며

이사해야 하는 사정을 말하는데

달빛이 드리우는 방에 산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두 시간씩 전철을 타고 와

후회를 털어놓고

요즘 듣는 노래를 물어보는 밤

 

켠 적 없는 블루투스가 연결되었다

—「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부분

 

‘혼자’를 잠시 놓아두기로 한 ‘나’는 예의 듣기를 결심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얘기”, “달빛이 드리우는 방에” 사는 얘기. 슬픔의 이야기들을. 그런 결심은 결코 쉽지 않아서 “오늘은”이라고 힘을 줘야 한다. 혹 ‘나’는 지금껏 실패했던 것일까. “이름을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돌아선 많은 날들을 이미 경험했고 그것을 후회했던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굳게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도.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실패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요즘 듣는 노래를” 묻는 일로 듣기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요즘은 어떤 노래 들어요?’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질문은 그러나 실로 놀라운 파장을 일으키는데, 나와 ‘그 사람’은 순식간에 접속된다. ‘듣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그 자체로 반짝 빛을 발한다. “켠 적 없는 블루투스가 연결”된 밤. 마치 기적처럼 나와 그가 ‘1개’가 되는 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순간은 다름 아닌 이런 밤인 것이다.

 

그리고 강성은.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시색으로 갖춘 시인인 만큼 앞서 언급한 시인들과는 분명 다른 경향으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강성은의 시를 꼭 함께 언급하고 싶은데, 여기서 그의 활달한 상상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대략이나마 살피는 일은 중요할 듯하다.

시인이 애호하는 ‘잠’과 ‘꿈’이라는 장치, ‘유령’과 같은 대상은 세번째 시집 『Lo-fi』(문학과지성사 2018)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서 하나의 주요한 키워드를 추출하자면 아마도 ‘계면(界面)’이 아닐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물질의 경계면, 그러니까 낮과 밤, 빛과 어둠,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어느 지점 말이다. 상반된 시공간을 무시로 넘나드는 화자들은 어느 순간 기묘한 계면의 자리에 서서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읊조리곤 한다.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햇볕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고, “죽은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0℃」).

그렇다. 여기에는 “죽은 후에도 가끔 산책을” 하는 이, “죽은 후에도 가끔 시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이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인 척 온종일 카페에 앉아 있”는 이도 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계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이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이 아웃사이더들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하나같이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 그만큼 무력하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거나 “혼자 동물원에 가는” 혹은 “눈이 내릴 땐 죽고 싶은” 이들(「Ghost」 43면). 우리는 이미 이런 이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은 어떤가.

끊임없이 이들을 찾아 호명하는 시인은 어떤가. 시인의 화자들은 주로 “식판을 들고 앉을 자리를 찾는 아이”. 점심시간이 끝날 동안 혼자 “식은 밥과 국을 들고 서 있”는 존재.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 오리너구리 같은 ‘나’(「Ghost」 57면)는 자신이 바라보는 이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창밖에 선 존재. 사람들이 있는 ‘안’을 바라보다 창에 돌을 던져도 결국엔 자신만 “피투성이가 되고/창문은 깨지지 않는다”(「채광」).

때문에 시인은 분리할 수 없다. ‘나’와 ‘너’를, 우리 계면의 존재들을.

 

이대 앞에 살 때 자주 봤던 두 사람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처럼 머리를 세운 거구의 남자

한여름에도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던 까만 맨발 여자

전철역 주변을 서성이며 혼자 중얼거리다

가끔 하늘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이 되면 저들은 어디로 돌아가는지

밤이 되면 저들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

 

언젠가 꿈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거나 발로 차기도 했는데 어떤 낯선 얼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눈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왜인지 나는 일어날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때 하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새들은 멀리로 날아가고

왜인지 밤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곳은 평화롭겠지

—「그곳은 평화롭겠지」 전문

 

이런 시는 의미심장하다. 여느 때와 같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처럼 머리를 세운 거구의 남자” “한여름에도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던 까만 맨발 여자”, 즉 아웃사이더이자 ‘ghost’인 대상들을 바라보는 화자는 문득 그들의 ‘밤’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곧바로 현실의 자장을 벗어나 “언젠가 꿈속”으로 향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 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고,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거나 발로 차기도 했”다고. 화자는 이 순간적인 이동을 통해 스스로 막다른 곳으로 향한 뒤 ‘저들’과 다름없는 ‘ghost’가 된다. 혹은 이미 오래전 그런 존재였음을 고백한다. (알다시피 ghost라는 단어에는 유령, 귀신 외에도 (특히 나쁜 일에 대한) 기억, 환영의 뜻이 담겨 있다.) 공감을 바탕으로 기꺼이 타인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시인의 수용적 행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함께 더불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슬픔은 그러나 어째서 “여전히 평화로”운가. 왜 “밤은 다시 오지 않”고 환한 낮만이 계속되는가. 이런 평화, 이런 낮은 과연 진짜인가.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겠다.

시인이 부단히 증언하는 세계를 보자. 지금 이곳은 “우린 다 죽었지/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상태(「유령선」)에 처해 있다. 연이어 출간한 네번째 시집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현대문학 2018)에서 찾자면, 결국 “재앙은 계속”되고 “1분 후 다음 재난 방송이 시작”되는, 그럼에도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일요일 오후”(「재난 방송」)와도 같은 것. 무수한 ‘별일’들이 무사(無事)로 가장된 불안과 혼란의 나날.

이로써 헤아리게 된다. 화자가 끊임없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이유. 일상에 발을 딛고 있을 때조차 시인의 시선이 먼 곳을 응시하는 까닭, 상상력의 기원. 지금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 실재하는 세계의 면면을 현시할 수 있기 위해.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면의 진실, 우리의 민낯이니까. 그리고 그 시작은 어쩌면 ‘저들’에서 ‘나’를 발견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선이나 한계는 무색해지고, 화자는 자유롭게 이런저런 경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 시인이 종내 그리는 것은 평화, 너와 내가 같이 빚어내는 일상의 온기가 아닐까.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밝은 미래」).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쉽게 이룰 수 없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해야 겨우 가능한 ‘미래’임을 안다. 지금의 우리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나는 이 글이 행여 특정 주제나 관점을 지닌 시만을 가치롭다 고집하는 것으로 잘못 읽힐까 두렵다. 시에 대해서라면 나는 정말이지 성실한 독자이고 싶다. 다양한 시와 편견 없이 만나고 싶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데 있어 그 시가 어떤 경향성을 띠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시에 사로잡히는 무방비의 독자인 것이다. 이 지면에서는 다만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주체에 대한 지지를 나름으로 피력하고 싶었다. 이들 시인이 지닌 선한 세계관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에 대해. (뇌리를 스치는 몇몇 시인들이 더 있지만 늘 그렇듯 지면은 넉넉지 않다.) 모든 시는 각각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 가능성이 마침 ‘너’에 대한 ‘나’의 진정이라니, 참 멋진 일이다. 모두가 자신에만 깊숙이 몰두해 있는 요즘이기에 더욱. 새삼 내가 쓰는 시를 돌아본다. 나의 ‘나’는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려가는지. 얼른 이 빈약한 원고를 마무리 짓고, 시 쓰는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