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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팬데믹 시대의 동물, 그리고 인간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공저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전후’』 『전후의 탈각과 민주주의의 탈주』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등이 있음.

indimina@gmail.com

 

 

팬데믹 속의 동물권

 

지난 7월 19일 법무부는 브리핑을 통해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선언적 조항을 민법 제98조의2 1항으로 신설한다고 입법예고했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 동물권에 대한 입법화가 이루어진 만큼 우리도 반대보다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대세이다.

김지혜 변호사는 법 개정에 대해 “팔이 네개였다면 네 팔을 모두 벌려 환영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동물이 물건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앞두고, 어느 보호소에서 복날 즈음하여 평소라면 입양이 거의 되지 않는 대형견 십수마리가 입양을 갔고, 그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라는 소식을 전했다.1 복날이면 개를 먹는 문화가 아직 종식되지 않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전언을 접하면서, 서울올림픽을 즈음하여 개고기 문화가 서구에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했던 것이나, 불과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야만으로 보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성토했던 선배 학자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이제는 대도시 거리에서 ‘보신탕’이라는 문구를 보기보다는 동물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7월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칠성 개시장의 완전 폐쇄를 위해 녹색당 대구시당, 동물자유연대 등 15개 동물단체 및 진보정당이 ‘마지막 남은 칠성 개시장 완전 폐쇄를 위한 연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27일 대구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칠성 개시장을 완전히 폐쇄해야 한다고 동의한 시민 약 1만명의 서명을 모아 대구시에 전달했다. 대구시는 “업소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고 내년 5월까지 칠성 개시장을 폐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2

사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동물들은 한층 더 우리에게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시기에 반려동물들과의 접촉이 우리의 격리생활을 위로해주면서, 그들을 단순히 돌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 먹먹한 불안의 시간을 함께하는 존재로서 인지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코로나 시기에 반려동물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추듯 8월 1일에는 전북 임실에 전국 최초의 공립 반려동물 장묘시설이 개장했고,3 육식을 기피하는 사람을 위한 대체육 시장의 성장에 대한 기사를 접하는 일도 많아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시행된 동물에 대한 입법은 어떤 모순도 없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국은 다채로운 육식 문화와 이에 대한 욕구를 실시간으로 실현시켜주는 배달 문화, 이를 뒷받침하는 축산업이 발달한 나라라는 점을 상기하건대 한국에서 동물권의 구체적 법제화와 실질적인 규제는 향후에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육식 문화가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문제와 전염병, 다른 한편으로는 축산업과 노동권 등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일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김지혜 변호사의 우려처럼 “동물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목소리는 언제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물에 대한 법제화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른바 ‘선진국’의 일환이 되었다는 자기만족 속에서,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들로부터, 혹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거나 집단 도축되는 동물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건가?

 

 

동물을 법의 테두리로 가져오는 것의 의미

 

동물권은 동물을 법의 테두리 안에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법 없이 살아온 동물들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온 것일까.

앨러스데어 코크런(Alasdair Cochrane)의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Should Animals Have Political Rights?, 2020, 한국어판 창비 2021)은 이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코크런에 의하면 피터 씽어(Peter Singer)가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 1975, 한국어 개정판 연암서가 2012)에서 쾌고감수능력의 관점에서 동물도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 이래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어왔고 이를 통해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것이 새로운 정치의 구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동물과 어우러진 인간의 정치적 생활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17면)를 동물권의 제도화 가능성 속에서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치적 생활’은 인간에 의한, 비인간에 대한, 대등한 법적 지위 부여의 가능성 탐구로 집약된다.

물론 코크런이 동물의 법제화를 그저 낙관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이 그러하듯이 동물에 관한 권리 역시 법적 질서에 들어가면 법 내부의 위계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정해지게 되는데, 그때 동물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에 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에 대한 학대를 표현하기 위해 동물을 이용한 독일의 한 예술가가 동물복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지만 예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독일 헌법 5조에 따라 전시가 허용된 사례는, 민법상의 동물보호법만으로는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동물을 보호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은 최상위법인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동물에 대한 폭력이 모두 저지되는 것도 아니다. 코크런은 헌법에서 “동물에게 인간과 대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67면)하지 않는 한 설사 동물을 존중하거나 연민을 내포한 헌법 조항이 존재하더라도, 어떤 국가도 산업화된 축산업이 수반하는 잔혹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따라서 코크런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인격권’과 ‘성원권’, ‘민주적 대표권’의 부여 가능성까지도 검토한다. 동물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니, 외국인이나 난민처럼 아직 인간 중에서도 참정권을 획득하지 못한 자들이 많지 않은가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장애인의 존재가 부각됨에 따라 사회가 장애인을 인식하는 방식이 크게 바뀌었고, 교통, 건축 규정, 도시계획 등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끼쳤”(133면)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가 없었던 불과 백여년 전 거리, 말과 소가 인간의 기본적인 ‘교통수단’이었던 시절의 도시 풍경을 조금만 상상해보면, 동물이 없는 오늘날 거리의 풍경이야말로 우리의 문명이 어떤 정치적 행위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코크런의 말대로 “동물에서 정치를 분리하는 일”(146면)을 거듭하고 기술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동물의 흔적을 지워버린 근대적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종공동체로서의 정치 공동체에서 동물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동물은 이제 대량으로 사육되는 축산 공장 속으로 은폐되거나 경마장이나 동물원 같은 교외의 특수한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멀어지게 되었다. 코크런의 주장대로 만약 인간이 동물을 지역의 주민으로서 인정해왔더라면, 우리의 도시 풍경은 지금과는 또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예컨대 자전거도로처럼 말〔馬〕 전용도로나 동물 전용 화장실이 있는 그런 거리 말이다.

요컨대 코크런이 말하는 동물권은 동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확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장에 동물을 어떻게 포섭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고민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생태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 간 경계 재설정의 필요성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터 정치의 영역에서 동물들을 추방했을까? 동물에 관련한 인문학적 연구와 담론 대부분은 ‘인간’이 유일하게 탁월한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현재까지 서구의 정치학에서 인간 이외의 동물을 정치 주체의 틀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1995, 한국어판 새물결 2008)는 이러한 서구 정치가 어떤 문제점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주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에 의한 예외상태 선언을 통해 인간의 법적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을 마치 동물처럼 살해하더라도 무방한 조건이 서구의 정치철학에 내장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는 푸꼬(M. Foucault)의 생명관리 통치와 함께 생명정치 연구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게 했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을 통치 유지를 위한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권력에 문제를 제기한 푸꼬나 인간으로부터 법적 권리를 박탈해 동물처럼 죽여도 되는 주권권력을 문제시한 아감벤도 동물을 정치활동의 바깥에 놓는 서구 정치학의 전통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동물을 가축화해 산업자원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동물축산복합체’의 허용이야말로 예외를 선언함으로써 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주권적 권력의 행사 프로세스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인간 동물의 ‘동물화’라는 폭력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감벤과 푸꼬는 서구 형이상학의 핵심인 ‘인간’중심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환기하는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즉, 그들이 인간을 동물의 지위로 떨어뜨리는 온갖 권력의 작동을 방어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이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과 정치장에서의 동물의 배제를 암암리에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류세 개념의 확대와 함께 포스트휴먼 논의 속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해러웨이(D. Haraway)의 「반려종 선언」은 남성중심주의적·개발중심주의적 인간중심주의의 대안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기계론적 인식론에 입각해 인간과 동물, 식물과 기계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하고 ‘잘 살고 잘 죽기 위해 그리고 최대한 잘 죽이기 위해’ 다종과 함께하기를 주장하는 그의 제안은 매우 매혹적인데, 이에 대한 실천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코로나19 등 공진화의 결과물로서 출현하는 변이 바이러스는 다종과 연대하면서 ‘잘 살고 잘 죽기’가 말처럼 쉽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진작부터 해러웨이의 주장을 생활세계에서 모두가 실천했다면, 애초부터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팬데믹은 인간이 다른 종으로부터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냈으며, 이러한 취약함으로 인해 새로운 혐오와 경제적 격차의 심화가 발생할 수 있음을 주지시켰다. 우리 모두가 ‘잘 살고 잘 죽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은 다른 종과의 동거와 공진화를 유보하고 당분간 더 확대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격리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동물과 과연 어떤 관계를 맺어왔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인간학적 기계를 ‘작동중지’시키자고 제안”하는 아감벤과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복잡화’하자”고 주장하는 데리다의 동물론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 그들 이론의 ‘불충분함’은 “역설적으로 동물 문제를 사유할 때 어떤 종류의 ‘인간중심성’이 불가피함을 일러”준다고 하며, 이를 감내하고 “어디에 경계가 필요하고 또 어디에는 경계가 무너져야 하는지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제안하는 황정아의 의견은 참조가 된다.4 동물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들에 인간중심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이전에, 취약한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을 재설정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예컨대 전염병이 동물 영역에 대한 인간의 침범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은 동물 고유의 영역(가령 박쥐와 같은 야생동물이나 보호종)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이미 인간과 생활세계를 공유하는 동물들과는 기존의 경계선을 더욱 허무는 일, 즉 그들을 위해, 혹은 그들을 대표해 우리의 법을 바꾸는 일도 필요하지는 않을까.

 

 

반려동물로서 돼지의 가능성과 한계

 

동물과 인간에 대한 경계 설정과 관련된 이러한 고민은, 결국 우리 인간들에게 동물의 이미지가 결코 일원화되지 않을 만큼 동물이 다양한 종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과 인간의 관계 역시 역사적으로 고정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 속에서 개, 고양이와 더욱 가까워진 한편으로, 불과 삼사십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대표적인 ‘반려동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돼지와 닭, 소와는 더욱 멀어졌다. 가축을 좀처럼 볼 수 없게 된 것과는 반대로 돼지와 닭, 소의 고기는 너무나 흔해졌고, 심지어 어느 틈엔가 ‘전문 뷔페’와 ‘무한리필’ 가게까지 생겼다. 식을 줄 모르는 ‘먹방’ 문화 속에서 반복되는 허기와 과식은, 내가 먹는 것이 어떻게 지금 눈앞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겨를마저 빼앗아버렸는데, 생산지와 소비지의 분리야말로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고기를 소비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일 테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에 쥔 『돼지를 키우는 채식주의자』(이동호, 창비 2021)는 무엇보다도 상품으로서의 고기 이전, 가축으로서의 동물의 ‘현실’을 간접적이나마 경험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귀촌한 뒤 산업화된 축산업의 실태를 알고 채식을 결심한 저자가 대안축산연구회로부터 받은 돼지 세마리를 직접 키우고 그중 한마리를 잡아먹을 때까지의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동물에 관심이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건 이 책이 가축으로서의 동물 돌봄을 단순히 낭만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저자 이동호는 돼지 돌봄이 파생시키는 각종 번거로움과 불쾌감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 경험을 통해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없이 경제 논리에 의해 동물을 기계적으로 사육하고 도살해 상품화하는 축산업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인간 중심의 기계식 사육 대신 친환경적인 ‘동물복지’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도축’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되묻고(139면), 돼지를 직접 키우는 동안 자신과 돼지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육식 자체를 죄악시하는 이분법적 채식 담론에도 의문을 던진다(155면).

전의령이 지적하듯 “‘행복한 삶을 영위한 동물이 더 좋은 고기를 만든다’라는 논리에 의해 지탱되는 동물복지적 축산업은 동물의 본연적 가치가 도살되고 또 먹히는 데 있음을 당연시하고, 그 속에서 폭력과 착취를 비가시화하는”5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채식주의자라면 누가 굳이 힘들여 돼지를 키우겠는가. 채식주의자였던 저자가 정성스럽게 키웠던 돼지를 끝내 잡아먹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딜레마와 관련된다. 어떤 종의 동물은 인간의 육식이라는 관습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세계 속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동물권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동물은 인간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동물이 가진 내재적 가치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지녀야 함을 목표로 삼는 동물권 논의는, 이미 인간의 막대한 돌봄노동을 생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돼지나 소 같은 가축들을 상품화를 위한 도축 없이 그 자체로 보호한다는 것이 법의 논리를 넘어서 인간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의 새로운 경계 설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쩌면 이러한 딜레마는,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이미 가축 같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이 명확하게 그어질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즉 상호의존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인수공통감염병의 출현과 이에 대한 방역 시스템이다.

이동호의 지적처럼 인간들이 백년에 한번 겪는다고 하는 팬데믹을 동물들은 이미 상시적으로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가축들은 인간처럼 항생제가 섞인 각종 예방주사를 맞으면서 관리되는가 하면 동물들의 팬데믹에 대한 방역 방식 중 일부는 인간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동물처럼 살처분하지는 않지만,6 감염 후 격리 중 사망한 환자들에게 행해지는 ‘선화장 후장례’는 친족의 죽음조차 격리하지 않고서는 남은 자들의 생을 보존할 수 없는 인간의 취약성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팬데믹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재고하게 만들면서 인간이 가진 동물적 측면을 긍정하도록 하는데, 아감벤은 이러한 경향이 자칫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인간의 삶을 오직 생존으로 왜소화하진 않을지, 생명관리통치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7 ‘바이오보안’이라는 형태로 강화되는 통치권력에 대한 그의 우려는 일리가 있지만, 그러한 권력이 인간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역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돌이켜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더불어 ‘얼굴을 맞댄 감정적 관계, 우정, 사랑’같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감정이 오직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지젝(S. Žižek)이 미국과 이딸리아, 스페인 남부 지방 등에서 과일과 채소들이 썩어갔음을 지적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8 물론 지젝은 팬데믹으로 인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동 제한이 초래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태를 주목했지만, 더 근본적으로 이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이 매우 유기적임을 보여준다. 과일과 채소들의 부패는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작물을 재배한 결과이겠지만, 그 결과로서 재배된 작물은 이제 인간의 관리(노동)가 없으면 제대로 생식할 수 없는 것이다. 키무라 유스께(木村友祐)의 소설 『성지Cs』(『聖地Cs』, 2014)가 보여주듯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에 방치된 가축들이 자신들의 배설물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동식물이 겪는 재난 앞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 역시 우리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한 축임은 분명한데, 이미 인간과 동물, 인간과 생태계의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양자의 분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간과 동물(자연) 간 경계선의 복잡함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지구화 과정에서 만들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형성된 이윤과 기술이 상시 재난 상황 속에 직면하는 동식물 종들에게 넉넉하게 돌아가려면 어떠한 정치적 활동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동물권 법제화가 될 수도 있겠고, 동식물에 대한 인간 노동의 필요성을 공론화하고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기 위한 노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만큼 동물도, 동물만큼 인간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취약하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를 위해 일단 가까운 곳에서 동물과 함께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는 건, 혹은 지금 식탁 위의 고기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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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지혜 「생명체는 물건입니까?」, 창비주간논평 2021.8.4.
  2. 「“벌써 1만명 서명… 대구 칠성 개시장 꼭 폐쇄시켜주세요”」, 한국일보 2021.7.30.
  3. 「전국 첫 ‘펫 추모공원’ 가보니… ‘장례 1호’ 유기견에게 전한 한마디 “미안해”」, 경향신문 2021.8.3.
  4. 「동물과 인간의 ‘(부)적절한’ 경계: 아감벤과 데리다의 동물담론을 중심으로」, 『안과밖』 43호(2017년 하반기), 90~100면.
  5. 전의령 「행복한 젖소·행복한 계란의 역설과 딜레마」, 경향신문 2018.8.9.
  6. 동물들에 대한 살처분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문선희의 『묻다: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책공장더불어 2019)와, 이에 대해 리뷰하는 이정숙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 세계를 알게 된다면: 최근 동물 르뽀에 대한 단상」,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참조.
  7. 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팬데믹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박문정 옮김, 효형출판 2021.
  8. 슬라보예 지젝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