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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프루던스 체임벌린 『제4물결 페미니즘』, 김은주 외 『출렁이는 시간[들]』, 에디투스 2021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 ‘잇기’

 

 

김소라 金昭摞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stellati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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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각종 사안에 응답하며 페미니즘 운동을 본격화한 여성들은 ‘영영 페미니스트’ ‘메갈’ 등으로 불리며 주목받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의제, 운동 방식, 파급력과 그 효과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늘어났다. 영국 영문학자 체임벌린(P. Chamberlain)의 책을 번역한 『제4물결 페미니즘: 정동적 시간성』, 그리고 이와 함께 출간된 국내 연구자들의 『출렁이는 시간[들]: 제4물결 페미니즘과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은 이같은 움직임을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것으로 보고 ‘제4물결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의 의미와 그 역동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다.

체임벌린은 강간당하고 싶지 않으면 ‘슬럿’처럼 옷을 입지 말라고 말한 한 경찰관의 발언으로 촉발되어 전세계적으로 조직된 슬럿워크(Slut Walk, 한국에서는 ‘잡년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와 같이, 온라인을 통해 사건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제4물결 페미니즘으로 명명한다.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둘러싸고 19~20세기에 전개되었던 제1물결, 풀뿌리 조직을 중심으로 여성의 의식 고양과 성 해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셌던 1970년대의 제2물결, 흑인 페미니즘 및 여성 내부의 차이와 교차성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의 제3물결에 이어, 변화하는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페미니즘 행동주의가 급등하는 순간을 우리가 다시 한번 맞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신속성·즉시성·응답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기술의 활용, 사건의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글로컬’하게 증대되는 운동의 역동성, 페미니즘의 대중화, 변화를 향한 에너지와 행동의 급증은 제4물결 페미니즘이 새롭게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이때 체임벌린은 우리에게 익숙한 물결 서사를 계속해서 사용한다. 그간 물결 서사는 선형적 시간성을 가정하고, 각 물결을 몇몇 의제와 정체성으로 환원하며, 특정 세대와 명망가가 해당 운동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물결이 끊임없이 연결되고 움직이며 ‘함께 바다를 형성하는’ 상황을 은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결 서사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재의미화될 수 있다고 본다. 물결을 연대기적 시간성으로, 다양한 목소리와 운동의 공존으로, 연속하고 겹치는 파동과 동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물결 서사는 페미니즘 운동을 세계에 관여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순간으로 이해하려는 체임벌린의 시선에 부합한다.

제4물결 페미니즘은 소셜미디어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때 변화를 향한 열망이자 행위를 추동하는 집합적 감정인 정동(affect)이 만들어진다. 정동은 사람들 간의 감정과 경험의 소통을 매개함으로써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고, 이를 지속시켜 연대의 감각을 생성하며, 변화를 위한 행동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가운데 미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를 새롭게 인지하고 미래를 기획하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가 수렴한 시간성을 열어준다. 정동이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시간들 사이를 ‘접촉’시켜 페미니즘 운동이 급등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의 부제가 ‘정동적 시간성’인 이유다.

제4물결 페미니즘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사건, 정동, 담론, 맥락이 마주치는 우연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정동적 시간성이 만들어지고 페미니즘 운동이 부상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간 한국사회에 성차별은 변함없이 존재해왔으나 여성들이 이를 인지하고, 페미니즘을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는 틀로 받아들이며, 남성들의 혐오 발화를 패러디하는 ‘미러링’ 전략으로 현실에 대응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였다. 여기에는 많은 우연성과 불확실성이 작동했다. 유머와 ‘드립’으로 인정받으며 온라인에서 오랜 시간 반복된 여성혐오 발화, 성평등한 사회와는 거리가 먼 현실 속에 축적된 분노, 온라인 문법에 익숙한 여성들의 등장,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세월호참사와 강남역 살인사건 등 페미니즘 운동을 추동한 여러 요인이 존재하지만, 그 시기가 왜 2010년대 중반이었는지, 향후에는 어떤 조건 속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향한 에너지가 증가하거나 감소할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운동의 구성원과 정체성을 특징짓고, 식별하며 그 한계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이 발생한 맥락의 우발성과 우연성을 인정하고 운동의 미래가 가진 불확실성을 받아들인 가운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 직면한 문제의 구체적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변화하는 상황에 계속해서 대응하는 페미니즘 운동은 완결된 것이 아닌 끝없는 페미니즘 ‘되기’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체임벌린이 제4물결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시각과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그의 논의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연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정동적 시간성’은 이 때문에 상황의 고유성을 전제로 하며, 제4물결 페미니즘의 이해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슬럿워크, ‘일상 속 성차별’(Everyday Sexism) 아카이브 운동, 페이스북 강간 문화 고발 캠페인 등 구체적인 운동 사례를 통해 제4물결 페미니즘의 행동주의를 소개하는 5장에서 온라인 공간과 디지털 기술 외에 각 운동의 정동적 시간성을 추동한 구체적 맥락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정동적 시간성이 과거와 미래가 수렴하는 ‘순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와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지, 운동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운동이 지향하는 미래는 무엇인지도 분석되지 않는다. ‘정동적 시간성’이라는 관점에서 제4물결 페미니즘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발생한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 그 해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같은 아쉬움을 채워주는 것이 『출렁이는 시간[들]』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각성하고 과거의 시간을 재해석하며 이로써 자신의 삶을 재조직하고자 하는 중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와 맞서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마주하고 ‘좋은’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과정 중에 서로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페미니스트들 내부의 다양성과 차이를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역시 가감 없이 담아낸다. 학내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거나 총여학생회의 폐지에 저항하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는 가운데, 그리고 문학장에서 여성 서사를 요구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저자들이 겪은 페미니스트 ‘되기’의 과정은 하나의 의제나 주장이 아닌 다양한 운동의 파동 속에 페미니즘을 향한 에너지가 오늘의 물결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페미니스트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아름다운 말이 실제로는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어떤 감정적 상흔이 남는지 보여준 이소윤의 글, 페미니즘 리부트를 가능하게 했던 ‘숫자 싸움’과 즉각적인 피드백 요청이라는 장치가 어떻게 총여학생회의 ‘민주적’ 폐지라는 반격으로 돌아왔는지 성찰한 김미현의 글, 갑작스럽게 췌장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를 돌본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와의 관계와 돌봄의 가치를 질문하는 김보영의 글은 페미니스트 ‘되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끝없는 과정인지를 새삼 생각게 한다. 이 글들이 페미니즘 내외부에 존재하는 긍정적·부정적 정동들을 끌어안고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은 그러한 노력 가운데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