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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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오래된 새길, 동학과 개벽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를 읽고

 

 

정지창 鄭址昶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 저서 『서사극·마당극·민족극』 『호르바트의 민중극』 등과 산문집 『오늘도 걷는다마는』 『문학의 위안』, 역서 『상어가 사람이라면』 등이 있음.

piscator@hanmail.net

 

 

1. 나의 동학 공부

 

내가 태어난 곳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 어부동, 보은보다는 대전이 가까운, 금강 상류 보청천을 끼고 있는 산골 마을이다. 요즘에는 길이 뚫려 대전까지 사십리길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차편이 없어 아버지는 산길을 걸어 대전에 다녀오시곤 했다. 가끔 짐승을 쫓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꽹과리나 징을 치며 마을 주변을 돌았다. 아이들은 나루터 깊은 강물에 미군이 버리고 간 탄약을 찾아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고, 무모한 청년들은 담력 시험을 한다고 깡(뇌관)에 불을 붙여 누가 오래 참았다가 던지는지 내기를 하다가 손목을 날리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강을 건너 십리길이라 물이 불어 나룻배가 뜨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입학할 때는 고개 너머에 분교가 생겨 3학년까지 다니다가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큰형님과 친척들이 사는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논밭도 부족하고 교통도 불편한 이런 오지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늘 궁금했지만 집안 어른 누구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얼마 전에야 큰형님을 통해 충북 진천에서 살던 5대조 할아버지가 동학쟁이가 되어 집안을 망친다는 이유로 큰집에서 쫓겨나 처가인 문의(현재의 청남대 자리)로 이주했는데, 거기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강을 건너 더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학은 백년이 지나서도 집안 어른들 모두가 쉬쉬할 만큼 금기의 영역이었다.

1980년 12월 문의와 신탄진을 잇는 대청댐이 생기면서 “차령산맥 비단 장막 둘러친 곳에”라는 초등학교 교가처럼 아름답던 고향 마을은 물에 잠기고 어렸을 적 동무들과 물고기를 잡던 맑고 깨끗하던 강은 녹조로 뒤덮인 커다란 호수로 변했다. 그러면서 강변에서 한참 들어간 후미진 산골 마을 어부동이 그제야 이름에 어울리는 호반의 마을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떠났고 옆집에 살던 친척은 머나먼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버렸다. 나는 이미 그전에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평생 서양의 학문을 팔아 밥을 먹고 살다가 정년퇴임을 한 다음에야 뒤늦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에 발을 들여놓아 집안에서 쫓겨났는지, 그것이 못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책을 통해 혼자 공부를 하다가 포항의 김현식 선생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전교조 교사인 김현식 선생은 동학에 관심이 많아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화전민 생활을 하던 흥해의 검등골을 안내해주고 보은 취회 재현행사에도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명색이 보은 출신이면서도 보은 읍내의 동학 유적지를 그때서야 처음 찾았다. 이곳 장내리는 1893년 2~3만명의 동학 도인들이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치적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집회를 열었던 곳이고, 북실마을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 2600여명이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에 의해 학살된 피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고향과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나는 오랜 벗인 채희완 교수의 권유에 따라 2014년 6월에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및 보은 취회 121주년 맞이 ‘보은생명평화대회’의 상임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채현국 선생의 추천으로 백낙청 선생을 공동대회장으로 모셨고, 동학 연구자인 박맹수 교수는 공동추진위원장으로 행사를 함께 진행했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공연했던 마당극 「칼노래 칼춤」(채희완 연출)을 20년만에 다시 공연했는데, 남성 군무(群舞)의 장쾌한 칼춤이 압권이었다. 공동대회장 가운데 한분인 이이화 선생이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이 무렵부터 대구동학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동학기행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여기서 만난 김천의 포도 농사꾼 김성순 선생은 기독교 장로였으나 뒤늦게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다. 선생은 아흔 가까운 고령인데도 언제나 기차를 타고 와서 공부모임에도 참석하고, 기행에도 동행하셨다. 나는 선생을 통해 그의 동갑내기 친구인 나까쯔까 아끼라(中塚明) 교수가 이끄는 일본의 동학기행단과도 만나고,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푸른역사 2002)와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모시는사람들 2014) 등 나까쯔까 교수의 저서들을 읽고 일본의 치밀한 한국 침략 과정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이 책들을 번역한 박맹수 교수를 여러 자리에서 만나면서 일본 측 자료를 뒤져가며 동학 연구에 몰두하는 그의 열정에 감복했다. 특히 그가 고은광순 씨를 비롯한 ‘동학언니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3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15년에 간행한 ‘여성동학다큐소설’(모시는사람들) 열세권의 후원자로 참여한 것은 나에게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이 무렵에 나온 동학소설들에 관한 서평을 대구의 문학계간지 『사람의문학』에 기고했고, 1920년대에 월간지 『개벽』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벽문화운동’에 관한 몇편의 글도 발표했다. 여기서 다룬 인물들은 방정환 김기전 차상찬 이돈화 등이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경북·대구 동학방’의 이름으로 월 1회씩 열린 시민강좌는 동학을 주제로 김용휘 주요섭 고은광순 김경재 이이화 윤석산 전택원 오강남 등 쟁쟁한 강사들을 모시고 진행되었다. 나는 공부가 부족한 탓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와 해월의 사상에 관해서는 감히 언급할 엄두를 못 내고 「동학의 예술적 형상화」라는 제목으로 동학에 관한 시와 소설, 연극, 영화 등을 소개했다.

2018년에는 대구 녹색당 성상희 변호사의 권유로 ‘생명평화아시아’라는 일종의 공익단체 겸 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생명평화사상을 알기 위한 공부모임을 만들었고, 제안자로서 동학에 관한 발제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동학과 개벽운동」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 「해월 최시형의 생명사상」 「동학에서 천도교로: 손병희의 삼전론과 이돈화의 개벽문화운동」 등 네 꼭지의 발제를 했는데, 그 내용은 그동안 읽은 책의 요지를 갈무리한 것으로 대학생의 보고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김천의 김성순 선생께 공부모임의 자료를 보내드렸더니 자료집으로 묶어 내자면서 고등학교 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달라고 주문하셨다. 나는 선생의 뜻에 따라 발제문을 고쳐 쓰는 과정에서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전2권, 통나무 2021)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고, 솔직담백한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지금까지의 동학 공부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공부의 각오를 다지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참에 마침 『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에 실린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세분의 좌담을 접하게 되었다.

 

 

2. 개벽파 3인의 만남과 대화

 

나는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뒤 처음 몇년 동안 이런저런 학술행사에 참석했지만, 대부분 지루하고 답답해서 나중에는 거의 외면하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며 간략한 발제와 토론을 이어가는 진행방식으로는 생산적인 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제자나 토론자가 자기 지식을 과시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여 궁지로 몰아넣는 데서 보람을 찾으려는 것도 여러번 보았다. 자신이 공부한 내용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밝히고 조언을 청하는 학인을 나는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앞에서 장황하게 나의 부끄러운 동학 공부의 내력을 밝힌 것은, 동학에 관심은 있으나 정작 동학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만학도로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세분은 내가 평소에 늘 존경하는 학자들이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창작과비평』의 애독자로서 백선생의 글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워온 처지고, 박교수는 동학 공부를 하면서 동지 같은 정을 나누는 분이다. 도올 선생과는 개인적인 교류는 없으나 그의 저작들과 강연은 언제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는 특히 『독기학설(讀氣學說)』(통나무 2004)과 『노자가 옳았다』(통나무 2020), 『동경대전』 1, 2권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내가 그의 팬이 된 것은 실학의 허구성을 논파한 역작 『독기학설』을 기존 학계의 반발로 학술지에 발표하지 못하고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만주의 독립군 유적을 답사하면서 좌익 쪽의 독립운동을 인정한 것과 강연에서 이승만의 죄상을 까발린 것이 문제가 되어 공중파 방송에서 볼 수 없게 된 도올을 백낙청 선생이 좌담에 초청하여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인 것 자체가 파격적이면서 신선한 기획이었다.

세분은 각기 출발점은 다르지만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개화’가 아닌 ‘개벽’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개벽파’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동학과 개벽을 화두로 삼아 연구와 저술을 해온 박맹수 교수는 ‘개벽대학’을 표방하는 원광대 총장으로서 매년 개벽사상의 담론을 펼치는 학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개벽파의 선봉장이다. 동양 고전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도올 선생은 『도올심득 동경대전 1』(통나무 2004)에서 동학사상의 핵심을 ‘플레타르키아’(민본성/민본주의)로 규정하고 최근에는 『동경대전』 1, 2권으로 동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니, 지금까지 서학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여 주체적인 한국사상에 눈뜨게 한 개벽파의 코페르니쿠스라고 하겠다. 백선생은 다 알다시피 영문학자와 문학평론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학행일치를 실천하는 우리 시대의 선비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창비 출판문화운동을 이끌었고, 분단체제론을 비롯한 통일 담론들을 내놓으며 통일운동에도 앞장섰다. 최근에는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모시는사람들 2016)과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를 통해 새로운 변혁과 전환의 화두로 ‘개벽’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나이를 잊은 독공(篤工)과 쇄신의 열정은 후학들의 존경과 감탄을 자아낸다. 이제 그에게는 맑은 날에 도롱이를 쓰고 다니는 시대의 이단아를 뜻하는 청사(晴蓑)라는 호와 함께 ‘개벽파’라는 별칭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세분의 좌담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담론의 향연이었다. 평생 문·사·철의 영역에서 내공을 쌓아온 고수들답게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핵심적인 쟁점에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치열한 토론의 열기가 숱한 학술행사나 좌담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즐거움을 선사했다. 나는 이러한 토론의 생동감과 열기가 바로 이들이 ‘개벽파’라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분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는 일가를 이룬 원로지만, ‘개화파’가 절대다수인 우리 사회와 학계 전체의 구도로 보면 ‘개벽파’는 아직도 비주류의 소수파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모처럼 말이 통하는 이단의 도반들이 만났으니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가. 화기애애하면서도 불꽃이 튀는 논쟁을 보는 재미는 독자인 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번 좌담을 계기로 창비 가을호의 초판이 매진되고 정기구독 신청이 급증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이것은 한 잡지의 ‘기획의 승리’일 뿐 아니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우리 시대의 터널 속에서 새 하늘 새 땅을 찾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갈증을 이번 좌담이 다소나마 풀어주었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3. 근대와 근대성

 

이번 좌담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은 서양의 근대와 근대성의 개념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였다. 도올은 서양인들의 근대라는 개념을 아예 무시하고 개벽과 ‘플레타르키아’의 틀로 역사를 보자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실학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만들어 우리에게도 자생적 근대의 싹이 있었다는 식으로 헛된 주장을 펼치는 대신 왕정과 민본제라는 커다란 틀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청사는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서양의 근대와는 다른 길을 추구하던 개벽파는 사라지고 개화파와 척사파만 남았는데, 나라가 망하자 척사파는 근거를 잃고 개화파의 세상이 되었지만 ‘근대’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는 도올의 주장은 지나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걸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반론의 요지이다.

도올은 ‘전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서양식 근대를 전제로 해서 생긴 자기비하적 개념이며 “이놈의 근대라는 걸 폭파시켜버리지 않는 한 우리 조선 대륙의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사유가 살아날 수가 없다”면서 “일단 서양의 근대를 방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제안은 단호히 거부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 특별좌담 108면, 이하 이 좌담에서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밝힘). 그러면서 자신은 사상가이므로 “주제를 좀 래디컬하게 설정”(131면)한다고 말한다. 두분 다 근대와 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는 인정하되 도올은 아예 근대라는 개념 자체의 가치론적 강압성과 폭력성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청사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노자와 수운, 원불교의 개벽사상에서 찾자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동학의 3대 교주이자 천도교의 창시자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떠올렸다. 수운은 동학이라는 혁명적 민본사상을 선포하고 포덕한 이단의 사상가로서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의암은 천주교의 포교가 허용된 이후에도 여전히 금기의 사슬이 풀리지 않은 동학을 공인받아 개벽세상을 열어가야 하는 현실적인 과제를 떠맡았다. 동학농민군의 북접 총사령관으로 우금치의 뼈아픈 패배를 통해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을 절감했던 의암은 일본 유학을 하면서 서구적 과학기술문명을 접한 다음,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의 세가지 싸움을 ‘다시개벽’을 위한 전략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삼전론을 현실적인 운동으로 조직하여 민족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실천이 1919년의 3·1만세운동이었다. 수운이 개벽을 꿈꾼 혁명 사상가라면 의암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동시에 추구한 경세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도올이 수운의 뒤를 이은 이상주의적 개벽사상가요, 청사는 의암처럼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안고 씨름한 현실주의적 경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암은 어떤 점에서는 수운과 해월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를 떠맡아 씨름했는지 모른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개벽세상을 여는 이중, 삼중의 과제를 떠안고 혼신의 힘을 다해 분투했다. 그의 목표는 종교적으로는 개벽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개화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서구 문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되 궁극적으로는 서구 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내천(人乃天)의 개벽세상을 열어가겠다는 그의 원대한 구상과 포부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1920년대의 개벽문화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수운과 해월에 비해 사상적 급진성과 순교자적 아우라는 약하지만, 의암의 경세가로서의 문제의식과 경륜, 실천성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후계자인 최린(崔麟)과 이돈화(李敦化) 등 천도교 인사들이 나중에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빠졌다는 사실이다. 천도교의 이론가이자 1920년대 개벽문화운동의 주역인 이돈화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보다 인간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치하에서 진정한 인간해방은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지만, 그는 서구와 일본의 철학과 사상들을 동학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서구풍의 천도교 교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수운이 말한 천주, 즉 하늘님(하느님)을 ‘한울님’으로 표기했는데, 이를 두고 도올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차별을 두기 위해서라지만 우리 고유의 하느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양보한 뼈아픈 실책이자 수운의 동학사상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천도교 측이 호교적(護敎的) 차원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도올의 이런 비판이 천도교의 쇄신을 위한 고언(苦言)이자 각별한 애정의 표현이라고 본다. 또한 도올이 서구적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주체의식의 발로라고 나는 이해한다.

도올이 금년에 발표한 ‘동학선언문’(유튜브 도올TV, 2021.5.7.)에서 동학은 초월적 절대자인 신(데우스)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서학(기독교)의 수직적 위계구조를 타파하고 신과 인간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겸손해야 할 주체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선언은 도발적이면서도 동학사상의 핵심을 짚어낸 열쇳말이다.

이번 좌담으로 개벽과 맞물려 근대와 근대성에 관한 본격적인 논쟁의 물꼬가 트인 것은 무조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래경 조성환 박길수 고은광순 김용휘 이병한 등 젊은 개벽파들까지 참여하는 공론의 장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조선시대의 이발기발론(理發氣發論)이나 태극/무극(太極/無極) 논쟁처럼 추상적인 관념 논쟁으로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현실 개혁은 외면하고 성리학의 이론 논쟁에만 골몰한 나머지 ‘무극 태극이 사람 잡고 이발 기발이 집안 망친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가깝게는 지난 1980년대에 지식인들과 운동권 내에서 벌어진 이른바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도 지나고 보니 소모적인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좌담에서는 근대와 근대성 논쟁이 남북통일과 촛불혁명의 완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수렴되면서 생산적인 토론으로 발전했으니, 이것은 세분이 모두 현실에 발을 딛고 개벽의 이상을 추구하는 ‘대지의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4. 개벽과 통일,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옛길

 

동학의 개벽운동이 농민혁명과 3·1운동, 촛불혁명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데 세분이 합의한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판단이다. 청사는 이를 전제로 동학과 원불교에서 남녀평등사상과 생태이론·생태주의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의 돌파구도 촛불혁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도올은 남북문제의 진전을 위해서는 대미관계의 비굴한 자세를 바꾸어 “미국을 뒤받으면서 설득할 수 있는 방법”(130면)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울러 동학의 개벽이 단군 이래 구한말까지의 왕정을 민주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지금 우리가 민주를 말해도 그것은 50년 정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보수세력들은 5만년의 관성을 등에 업고 설치는 것”(131면)이라고 갈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촛불항쟁으로 박근혜정권이 물러난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보수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저항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연히 깨달았다. 4·19와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 촛불혁명을 거치며 겉으로는 민주화가 크게 진전된 것 같지만, 분단과 냉전체제를 이용하여 온갖 특권과 불로소득을 독점해온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고 그들의 의식은 아직도 왕정시대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올은 ‘5만년의 관성’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용천검 날랜 칼로 얽히고설킨 적폐를 내리치듯 호연지기가 넘치는 통쾌한 표현이다.

5만년의 관성! 천지개벽 후 5만년에 이르러 다시개벽이 이루어진다는 수운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니 개벽에 대한 회의와 조급한 기대가 오히려 느긋한 믿음과 희망으로 전환되는 것을 느낀다. 동학과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에서 말하는 개벽은 5만년의 관성을 뒤집어엎고 사람과 하느님이 대등한 진정한 민본주의(자본주의와 내연관계인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니다!)와 남북통일의 오래된 새 길을 다시 여는 문명의 대전환이 아닌가.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修心正氣)가 단순한 개인적 수양운동이 아니라 개벽의 꿈을 향한 마음의 혁명적 변화, 즉 사람과 세상만물에 대한 증오와 혐오와 차별을 사랑과 포용과 모심의 마음으로 바꾸는 개심(改心)의 공부라는 구체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해월의 인심개벽과 원불교 개교표어인 정신개벽이 모두 이런 마음의 혁명적 변화를 뜻한다는 청사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해월 선생은 동학의 도가 펼쳐지는 현도(顯道)가 언제 이루어지겠느냐고 묻는 제자에게 “모든 산이 검어지고 모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과 더불어 통상할 때”라고 답하면서 “때는 그 때가 있으니 조바심하지 말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이니라”라고 덧붙였다. 또한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 종사는 “언제나 남북이 통일되겠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남북 분단은 조선조 오백년 동안 생긴 업연으로 막힌 것이니, 그 업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미운 사람이 없어져야 할 것이며, 마음에 척이 쌓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두분의 말씀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모든 외국 군대가 우리 땅에서 철수하고 남북과 동서 간에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통일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이런 개벽은 오래 참고 기다리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간절한 마음을 모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시도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해월과 정산이 말하는 현도와 통일의 참뜻이 아닐까. 이번 좌담의 결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좌담 내용을 천천히 되새기며 떠오른 첫번째 생각은 인문학을 하려면 한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은 배웠지만 그후 제대로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해 동양의 고전을 원문으로 읽지 못하고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지적 유산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없는 형편이다. 서양의 경우,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웬만한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없다. 나는 한글전용론자이지만, 적어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반드시 한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올의 개벽적인 안목도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한 동양 고전의 심층적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국어와 문장의 독립이 없으면 국민과 문화의 독립이 없다고 강조한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선생은 1962년 「음양론」 강의를 시작하면서 한글을 사용하되 한자를 알아야 국어와 국학 연구가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음양론」이야말로 한국사상, 범부의 용어로는 ‘동방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한문 독해력이 부족하고 동양 고전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강의 내용의 절반 정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범부가 1960년에 발표한 「최제우론」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박맹수 교수도 「범부 김정설의 동학 이해」(『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모시는사람들 2014)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지만 「최제우론」은 「음양론」과 마찬가지로 까다로운 한문 투의 문장과 주역을 비롯한 난해한 동양 고전의 인용으로 여전히 나같은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도올 선생에게 바라건대 이제 「동경대전」 주해를 마쳤으니 내친김에 범부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와 주해에도 손을 대어 동학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범부가 국풍과 화랑도 같은 풍류정신의 부활을 강조하고 국민윤리를 국책과목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음양론」과 「최제우론」(『풍류정신』, 영남대학교출판부 2009)은 동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입문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범부는 한문의 대가로서 동서양의 고전을 줄줄 꿰고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어 읊으면서도, 장편소설 『췌세옹 김시습』(1957년 경향신문 연재)과 전기소설 『화랑외사』(1954)의 작가로서 우리말의 발굴과 구사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나는 『화랑외사』에 나오는 백결선생의 시나위를 좋아한다. 백결선생은 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노래가 아니라 제 빛깔, 제 가락의 우리 노래, 즉 다음과 같은 시나위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산이야 푸른 산이 제대로 푸른 산이

구름이야 흰 구름이 제대로 흰 구름을

언제나 산이 그 산 구름을 맞아 푸른 산이

언제나 그 구름이 산을 만나 흰 구름을

산일세 구름일세 희거니 푸르거니

거침없는 멋 속으로 그지없는 한가락을

 

이제 동학과 통일에 관련된 문학작품들에 관한 나의 소박한 독후감을 독자들과 나누면서 조언을 듣고자 한다. 나는 이돈화의 소설 『동학당』(1935)과 조운의 시조 「고부 두성산」(1947)을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전쟁)을 다룬 작품들을 읽어보았다.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1965~88),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1975~2012), 송기숙의 『녹두장군』(1981~94) 등 대하소설과 시선집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엮음, 1993) 등이 인상적이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호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것들이었다. 나로서는 신동엽의 장시 『금강』(1967), 김지하의 담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백무산의 장시 「최제선」(1996), 황석영의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2012) 등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진 농민혁명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과 동학의 창도와 포교 과정을 다룬 작품들에 관심이 쏠린다. 채길순의 장편 『웃방데기』(2014)는 주로 충북 영동 백화산 자락과 충청도 지역을 무대로, 동학 지도자가 아닌 밑바닥 민중의 시선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조명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동학의 꿈이 민초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꿈틀거렸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하고 좌절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민중의 동학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채길순은 『어둠의 세월』(1993), 『흰옷 이야기』(1997), 대하소설 『동트는 산맥』(2001), 『조 캡틴 정전』(2011) 등 동학소설만을 써온 특이한 작가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전문적인 작가가 아닌 여성들이 박맹수 교수의 도움으로 ‘동학언니들’이라는 결사체를 만들어 써낸 ‘여성동학다큐소설’ 열세권도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을 여성의 시각에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소설들은 1970년대에 민중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노동자들의 글쓰기와 2000년대의 민중 구술자서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여성의 관점과 상상력을 보태 소설로 창작한 여성문예운동의 결실이다. 가령 청산 편에는 해월의 딸 최윤(용담할매)과 그의 아들인 음악가 정순철로 이어지는 모계 중심의 동학사가 펼쳐지고, 강원도 편에서는 해월의 생명사상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한살림운동으로 이어지는 동학사상의 흐름을 짚어낸다.

동학이나 개벽을 천착한 작가는 아니지만 기독교의 폭력적인 신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분단체제의 모순과 통일의 꿈을 형상화하기 위해 고투(苦鬪)한 ‘내적 망명’ 작가 최인훈(崔仁勳, 1934~2018)에 나는 주목한다(졸고 「최인훈에 관한 아홉 개의 메모」, 『문학의 위안』, 한티재 2020 참조). 그는 『광장』(1960)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다른 여러 작품에서 ‘하나님’이라는 수입된 신에 대해 문화적인 주체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왔다. 가령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72)에서 구보는 세상 일이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돌아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에잇, 신가 놈아!”라는 욕설을 내뱉는다. 조화와 공평의 원칙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면 세상이 이처럼 거꾸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심술을 부려 선한 자에게는 벌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상을 주는 신은 믿지 못하겠다는 억하심정에서 그런 발칙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에잇, 신가 놈아!”라는 말은 서양 사람들과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Oh, my God!’에 해당하는 감탄사다. 우리에게도 세상을 섭리하고 다스리는 ‘하늘’이나 ‘하늘님(하느님)’은 있었지만, 요즘의 한국 기독교 교회에서 받들어 모시는 하나님처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장편 『회색인』(1963~64)의 주인공 독고준은 월남 피난민이다. 북한에서도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적 망명자였던 독고준은 월남 이후에도 여전히 망명자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동경했던 자유와 민주의 나라는 독재와 검열이 일상화되고, 야당 국회의원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주장하자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독고준의 친구 김학이 찾아간 경주의 현자 황선생은 조선의 역사를 서양의 역사에 비교하여 너무 자학적으로 보지 말라면서 동학혁명을 예로 든다. 그에 따르면 동학혁명은 프랑스혁명에 비견할 만하며,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임을 선언하고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을 내건 농민군이 승리했다면 동양식 유토피아인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꿈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학당을 왕당파와 일본군이 압살한 것은 구세주를 외국 총독과 결탁하여 잡아 죽인 유대인들의 경우와 비슷하고, 우리 설화에서 백성을 구하고 하늘의 길을 열려고 내려온 ‘아기장수’를 외국 군대와 결탁하여 잡아 죽인 격이라는 것이다. 아기장수 설화의 모티프는 후일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라는 시극으로 형상화된다.

유신시대에 쓴 유토피아 소설 『태풍』(1973)에서 작가는 분단과 반공의 시각에서 벗어나 가상의 시공간에서나마 자유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통일의 이상을 마음껏 펼친다. 『광장』의 이명준은 남북한이 아닌 제3국 인도로 향하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지만 『태풍』의 오토메나크(조선인 학도병 카네모또)는 제3국인 아이세노딘(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 카르노스(수까르노)를 도와 자주독립을 성취한다. 그리고 30년 후 그의 조국인 애로크(코리아)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이 되는 데 카르노스(수까르노) 대통령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크게 도움을 준다. 최인훈이 꿈꾸었던 제3의 길은 카르노스(수까르노)가 추구했던 중립적인 제3세계 노선, 즉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민족주의 노선이 아니었을까.

‘남북조 시대’(『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개발도상국이 아닌 ‘통일도상국’(담시 「호질」)을 염원했던 ‘내적 망명’의 작가 최인훈에 대해서는 보다 치밀하고 깊이있는 논의와 평가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정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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