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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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박

1983년 출생. 2012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 『아름답습니까』가 있음.

aroma-mean@hanmail.net

 

 

 

치마

 

 

짧게

짧게

짧게

 

예컨대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처럼 억압을 통념을 벗어던지듯

짧게

쓰라고 한다면 쓸 수 있습니다

답답해

답답해서라도 짧게 쓸 것입니다

 

당신도 들었지요?

빨랫줄 아래 군인들

무력과 미신의 충돌

터메인이 걸려 있는 빨랫줄 아래에서 “심상치 않는 것이 있”는 듯 “확실히 무언가 있”는 듯 어떤 “힘” 앞에 “맴도는”1 군인들

아래를 지나면 남성성을 잃는다나?

 

미얀마의 여자들이 치마로 바리케이드를 만든 것을 듣고

행주산성의 여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던 것이 생각났죠

아들을 낳기 위해 치마바위에서 기도를 올린 여자들도요

 

독실함

어떤 것에 독실해지는 걸까요

밤마다

어떤 것에 독실해지는 걸까요

긴긴밤

 

길게

길게

길게

 

예컨대 한 총사령관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에 반하는 외설적인 옷인 바지를 입은 여자들이 반독재 시위에 참여하듯

길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답답해

답답해도 길게 썼어요

 

당신이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치마 노래」라고요

지역마다 전해지는데

충과 효와 사랑 그런 것을 담은 노래인데요

칠곡 외할머니는 치매 치매라고 불렀거든요

지금도 치마하면 치매가 떠오르는데 어때요

 

치마든

치매든

 

치마를 치매처럼 지워버린 국가도 있는걸요

미니스커트 대신 히잡을 쓴 여자들

선택할 자유2를 박탈당한 여자들

종교는 독재다

쓰려다 멈추고

1972년 카불 거리의 여자들을 보고 또 보다

2022년 검열된 성性에 역사에 역행에

독재는 독재다

쓰려다 멈추고

 

독실함

어떤 것에 독실해지는 걸까요

밤마다

어떤 것에 독실해지는 걸까요

긴긴밤

 

길게

길게

길게

 

짧게

짧게

짧게

 

어때요

 

짧든

길든

 

시는

시죠

 

 

없다/있다

 

 

물이 필요합니다.

(오아시스 앞에서) 뭐라고요?

물이 필요합니다.

(키오스크 앞에서) 뭐라고요?

물이 필요합니다.

(키오스크 앞에서) 아름다운 풍경이군요.

……………………

(앞, 앞에서 서서) 뭐라고요?

 

예컨대 갈증과 갈등

물이 물의를 일으킴

 

흐름

미래

 

미래는 사라짐/사람

미래는

얽히고설키다: 늙으면 죽는다는 사실과 늙어도 죽지 않는다는 신화의 인물과 늙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과 늙으면 죽어야지 멸시와 늙으면 죽어야지 포기와 늙으면 죽어야지 말이 내포하는 바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가

 

은행 점포가 사라지고 있다더군요

무인점포로 대체되고 있다죠? 편의점도 프랜차이즈도

아세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제 사람이 번호를 안내해주는 유일한 곳이 114라는 거

이용자가 대체로 노인이라죠 재난지원금 받으러 동사무소에 간 사람도 대체로 그렇고요

 

문제군요

 

뭐라고요?

엄마 나야 나 폰 액정 깨져서 A/S 맡겼어 통화 안 돼 부탁할 거 있어 이 번호로 문자 줘

뭐라고요?

통화 안 된다니까 구글기프트카드 필요한데 엄마가 구해줘

뭐라고요?

편의점 가면 팔아 이십만원권 다섯장만 구매해줘 현금으로만 구매할 수 있어 믿을 사람이 엄마밖에 없어

뭐라고요?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이 안 돼 엄마 도와줘

뭐라고요?

본인 사용 외에 재판매 못하게 하니까 물어보면 엄마가 쓴다고 해 엄마 사고 문자 줘

뭐라고요?

엄마 사진 찍어 보내줘

엄마 빨리

엄마 뭐 해

 

엄마라고 하잖아요

뭐라고요?

엄마라고 하잖아요

뭐라고요?

엄마라고 하잖아요

뭐라고요?

……………………

뭐라고요?

 

전화 금융사기에 특히 취약하다던데요

오늘은 밥맛이 없네요 그런데 어쩌다

파이프 단순 조립 경력, 학력은 무관

교육은 친절을 제공하는 거죠 그래요

이해할 때까지 복지를 제공하는 거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요?

 

문제네요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분간할 수 없음=밤=똥칠=노인=뒤로

뭐라고? 하길래요 뭐라고요? 했어요

분간할 수 없음=밤=어두운 귀=노인

노인=바다 밑=소용돌이=할 수 없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 식이면 아이도 청년도 없다

그런 식이면 자연밖에 없을걸요

(No No 노 젓듯 리듬은 있네요)

그런 식이면 당신도 결국 결국은

 

모든 것을 이미 겪고

모든 것을 겪지 않는

 

어렵군요

 

전망은

엘리엇의 『황무지』(1922)에 인용된 쿠마에의 무녀 늙은 채로 죽지 않는 제목대로 황무지

가속화되는

미래는 있어 없고 없고 없고 현실감 없는 현실

 

아름답습니까3

의미 없습니다4

 

씁쓸합니까

쓸쓸합니다

적적寂寂합니까

적적상승 嫡嫡相承입니다

 

시대가 작동됩니다

사람은 노인입니다

흐르므로 흘립니다

지지가 필요합니다

지지 그 지지 말고

 

지지止持를 지지支持

돌아봄 돌봄

그림자 노동

 

어렵네요

 

평화 없는 고행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있다

안녕 안녕

 

 

  1. 문정희 「치마」(『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변주.
  2. 밀턴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민병균 옮김, 자유기업센터 2011) 차용.
  3. 권박은 『아름답습니까』(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답다’는 의미를 파악하 고자 했다.
  4. 권박은 「왜 안 만나줘?」(같은 책)의 〔비대면 인터뷰〕를 통해 “그런 식의 질문은 의미 없”다고 하면서 “달라지는 것에 발 빠르게 대처”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AI 관계자들은” “로봇은 인간을 멸종시킬 거라”고 예측하면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데 이번 〔비대면 인터뷰〕에서는 그보다 인간이 인간을 멸종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없다/있다」를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로봇의 인간-되기, 인간의 로봇-되기 이전에 인간의 인간-되기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이해할 차례이다』(민음사 2019), 『아름답습니까』에 이은 권박만의 대화법에 주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