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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현진 黃玄進

1979년 경북 선산 출생.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으로 등단.

소설집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두 번 사는 사람들』 『호재』, 중편소설 『달의 의지』 『부산 이후부터』 등이 있음.

flyto-u@daum.net

 

 

 

망조

 

 

엄마가 병들었다.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폐에 지름 5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있고, 이미 림프샘으로 전이되어 양쪽 겨드랑이까지 다 퍼진 상태였다. 어디까지나 사진으로 봤을 때 그러한 것이고, 이런 경우 막상 몸을 열어보면 훨씬 더 많이 있다고도 했다.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의사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 적지 못한 게 후회됐다.

엄마는 연신 피식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보란 듯이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올려 겨드랑이 언저리를 찬찬히 더듬었다. 결코 의사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잰 체하는 듯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의사의 눈치를 살폈다. 의사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크기는 작지만 개수가 많은 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굳이 만져볼 것까진 없다는 투였다. 불쾌한 심기가 역력해 보여서 얼결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어쩌다가 아무 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발하게 되었는지, 어쩌자고 감사하지 않은 마음을 거꾸로 말하는 버릇을 가져버렸는지, 그간에는 전혀 알아채질 못했다. 솔직히 내 나름대로는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정도로는 살고 있다, 생각했다.

 

엄마는 단박에 상처받았다.

나는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뒤늦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고작 일년 만에 이럴 수도 있습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아, 아디다스. 대단히 중요한 걸 기억해낸 사람처럼 나는 혼자 중얼중얼했다. 불가능은 없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떠들어대던 광고의 슬로건을 폐암의 병기를 따지는 의사의 입에서 다시 들을 줄이야. 게다가 그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격려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때 모두의 정신을 고취시켰던 그 문장을 병기의 경과를 설명하는 데 바칠 리가 없었다.

임파서블 이즈 나씽, 십여년 전 아디다스의 그 광고 문구가 온갖 지면과 매체를 도배하고 도처에서 들려오던 때, 아버지가 죽었다. 엄마와 나는 쫓겨나듯 마산의 중심가에서 변두리로 이사했다. 몇년 후, 마산시는 인근의 창원과 진해와 통합되었다. 셋이 함께 살던 동네는 창원 변두리의 구도심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쇠락했다. 엄마는 모두가 함께 망해가고 있다며 안도했다. 이만한 평화가 없다고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핑계로 서울에 가겠다 고집부릴 때도 엄마는 기꺼이 혼자 남고자 했다. 도시의 쇠락과 자신의 노화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이자 운명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엄마는 도로명 주소를 알려달라는 이런저런 요청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폐지된 주소로 답하고, 자신이 창원 아닌 마산 사람임을 자랑하듯 강조하면서 도시 전체를 제집처럼 아꼈다.

“이미 혈관을 타고 몸속을 몇바퀴나 돌았을 겁니다.”

의사는 모니터에 띄운 폐 사진의 말단을 볼펜으로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장기 곳곳에 침투했을지 모를 암세포의 기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할지 제대로 알아두라는 뜻 같기도 했다. 몸의 오장육부가 손안에 있다고 믿는 엄마는 붉은 기가 도는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의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쓱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무것도 없다니요, 선생님. 이 손에 사람의 전부가 들어 있는데요.”

엄마가 손뼉을 짝짝 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엄마는 대체로 건강했다. 겨울마다 감기를 호되게 앓긴 했지만, 몸이 크게 축난 적도 없고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없었다. 일년 전 건강검진에서도 주의하거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랄 게 전혀 없었다. 평균에 가까운 정상 수준, 검진을 담당했던 의사의 말로는 분명 그러하다 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이 병은 징후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 앞에서 지나치게 담담하게 구는 사람들을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까지 무정한 얘기는 처음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던 의사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의사에게 밉보여선 안 될 것 같아 참은 건데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를 위로하는 건 차치하고, 벌써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고 서러웠다. 내가 먼저 위로받고 격려받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제때 위로받지 못한 설움이 나에게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고맙습니다, 고개 숙이게 만든 건지도 몰랐다.

 

기미랄까, 징조랄까. 이러다 망한다 싶은 예감과 이미 망했다는 불안에 휩싸여 갈팡질팡한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이만하면 정상, 엄마가 건강검진의 결과를 뭉뚱그리며 알려왔던 일년 전 그맘때, 나는 직장을 잃었다. 웹디자인 전문회사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직원이 해고를 당했다. 투자자의 변심이 파산의 이유였다. 꾸준한 흑자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고로 장기적으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게 투자자의 판단이었다.

그달에 전직원의 월급이 절반으로 삭감되었다. 그뒤 사장은 두달을 못 버티고 조만간 사무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만한 것은 가져가라고도 했다. 다른 직원들이 태블릿과 PC를 트렁크에 실을 동안 나는 냉장고에 남아 있던 간식과 음료들을 조금씩 가방에 넣었다. 사장이 하라는 대로,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만한 것은 죄다 챙겼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해가며 직원들의 이직 자리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자기도 빈털터리 신세이면서 직원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뜻밖이었다. 그것 말고도 놀랄 일은 많았다. 투자자 한 사람의 마음에 따라 사업체의 경영과 존폐가 좌지우지되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사장이 생각했던 만큼의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투자자의 통장에서 사장의 통장을 거쳐, 다시 법인통장에서 내게로 이체되어온 월급의 경로를 알고 나니 뒤통수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사장이 딱하기도 했지만, 그간 괜히 사장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자처했다는 생각에 괜스레 미운 마음도 생겼다.

“해주씨 같은 사람이 일할 자리는 얼마든지 있어요.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해요. 능력있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게 살아요.”

공교롭게도 당장 이직 가능한 빈자리는 죄다 비서나 총무 직종뿐이었다.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무조건이라는 말이 맘에 걸렸는지 사장은 내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능력있고 재능있는 다른 직원들을 챙겨주지 못한 게 투자자의 변심보다 더 쓰라린 열패감을 안겨준 듯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운했다. ‘해주씨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따져 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끝끝내 나 혼자 먼저 가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그래서 안 했다.

사무실의 가전과 가구들을 모조리 당근마켓에 내다 팔 무렵, 나는 이직했다. 이미 망했다 싶은 불안은 용케 떨쳐냈지만 이러다간 곧 망한다는 예후랄까 예감은 어딜 가도 따라왔다. 말하자면, 망조였다.

 

디지털콘텐츠퍼블리싱, 명함에 적힌 바로는 그런 일을 하는 회사였다. 첫 출근 날에 대표는 나를 업무지원팀에 새로 온 나해주씨라고 소개했다. 누가 나와 같은 팀일까, 기대하며 직원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남달리 반색하는 얼굴을 찾아볼 순 없었다. 업무지원팀의 구성원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나를 뺀 모두가 경영기획팀에 속했다.

해주씨, 부탁 좀 할게.

누구라도 그리 말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복합기 앞에 섰다. 쏟아져 나오는 문서를 모아 잡은 뒤 펀치로 구멍을 뚫어 오링을 끼웠다. 깐깐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링 제본을 해서 주고, 털털한 사람에게는 스테이플러로 찍어주기만 했다. 그 문서들을 파쇄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직원들의 휴가와 조퇴를 관리하고, 그들이 가져온 영수증을 스캔하고 숫자들을 엑셀에 저장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내가 할 일은 많았다. 대표의 책상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대신 받아야 했고,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일일이 수기로 기록해두어야 했다. 이전 직장에서는 절대 하지 않던 일이었다. 때때로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겨졌는데, 그 또한 이전 직장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여기 직원들은 자주 자리를 비웠다. 작당이라도 한 듯이 나만 빼고 우르르 동시에 나간 적은 없지만, 한두명씩 나가다보면 어느새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일이 잦았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왔다. 누구라도 두시간 넘게 자리를 비우면 외출로 간주하고 남은 연가일수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제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자리를 얼마 동안이나 비웠는지 그 시간을 재고 외출과 외근을 구분해서 근무기록지에 기재하는 사람도 나였다. 내가 사무실을 절대 비울 수 없는 이유이자 내가 종종 혼자 남겨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제자리에 없으면 공교로운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사람은 나인데, 왜 내가 무단으로 외출한 사람 같을까.’

묘하게 기분이 나빴는데, 그런 티를 내기도 뭣해서 그저 공교롭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실은 부끄러운 마음도 적진 않았다. 시간을 재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는 온종일 다른 직원들을 힐끔거렸다. 정작 나를 곁눈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의 출입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나의 근무시간을 계량하지 않았다. 나의 근무기록지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결재자인 대표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뭐랄까, 나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로 천장에 매달린 구식 CCTV 같았다. 남의 잘못과 근태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간 나의 실수와 허물부터 먼저 들킬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나는 열심히 일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잠을 줄이기는 어려웠다. 어떻게든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자면 집을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당산역 주변이 맞춤이었다.

퇴근 후 들른 당산역 일대는 번잡하고 소란했다. 좁은 인도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나다녔다. 역 앞에 가로로 길게 뻗은 도로 양쪽은 오래된 빌딩 숲이었다. 사무용 오피스텔이 많았는데 주거용으로 지어진 곳도 적지는 않았다. 당장 입주가 가능한 공실도 흔했다. 한강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따라 월세 차이가 꽤 컸다. 매달 내야 할 공용관리비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 살려면, 되도록 싼 집이어야만 했다. 천에 육십오짜리가 가장 쌌다. 중개사의 말로는 큰길에 있긴 하지만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인데다 식당 바로 위에 있는 원룸이라서 그동안 죽 공실이었다고 했다. 나는 당장 그 집부터 가보자고 했다.

당산역과 선유도역 사이에 있는 오피스텔의 5층이었다. 중개사가 내내 비어 있던 집에 불을 켰다. 일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하얀 벽이 새것처럼 희었다. 싱크대와 붙박이 가구들도 모두 흰색이었다. 중개사는 아무도 살지 않아서 이만큼 깨끗한 거라고, 도배를 한 지 얼마 안 돼 새집이나 마찬가지라고 부추기면서도 어쩐지 말을 아끼려는 눈치였다.

“이 건물의 어느 집에서도 한강은 볼 수 없어요.”

신발을 신은 채로 중개사는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서 건너편 빌딩을 가리켰다.

“저 건물은 어느 집에서나 한강을 볼 수 있고요.”

그런가요, 나는 희다 못해 맑기까지 하고 심지어 시세보다 싼 이 집에 온통 맘을 뺏긴 터라 건성으로 대꾸하며 중개사의 옆에 섰다. 돈 드는 일도 아니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자는 중개사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어둑해진 후라서 불 켜진 맞은편 건물의 내부가 훤히 보였다. 회색 벽지를 바른 실내는 칙칙했고, 네온 컬러의 싱크대는 지나치게 반짝반짝했다. 너무 빛나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매일 한강을 내려다본다는 게 과연 좋을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첫눈 예보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11월 말에 집을 옮겼다. 커다란 유리창 앞에 흰색 침대를 들이고 같은 색의 이불을 샀다. 방은 더욱 희고 맑아졌다. 이튿날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굵은 눈발이 펄펄 내렸다.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쏟아지는 눈발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을 가리지 않고도 직시할 수 있는 빛이 있다면 바로 이뿐이라고 해도 될 만큼,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는 밝았다.

매일 아침, 북향인 유리창으로 희미한 빛이 드리워지면 첫눈이 쏟아지던 그날의 풍경이 아슴아슴 떠올랐다. 빛나지 않고도 맑을 수 있다면, 눈을 뜰 때마다 그런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나보다 앞장서서 나를 질질 끌던, 유서 깊은 망조의 힘도 어영부영 잊혔다. 그 몇달 사이 엄마의 망조는 드세질 대로 드세져서 아무런 증세도 없이 병들기 시작했다.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엄마는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좁은 오피스텔이었지만 다른 대책이 없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후에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주치의가 알려준 일정대로라면 3월에 시작한 항암치료는 내년 6월에나 끝날 계획이었다. 집에 온 첫날, 엄마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곧장 침대로 걸어갔다. 어린애처럼 이불 속을 파고들며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해주야, 엄마가 진작 올 걸 그랬다.”

그 순간부터였다. 방은 더이상 예전의 그 방이 아니었다. 희지도 맑지도 않았다. 그저 창백하고 파리했다. 여태 내가 좋아하던 색과 빛이 아니었다. 이제 내 방은 누가 봐도 일인용 병실 같았다. 엄마의 몸을 몇바퀴나 돌았을 그 암세포가 순식간에 벽을 훑고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듯, 방 안 가득 푸르스름한 냉기가 번졌다.

그날부터 나는 바닥에서만 잤다. 번번이 잠을 설쳤다. 바닥에 누워 위를 올려다보면 천장이 아찔할 만큼 높았다. 바닥과 천장 사이가 이토록 깊은 줄은 그전에는 몰랐다. 나는 밤마다 끝없는 낙하를 겪다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에서 간신히 깨어나는 기분으로 눈을 떴다. 매일매일 쓰러진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진부하기 그지없는 결심을 굳게 다잡는 하루들이 이어졌다.

이전에는 버릇처럼 죽음을 상상하곤 했다. 떠나는 삶과 남는 삶을 견주다가 항상 떠나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엄마와 나, 둘 중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항상 엄마가 생존자이길 바랐다. 내가 죽는 쪽이길 여러번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미래는 꽤나 또렷했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제외한 나머지 일들 또한 내 뜻과는 무관했다. 불행에 있어서만큼은 남들보다 앞당겨 살아냈으니 당분간은 무탈할 줄 알았고, 그래서 더더욱 예감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나도 고아로 죽는다는 걸 잊었다.

 

어제는 엄마가 여덟번째 항암 주사를 맞는 날이었다. 저녁부터 엄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빨 부딪는 소리가 딱, 딱 끝없이 이어졌다. 입술이 퉁퉁 부어오르고, 눈언저리가 짓무르듯 벌게졌다. 물만 마셔도 족족 게워냈는데, 삼킨 양보다 토해내는 양이 더 많았다. 나는 엄마의 오장육부가 통째로 변기 속으로 쏟아질 것 같아서 허리라도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엄마는 내 손이 닿기만 해도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결국 엄마는 화장실 바닥에 모로 누워버렸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엄마는 화장실 입구를 향해 돌아누웠다. 지쳐 쓰러진 엄마를 둘러업고 침대에 눕혔다.

“지겨워 죽겠다.”

여름까지만 해도 엄마는 아파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의지가 휘발된 사람처럼 지겹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다가도 깜짝 놀라서는 방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애썼다.

“너를 두고 지겨워 죽을 순 없지. 엄마는 안 죽어, 그러니 너는 열심히 일해.”

시계는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는 물도 없이 진통제를 오도독오도독 씹어 삼켰다. 약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면 엄마는 혼곤한 잠에 빠질 것이다. 기억도 못할 테지만 잠결에도 흐느끼며 울 것이다. 마약 성분이 들었다는 진통제를 먹고 잠드는 밤이면, 엄마는 작은 기척에도 반드시 울었다. 진통제가 엄마의 감각 중에서 무얼 잠재우고 무얼 일깨우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잠든 엄마의 모습은 유독 어린애 같았다. 분홍빛이 도는 두피는 갓난아기의 살결처럼 반지르르했다. 이제 남은 머리카락도 없는데, 심지어 속눈썹 한올조차 없는데, 더 뽑힐 만한 무언가가 몸에 남아 있질 않은데, 이런 무자비한 일을 여덟번이나 더 겪어야 했다. 아무리 치료를 위한 항암이라 해도 부작용은 심각했다. 방사선을 쐰 자리에는 벌건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의사는 분명 차도가 있고, 절반을 지나왔으니 견뎌온 만큼만 버티면 된다 했지만, 작아진 엄마의 몸을 보면 그저 막막했다.

이십대에 고아가 된다는 것, 환갑이 되기도 전에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깊이 생각했다. 아프지만 늙지 않은 엄마와 젊지만 번듯하지 않은 내가 계속 함께 살아야 한다면, 과연 지금의 벌이로도 충분한지, 엄마가 살던 주공아파트를 판 돈으로 이 생활을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두 사람의 생계비용을 계산하다보면 눈앞이 캄캄했다. 나고 자란 마산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긴 내 삶이었는데, 엄마의 투병으로 삶은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엄마도 어지러운 꿈속에서 나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엄마가 낮게 울기 시작했다. 잠꼬대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마산에 가자, 해주야.”

또 그 소리였다. 마산에 가면 울 일밖에 없다.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마산합섬사원아파트 1차 520호, 모든 망조는 그 집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생계는 곤궁해지고, 인정에 기대어 누군가의 친절과 배려를 바라던 비통하고 참담한 유가족의 삶은 그 집에서 비롯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에겐 각자의 망조가 있고, 그 망조의 힘을 키우는 건 다름 아닌 서로의 망조라는 걸 직감했다.

쫓겨나듯 그 집을 떠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믿지 않겠다 결심했다. 가끔은 나쁘게 살아야겠다 계획했다. 고맙다는 말은 아끼고, 미안하다는 말은 삼키고,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서 빛나지는 않되 맑아지려 했다.

 

마산합섬사원아파트는 기업의 복지정책 중 하나로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던 공동주택이었다. 한층에 스무가구가 사는 복도식 저층 아파트에는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주로 살았다. 아파트의 모든 입주민이 아버지의 직장동료이자 그 가족들이었다. 심지어 아파트 안에 있던 조그만 슈퍼의 주인도 아버지와 한 직장을 다녔던 사람이었다.

같은 점퍼를 입은 남자들이 매일 정해진 시각에 통근버스를 타고 떠났다가 함께 돌아왔다. 낮에는 온통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고, 밤에는 남자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서는 제각각 흩어졌다. 방 두개,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 호수만 다를 뿐 똑같은 평수와 구조를 가진 조그만 집으로 남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비로소 아파트의 모든 문이 닫혔다.

한낮에는 모든 집의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열린 문으로 여자와 아이들이 무람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다. 여자들은 한 집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고구마줄기, 쪽파 같은 반찬거리를 다듬기도 하고 어느날은 종일 수다만 떨기도 했다. 모두가 한 가족 같았다. 아이들은 남자 어른들을 삼촌이라고, 여자 어른들을 숙모라고 부르라고 배웠지만, 나는 좀처럼 그 말이 입에 배지 않았다. 내겐 이미 명절마다 만나는 진짜 삼촌과 숙모들이 있었고, 실은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가족이 더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엄마는 1층부터 5층까지 모르는 집이 없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얼른 밥을 차렸다.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앞치마 바람으로 집을 나섰다. 문 잠그지 말고 열어놔. 엄마는 신신당부했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이어서 열어두라 하면 열린 채로 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엄마는 안심했다. 사는 형편이 다들 고만고만해서 모두가 안온했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혼자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그 아파트에서 매일같이 혼자인 어린애는 모두를 통틀어 나 하나였다.

나는 사원아파트의 다른 또래들과도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했는지,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없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년마다 같은 반에 이웃인 아이가 더러 있었지만, 굳이 등하굣길을 함께할 친구를 갖고 싶진 않았다. 내 친구들은 모두 학교 앞에 살았다. 마산합섬사원아파트 안에서만, 나는 혼자였다.

다행히 엄마는 항상 가까운 데 있었다. 아파트 안 어딘가에 반드시 있었다. 때로는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해가 저물어서야 엄마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만 어쩌다 한번씩, 엄마는 나를 원망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에 사람들을 초대할 수가 없잖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열린 문으로 불쑥 들어와 “엄마는?” 하고 묻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부지불식간에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김없이 놀라곤 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날이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없어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금세 기가 죽었다. 행여라도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까봐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 갔어?” 재차 엄마의 행방을 물으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라요.”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고 알리는 게 싫어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공포가 가장 극에 달하는 순간이기도 해서, 나는 주로 안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내가 잠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처럼, 이제 온종일 혼자 집에 있는 엄마는 침대에 앉아 건너편 빌딩을 살펴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11월이 되자 건너편 빌딩의 창에도 일찌감치 불이 켜져서, 실내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층에 있는 방들은 대개 사무실이었다. 엄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조그만 형체를 넋 놓고 바라봤다. 해가 긴 여름 동안에는 전혀 몰랐던 풍경을 멀찌감치 바라보면서 엄마는 나의 하루를 상상한다, 했다.

 

책상은 총 일곱개였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대표의 책상을 기준으로 책상 여섯개가 T자 모양으로 마주 보는 구조였다. 대표의 책상은 사무실에서 가장 크고 깔끔했지만 실은 쓰레기통이나 진배없었다. 대표는 애연가였는데, 디스플러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빈 담뱃갑조차 버리질 못했다. 일렬로 반듯하게 쌓아 올린 빈 담뱃갑이 빼곡했다. ‘타르 흡입량은 흡연자의 흡연습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표가 책상 위에 높다랗게 쌓아 올린 담뱃갑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가 모으고 있는 건 바로 저 문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타르의 흡입량을 늘려온 자신의 흡연습관을 뿌듯해하면서. 타르와 니코틴, 순진하게도 나는 대표가 오로지 그런 것들만을 원한다고 믿었다.

대표의 바로 앞자리는 대표와 동창 사이라는 재무이사의 책상이었다. 통신 서버를 관리하는 팀장이 그 맞은편을 차지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제1열이었다. 1열에 앉은 두 사람은 책상 앞에 거의 붙어 있질 않았다. 그들은 탕비실 한구석에 마련된 원탁 테이블에 종일 앉아 있었다. 서로의 책상을 무람없이 뒤적거릴 만큼 허물없는 사이는 사무실에서 그 둘뿐이었다.

2열은 재무이사의 회계업무를 돕는 대리와 웹페이지를 관리하는 차장의 자리였다. 대리의 책상에는 크고 작은 달력과 일력이 수두룩했고, 차장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음료수병들이 즐비했다. 차장은 본인이 2열인 것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왜 대표의 왼편에 앉아야 하는지 불만스러워했다.

내 책상은 왼쪽 3열, 말하자면 차장의 옆자리였다. 내 맞은편 책상은 빈자리였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그 책상은 브라질 사람 마르꼬의 자리였다. 마르꼬는 채용공고에 따른 절차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출근했다. 그즈음 페루와 계약 건이 성사되면서 이제 남미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준비하자는 대표의 언질이 있었던 터라 다들 반갑게 그를 맞았다.

첫날부터 마르꼬는 모두를 성으로 불렀다. 헤이 킴, 헤이 팍, 헤이 초이. 킴이 재무이사였고, 팍은 팀장이었다. 초이는 대리일 수도 있고 차장일 수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대리를 부르는 소리였다. 직급과 직함을 무시한 마르꼬식 호칭을 가장 못 견뎌한 것은 재무이사였다. 이사는 틈만 나면 ‘존대가 곧 존중’이라는 걸 구구절절 가르치려 들었다. 하지만 마르꼬는 존대와 존중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이사는 잘 참는가 싶더니 어느날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치며 고함을 질렀다. 높이라고, 사람을 높이라고. 그때 나는 복합기 앞에 서서 스테이플러를 쾅쾅 내리찍고 있었다. 노라고? 노라고? 외치던 마르꼬의 목소리가 내 귀에는 놓으라고, 놓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갑갑했던 이사가 그냥 님, 님 자를 붙이면 되는 거라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거라고 고래고래 외쳤다.

“헤이 빼고, 대표님, 이사님, 무조건 님, 님. 그게 어려우면 킴님, 팍님, 초이님!”

마르꼬는 이사의 말을 곧잘 따라 하더니 돌연 나를 불렀다.

“나님.”

처음에는 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 몰랐다.

“해주 나님?”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르꼬를 쳐다봤다. 해주나란다, 해주나. 이사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자 모두가 끅끅거리며 웃었다. 오직 마르꼬와 나만 웃지 않았다. 마르꼬가 왜 웃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해주나, 안 해주나 놀려먹던 건 그들도 종종 하던 짓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오래 웃은 건 이제 막 입사한데다 한국말도 서툰 마르꼬가 3열을 꿰차고 그 바람에 나는 4열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딱 그만큼 우스워진 탓이었다.

마르꼬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게 지난달 초의 일이었다. 그 얼마 전에 나는 최근 석달 동안 납부한 전화 요금고지서를 대표에게 보고했다. 마르꼬가 입사한 첫달부터 국제전화 요금이 평소보다 세배 늘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액수가 점점 더 커졌다. 종래에는 수백만원에 달해서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마르꼬 한 사람을 운용하느라 드는 비용을 계산하고 보고하는 게 내가 맡은 일이자, 대표가 모두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회사가 잘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주씨, 미안해.”

차장은 재무이사의 옆자리가 왜 자신이 아닌 대리인지, 내게만 대놓고 불평했다. 그와 내가 대표의 왼쪽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함께 분개해주길 바랐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무턱대고 사과하면서 빈자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죽댔다.

“우리가 좌파야?”

늘 하는 말이었다.

“해주씨, 난 평생 좌파였던 적이 없어.”

차장은 그 말을 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담배를 물었다.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담배 좀 피워도 될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8시 20분, 어차피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사무실의 창문을 죄다 열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무실의 흡연자는 대표와 차장 둘뿐이었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장이 계속 담배를 피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드문 일이긴 해도 대표는 종종 차장에게 담배를 빌렸다. 처음에 차장은 디스플러스 한갑을 따로 서랍에 보관해두었다가 한개비씩 건네곤 했는데 대표는 단박에 묵은내를 감지했다. 전혀 프레시하지 않은 ‘디스 마이너스’의 맛이라고 혹평하며 차장의 취향 전반에 대해 악평했다. 커피도 믹스만 마시지? 밀크 대신 프리마? 웃자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차장은 울 뻔했다.

얼마 후 차장은 말보로레드 대신 디스플러스를 피우기 시작했다. 대표의 취향에 한껏 맞추려고 블랙커피에 각설탕을 다섯개씩 녹여 마셨다. 대신 술에 취했을 때는 무조건 말보로레드만 찾았다. 빨갛고 싸한 이 맛을 대표는 왜 모를까, 차장은 회식 도중에 슬며시 빠져나와 몰래 말보로레드를 피우며 기침하듯 혀를 차곤 했다. 해장이 필요한 아침에는 커피믹스 세봉을 한꺼번에 타서 단숨에 마셔버렸다. 달고 끈끈한 이 맛을 대표는 왜 모를까, 입맛을 다시며 내게 속삭였다.

“디스플러스를 맛으로 피우는 사람은 없어. 싼 맛에 피우는 거지.”

그 말이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았다. 나 또한 싼 맛에 채용당한 거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세가 있는데, 그걸 매일 퇴근 시간마다 반복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때 가장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 직급, 그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첫 출근 날에 내게 업무를 인수인계한 사람은 대표였다. 그는 문서 파쇄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러번 강조했다. 덧붙이기를 반드시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일괄적으로 끝내야 하며, 이를 어겼을 경우 대외비 문서가 반출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 쉽고, 내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전담하지 않은 일인 게 분명하고 모든 문서에 대외비 도장이 찍힌 게 우스웠지만, 대표가 워낙 단단히 일렀던 터라 나는 단 하루도 그 일을 건너뛸 수가 없었다.

파쇄할 문서들을 담는 상자는 직원들의 책상 아래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깊숙이 처박혀 있는 상자를 꺼내기란 불가능했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상자 위에 맨발을 올려놓고 있다가 내가 오리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그제야 발을 떼고 의자를 뒤로 쑥 뺐다. 나는 몸을 한껏 숙인 채로 그들의 발 아래로 팔을 길게 뻗었다. 손끝으로 상자의 모서리를 그러쥘 때마다 왜 나만 직함이 없는 걸까, 곰곰 생각했다. 해주씨, 해주씨, 모두가 지겹도록 내 이름을 불렀다. 어째 나만 동료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와 나의 가치가 다르지 않고, 이십대의 평균적인 삶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는 다르다고, 나는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직함이 없으므로 너희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고아가 되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왜 모두를 공평하게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지를 더 궁금해하는 법이라고, 파쇄기 앞에서 나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직급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신분을 지속시키는 힘은 사업자인 대표의 것이며, 대표 역시 투자자의 마음에 휘둘리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잊지 않으려 애썼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숨통을 잡힌 채로 행여 눈 밖에라도 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일한다는 것, 맡은 업무와 소속은 달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는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그 동질감이 내겐 위안이었다. 끝에 다다르면 여기를 가장 먼저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임을, 나는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해주씨, 수고해. 내 손으로 단단하게 철한 문서들을 일일이 뜯어내어 모조리 파쇄하는 동안 직원들은 하나둘씩 손을 흔들며 퇴근했다. 나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고맙습니다, 화답했다. 느리고 더디게 그 모든 일을 끝내고 빈 상자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면 언제나 나 혼자였다. 매일같이 죄송한 일만 하는 사람처럼 차곡차곡 혼자 있는 시간이 쌓여서, 가끔이라도 나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쁘게 사는 길을 나는 알지 못했다. 자학에 가까운 냉소를 떨쳐내고, 이만하면 됐다 자족하며 그 시간을 억지로 감내하게 된 건 엄마의 수술 직후부터였다.

 

수술을 마친 엄마가 병동으로 옮긴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여덟시 뉴스가 막 시작하는 참에 대표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엄마에게 나의 됨됨이를 칭찬하고, 그 됨됨이의 근원은 바로 어머니 아니겠냐고 추켜세우고, 선한 사람이 때때로 시험에 드는데 그것은 신의 선물을 받기 위한 면접 같은 거 아니겠냐면서 불쑥 흰 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말한 신의 선물이 바로 이것인가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두툼한 봉투 안에는 오만원짜리 지폐 60장이 빼곡했다.

“저희 모두가 어머님이 얼른 쾌차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해주씨를 위해서라도 얼른 건강을 되찾아주세요. 해주씨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어머님.”

대표가 돌아가자마자 엄마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허리에 찬 피 주머니가 빠르게 차올라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엄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픈 몸으로 나를 찾아온 게 더는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부끄러워한 적은 없지만 자랑하며 키운 자식도 아니어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거로 만족했는데 인제 보니 너는 내 이상이다, 고졸 이상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뜸 마산에 가자고 했다. 아직 실밥도 풀지 않은데다가 그새 마산의 집을 팔아버린 걸 잊었나 싶어서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좀처럼 단념하지 않았다. 마산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해주야, 더 아프기 전에 다녀오자, 우리 살던 마산에.”

“다 나으면 그때.”

나는 짧게 일갈했다. 간신히 엄마를 재우고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직원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돌아오는 답장은 물음표투성이였다. 알고 보니 십시일반 모은 위로금이 아니라 전부 대표의 사비였던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돈이라 나는 당황했다. 되돌려주자니 그 또한 무례한 짓 같았다. 얼결에 마음의 빚을 얻은 것 같아서 속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장례를 치른 것도 아닌데 한달치 월급을 웃도는 위로금을 받다니, 순간 위로받아야 할 일이라도 생긴 걸 좋아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때 이후로 대표 앞에만 서면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오직 대표만이 나를 위로해준 유일한 사람이라서 나는 그가 무섭고 두려웠다.

디지털 탁상시계와 타이머를 산 건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초 단위로 남겼다. 사무실 운영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려고 점심시간에는 반드시 불을 껐다. 형광등 몇개는 아예 빼냈다. 냉난방에도 야박하게 굴었다. 충전기의 개수를 줄이고 간식거리와 음료의 종류도 간소화했다. 양면 복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이면지의 사용을 늘리려고 스테이플러를 숨겼다. 대신 클립을 상자째 여기저기 놓아두었다. 그런 식으로 고마운 마음을, 빚진 듯한 기분을 덜어냈다.

 

“해주씨, 나 오늘은 8시 10분 출근, 알지?”

차장이 빈 음료수병에 담배를 떨어뜨리며 말을 걸었다. 요즘 들어 차장의 출근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기껏해야 9시 정각에 헐레벌떡 뛰어오는데, 그들보다 훨씬 일찍 출근하는 나보다 차장은 고작 10분 늦게 도착했다. 내가 8시 30분에 출근하면 그는 8시 40분쯤 사무실에 들어오는 식이었다. 내가 8시에 도착해도 마찬가지였다. 꼭 내가 출근하기를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뒤를 밟는 것처럼 매번 그러했다.

차장은 농담조로 해주씨보다 일찍 출근하는 게 내 소원,이라는 말을 수시로 떠들어댔다. 처음에는 그가 은근슬쩍 내 일을 넘보고 있다고 곡해했는데, 나중에는 그가 그런 식으로라도 떠들어주길 바라게 됐다. 차장이 실없는 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9시가 되자 나는 책상 앞에 놓인 디지털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줄줄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야 할 때인데, 사위가 조용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잔뜩 귀를 세워도 문밖에선 아무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장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어슬렁거리며 창밖을 흘깃거렸다.

“아침부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네.”

차장이 열려 있던 창문들을 죄다 닫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줄여가며 꼭꼭 잠그기까지 했다. 때마침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볼펜을 힘주어 쥐고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곧이어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9시 7분 27초, 메모지에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그 뒤를 잇는 발소리는 9시 7분 28초, 연달아 적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둘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몹시 서두르는 몸짓으로 명함을 건네고 대표의 행방을 물었다.

“해주씨, 우리 뭐 도둑맞았어?”

차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나야말로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명함에 적힌 바로는 그들은 형사였는데, 나와 차장만 빼고 모두가 잠적했으며, 법인통장의 돈이 깡그리 사라진 지 며칠 되었고, 대표와 재무이사는 이미 사기와 횡령죄로 고소장까지 접수되었다고 했다.

“다들 어디 있습니까?”

형사들이 번갈아가며 물었지만 나와 차장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차장이 줄담배를 피우며 여기저기 전화를 거는 동안 형사들은 대표와 1열과 2열의 책상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압수했다. 그들이 내게 따로 원한 건 파쇄기 안에 들어 있던 실낱처럼 잘려나간 문서 한봉지였다.

형사들이 떠나자 사무실은 텅 빈 듯했다. 이 사무실의 진짜 주인은 그 모든 서류와 종이들이었던 것처럼 휑했다. 차장의 말이 옳았다. 오른편이었던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나를 왼쪽에 앉힌 이유가 따로 있었다.

“차장님, 혹시 우리 회사 망한 건가요.”

주섬주섬 가방을 싸는 차장에게 물었을 때 차장은 사뭇 비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우리 모두 순장이지, 장렬하게.”

 

마산합섬사원아파트 1차 520호, 내가 아홉살부터 열네살까지, 우리는 거기 살았다. 처음 그 집으로 이사하던 날,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기다란 복도 곳곳에 세워진 자전거들이었다. 바퀴 커버에 주인의 이름 대신 아파트의 호수를 적어놓은 자전거들이 단지 곳곳에 많았다. 아버지와 엄마에게도 그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던지 그날 바로 새 자전거를 사주었다.

아버지는 문패를 쓰듯 유성매직으로 크고 진하게 520호라 썼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는데, 그 순간에야 나는 우리 가족에게 집이 생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술 더 떠 엄마는 한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회사의 사원인지, 얼마나 훌륭한 사원인지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살면 살수록 나는 아버지가 꼴찌 같았다. 5층 복도의 맨 끝 집이었던 우리 집은 통근버스 정거장에서 가장 먼 집이기도 했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하차하지만, 아버지는 가장 늦게 집에 당도하는 사람이었다. 엄마와 내가 밥상 앞에 마주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몇분 동안, 먼 집의 무거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진동이 꼭대기 맨 끝 집에 앉아 있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침내 519호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얼굴을 들면 아버지는 어느새 현관에 들어와 구두를 벗고 있었다. 곧이어 우리 집 현관문이 쾅 닫히면, 아파트 전체가 일순간 고요하고 적막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짧은 적막 속에서 고요히 신발을 벗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랫동네에 있는 미술학원에 갈 때마다, 엄마가 멀리 심부름을 보낼 때마다 어김없이 자전거를 몰고 다녔다. 아파트 한가운데에는 1층부터 5층까지 평평한 경사로가 비상통로처럼 죽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길을 유난히 좋아했다. 내려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긴 복도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핸들을 휙 틀어 경사로에 접어들자마자 페달에서 두 발을 떼고 몰아치는 바람을 즐겼다. 하지만 그 길을 되짚어 오르막을 오르는 건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번번이 1층 계단 입구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걸어 올라갔다. 잃어버릴 염려 따윈 하지 않았다. 520호라고 크게 적어두었으니, 누가 주인인지는 한눈에 봐도 다 알 만했다.

아버지도 나 못지않게 자전거를 아꼈다. 1층에 묶여 있는 자전거를 아버지가 퇴근길에 챙겨 올라오는 건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새 자전거를 샀다. 더욱 크고 무거워진 자전거를 아버지는 등에 짊어지고 올라왔다. 그즈음 자전거 도둑이 극성을 부렸다. 그래도 사원아파트에 도둑이 들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그때는 나도 줄줄 외울 정도였으니까.

그날따라 아버지의 퇴근이 늦었다. 519호의 문 닫히는 소리가 이미 한참 전에 들려왔는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엄마가 옆집에 물어봐야겠다며 일어서는 참에 아버지가 들어왔다. 대뜸 내게 자전거를 어디 뒀냐고 물었다. 계단에,라고 답했더니 없어,라고 했다. 1층부터 5층까지 다 보고 왔는데 없더라고 했다. 아버지가 당장 찾으러 나가자고 해서 엄마가 밥부터 먹고 나서자고 말렸다. 도로 갖다놓겠지, 나는 그러고 말았는데 아버지가 기어코 한바퀴만 둘러보겠다고 해서 결국 아버지와 같이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아파트 입구 쪽으로, 나는 놀이터 쪽으로 흩어져 찾기로 했다. 내가 놀이터 주변을 두어바퀴 돌았을 즈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났다. 문 닫히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나는 어떤 불길한 망조도 느끼지 못했다. 배도 고프고 밤도 깊어져서 이제 그만 자전거는 포기하고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빠, 아빠 부르며 나는 단지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뚝 멈췄다. 슈퍼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 뒤로 경광등이 번쩍번쩍했다. 사람들이 두서없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120호에 사는 남자가 술에 취해 차를 몰았다. 주차 중 미처 뒤를 못 보고 후진을 하다가 사람을 쳤다. 사람을 친 줄 모르고 전진을 하다가 다시 후진했다. 그 바람에 사람이 아주 박살 났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는데,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짧지 않은 이야기를 단 한 문장으로 줄여서 서로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인규 아빠가 해주 아빠를 죽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퇴거명령서가 배송됐다. 우리의 이웃 중에는 퇴거명령을 해제할 만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여러 집을 전전하며 사정을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가족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어쩌고저쩌고했다.

“이대로 다 순장이라도 할 끼가?”

날 세운 목소리로 되묻던 사람은 420호 아주머니였다.

달라진 건 없었다. 120호를 포함한 모든 남자가 제시간에 출근하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만 한낮의 풍경이 서서히 달라졌다. 1층에 있는 집들부터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엄마와 내가 아파트를 떠나던 날에는 모든 집의 문이 닫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120호에 살던 인규 아빠가 나날이 불행해지길 바라고, 자전거를 훔쳐 간 도둑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떨어지길 빌었다. 사원아파트에 살던 모두가 일찌감치 고아가 되어도 마땅하다 믿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던 날, 이삿짐을 실은 트럭은 아버지가 죽은 자리를 밟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핏자국이 마른 자리에는 흰 페인트로 그려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게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묻혀서 지워지지 않은 그림으로 여태 남아 있다. 그런 내 마음이 바라는 것도 실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순장이었을까. 그 저주의 마음이 어쩌면 나의 망조였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때 이른 불행이 그뒤에 이어진 삶 전부를 속이도록 내버려둔 나야말로 왜 어느 한군데 병들지 않았나 모르겠다. 막상 열어보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왜 자꾸 그 말만 기억나고, 엄마만 죽도록 아픈지 도통 모르겠다.

 

왼쪽 3열 내 자리에서, 나는 가만히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퇴근 시간이 돼서야 나는 대표의 책상에 높다랗게 쌓아 올린 빈 담뱃갑들을 와장창 무너뜨렸다. 전화선을 죄다 뽑고 두꺼비집을 내렸다. 깜깜한 사무실에서 빛을 내는 거라곤 내 책상에 있는 탁상시계들뿐이었다.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두었다. 집을 향해 걷는데 아침보다 바람이 찼다. 이번 달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 엄마와 먹을 저녁거리를 고민하다가, 오래전에 의사가 했던 말들을 처음부터 기억해보려 애쓰다보니 벌써 오피스텔 앞이었다.

더는 발길이 안 떨어져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집 창문의 흰 커튼 뒤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그림자가 셋인 것도 이상한데 셋 다 엄마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불길했다.

5층에 다다르니 복도가 시끌시끌했다. 우리 집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다리가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옥죄어왔다. 현관에는 처음 보는 신발들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해주야.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끌려가다시피 방에 들어서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엄마가 보였다. 바닥에 깔린 요 위에 촘촘하게 모여 앉은 사람들 속에서 엄마는 귤껍질을 까는 중이었다. 얼추 예닐곱명은 되어 보였다.

“마산 숙모들 왔다, 해주야.”

엄마의 목소리에선 활기가 넘쳤다. 새벽 내내 고통에 겨워하던 때가 바로 어제였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제야 엄마가 여전히 사원아파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심지어 나의 근황까지 낱낱이 전해주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네가 마산에 못 온다고 해서 우리가 왔다.”

싱글벙글 알은체를 하는 아주머니는 아랫집에 살던 420호가 분명했다. 남편과 함께 슈퍼를 운영했던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피며 감탄사를 퍼부었다.

“젊어 좋구나. 해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나는 어떻게든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맘에 없는 인사를 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아마도 217호이지 싶은데 머리칼이 하얗게 센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서서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해주야, 이리 와봐라, 나를 불러 냉장고 안을 보여주었다.

“저건 김치, 이건 불고기랑 LA갈비, 위에 저건 곰탕, 한우곰탕. 요 밑에는 네 엄마 좋아하는 고들빼기랑 방풍이파리. 이거는 암에 좋다는 버섯. 과일 칸에 든 거는 검은콩이랑 오징어. 냉동 칸에는 육개장이랑 미역국. 다 꺼내 무라. 알았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에 얼결에 네, 네 대답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인덕션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가 보였다.

“아, 저건 추어탕. 너 오기 전에 아귀는 다 먹어치아뿌따. 억울해 마라, 네 엄마가 다 먹었데이, 우리도 겨우 맛만 봤데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원아파트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잡아당기면서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히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웃음이 좀처럼 멈출 기미가 없어서, 이러다간 옆집 사람에게 한 소리 듣지 싶어서, 그때까지 열려 있던 현관문을 닫으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나를 뺀 모두가, 절대 그것만은 참지 않겠다는 듯 한목소리로 외쳤다.

“해주야, 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