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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

‘문학의 정치’를 생각하며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소설의 고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공동영역으로서의 문학

 

하나의 전제가 필요할 듯싶다. 황정아가 온당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문학의 정치’는 “애초에 문학의 ‘이미 그러한’ 역능에 대한 관찰이지 문학에 부과된 규범 같은 것이 아니었다”1는 점이다. 근대문학의 발생적 기원이나 역사가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립·확산과 얽혀 있는 긴밀성은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충분히 관찰되었으며, 특히 근대문학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의 경우 사회·역사적 지평의 창조적 인식과 수용에 의해 역량을 심화하고 키워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즈음은 훨씬 덜 언급되는 것 같지만, ‘총체성’에 근접하는 문학의 인식, 재현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논의해볼 수 있었던 측면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 백년의 역사를 돌아봐도 ‘문학의 정치’는 이 땅의 창작자나 독자 모두에게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속 편한 쓰기와 읽기를 허락하지 않은 뾰족한 칼날이었음이 뚜렷해진다. 여기에는 문학과 현실의 긴장을 계속 환기한 문학담론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지 싶다. 나 자신의 실감 속에서는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지만, 지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민문학론, 민중문학론, 리얼리즘론 등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족문학론’은 물론이고 반대편에서 ‘민족문학론’의 ‘정치’ 우위를 비판한 대항 담론들 역시 ‘문학과 정치’ 혹은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사유하는 폭넓은 지평을 열어왔다. 그러나 문학담론의 지위 또한 역사화되는 것이라면, 현실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글쓰기의 민주주의체제’2 역시 빠른 속도로 한국문학의 장 안에 펼쳐지기 시작한 듯하다.

특정하게 도드라진 일부 소설적 경향에 대한 언급이긴 했지만 ‘역사의 인력에서 벗어난 무중력 공간의 탄생’으로 2000년대 일군의 새로운 문학적 흐름을 진단한 비평적 논의3도 있었고, 2000년대 소설을 향해 ‘현실’의 결여나 과소를 지적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으나, 이후 전개된 양상이 판이했음은 두루 아는 대로다. 사정은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에 걸친 ‘문학의 정치’ 논의는 당시 금기까지는 아니라도 추문으로 취급받던 문학과 정치의 결합을 당당히 선언했다”4로 시작되는 황정아 글의 서두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황정아는 널리 공유된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개념이나 ‘포함과 배제’의 프레임이 조금은 단순한 접근이 아니었는지 되짚는다. 그런 가운데 차이와 타자성에 대한 강조가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이어지면서 “여하한 객관화나 보편화도 타자를 향한 폭력처럼 생각되고 그런 폭력을 미세한 수준까지 감지하고 추적하는 태도가 정치적·윤리적 덕목이”5 되고 만 역설적 상황을 지적한다. 요컨대 ‘문학의 정치’가 문학 본연의 역능이라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이 정답처럼 전제될 때, ‘문학의 정치’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살아 있는 질문이 되지 못하고 문학 스스로를 좁게 속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기실 최근 한국문학에서 ‘정치성’의 우세화는 일종의 도덕적·윤리적 안전판처럼 작동하는 측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문학은 현실에 대한 질문을 포함해서 현실과의 긴장력을 불가피하게 표현하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며, 당연히 ‘정치’나 ‘윤리’의 동의어도 아니다. 문학은 때로 정치나 윤리에 침묵하는 방식으로 인간사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데, 그런 작품들에서도 우리가 단순한 독서의 즐거움 이상의 무언가를 되돌려받는다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그같은 침묵과 역설을 상당한 정도로 포함하고,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문명화란 진실을 앎으로써 유발되는 어떤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을 전제한다”6는 생각은 가령 소설이 인간의 심성과 행동과 말을 자신의 문학 언어로 옮길 때도 충분히 유효할 법하지 싶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특히 차별과 혐오의 일상을 새롭게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긴박한 요구에 이어져 있지만, 거기에 개재된 모종의 근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해야 마땅한 거리와 침묵의 영역을 삭제하기도 한다. 과도한 투명성과 가시성의 요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확산을 타고 ‘전짓불의 심문’을 은밀하지만 동시에 거의 공개적인 일상의 상호 정치적·윤리적 낙인 방식으로 만든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다. 이 차이를 망각할 때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대체됨으로써 ‘공적 영역’의 포기를 무의식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7

여기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이론적으로 통합할 길은 없다고 보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입장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로티는 “자아창조의 요구와 인간의 연대성의 요구를 똑같이 타당하지만 영원히 공약 불가한 것으로 취급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연대성’을 발견되거나 인식될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성취되고 창조되어야 할 목표로 제시한다. “그것은 탐구가 아니라 상상력,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들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8 로티는 이 과정을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의 문제로 보면서 이를 이론의 과제가 아니라 보고(報告)와 서사 예술, 특히 ‘소설’의 과제로 설정한다.9 자신의 ‘마지막 어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가능한 모든 판단과 느낌의 방식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메타-어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를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철학자, 작가로 명명하고 있지만, 이런 특정한 범주화와 관계없이 대문자 진리의 거대서사를 내면화하지 않고도 세상의 비참, 잔혹함의 감소를 생각하고 연대와 정의의 상상력을 키워가는 일은 세상 장삼이사의 몫일 수 있다. 사실 ‘공적 영역’은 우리 각자의 편견과 두려움, 나약함을 억제하고 혹은 불편함을 참아내면서 얼마간의 가면이 있을망정 우리 자신의 성숙한 의견을 시민의 얼굴로 등재하는 공간이다. ‘민주주의와 문학’을 생각하는 가운데 그 민주주의를 “갈수록 빈틈없이 규정해오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계기”를 섬세한 작품 분석과 연동하고 있는 강경석의 글10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과 정치를 규정하는 더 크고 근본적인 구조를 폭넓은 현실 인식으로 품기 위해서도 ‘공적 영역’ ‘공적 정치의 장’을 지키고 활성화하는 일은 긴요하다.

‘문학의 정치’의 특정한 양상이 ‘타자성’과 ‘차이’를 특권화하는 가운데 ‘재현의 윤리’나 ‘공감’의 윤리적 좌표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스스로의 창조적 영역을 얼마간 제한해왔다면, 이는 보편의 작동공간으로서 ‘공적 영역’의 역사나 현재에 대한 오래된 실망과 거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역사는 그 민감성을 잃지 않은 채로도 숱한 모순과 한계로 뒤얽힌 인간과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폭넓은 시야와 방법을 찾아왔다는 걸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는 가장 사적인 감정과 욕망의 표현인 경우에도 상황과 맥락과 관계 안에 그것을 놓으며, 역설과 아이러니의 힘으로 소통의 ‘공동영역’(commons)을 창출한다. ‘문학의 정치’는 문학이 곧 ‘공동영역’이라는 자기확인으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다. 개인의 자리와 분리된 ‘공적인 영역’의 확장이 민주주의의 진전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것과 나란히 가는 인간의 자기이해에는 평등이라는 장기적 목표 아래 개인의 한계를 감싸고 보호해주는 상호 관용의 지대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관용의 지대는 ‘배타적 개별성’과 ‘이어짐의 감각’ 사이에 있으면서 공동의 토론과 연대,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강경석이 글의 결론에 인용하고 있는 정성숙의 소설 「호미」11에서 영산댁이 마비된 몸으로 호미에 의지해 산길을 기어서 내려가는 압도적인 장면은(해거름에 시작된 포복은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4시쯤에야 동네 어귀에 영산댁의 몸을 부려놓는다) 여전히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그이의 육신과 그 사실을 알 길 없는 동네 봉고차 불빛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서 너무 쉽게 쓰이고 있는 정치의 언어, ‘이어짐’ ‘연대’의 상상력을 쓰라리게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이어진다는 것은, 혹은 이어짐을 상상한다는 것은, 이같은 전면적인 인간의 풍경, 단절과 침묵을 포함하는 인간의 이야기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일곱 명의 사람들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 동구댁은 맞춰야 할 사람을 다 채운 모양이었다. 사람이 모자라지 않았으니 동구댁은 영산댁한테 이녁 일은 나중에 하고 양파 작업하러 가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영산댁 자신이 동네에 없음을 아는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태운 차는 동네를 등지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46~47면)

 

‘문학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이 ‘이어짐’의 상상력과 관련해서 조금 부연해보고자 한다. 박솔뫼의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문학동네 2021)과 임솔아의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문학과지성사 2021) 속 두편의 단편이 지금 내 앞에 있다.

 

 

2. 과거 혹은 미래와의 이어짐

 

박솔뫼 장편 『미래 산책 연습』은 2020년 부산비엔날레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단편 「매일 산책 연습」(『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에서 자라난 작품이다.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후 ‘부미방’으로 약칭)을 당시 근처의 직장인으로서 목격했던 ‘최명환’이라는 60대 여성과 부산을 찾은 소설가인 화자 ‘나’의 만남을 핵심 사건으로 공유하는 가운데, 『미래 산책 연습』은 ‘부미방’에 참여했던 대학생 ‘조윤미’와 그의 먼 이종조카 ‘수미’의 이야기를 열린 액자소설 형식으로 병치한다. ‘나’와 ‘수미’의 연관은 소설에 드러나 있지 않은데(‘나’의 또다른, 상상된 과거로 ‘수미’의 이야기를 읽을 여지도 없지 않다. ‘나’를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상상하기), 그렇게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체험’(erlebnis)이라는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 너머에서 역사의 시간을 상상하고 ‘경험’(erfahrung)하려는 소설의 의지를 좀더 적실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 같다.12 그러나 ‘조윤미의 이야기’가 합류하면서(‘조윤미의 이야기’ 안에는 1980년 5월에 광주에 살던 동명이인 조윤미가 ‘부미방’으로 수감된 조윤미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후 석방된 조윤미가 광주의 조윤미를 ‘나’와 함께 찾아가는 삽화가 나온다. ‘부미방’의 기원으로서 ‘5월 광주’는 좀더 구체화된다) 장편에서 더 충실하게 돋을새겨지는 측면은 소설 제목에도 표현된 ‘미래’라는 시간이 아닌가 한다. ‘미래를 겪고, 미래를 살아내고,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겠다’는 생각은 ‘나’가 ‘부미방’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걷고 또 걷는 부산의 시간에 거듭 포개진다. “미래를 살고 와야 할 것을 살아낸다면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153면) ‘산책 연습’이라는 제목이 정확히 가리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 혹은 ‘역사의 시간’을 미래의 지평에 놓는 가역적이고 혼성적인 시간 감각은 기실 박솔뫼의 소설세계 전반에서 그다지 낯설거나 파격적인 것은 아니다. 박솔뫼 소설은 규범적인 언어의 질서 바깥으로 흘러가는 인물의 생각과 말을 가급적 그대로 받아 적는 한편, 구획된 격자와 선조적 진행을 비껴가고 거스르는 시간의 흐름을 소설의 무의지적이고 무의식적인 서사의 결로 만드는 데 특별한 성취를 보여왔다. 혹은 미체험 세대의 간극과 거리를 그대로 둔 자리에서 ‘5월 광주’와 같은 역사의 시간을 ‘경험’하는 문제는 근자 박솔뫼 소설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했다.13 그런데 『미래 산책 연습』에서 박솔뫼의 소설적 질문은 최명환과 조윤미, 그리고 수미와 수미의 중학교 동창 정승이라는 인물들이 살아온 시간을 받아 적고 상상하는 가운데 장편의 형식 안에서 좀더 자각적이고 풍부하고 명료한 이야기와 사유에 이르고 있는 듯하다.

 

최명환의 말처럼 기후가 변화하고 동물들이 사라지고 지구의 끝이 가까워질 때 나는 그 창 너머를 떠올리며 내가 갖고 싶은 미래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과거로 여겨질 것이고 그때는 괴로울 것인지 후회스러울 것인지 혹은……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간절히 되살리고 싶고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이기도 했다.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는 여전히 미래로 여겨지고 내가 그리는 미래도 미래에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미래가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18면)

 

미래는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이며, 그런 한에서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거를 일깨울 수 있다면, 누군가가 되살리고 만들어간다면 미래의 자리는 보존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져오려 애쓰는’ 미래로 남는다. 그러므로 ‘반복’해야 하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된다.14 『미래 산책 연습』은 이 반복을 옛 부산미문화원 건물 주변을 걷고 또 걷는 인물의 ‘산책’으로 수행한다. 소설 속에서 산책은 서사의 리듬이자 사유를 생성하는 운동이 되고 있다. 반복되는 ‘과거-미래’는 하나가 아니며 다층적인데, 가령 최명환과 조윤미는 목격자와 사건 참여자로서 전혀 다른 삶의 행로를 걸어왔고 걷는다. 그러나 최명환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야학이 있던 영도 봉래성당을 통해 ‘부미방’의 ‘김은숙’과 희미하게 연결되며 방화사건이 있던 바로 그날 지하도 계단에서 성폭력을 당한다. 부산의 조윤미와 광주의 조윤미가 그랬듯이 과거-미래에는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나’는 그 작은 교차점들을 받아 적고 응시하는 가운데 개인과 시대, 개인과 역사의 접점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화자가 ‘부미방’의 성명서를 찾아 읽고, ‘부미방’의 역사를 ‘5월 광주’와 ‘부마항쟁’ ‘부림사건’으로 거슬러 오르고, 김은숙이 노동 야학을 했던 서울 창신동 청계피복노조 주변을 다시 찾고, 부산미문화원 건물의 역사를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까지 되돌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최명환과 조윤미의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나’가 최명환과 조윤미의 과거-미래를 긴 시간의 지평 안에서 ‘경험’하는 한걸음 한걸음의 순간들이다.

소설은 그날 부산 시내에 뿌려진 ‘부미방’의 성명서와 사건 이틀 후 발표된 고신대 총학생회장 명의의 성명서(“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일에 전혀 관계가 없으며 우리의 떳떳한 입장을 분명히 하여야겠읍니다.” 95면)를 나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두개의 미래가 “다른 곳에 존재하며 사람들은 두 세계를 오갈 수 없다”(96면)고 쓴다. 여기에는 ‘다른 세상’의 소망이 각기 다른 전망과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고신대 성명서는 당시의 정치권력에 굴복한 종교의 얼굴을 보여준다. ‘나’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떠올리는 인상적인 삽화가 있다. 1980년 11월 광주 전남 지역의 미술인들은 ‘2000년을 위한 파티’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연다. 그들의 소망 속에서 2000년은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세상이다. 전시회는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작품들은 압수당했지만, 그들이 꿈꾼 ‘다른 세상’은 오지 않았는가. “2000년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그것은 2000년을 위한 파티에서 오갔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실제의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의 대통령이었다는 것이 뚜렷한 사실 같기도 하고 누군가 살아내어 가져온 다른 세계의 믿음 같기도 하다. (…) 그게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194면) 과거가 ‘다른 세상’의 믿음 속에서 미래를 산 사람들의 시간이라면, 거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와야 할 것을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미래 산책 연습』의 화자가 옛 부산미문화원 주변을 산책하며 반복하는 시간의 감각 안에서는 “미래를 살고 와야 할 것을 살아낸다면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 수 있”는(153면) 지평이 희미하게 열린다.

그런데 과거-현재-미래의 다른 배치와 연결을 상상하는 『미래 산책 연습』의 문제의식은 일견 ‘나-최명환’ ‘수미-윤미’의 병치된 이야기 쌍에서 ‘나’나 수미의 자리에 대한 좀더 깊은 소설적 탐문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최명환과의 만남에서 ‘나’는 얼마간은 자유로운 화자-청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수미에게 이모 윤미의 삶은 어떤 ‘미래-기억’이 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던져볼 만하다. 황정아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전승’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것이 때때로 “트라우마의 ‘벌거벗은 반복’이라는 불가능한 위치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일이 될 수 있다”15는 점을 지적하는데, 『미래 산책 연습』은 그 ‘불가능한 위치’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려 하는 것 같다. 소설은 병치된 이야기에 두개의 반복되는 결말의 형식을 부여한다. ‘나’가 최명환에게 김은숙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최명환이 “어떻게 처음 그 사람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줄게”(225면)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한쪽이 끝나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에서 만난 수미와 정승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수미는 일본까지 찾아온 윤미 언니의 이야기를, 정승은 이혼 후의 생활과 새로 만난 연인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끝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이야기해줄게.”(241면) 우리는 이 반복되는 형식의 끝이 소설의 처음과 원환처럼 이어져 있고, 소설의 결말에서 듣게 될 이야기들이 소설의 처음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을 통해 최명환과 윤미, 혹은 수미와 정승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제한적이며 더 많은 이야기는 미래의 시간으로 남는다. 그렇게 해서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화자와 수미가 이야기를 듣는 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한다. 말하자면 화자는 최명환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위해 ‘부미방’에 대해 알아보고 옛 부산미문화원 주변을 돌아다니고 김은숙이 번역한 책과 『티보가의 사람들』(이 소설 역시 ‘다른 세상’을 꿈꾼 미래-기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을 읽는데, 이러한 ‘준비 과정’이 소설의 실질인 셈이다. “어떻게 처음 그 사람(김은숙—인용자)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줄게” 하고 최명환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설의 마지막 바로 앞 문장이 “최명환은 내게 들을 준비가 되었냐고 묻듯이 잠시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224면)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셈이다. 그러나 소설이 ‘불가능한 위치’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는 않되 의식하고 있으며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최명환이 ‘나’를 쳐다보기 직전의 장면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나는 최명환에게 김은숙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최명환은 창가를 바라보고 나도 서서히 붉게 변하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을 때 그의 옆얼굴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는데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얼굴에 본 적 없는 감정을 보이게 하였다.(224면)

 

‘이어진다’는 것을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의 차원, ‘체험과 경험’의 차원, 혹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전승’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때 박솔뫼의 『미래 산책 연습』이 도달한 이 지점은 있을 수 있는 한계를 수락한 채로 글쓰기의 문제를 포함하여 문학적 진실과 인간적 진실에 대한 도전과 물음을 함께 지속하고 있는 것 같다.

 

 

3. 성숙 혹은 새로운 인간 유대의 시작

 

임솔아의 단편 「그만두는 사람들」에는 소설가인 화자 ‘나’가 친구인 미술가 재연의 전시회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설치미술인 듯, 프로젝트 영상에는 허공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두 손으로 받는 장면이 비친다. 손안에 차오른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면 다른 사람의 두 손이 이어서 그 물을 받아내는 식으로 손이 계속 아래를 받친다. 전시회의 제목은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연습”이다. ‘나’가 머물고 있는 은돌해변의 ‘노루섬’ 이야기도 있다. ‘나’는 ‘적’을 피해 육지의 숲을 돌고 돌다 밤바다를 건너 섬으로 필사적으로 뛰어오르는 노루를 지켜보며 “경이로움을 느”(11면)낀다. ‘그만두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의 제목과 전시회 이야기, 그리고 노루 이야기를 이으면 소설에 표현된 ‘위기감’과 ‘고립감’을 얼마간 그려볼 수 있다. 재연은 이번 전시를 끝으로 미술작업을 그만둘 생각이다. 미술 현장의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던 동료 작가는 매번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다가 자살했고, 재연은 ‘그만두고 싶다’는 그이에게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고 말해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 ‘나’ 역시 ‘문학계 권력남용’ 문제를 다룬 포럼에서 튀는 발언을 한 이후로 ‘문학계’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며, 처음으로 이력서를 써보면서 ‘문학을 그만두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문학을 하던 동료들이 한 명씩 그만둘 때마다”(24면)의 상황에 담긴 대로 턱없이 낮은 경제적 보상을 포함해서 ‘권력’ ‘성차별’ 등 ‘예술 노동자’들을 둘러싼 여러 문제가 이야기의 배경에 놓여 있는데, ‘나’가 느끼는 위기감의 정도는 밤바다를 건너는 노루를 지켜보는 장면에 뚜렷이, 아프게 담겨 있다. ‘나’와 ‘재연’은 지금 “얼음의 언저리를 걷”고 있다. 스웨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혜리’와는 대학에서 교양수업을 같이 들은 인연밖에는 없지만 7년 전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오면서 서로 연락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메일로 서로의 부탁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정도까지 관계가 진전된 상태다. 혜리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소설에 나와 있지 않지만, 스웨덴에서도 한인 커뮤니티를 최대한 피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특히 여성들의 삶에 불리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한국의 현실을 벗어나고 ‘그만두는’ 방식으로 그이의 선택과 결정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숨 막힘은 ‘나’가 재연에게 보낸 메일 속에서 “관두자,라는 마음에, 더 해보자,라는 말을 하는 것. 그거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간다는 걸 알고 있는데”(25~26면)라는 절망의 표현을 낳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기서 가령 ‘문학의 정치’와 같은 차원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거의 무망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절실하고 절박하게 공유하면서도 어떻게든 글쓰기를 이어간다. “그 사건(문학계 포럼 사건—인용자) 이후로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27면) 그런데 소설은 그 ‘억지로’의 상황에 작게나마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여지가 있다. 연약한 노루의 도주는 ‘위기감’이나 ‘고립감’, 상황의 가혹함만을 환기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것은 필사적인 만큼이나 생존의 어떠함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바가 있다.

‘나’가 머물고 있는 은돌해변 근처 숲속의 ‘사비나가든’ 이야기도 단순히 소설의 배경 서사로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때 간호장교로 참전했다가 동료의 죽음과 관련된 잘못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본국 귀환을 거부하고 은돌해변에 남은 ‘사비나’라는 미국 여성. 사비나는 한국으로 귀화했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숲속 작은 연못가에서 60년을 혼자 살며 ‘사비나가든’을 일구다가 91세로 사망했다. ‘나’는 재선충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소나무들을 근심하는 사비나의 식물일지를 읽는다. 근자에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일인칭 글쓰기’의 문제와 관련해서 ‘일인칭 화자’ 뒤에 있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글쓰기와 함께 밀고 가는 ‘수행성’의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어로 된 사비나의 일지를 읽는 ‘나’는 바로 그 ‘수행성’의 역학으로 소설의 벡터를 이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모두 죽여야 하는가./그럴 수는 없다”(19면)라는 사비나의 일지 대목은 ‘나’가 함께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에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고립 속에서 기록한 사비나의 식물일지는 ‘그만두기와 지속’의 경계에 있는 ‘나’의 글쓰기를 지속 쪽으로 추동한다.

‘나’가 지금 은돌해변에 머물고 있는 것도 혜리와 주고받는 메일이 혼잣말에 가까운 형식적인 안부 묻기에서 한국과 스웨덴에서 각자 해보고 싶은 일들을 부탁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단계로 진전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전 두 사람의 관계는 “나처럼 멀리 있는 사람이 혜리에게는 필요했다. 가까워질 수 없고 개입도 불가능하고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19면)는 진술에 잘 요약되어 있다. 멀리 떨어진 채 메일로 일상을 공유하는 ‘이어짐’의 방식은 ‘그만두는 사람들’이 고립과 단절 속에서 찾아낸 생의 동력이라 할 만하다. “나는 혜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전보다 더 자주 바깥에 나왔다. 더 많이 걸었다. 그리고 혜리에게 부탁할 것들을 궁리했다.”(32면) 이 동력은 희미하고, ‘나’가 ‘문학계의 현실’ 혹은 그런 현실을 구조화하고 온존하는 더 큰 세상의 시스템과의 관계에서 지금의 환멸과 절망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발견할 가능성도 소설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전면적 감각 사이에서 희미하게나마 감지되는 지속과 소통의 기운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 같다. ‘나’와 혜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크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이상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 조건인데, 소설에서 ‘나’가 이메일 외에 사람과 직접 나누는 대화는 콘도의 주인 할머니와 은돌수산시장 (아마도 혜리의) 할머니 외에는 없다는 점을 쓰리게 돌아보게 한다. 좀더 친밀한 접촉이라 할 만한 것은 고양이들을 천천히 유리문으로 밀고 개 ‘뭉치’를 쓰다듬을 때 겨우 일어날 뿐이다. 소설은 “창문을 닫고 계란장조림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으면 메일을 다시 쓸 것이다”(33면)로 시작하는 마지막 언어에서 사비나를 생각하고, 혜리의 답장을 기다리고, 뭉치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다를 건너가는 노루를 지켜볼 시간을 ‘의지의 미래’로 숨 가쁘게 기입한다. 그렇게 해서 ‘(할) 것이다’로 끝나는 여덟개의 문장이 격문처럼 이어진다. 이 바닷가로부터 ‘정치’나 공동체의 차원은 북구의 도시만큼이나 멀게 감각되지만, 문학(혹은 문학을 하는 일)과 세상을 함께 묻는 일이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문학의 정치’의 시작이라면 이 가난하지만 격렬한 ‘의지의 미래’가 시작되는 지점만은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임솔아 소설이 보여주는 또 한번의 쓰라리고 이상한 소통의 장면을 간단히 부기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는 10년 전 대입 기숙학원에서 만나 친밀한 관계를 이어오다 언제부턴가 소원해진 아란과 문경이 겨울밤 각자의 동네를 거닐며 나누는 전화 통화가 소설의 핵심적 사건이다. 문경에게서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은 아란이 휴대폰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 통화를 이어가고, 문경도 아란에 맞추어 자신의 동네를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게 소설의 현재를 이룬다. 아란은 공원 그네에 앉고, 문경은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앉아 그네 높이 올라가기 시합을 한다. 그러나 실상 문경이 도착한 놀이터에는 그네가 없었고, 그네에 앉은 척 연기를 하며 아란과 대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란도 그네를 멈춘 채 타고 있는 척했고, 문경은 그걸 알아차린다. 그때쯤이면 아란도 문경의 연기를 알고 있다. 기실 두 사람은 이미 전화에서 부러 친밀했던 시절의 말투를 쓰며 “각자의 과거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둘 다 알았다.”(198면)

소설은 아란과 문경, 아란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고아 단영까지 모두 “괜찮아?”(207면)라고 안부를 묻고 대답하는 일이 언제든 ‘감정 고통’으로 바뀔 정도로 ‘얼음 언저리를 걷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힘겨움들은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아란과 문경이 서로를 배려하고 보살피며 이어온 관계는 지금 ‘연기’가 필요할 정도로 약화되어 있다. 또한 아란이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절에서 만난 단영은(아란과 단영의 전사를 다룬 작품이 같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영」이다) 여러 위탁가정을 떠돌다 열일곱살 때 아란의 집으로 찾아온 이후로 “다른 인간관계가 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통”하며 6년째 같이 살고 있지만, 이 ‘유사 가족’은 “언제든 단영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단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03면)라는 진술이 알려주는 대로 지속을 어렵게 하는 더 많은 조건과 상황의 습격에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는 관계의 환상을 거절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이들이 고안해내야 했던 ‘감정 관리’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네를 타고 있는 것처럼’ 연기하기는 아란과 문경의 관계에 찾아온 성숙의 표현이 아닐까. 이것은 사실 “아무도 속지 않는 기만”16이며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이어가려고 할 때 오히려 ‘요구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정치’가 사람들의 상호 이어짐의 가능성을 마련하고 실현하는 공적 영역의 과제라면, 우리는 때로는 ‘마치 —인 것처럼’ 고립을 대하고 단절과 마주 서야 한다. ‘함께 그네 타고 있는 것처럼’의 연기가 끝난 뒤 문경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나는 이제 아무도 안 보살펴. 나만 생각해. 언니가 나한테 많이 서운해했다는 거 아는데. 근데, 나 이제 좀 만족해. 지금 내가 좋아. 그냥 우리 얘기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 그래서 전화했어.”(211면) 통화가 끝난 뒤 아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 다시 전화를 걸지만 문경의 전화기는 꺼져 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놀이터의 흙바닥 위로 우당탕탕 쏟아졌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휘발됐다. 그때의 아란과 문경은 이제 사라졌다. 아란은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212면) 이것이 두 사람 관계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유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굳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그 성숙은 여전히 아슬아슬하기만 한 아란과 단영의 상호 보살핌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도 한다. 그러니 여기가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시작의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4. 단절과 침묵 너머에서

 

임솔아 소설의 사비나와 식물일지 이야기는 박솔뫼 소설이 ‘부미방’의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애쓰는 ‘미래의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임솔아 소설의 경우 보다 긴박한 외적 조건과 연계된 글쓰기의 중단/지속의 질문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소설가의 존재 조건이나 글쓰기의 물음을 메타 서사로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좀더 수행적이 되어가는 우리 시대 소설 쓰기의 중요한 징후에도 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정성숙의 「호미」에서 더없이 강렬하고 극적으로 표현된, 한 인간의 육신과 존재의 시간 전체에 닥친 단절과 침묵의 벽은 완강한 고립의 이야기라 할 임솔아의 소설만이 아니라 열린 만남들이 가벼운 저녁 산책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박솔뫼 소설에도 숨어 있다. 최명환의 집에서는 밤새 술과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는 모임이 종종 열리는데, 최명환과 조금씩 연결되어 있을 뿐 이들은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밤중에, 아침에 역시 서로 잘 모르는 상태로 헤어진다. 비슷한 방식으로 『미래 산책 연습』의 ‘나’는 자신의 아파트 계단에서 건너편 호텔 건물을 바라보는, 건축을 공부하는 P를 만난다. 사실은 ‘나’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계단에서 그 호텔 토요코인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다. 최명환과 김은숙이 ‘나’에게 그러한 것처럼. 단절과 침묵은 사실 소설 전체의 행간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부산의 시간. 그러나 ‘나’에게는 방법이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들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124면) ‘나’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 부산타워 전망대에 올라 옛 미문화원 건물을 보고 그날 연기에 휩싸인 건물을 보았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나는 나와 비슷하고 나와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했다.”(185면) ‘타자와의 거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 인상적인 소설의 풍경에는 ‘타자’를 ‘알 수 없는 자리’에 놓는 윤리의 향유가 없다. 민주주의의 원칙이자 목표인 평등의 이상을 향해 우리가 함께 그려가야 할 지도에는 ‘그리움’과 ‘사라짐’, 불가피한 단절과 침묵을 수락하면서도 서로를 이으면서 밀고 가는 문학의 사유와 상상력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정치’가 문학에 부과된 규범이나 덧붙여야 할 내용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역능에 대한 관찰이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1. 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20면.
  2. “(민주주의적 글쓰기의) 말 많은 침묵은 말로 행동하는 인간들과 단순히 살아갈 뿐인 인간들 간의 구분을 폐기한다.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소설 속 영웅들의 삶을 전유(專有)한다든지, 스스로 작가가 된다든지, 또는 공동 관심사에 대한 토론에 몸소 참여하는 것 등을 통해 각자가 몫을 챙길 수 있는 자유로운 문자 체제이다.”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27~28면.
  3.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2000년대 문학의 다른 이름들」,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4. 황정아, 앞의 글 17면.
  5. 같은 글 20면.
  6. 로베르트 팔러 『성인언어』, 이은지 옮김, 도서출판b 2021, 89면.
  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혼합은 사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많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무분별하게 포함될 여지를 열어놓았다. ‘일상의’ 미학적인 ‘변형’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특권화된 주체적 경험을 그 대상보다 우위에 놓는 평준화 효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마틴 제이 『경험의 노래들』, 신재성 옮김, 글항아리 2021, 214~15면.
  8.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김동식 옮김, 민음사 1996, 24면.
  9. 같은 책 24~25면.
  10. 강경석 「진실의 습격」,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인용은 57면.
  11. 정성숙 『호미』, 삶창 2021. 소설집 『호미』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논의될 지점이 많은 듯하다. 사라져가는 농촌의 삶, 거기서 가부장제의 질곡을 견디며 가장 힘겨운 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성이다(결혼을 매개로 건너온 이주민 여성들도 있다). 작가는 그 여성들의 시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오늘의 착잡한 농촌 현실을 그 깊은 사회적 배경과 함께 충실한 리얼리티 속에 담아낸다. 여성 인물들의 언어는 ‘위생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걸러지지 않고 질펀한 생활어의 실감을 놀라울 정도로 유지한다. 남편의 폭력과 힘겨운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 한 여성은 인터넷 채팅의 세계에 유혹당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그이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그려진다(「기다리는 사람들」).
  12. ‘체험’과 ‘경험’의 구분은 널리 알려진 벤야민의 예를 따랐다. “일반적으로 Erlebnis는 Erfahrung보다 더 직접적이고 선반성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변종을 함축한다.” 마틴 제이, 앞의 책 23면.
  13. 가령 「그럼 무얼 부르지」(『그럼 무얼 부르지』, 개정판 민음사 2020)와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14. 이 대목에서 벤야민의 생각을 잇대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는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관계되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344면.
  15. 황정아, 같은 글 22면.
  16. 로베르트 팔러, 앞의 책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