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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요즘’ 청년들의 트릴레마

최근 소설 속 일과 사랑에 관하여

 

 

전승민 田承珉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레즈비언 구출하기: 침묵, 방백, 그리고 대화」 「만질 수 없음을 만지는 언어」 등이 있음.

nrz5haeyo@naver.com

 

 

1. 상호 침범하는 섹슈얼리티와 노동

 

사랑하거나 일하거나 혹은 그 둘 모두를 거부하는, 인간은 이 세가지 실존적 상황 중 최소한 하나에는 해당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고사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부터 어려워진 시대다. 사랑은 어떤가? 온몸을 바쳐 사랑할 만한 끌림의 경험은 너무나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차원의 것이 되었고, 결혼은 더 나은 수준의 삶을 살기 위해 각기 가진 자본을 결합하는 계약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생활이 곧 생존의 연속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처럼 일과 사랑으로 시선을 모을 때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윤곽이 좀더 드러난다.

질문은 한번 더 쪼개진다.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섹슈얼리티나 젠더는 공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노동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둘은 상호 침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울에서 취업에 성공한 남자와 서울로 진입하지 못하고 지방 소도시로 다시 돌아간 여자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유리천장을 뚫고 힘들게 입사한 회사에서 팀장과 부장을 거쳐 임원까지 승진하려는 여자는 과연 회사에서도 ‘여성’일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에 함께 성공하고 서울의 아파트를 구입하기도 한 이들의 연애는 마냥 안정적일까?1 노동과 섹슈얼리티의 공모관계는 매우 치밀하고 음험해서 분리가 어렵다. 노동과 생산조건이라는 유물론적 토대가 섹슈얼리티와 젠더, 사랑이라는 관념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역으로 그 성적 실천이 생산과 노동의 물질성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가령 모종의 이유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연애로 인해 승진이 좌절될 수도 있고, 혹은 회사의 ‘자비로운’ 대출상품 덕에 애인과 함께 살 보금자리를 마련해 더욱 안정적인 연애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 청년 주체들의 노동과 사랑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다음 세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보자.

 

 

2. 프레카리아트 피터팬: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모든 유혹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무한경쟁과 제로섬 게임을 사랑하도록 유혹한다 할지라도 매혹되지 않는 자는 분명 있다. 송지현의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의 화자는 그 힘의 변두리에 조용히 기거하는 삼십대 여성이다. 인디밴드 가수를 꿈꾸던 ‘나’는 고시원에서 ‘임시’로 거주하다가 낙향하여 지방 소도시의 시장 근처에서 이모와 지내기로 한다. 스스로를 “한치 같은 인생”에 비유하는데, 한치는 돈을 주고 사 먹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주문하는 메뉴라서다(163면). 이는 인력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재단할 줄 모르는 사람이나 자신을 고용할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고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낙담의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고 취업에 필요한 능력을 계발할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2로 노동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슬픔을 갖는 것도 아니다. 대신 천천히 걸어가는 거북이처럼 고요하고 느린 평온함으로 둘러싸인 그 일상의 표피 아래에는 어색한 접속사와 말줄임표로 압축된 강렬한 정서가 숨어 있다.

 

나는 남을 죽이고 내 인생이 망가지는 악몽을 자주 꾼다. 악몽 속의 나는 항상 사소한 실수로 살인을 한다. 원망도 증오도 없다. 그런 실수로 인생이 망가져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시체를 유기한다. (중략)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데 망가지지 않은 것이 맞나? 어쨌든.

그래서, 나는 휴먼고시원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모의 일도 미리 배울 겸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거였다.(164면, 강조는 인용자)

 

꿈속이지만 사람을 ‘사소한 실수’로 죽이고 그로 인해 자기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적극적으로 시체를 유기하는데, 그런데도 인생이 망가졌는지 아닌지는 불확실하다는 마음이 말줄임표 안에 들어 있고,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이어지는 ‘그래서’라는 전혀 개연성 없는 접속사에는 사유와 결단의 부재가 들어 있다. 자기 인생이 망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하게 감지하기 어렵거나 혹은 감지하고 싶어하지 않는 화자는 사태 파악에 있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을 유보한다. 이 프레카리아트적 산책자(flaneur)의 정념은 정념이라 부르기 머쓱할 정도로 식은 밥처럼 뜨뜻미지근하다.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를 거닐며 십대 시절을 추억하지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상대가 당최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으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가 진지하게 의문시하는 것은 소머리국밥집인데 왜 돼지머리를 대야에 담가 둘까 하는 것 정도니 말이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 산책자는 그러나 자신의 현재 상황이 다분히 임시적이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한다(“우리 모두 이곳을 임시로 거쳐 가는 것이 맞겠지요, 휴먼?” 162면). 이 프레카리아트 산책자에게도 주택 마련의 꿈은 분명 실재했다. 다만 현재 임시적으로 유보하는 중일 뿐이다. 우리의 이 여성 프레카리아트는 룸펜처럼 ‘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극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선택과 결단을, 나아가 상황을 제대로 감각하는 일조차 끝없이 미루면서 현재라는 순간의 욕조에 몸을 담그며 머무르고 있다. 물 온도는 역시, 뜨뜻미지근.

하지만 이토록 평평해 보이는 ‘나’의 서사에도 애정의 삼각관계가 있다. 시장 내 청년몰에 입점한 핫도그집 사장,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첫 키스 상대로 뒤늦게 밝혀지는 동창 b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서사 전체를 지배하는 느슨함은 연애 관계에도 물론 적용되어서 이 삼각 구도는 그 어떤 긴장도 암투도 경쟁도 포함하지 않는다. 삼십대의 연애는 모름지기 대개 조건을 앞세운 결혼을 염두에 둘 때가 많지만 화자는 서울에서 재취업에 성공한 b를 핫도그집 사장보다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업턱을 낼 테니 서울에 언제 오느냐 묻는 b에게 ‘나’는 이유 모를 화가 난다. b를 통해서 서울에서 다시 음악에 도전하려는 생각을 가지거나 주택 구입의 꿈을 되살려볼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의지를 가지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쉽지 않다. b의 문자나 자신의 취향과는 다른 이모 집의 이불을 보면서 문득문득 서울에 놔두고 온 자신의 욕망을 재확인하게 될 때마다 마음이 어지럽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면 b를 연애 상대로 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겠지만, ‘나’는 핫도그집 사장의 문자에 자꾸 눈이 간다.

그는 상위 계층과의 접촉을 통한 계층 상승을 욕망하지 않고 오히려 유사한 계층 감각을 가진 존재와 관계 맺는 것에서 더 큰 행복과 안도감을 느낀다. 하루에 몇개나 팔릴까 싶은 시골 핫도그집을 운영하는 사장은 ‘사장’이지만 오히려 ‘나’의 계층성과 훨씬 가까이 맞닿아 있다. 이 시대의 자영업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 피고용된 노동자 혹은 프레카리아트에 가깝다.3 ‘나’가 사장으로부터 느끼는 이 미지근한 따뜻함 역시 그가 처한 경제 상황의 논리와 평행선을 그리며 파생된다. 더는 경쟁도 실패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유보적 정념은 피터팬 콤플렉스를 소환하기도 한다(“계속 애기 같으면 좋겠어.” 167면). 소설의 마지막에서 “팬티 바람에 초록색 스웨터와 초록색 가방”으로 무장한 피터팬으로 거듭난 화자는 드디어 그 완전한 유보에 성공한다.

 

나는 스웨터에 팬티만 입은 채로 깔깔 웃었다. 이모는 곧 먼 곳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나는 이미 떠나온 기분이었다.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네, 나는 생각했다.(179면)

 

송지현 소설이 그리는 피터팬의 이미지는 상상계로의 유아기적 퇴행이 아니라 비(非)노동을 욕망하는 마음의 표상이다. 이는 대학 졸업과 취업, 주택 마련과 결혼으로 곧장 이어지는 이 욕망의 기표들의 연쇄에 저항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자본주의에서 어린이의 미성숙함은 곧 생산 불능자의 조건으로, 어른의 성숙함은 생산 가능자의 조건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리는 이 화자의 웃음은 차라리 혁명가에 근접할 테다. 주택을 반드시 구입해야만 한다는 욕망의 당위적 장소를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삶의 비극이랄 것이 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래디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노동 불능의 상태가 아니라 비노동의 상태, 자본주의의 문법 속에서 언제나 비정상의 상태를 점유하게 되는 이 미지근한 프레카리아트는 오늘날 노동의 자기착취적인 가치와 당위를 표백시킨다.

 

 

3. 서스펜스 속에 남겨지는 여성 간 이해: 「공모」

 

장류진의 「공모」는 ‘언니’에서 ‘현부장’이 되는 데에 전부를 바친 여자 현수영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가 그 성취를 오롯이 자기 힘으로만 해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는 점이다.

소설에는 총 세번의 공모가 등장한다. 하나는 화자 현수영이 자신을 팀장으로 추천하는 김건일과 맺은 (무의식적) 공모, 다른 하나는 천경희의 딸 김세원의 새중앙에너지 입사를 위한 김건일과 천경희의 공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현수영과 천경희의 공모다. 앞의 두 공모는 성공적이지만 뒤의 것은 실패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공한 두 공모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나 후자는 여성 간 공모라는 점에서 변별된다. 무엇보다도 앞선 두 공모는 회사라는 공적 영역을 무대로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 실패가 다분히 사적인 감정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김건일과 현수영의 공모는 실상 젠더적으로 ‘남성 간’ 공모에 더욱 가까운데, 이 공모의 결과가 현수영의 ‘남성-되기’이기 때문이다. 수영은 남성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를 넘어서는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김건일이 수영을 팀장 후보로 올린 것은 단지 업무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수영이 승진할 경우 자신이 싫어하는 일군의 무리를 배제시킬 수 있는 정치적 효과와 반사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뒤이을 후배로 그를 발탁한 김건일에게 수영은 이미 젠더적으로 여성이 아니다(“난 현 차장, 여자라고 생각 안 해.” 160면).

사내(社內)의 남성성이 ‘룸’에 가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로 분화될 때, 여성들은 ‘여성이거나 혹은 아니거나’의 실존적 분화를 겪는다. 수영은 ‘여성’이 아니기 위해 악바리처럼 노력해온 경우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여성’은 주점 ‘천의 얼굴’을 운영하는 천사장이다. 회사 남성들에게 여성인 천사장은 자신들과 동일한 성질의 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위 주점을 운영하는 ‘여자’다. 수영의 눈에도 마찬가지다. 수영은 그의 모습에서 성판매 여성의 실루엣을 겹쳐보며 회사 사람들의 주류·음식 취향을 꿰뚫고 있는 그의 철저함을 전문성이나 직업의식으로 의미화하지 않는다. 혈혈단신이 아닌 ‘홀홀단신’이 천사장의 수식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153면). 홀홀단신은 ‘홀몸의 여성’이 지니는 위태로움을 담는 말인 동시에 ‘남편 없는 여자’로서 성적으로 침범당하기 쉬운 육체로 쉽게 환원될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천사장의 성적 이미지는 스스로가 자신을 성적 대상화한 것의 결과라기보다 주변의 남성 사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162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팀장이 된 이후 회식 장소를 ‘천의 얼굴’로 하지 않고 끝내 그곳에 가지 않는 수영의 선택은, 즉 이 ‘공모’의 실패는 두 여성 간의 이해 불가에 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일의 성취와 능력 발휘를 위해 성적 이미지를 소거해야 하는 여성인 수영은 남성적인 시선 끝에서 극도로 대상화되는 성적 이미지를 자신의 생산수단의 일부로 삼을 수 있는 여성인 천사장과 자신을 대립된 자리에 놓는다. 수영은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소거시켰던 여성성의 집합체를 천사장에게 투사한 후 그것을 경멸하면서 천사장과 자신이 ‘같은 여성’이 아님을 계속 확인한다.

그런데 소설은 결말에서 수영의 기억과 판단이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은근한 암시와 함께 천사장의 정체를 수수께끼로 던져놓는다. 이 지점에서 ‘천의 얼굴’에 대한 모종의 서스펜스 효과가 발생한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시종일관 과거 시제의 회고조로 서술된다.

 

나는 이 가게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갔던 16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아니다. 처음엔 문을 열지 못했지. 그때 이 문은 닫혀 있었다.(144~45면)

 

그제야 나는 그 손짓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천 사장의 손짓은 이리 오라고 하는 손짓이 아니었다.(191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누락되거나 오판으로 드러난 사실들, 그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의혹은 바로 김세원이 정말 천사장이 김건일과의 사이에서 몰래 낳은 자식인가 하는 것이다. 수영이 이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므로 진실의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가능한 경우는 두가지다. 수영이 김세원을 김건일의 딸이라고 단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딸이라고 간주했다면, 그 출생의 비밀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여성 후배 김세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천경희와 ‘공모’한 것이 된다. 만약 단정하지 않은 것이라면 김건일과 천사장의 관계 또한 부정되는 것이므로 16년 동안 자신이 경멸해온 천사장의 얼굴에 대해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해보려는 가능성을 집어든 것일 테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아직 충분히 든든해 보이지 않는데, 수영이 목도한 천사장의 마지막이 엉엉 우는 김건일을 가슴팍에 안고서 수영을 향해 ‘저리 가라’고 손짓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의 천사장만큼 나이가 든 수영이 결국은 “나도 천 사장도 명백한 ‘아줌마’였”(189면)다고 읊조리는 것 역시 일견 상호 이해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줌마’가 성적 함의가 탈각된 다소 나이 든 여성의 지칭으로 쓰인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천사장의 섹슈얼리티는 수영의 입장에서 결국 포용되지 못한 셈이다. 결국, 수영은 천사장이 자신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들의 부당한 시선을 그저 내버려두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이득’을 차단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천사장과의 대비 속에서 수영의 섹슈얼리티가 지니는 에너지는 사회적 인정과 능력 발휘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예컨대 회사를 떠나는 젊고 유능한 여성 인재들을 보며 수영은 마치 헤어짐을 고하는 연인을 대하듯 말한다. 그러니까 수영이 가진 성적 에너지는 연애나 사랑이 아니라 일터에서 다른 층위로 발현되는 것이다.

 

퇴사도 했으니까 한 번만 툭 터놓고 만나주지 않을래? 기다릴게. 그 애(퇴사한 여성 후배—인용자)가 나타났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왔다. 맹세컨대 나는 연애하면서도 이런 추태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미안…… 내가 같이 잘하고 싶었던 친구들이 다 떠나니까…… 속상해서…… 그냥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혹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는 없을까…… (중략)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니. 네 미래가 될 수 없었던 내가 죄송하지.(182면)

 

수영은 ‘여성도 남성과 평등/동등하게 일한다’를 자기 존재를 통해 주장한다.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벗어던지는 것에 대한 강박, 그리고 무엇보다 투명한 능력주의의 세례 안에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욕망은 자기 여성성의 일부를 기회비용 삼아 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능력있는 여성의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자리인가? 그것의 정치적 효능감과는 별개로 여성-남성의 동등한 권리의 주장을 위해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섹슈얼리티와 다양한 장소성이 무화(無化)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모」에서 수영이 선택해온 삶의 방식, 그러니까 성적 매력으로 발현되는 여성성의 일부를 폄하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축출함으로써 남성의 영역으로 편입해 그들의 주류성을 점하거나 그보다 더욱 주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자아 일부를 배제하고 억압해야만 실현 가능하다는 데서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게다가 상승 이동에 대한 욕망의 성취는 구조 그 자체를 승인하고 강화하게 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여성이 인정을 성취해나갈수록 그 차별적 구조는 역설적으로 더욱 공고해진다. 이것이 ‘공모’의 한계다. 한편 계급/계층적 상승 이동이 생산해내는 구조 내부로의 구심력은 그러한 공모가 필요하지 않은 이동에서도 발생한다. 가령 섹슈얼리티라는 변수가 일으키는 화학작용은 없을지언정 비정규직 남성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더 미시적인 계층 이동에서도 매한가지다.

 

 

4. 아파트 구입으로도 막을 수 없는 관계의 불안: 「요즘 애들」 「우리가 되는 순간」 「보름 이후의 사랑」

 

박상영이 지난 한해 동안 발표한 세 단편소설 「요즘 애들」 「우리가 되는 순간」 「보름 이후의 사랑」은 연작으로 묶일 수 있다.4 인물의 나이나 직업의 일치가 상호텍스트성을 자아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점화해야 할 것은 세 소설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연작소설로 읽어냈을 때 구현되는 입체적인 주제의식이다. 세개의 작품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는 대졸 비정규직 남성이 정규직이 되어 회사 대출상품에 힘입어 애인과 함께할 주택 마련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벽장 게이’로 살던 남자가 직장에서 게이 동료를 만나 유대를 형성하고(‘오피스 허즈번드’) 애인과 안정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영등포구의 아파트를 사는, 그러나 가까스로 찾아오는 듯하던 그 안정은 코로나 때문에 다시 ‘보름’의 시간만큼 멀어지고 마는 그런 이야기다.

먼저 첫번째 소설이 되는 「요즘 애들」은 ‘요즘’의 화용론과 더불어 주체가 계층의 밖에서 안으로 진입할 때 일어나는 시선의 변화를 제시한다. 가령, 동기들 중 유일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된 ‘나’는 계층구조 안으로 함입되면서 안과 밖의 구분선을 더는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현실의 살벌한 제도와 ‘공모’한 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포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지나친 죄책감이나 안도감 그 어느 쪽도 표하지 않는 일, 최선을 다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이던 사이가 멀어질 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곁을 주”고 “또 공평하게 선”한 “그런 종류의 기계적 공평함”(212면)을 발휘하는 일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획득하는 순간 시스템 안으로 안착하며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닫는 일에 본의 아니게 ‘공모’하는 역설 속에서 청년들은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간다. ‘요즘 애들’의 화용론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요즘’이라는 말의 물리적인 시간성은 다분히 주관적인 영역으로 전이되며, 출생연도에 따라 획득되는 세대적 구분과는 별로 상관성을 갖지 못한다. ‘요즘’이라는 말은 모종의 가치관, 가령 사회생활과 회식 문화에 대한 공감과 동의 여부 등을 가르는 판별식이다. 이러한 가치관에 대한 합의는 ‘어엿한’ 노동자로서의 자격을 획득할 때, 예컨대 취업준비생이나 학생이던 시절을 지나 자신만의 일을 시작하게 될 때 발생한다. ‘요즘’이 함의하는 동시대성은 이렇게 구획된다. 그러니까 ‘나’의 사수였던 배서정의 ‘요즘’과 황은채 그리고 ‘나’의 ‘요즘’이 갖는 문화적 의미소들의 괴리만큼 그들의 세대 감각 또한 달라진다. 요컨대 ‘요즘 애들’의 용법은 사회에서 자신의 계층적 지위가 안정적인 국면으로 무사 이행했음을 전제로 한다.

‘요즘’의 중요한 가치관 중 하나는 방어선 구축이다. 업무 중인 ‘나’의 페르소나와 사적 영역에서의 ‘나’는 엄격히 다르며 분리되어야 한다. 부러 내가 먼저 ‘나’의 영역 바깥으로 마음을 뻗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설의 끝에서 배서정을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하는 ‘나’의 모습은 모종의 불편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도 배서정만큼의 나이를 먹고 정규직이라는 같은 계층 안으로 편입된 이후에야 열리는 (어쩌면 그것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직한 고백일 테지만) 그 이해의 가능성은 실상 위선적이라는 혐의로부터 쉽게 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공모」에서 현수영이 예전의 천사장만큼의 나이를 먹고, ‘같은 아줌마’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서야 천사장에 대해 좀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돌아보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어떠한 이해는 직접 삶으로 살아내본 후에야 비로소 실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호적인 동일시(identification)가 물리적으로 가능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발산하는 씁쓸함이 있다. 공통경험이 부재하는 서로 다른 위치의 존재들 간의 이해는 같은 시간대(time zone)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나’가 배서정에게 보내는 이해의 제스처는 그녀에 대한 연민에 다름 아니며, 동시에 그 연민하기는 정규직이 된 뒤 이대로 시스템에 안주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요즘’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아직 충분히 살 만한 시대가 아니다. 가령 퀴어가 자신을 언제 드러내도 괜찮은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오감을 총동원하여 매 순간 판단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 조마조마함은 시대의 무엇이 바뀌어야 완전히 사라질까. 「우리가 되는 순간」은 침묵으로 하는 소통이 가능할 때 비로소 “비밀의 등가 교환”(164면)이 가능하고, 그게 바로 ‘우리’가 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한영이 ‘여자 친구’와 같은 보편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통해 넌지시 눈치챈 것인지 (…) 깊게 캐묻지 않았다.” 163면). 말하자면 한영의 게이 정체성은 커밍아웃의 발화를 통해 사후적으로 은채에게 수용된다기보다, 은채의 말없음이 한영을 선제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박상영의 이 ‘요즘’ 연작이 탁월한 지점 중 하나는 이러한 화용론을 제시하면서도 그에 의한 세대론적 분리를 배격하고자 하는 명시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우리가 되는 순간」에서 한영과 은채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인 리나 이모의 삶을 겹쳐두는 것은 그런 전면적인 의도다. 상대의 말을 그저 들으면서 아무런 말을 덧대지 않는 것은 무시나 침묵이 아니라 다만 이해와 관용의 극대화임을 ‘요즘’ 애들인 은채와 한영은 안다. 당사자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부러 캐묻지 않는 존중의 포즈, 리나 이모 역시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보름 이후의 사랑」은 그러한 존중 혹은 방어적 태세를 온몸으로 불사르며 살고 있던 ‘나’(고찬호)가 김남준을 만나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믿음”(260면)을 가지며 계획에도 없던 아파트 구입을 돌연 감행하는 이야기다. 물론 그 믿음의 최후 행방이 결국은 ‘확신할 수 없음’의 영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두려워하는 그 마음은 격정의 시간을 지나 어떠한 소중함이 내 삶으로 스며든 후에만 찾아오는 것 아닌가. 일단 사랑을 믿었다면 결코 그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냉담할지언정 배교(apostasy)는 그저 관념에 불과해진다.

송지현 소설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이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계층성이 사랑의 성취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b와 ‘나’의 상대적 위치를 통해 보여주었다면, 「보름 이후의 사랑」에서는 연인 사이에 경제적 조건의 낙차가 해소된 상황을 전제한다. 그러나 어떤 안정과 행복은 삼십대에 서울 시내 아파트를 사도 그러쥐기 어렵다. 물적 조건뿐 아니라 심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안정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벽장(closetted) 게이’와 ‘오픈리(openly) 게이5’가 연애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은 어쩌면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물로 칼 베기’처럼 아연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비록 그것이 사소하고 미시적인 포즈일지라도,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자 하는 누군가의 욕망이 상대에게는 실존적 위협으로 작용한다면 둘의 사랑은 현실의 풍경 속에서 얼마나 평안할 수 있을까. 연인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의 파동 위에 소수자들 내부의 정치적 긴장을 담은 파동이 중첩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살(殺)풍경하다. 인터넷에 올라온 게이클럽의 군무 영상을 보면서 ‘나’가 “살풀이”(277면)라 말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아웃팅의 위협이 항상적으로 내재하는 ‘자연’스러운 현실은 퀴어에게 마치 타고난 사주의 살(煞)처럼 비극적 운명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이를 두고 “성격이 곧 운명이다”(256면)라는 공리로 제시하지만, 아웃팅의 위험을 매 순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퀴어의 실존적 조건을 ‘성격’으로만 담아내기는 어렵다. 이때 ‘성격’은 그 모든 번뇌와 고통과 안타까움—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결렬되는 둘의 관계를 두고 쉽게 포기하지도 낙관하지도 못하고 그저 최대한으로 끌어안으려는 ‘나’의 방어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불안에 떠는 남준에게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밥 잘 먹고, 잘 지내고, 보름 후에 만나자”(281면)라며 애써 태연한 척 안심시키려 하지만, 그 역시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사랑을 두고 그러나 생애 다시없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되뇌어보는 일 외에, 무엇을 더 노력해서 얻고 성취하고 벌어서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까. 이 연인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아파트가 아니라 퀴어에게 안전한 현실이 마련되어야 한다.

 

 

5. 마음의 습관들이 만드는 삼각형: 서로 다른 좌표에 관하여

 

세 묶음의 단편소설들을 통과하여 본 ‘요즘’ 젊은이들의 삶의 태도는 방어적 자세로 일관되는 듯하다. 더 높은 임금의 고용을 위해, 그리고 덜 상처받기 위해 각자의 벽을 사수하려 애쓰는 이 마음의 습관들은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구체화된다. 그 차이를 더 직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잠깐 수학적 도구를 빌려와서 살펴보자. 삶 또는 젊음(youth)이라는 산출값을 좌우하는 변수로 사랑(love) 또는 일(work)을 설정할 수 있다.

송지현 소설(S)의 경우는 사랑, 연애 관계에 대해 화자가 보이는 정동의 변화율이 가장 안정적인 양태이지만 임금노동 혹은 그로부터의 자기 성취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삶이다. 장류진 소설(J)의 경우는 사랑이나 섹슈얼리티의 실천이 거의 소거되어 있는 반면, 업무에서의 자아실현이 활발한 경우다(유리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항상 불안을 내포하므로 완전히 안정적이진 않다). 박상영 소설(P)의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에 성공, 노동과 그 안에서의 자기성취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가장 큰 안정성을 획득하고 고소득군에 속하지만, 사랑의 성취와 안정은 이같은 노동조건과 고임금에 의해서도 보장되지 못하는 경우다. 각 가치(변수)가 지닌 안정성의 강도를 축으로 옮겨 좌표평면을 만들어 세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의 위치를 지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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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개의 삶은 삼각형을 이루는 꼭지점이 된다. 이들 중 서로에게서 가장 멀리 비껴나 있는 것은 S이다. 프레카리아트와 기업 임금노동자의 삶이 형성하는 간극만큼이나 물리적인 삶의 거리도 가장 멀다. P의 인물은 성‘소수자’인데도 불구하고 사랑도 일도 셋 중에서 가장 많이 성취한 경우다. 퀴어의 문화정치적 소수자성을 훨씬 초과하는 주류적 힘이 신자유주의의 노동과 경제적 계층에서 발생하는 경우다.

각각의 삶을 한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세 삶의 관계성을 톺아보기 위해 조금 거칠게 가치를 부여해보면 다음과 같다. S는 실제 삶의 안정은 아니나 주체가 일상을 살아내며 느끼는 ‘안정감’이라는 가치를, J는 일터에서 여성의 ‘독립’적인 영역의 확보와 그 능력 발휘를, 그리고 P는 계층의 상승과 연애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요컨대 사랑과 일 두 영역 모두에서의 ‘이동’을 함축하는 삶의 양태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때 세 삶은 ‘요즘’ 젊은이들이 처한 트릴레마(trilemma)6—동시에 성취될 수 없는 삼각형의 불가능성을 이룬다.

이 세 삶의 모습이 만들어내는 트릴레마는 사랑과 일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동일한 물리적·정치적 현실 안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개인들의 성격에 따라 정해지는 서로 다른 선택들이 서로 다른 좌표를 형성하고 결국은 각자 다른 가치 지향성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곧 ‘요즘’ 청년들의 욕망과 선택을 동일한 세대론적 구조로 치환할 수 없다. 교차적 사유의 필요성은 이로부터 나온다. 차이들이 서로 경합하며 만들어내는 장소성의 좌표들이 공통의 좌표평면 위에 있다는 맥락을 고려하며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선택과 추구가 어떠한 공통의 맥락과 배경 안에서 내려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래서 가령 S와 P 중에 ‘누가 더 힘들까?’라는 질문은 쓸모없어진다.

이 삼각형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 중 하나는 ‘요즘’ 이들의 방어적 태도다. 타인/타자성의 접촉과 이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름 이후의 세계」)에 의해 막히고,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로 인해 관계의 접촉을 애초부터 포기하거나(「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또는 부러 극렬히 저항함으로써(「공모」) 공동의 감응은 은폐된다. 그래서 삼각형이 깨지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세운 벽 중 최소한 하나는 먼저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찬호가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남준과의 사랑을 두고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간”(282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힘없는 냉소도 비관도 과장도 아닌, 최대한의 긍정이다. 사랑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내려놓고 덥석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작심한 것은 객기가 아니라 방어기제에 대한 정면돌파다.

세개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일의 양태를 안정성이라는 축으로 가늠해보았지만 이는 혹자의 삶이 덜 불안하거나 더 안정적이라는 구별 짓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서로 다른 불안을 딛고 그 위에서 각자 고유한 생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시간의 단면들, 그것들이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단층(planigraphy)의 모습을 한 화면에 모아 보기 위함이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대신 경쟁 구도 자체에서 잠시 이탈하는 임시적 유보를 전략적으로 채택하거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은 그 사랑을 위해 뜻밖의 결단을 과감히 내리는 등의 면모는 이 시대의 젊음이 현실을 오롯이 긍정하는 자세에서 기인한다. 어떤 자책이나 왜곡 없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일. 불안을 안정이라는 국면에 미달된 양태로 여기지 않고 다만 그 불안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재단하여 잘라내지 않게 방어하는 일. 그것이 ‘요즘 애들’의 삶의 자세이며, 이들이 처한 트릴레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삶의 자세가 만들어낸 고유의 궤적이다.

 

 

  1.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탐구하며 다음과 같은 소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송지현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 장류진 「공모」(『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그리고 박상영의 세 소설 「요즘 애들」(『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우리가 되는 순간」(『릿터』 2021년 12월/2022년 1월호), 「보름 이후의 사랑」(『악스트』 2021년 9/10월호).
  2. 불안정함을 뜻하는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 그들은 노동하지 않거나 못하는 ‘노동자’층이며 직업적인 전문성과 안정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불안정한 벌이로 생계를 가늘게 이어나간다.
  3. 뒤에서 분석할 박상영의 단편 「보름 이후의 사랑」에서 이자까야를 운영하는 철우 역시 ‘사장님’이지만 대기업 회사원인 찬호와 남준보다 대출상품 구매력이 현저히 낮아서 주택을 구매할 수 없고 한영과 함께 월세를 산다.
  4. 「요즘 애들」의 ‘나’(김기자)는 뒤의 두 작품에서 ‘유한영’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잡지사에서 일한 경력 등의 행보나 나이와 학번이 일치하는 것, 무엇보다 황은채와 절친한 친구라는 점에서 같은 인물로 읽어낼 수 있다.
  5. 커밍아웃을 주저하지 않는 퀴어를 뜻하기도 하지만 꼭 커밍아웃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퀴어함을 일상 속에서 드러내기를 망설이지 않는 퀴어를 뜻한다. 이를테면 ‘알 사람은 알 테지’ 정도의 자세.
  6. 세가지 문제가 서로 영향을 미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삼각 딜레마’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