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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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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현 朴東賢

서울예대 문예창작전공 3학년. 1994년생.

nongyakking@naver.com

 

 

 

 

 

하루하루 늙어가는 개를 바라보며, 나는 지난 모든 잘못을 떠올리곤 했다. 그 순백색 원단에 묻은 천박한 얼룩을 지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지금보다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개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그게 망상임을 알아도 그랬다. 병원에 다녀온 날이면 개는 유난히 밤새 헐떡거렸고, 다소 떨어진 시력 탓에 느린 움직임으로 배회하다가 내 허벅지에 몸을 기대곤 했다. 맞닿은 피부로 전해진 개의 감정 중 가장 크고 묵직한 것은 무력감이었다. 그것은 놓쳐버린 유리잔처럼 추락하다 내 마음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죄책감이 철심처럼 박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주변에 흩어진 조각들 중 가장 반짝이는 것을 찾아내 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개가 원한다면 그것만으로 밤새워 떠들 수도 있을 거였다. 하지만 개는 전혀 관심 없는 얼굴로 꾸벅거렸다. 개가 잠들기 위해 애견용 쿠션으로 돌아갈 때면 나도 무릎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곤 쿠션에 누운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어주었다. 내 팔이 무거운 시계추처럼 느껴질 즈음에야 개는 잠들었다. 여전히 거친 호흡이 이어졌지만 얼굴만은 고요했다. 그런 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수의사의 충고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제 생각에, 뿌꾸에게 필요한 건 가벼운 산책이 전부예요. 괜히 무리시키지 마시고요. 그게 행복한 여생일 겁니다.”

뿌꾸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나는 꼭 한번 바다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지체하지 않고 날을 잡았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잔뜩 흥분한 뿌꾸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줄줄 흐르는 침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며 창문에 흔적을 남겼다. 불독 특유의 짧은 다리와 비대한 몸은 예전처럼 너무나도 예뻤다. 우리는 해안 근처에 길게 늘어선 횟집 중 한곳에 들어서서 산낙지를 함께 먹었다. 노을과 파도치는 바다를 등지고서 꿈틀거리는 산낙지를 기운차게 받아먹는 그 모습은 내게 무언가를 낙관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마음이었는지는 다음 날 깨달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었던 뿌꾸는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했다. 파도 찌꺼기 같은 거품을 입에 물고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으니까. 나는 뿌꾸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다다르는 동안, 품에 안긴 뿌꾸의 몸이 점점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뿌꾸를 계속해서 불렀다. 안 돼, 뿌꾸, 제발……

뿌꾸는 응급조치를 받다가 깨어났다. 주사와 약을 처방받은 나는 수의사의 충고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점잖은 투로 나를 질책한 그 말. 행복한 여생. 그날 이후로 나는 뿌꾸와 함께 근처 아파트단지에서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혹여나 돌아오는 길이 힘에 부칠까봐 뿌꾸를 태울 유모차도 끌고 다녔다. 느리게 걷는 뿌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때 바다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되뇜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산책은 매일 느긋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뿌꾸를 유모차에 태운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뿌꾸의 증상은 불독 특유의 유전병이라 어쩔 수 없다며 덤덤하게, 그러나 진실을 폭로하듯 말했던 수의사를 떠올리면서. 왠진 몰라도 그가 내게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근친교배로 만든 품종견을 선택한 책임을. 나는 유모차에 탄 뿌꾸를 바라보았다. 요새 뿌꾸는 아파트단지를 온전히 돌지 못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산책 가자는 내 말에 꼬리를 흔들며 왕왕 짖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했다. 지금도 뿌꾸에게 산책이라는 것이 즐거운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시간을 남기는 행위는 산책이 전부였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아직까지 뿌꾸가 싫은 티를 낸 적도 없었다. 내가 산책 가자, 산책! 하고 말하면 기꺼이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향했으니까. 뿌꾸도 힘이 닿는 데까지는 내게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다만 금세 주저앉아서 유모차에 태워야 할 뿐이었다.

하늘은 구름 없이 맑았고 우리의 몸은 햇살에 휩싸인 채 아주 천천히 따스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환한 얼굴로 뿌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뿌꾸, 너는 어떻게 해야 행복했겠니? 내가 불독에게 새겨진 여러 질환의 이름과 증상, 그리고 나의 수많은 잘못들을 떠올리는 동안, 유모차에 앉은 개는 여느 노인들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산책로를 둘러보고 있었다. 혹은 침침해진 눈으로 그저 빛의 번짐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참 해바라기를 하던 뿌꾸가 끙끙 소리를 냈다. 어디가 아픈 걸까 싶어 살피기 위해 몸을 기울였더니 뿌꾸가 나를 붙잡듯 어깨에 두 다리를 올려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영문을 모른 채 바닥에 내려놓자, 뿌꾸는 만족한 듯 꼬리를 흔들며 킁킁 소리를 내다가 짖었다. 그때 뿌꾸의 입가에서 튀어나온 침방울의 반짝거림은 내가 너무나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모처럼 기운을 차린 개의 모습은 내게도 힘을 주었다. 햇살 아래를 걷는 순간 모든 불필요한 생각들이 깨끗이 소독되었다. 우리는 동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듯 씩씩하고 힘차게 걸었다. 주위의 소음들이 알록달록했고 거리는 크레용으로 거칠게 색칠된 것만 같았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서툰 무늬로 변해 아기자기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뿌꾸는 다시 왕! 짖었고 그건 목이 마를 때 곧잘 하던, 우리의 약속이었다. 나는 맑은 물을 그릇에 따라 내밀었다. 혀로 물을 떠 마시는 개 특유의 경쾌한 소리가 났다. 정말 너에게 죽음이란 게 있는 거야, 아직도 난 네가 이다지도 놀라운데. 잠깐 눈을 비비자 동화의 장면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젖은 입가가 반짝거리는 늙은 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시간에 몰두했다. 그래서 작은 남자애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이가 뿌꾸의 엉덩이를 가볍게, 너무나도 가볍게 치며 ‘멍멍!’ 하고 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건 그 때문이었다. 순간 뿌꾸가 처음 바라본 것은 자신의 등 뒤가 아니라 놀라고 있는 나였는데, 그 깊고 따뜻했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몸을 돌린 뿌꾸는, 끈적한 침을 튀기면서 아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늙은 불독이 아이의 얼굴을 단단히 문 채로 고개를 거칠게 흔들자, 아이는 인형처럼 무력하게 휘청거렸다. 겨우 둘을 떼어냈을 때 아이의 턱에 너덜너덜한 살점이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아이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서는 다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턱에서 줄줄 흐른 피가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뿌꾸를 유모차에 태우고 달려서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자꾸 어깨가 떨렸는데 그러다 힘이 빠져 유모차를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모래 위를 달리듯 발이 지면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고, 추웠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핸드폰 전원을 껐다. 뿌꾸는 차량 뒷좌석에서 닫힌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며 짖었다. 뿌꾸에게 제발 진정하라고 했다. 반복해서 이름을 부른 덕인지, 거칠게 호흡하던 뿌꾸는 운전석으로 넘어와서는 내 품에 안겼다. 미친 듯 뛰는 늙은 개의 심장이 느껴졌다. 무리하지 않고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뿌꾸의 수명이 몇분씩, 아니 며칠씩 마모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뿌꾸의 머리를, 볼을, 턱 아래와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곧 내 품에서 얌전해진 뿌꾸와는 별개로, 뿌꾸의 심장은 여전히 터질 듯 뛰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피가 묻은 게 보였다. 치석 관리를 제때 못해주었을 때 이 늙은 개의 잇몸에서는 염증으로 피가 배어나오기도 했었다. 그럴 땐 치석제거용 개껌을 먹이면서 수시로 양치질을 시켜주면 됐는데, 칫솔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주로 양치질용 장갑을 끼고 이빨을 문질러주곤 했다. 정말로 그것들이 효과를 보였는지 기쁘게도 염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맨손으로 뿌꾸의 이빨과 잇몸을 문질러보았다. 그러나 피는 어디에도 묻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뿌꾸의 입안을 살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물티슈를 꺼내 하얀 입 주위에 얇게 굳어 들러붙은 핏자국을 살살 닦아냈다. 곰팡이성 피부병이 입 주위로 조금 퍼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뿌꾸의 얼굴은 여전히 눈처럼 희었고 특히 입 근처의 선홍색 피부가 맑고 환했다. 나는 아이의 피를 닦아낸 물티슈를 배변봉투에 집어넣었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운전대를 잡은 나는 창 너머로, 무심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먼 골목에서 몰티즈가 보호자와 유유히 산책하고 있었다. 뭐지? 도대체 이게 뭐지?

이런 기분은 우연한 기회로 유기견센터 봉사를 처음 나갔을 때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더럽고 아프고 장애가 있고 슬픔에 깔려버린 수많은 개들의 시선 한가운데에서 느꼈던. 물론 개는 동물이고 그래서 죽기도 다치기도 하며 몸이란 것은 색종이와 다를 것 없이 어떠한 형태로도 구겨지거나 찢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의 광경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개들이 이렇게 될 수 있다니. 개들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니. 그 충격이 계기가 되어 나는 정기적으로 봉사를 다니게 됐다. 혹여나 어설픈 애정이 헛된 희망으로 변할까 염려하며 그 개들을 피해 다녔던 나는 집에 돌아와서는 나를 반기는 뿌꾸를 한껏 끌어안았다. 그럴 때면 뿌꾸는 곧 얌전해져서 내 슬픔을 함께 느껴주었다. 그런 뿌꾸를, 행여나 놓치는 날이 올까봐 두려웠다. 그건 보호소의 개들 가운데서 보았던 불독 한마리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곳곳에 피부병이 나고 뒷다리를 절던 그 불독은 이미 나이도 꽤 먹어서 입양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안락사를 미루곤 있었지만 언제라도 처분될 수 있는 그 개가, 아직 닥치지 않은, 그래서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가능성처럼만 보여 괴로웠다. 나는 품에 안긴 뿌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런 일은 너에겐 없을 거야……

그 아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저 산책을 한 거였고 잠깐 물을 마시며 쉬었던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거기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무방비했던 것은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잘 살폈어야 했다는 뻔뻔한 질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이 시대에 누가 사방을 살피며 물을 마시는가? 그건 아이 혼자의 잘못이었다. 전기 콘센트에 젓가락을 넣거나 베란다 창살을 넘거나 산이나 바다에서 자제력 없이 날뛰다 변을 당한 아이의 경우처럼 말이다. 부모의 부주의를 탓할 생각도 없다. 부모가 어떻게 항상 아이를 지켜보는가? 아이의 사고는 마냥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그저…… 때때로 벌어지는 불가항력 같은 일이다. 문제는 그 일이 부른 불행이 아이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물린 게 사고였다면 아이를 물어버린 일도 사고일 테니, 어쩌면 평등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평등하지 않을 게 뻔했다. 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 사람이 개에게 물렸을 때 항상 개의 잘못이 되는 모습을 수없이 접했으니까. 사나운 개도, 연약한 개도, 무고한 개도 모두 사람을 물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음을 말이다. 개라서 문제인 게 아니라 입마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나무젓가락 같은 소리를 떠드는 무리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들은 입마개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장치인지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뿌꾸는 입마개를 할 줄 모르는 개가 아니었다. 젊고 기운찼던 시절, 몸에 어떤 증상이 없어 기꺼이 기분 좋게 뛰어다닐 수 있던 그 시절엔 입마개를 차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뿌꾸에게는 그럴 기운이 없다. 열이 많고 호흡이 불편한 탓에 종종 헐떡거리는 뿌꾸에게 입마개를 씌우고 산책한다는 것은 학대에 가까웠다. 플라스틱 그물코 사이로 들러붙은 끈적한 침과 더운 숨의 반복이 이 늙은 불독을 더 금방 지치게 했으니까. 때문에 나는 태만하게 다니지 않았다. 출퇴근과 등하교 시간을 피해 산책을 나갔고, 와중에도 드물게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방금은 그저 물을 마시느라, 잠깐 기운을 차린 듯했던 뿌꾸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아이가 다가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 잘못이 될 것이라니. 애초에 뿌꾸는 반드시 입마개를 착용해야 하는 견종도 아닌데, 기어이 우리에게 잘잘못을 따지겠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애원해봐야 상황만 악화될 것이 뻔했다. 그 누구의 동조도 받지 못한 채 외딴 표적이 되어 분노에 차 몰려든 이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기 좋을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과다출혈이나 쇼크 혹은 감염 따위로 어쨌든 죽어버리기를 바랐다. 혹은 거기서 아이를 납치한 뒤에 며칠 뒤 산 채로 돌려보냄으로써, 부모 측이 아이의 생존 자체를 감사히 느끼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전혀 쓸모없으며 뿌꾸에게 부끄러운 짓임을 깨달은 나는 아이를 상상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이 늙고 사랑스러운 불독이 일회용품 같은 정의감과 환호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끝도 없이 변주되어 그려졌고, 반드시 그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와 부모에게는 유감이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뿌꾸였다. 그런 생각 속에서 드디어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하게 떠올렸다. 품에 안긴 뿌꾸의 체온이 뒤늦게 느껴지면서 목이 메었다. 뿌꾸, 진정해. 우리 며칠 정도는 못 보게 될지도 몰라. 씩씩하게 버텨야 해. 그렇게 죽도록 두지 않을 거야.

 

평소의 산책 시간을 훌쩍 넘겨서 녹초가 되어버린 뿌꾸를 강제로 걷게 할 수는 없었다. 산길을 유모차로 다닐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뿌꾸를 안아 들고서 산을 올랐다. 한시가 급하다는 생각에 숨을 돌리지도 못했다. 기분 탓인지 뿌꾸의 몸이 계속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미 등과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뿌꾸는 계속 끙끙거렸다. 쉬고 싶다는 뜻이었다. 집에 가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집에 갈 수는 없어, 뿌꾸. 우리가 집으로 향한다면 어쩌면 그게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나는 주된 등산로를 벗어나서 걸었다. 한참을 걷자 바닥에 버려진 담뱃갑과 막걸리 병, 신문지 따위의 쓰레기들이 보였다. 이 산의 등산로는 나름 정기적으로 관리되는 편이었지만, 이처럼 외진 곳은 오랫동안 방치되곤 했다. 이만큼이나 많은 쓰레기들이 있다는 건 충분히 인적이 드물다는 뜻 같았다. 물론 이런 쓰레기야말로 누군가 계속 오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거기엔 뿌꾸를 숨기기 좋은 굴이 있었다. 나는 뿌꾸를 내려놓았다. 여태 뿌꾸의 엉덩이를 받쳤던 팔이 제멋대로 떨렸고 잔가지 사이로 지나다니는 동안 몸 곳곳에 난 생채기로 쓰라림이 뒤늦게 번졌다. 각 상처의 틈새에서 작은 불씨가 타는 것 같았다. 뿌꾸는 내가 내민 물그릇을 깨끗이 비우고서도 혀를 길게 늘인 채 헐떡거렸다.

나는 나무뿌리가 절반 이상 밖으로 드러난 비탈 쪽으로 향했다. 직각에 약간 모자란 경사를 이룬 비탈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굴이 있었는데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와 함께 바라보니 그 모양이 아주 조악한 개집처럼 보였다. 뿌리 위에 비닐 따위를 펼쳐놓는다면 정말로 지붕 역할을 해냈겠지만 적어도 며칠 새 비가 쏟아진다는 소식은 없었다. 아무리 길어야 이틀 내에 모든 것을 끝낼 셈이었기에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굴은 좀더 파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손으로 굴 안쪽을 파냈다. 비탈이 무너질까 싶어, 좌우 공간을 넓히는 대신 아래로 움푹한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축축한 흙바닥이라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겠다는 생각이 들어 굴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보았다. 사방으로 튄 흙 때문에 주위가 지저분해진 것 말고는 유의미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만족할 때까지 굴을 팔 수도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의 행방이 벌써 추적되는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그릇에 물을 잔뜩 부어 굴 앞에 놓았다. 뿌꾸는 굴 안쪽으로 옮겼다. 최대한 길게 늘인 목줄을 나무에 한번 둘러서 고정시켰다. 다행히 물그릇으로 향할 때 목줄이 팽팽해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뿌꾸가 거기서 안전하게 숨어 있기를 빌었다. 피곤했는지 바로 엎드린 뿌꾸는 치켜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마개를 꺼내 뿌꾸에게 씌웠다. 뿌꾸가 고개를 저으며 입마개를 거부하는 바람에, 화를 내면서 약간의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우리가 끔찍하게 오염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그리고 배신감에 밤새 짖어대다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물그릇을 뿌꾸에게 더 가까이 두었다. 입마개를 하고 밥을 먹을 순 없겠지만 물은 어떻게든 혀를 내밀어 마실 수 있었다. 호흡에 최대한 방해가 없도록 그물형으로 된 입마개를 쓴 뿌꾸는 마치 마스크를 뒤집어쓴 악당처럼 보였다. 금방 만날 거야, 뿌꾸. 나는 무조건 돌아올 거야, 그때 밥도 주고 물도 갈아줄 거고 맛있는 간식도 가져올게. 조금만 그렇게 지내면 될 거야. 목줄에 걸려 있던 목걸이형 인식표를 빼냈다. 등록제가 막 시행됐을 때 개의 몸에 마이크로칩을 넣으면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나 역시 불안함 때문에 목걸이만 매단 것이었는데, 칩 삽입을 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뿌꾸를 한껏 안아주며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면서 귀에다 여러 약속의 말들을 속삭였다. 내가 떠나려 하자 뿌꾸는 몸을 일으켜서 거친 숨소리를 냈다. 금방 올게. 금방. 뿌꾸는 입마개 탓에 제대로 벌릴 수 없는 입으로 끙끙 소리를 내며 울었다. 겁이 많아 크게 내지도 못한 그 소리는, 등 뒤로 멀어질수록 네 탓이야, 네 탓이야…… 하는 질책처럼 들렸다.

차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 전원을 켰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머리까지 흔들렸다. 아직 어떤 연락도 온 게 없었다. 어쩌면 영영 나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이 부풀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문제였다. 뿌꾸를 언제까지 산에다 묶어둔 채로 불안 속에서 지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들이 날 찾지 못한다면 자수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었다. 나는 최근까지 봉사활동을 나갔던 유기견센터의 사이트에 들어가 어느 개를 찾아보았다. 뿌꾸의 다른 가능성처럼 느껴져 나를 괴롭게 했던 그 불독을. 소장은 그 개를 꽃돌이라 불렀는데 생의 모양새와 어울리지 않아서 모두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꽃돌이는 검색으로 찾을 수 없었다. 불독, 불도그, 잉글리시불독, 불리, 아메리칸불리 등으로 다시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텅 빈 화면을 보던 나는 실험을 위해 유리 비커에 빠뜨려진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스스로를 구하지 못한 채 그저 발버둥 치다 지쳐 포기한 채 부유하거나 자살하여 하나의 현상이나 사례가 되는 게 나의 유일한 선택지인지도 몰랐다. 운전대를 아무 방향으로 꺾으며 질주하다 즉사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뿌꾸의 여생을, 그 가여운 개가 어째서 혼자 남겨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외로움 속에서 죽어갈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기적이 일어나길 빌었다. 유리 비커의 벽면을 비벼대는 실험용 생쥐와 다름없이.

혹시나 하여 다른 센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도 뒤져보았지만 대개는 프렌치불독이었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뿌꾸와 닮지 않은 개들뿐이거나 이미 안락사 표시를 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꽃돌이가 안락사당하지 않았기를, 혹은 그 직전에 도착할 수 있기를 내내 빌면서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장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보호소에 꽃돌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소장은 그렇다고 했다. 그 대답만으로도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리로 향할 테니까 철문을 열어놔달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소장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러겠다고 대답해주었다. 이제는 소장이 입양서류를 작성하지 못하게끔 만들 필요가 있었다. 꽃돌이는 당장 오늘 필요했다. 내일이 되면 세상이, 내 주위가 얼마나 소란스럽게 변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반드시 오늘 꽃돌이와 함께 돌아가야 했다. 급히 이사를 떠난다는 핑계 같은 것들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나는 함께 봉사활동을 다녔던 애견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주워들었던 소문들을 떠올렸다. 동물보호단체 쪽 몇몇에게도 들을 수 있었던 소장을 둘러싼 소문은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소문 속의 소장은 내가 보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동물보호단체의 봉사자에게 그게 사실이라면 왜 아직 조치를 취하질 않는지 물었다. 봉사자는 최근에 큰 규모의 보호소들에서 벌어진 문제를 처리하며 그곳에 있던 개들을 옮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 병렬적인 일처리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수많은 보호소들이 어떤 일들을 저지르는지 이야기하던 봉사자는 하나하나 끔찍한 내용들이지만 그 모든 일들을 해결할 수 없는 적은 인력과, 해당 문제들이 흥밋거리 정도로만 소비되는 양상에 얼굴을 구기며 크게 분노했다. 나는 그 소문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하며 소장을 압박해볼 셈이었다. 그가 요구할 모든 절차를 건너뛰기 위해서.

하지만 막상 철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소장을 만나 차에서 내려 함께 걷고 있으니 다소 주눅 들었다. 내 기억보다 두꺼운 그의 팔뚝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겁박당하는 것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르자 녹색 철장 너머로 마당의 수많은 유기견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짖는 게 보였다. 돌덩이를 만지는 기분으로 몇몇 개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꽃돌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소장은 꽃돌이를 왜 찾느냐고 했다. 나는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더 캐묻지 않은 소장은 내게 따라오라며 야외에서 요란하게 돌아다니는 개들 사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섰다. 그곳의 개들은 바깥의 개들과 달리 기운 없는 모습으로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꽃돌이도 있었다. 다시 보니 꽃돌이는 뿌꾸보다 얼굴이 좀더 작았고 얼룩의 색과 모양도 달랐다. 심지어 피부병도 더 심해서 조금이라도 개를 보아온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차이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물린 아이가 그렇게까지 개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여전히 두마리의 개 사이에서 느껴지는 어떤 연결성 때문에, 꽃돌이가 충분히 뿌꾸의 역할을 해내리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꽃돌이를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소장은 꽃돌이가 오래 못 살 거라 말했고 나는 알고 있지만 자꾸 아른거려서 괴로웠다고 말했다. 다소 어정쩡한 답이었지만, 몇차례의 봉사활동에서 짧은 대화를 나눴던 덕에 내가 비슷한 종의 늙은 불독 한마리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던 소장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간식과 낡고 지저분한 이불 하나를 껴안고 돌아왔다. 소장은 꽃돌이가 꼭 이 이불 위에서만 잠든다고 덧붙였다. 꽃돌이를 차에 태울 때까지도 소장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너무 손쉽게 이뤄져서, 어쩌면 소장이 마땅한 절차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그래서 떠나기 직전에 차를 막아서거나 오늘 저녁 혹은 그 이후에 연락해서 뒤늦게나마 서류를 작성해 보내라고 통보할까봐 조마조마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일이 꼬일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소장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한심하게 입을 열어 이렇게 그냥 가면 되느냐고 묻고 말았다. 그 질문을 참을 수 없었던 내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고 머릿속에서는 어떤 예상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거기서 뿌꾸는 안락사 직전에 있었다. 의사는 울고 있는 나에게 딱딱한 얼굴로,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는 마세요, 뿌꾸의 상태는 이미 심각했고 내색하지 않았어도 많은 순간마다 아팠을 겁니다. 편히 쉬도록 보낸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의례적인, 그러나 사실일지도 모르기에 아주 이상하고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투약을 마친 뿌꾸의 눈이 조용히 감기고 있었다. 내가 뿌꾸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려 할 무렵, 소장은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꺼내 나를 그 불길한 예감 속에서 건져냈다. 애당초 꽃돌이를 유기견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장은 정말로 입양 가능성이 전무한 몇몇 개들을 아예 등록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돌봤고, 그래서 꽃돌이가 안락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평생 외롭게 지낸 개들을 죽일 순 없었다고, 그래서 오히려 어리고 건강한 개들이 때가 지나면 안락사되는 아주 이상한 형태로 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말을 마친 소장은 죄책감과 후련함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숭고해 보였지만, 그 고백이 내가 들어온 소문들과 너무 자연스럽게 결합되었기에, 그릇된 믿음 속에 빠져버린 사람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미소였다. 나는 어리고 건강한 개들이 안락사로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문득 섬뜩해졌다. 정말로 안락사였을까? 그렇게 ‘육질’ 좋은 개들이……? 그때쯤 내게 소장은 조금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근육을 일그러뜨려서 지어낸 표정이 너무나 기괴했다. 나는 꽃돌이의 여생을 잘 지켜주겠다고 다짐해 보이며 보호소를 떠났다. 와중에도 소장의 소문과 그의 고백은 저들끼리 들러붙다가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쓰레기로 가득한 도로가가 보여 차를 세웠다. 나는 거기에다 소장에게 받은 너저분한 이불을 버렸다. 무심히 던진 이불은 죽은 동물의 몸처럼 축 늘어졌다. 차로 돌아와서는 뿌꾸의 인식표를 꽃돌이의 목에 걸었다. 굴을 파느라 지저분해진 내 손이 보였다.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손톱 아래에 낀 흙을 빼내던 도중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다다랐다는 게 느껴졌다. 집으로 향하든 혹은 뿌꾸에게로 돌아가든, 이후의 모든 일들이 나의 바람대로 흘러간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었다. 산에서 무사히 데려온다고 해도 뿌꾸는 몇달, 몇주, 아니면 며칠 뒤에 내 품에서 세상을 떠날 거였다. 그날부터 나는 회복도 수복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지게 될 것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아이를 물기 전에 뿌꾸를 말리지 못한 것? 그 늙은 개를 내 욕심으로 무리하게 바다까지 데려갔던 것? 내 주위에다 잘못을 조각조각으로 흩뿌렸던 시간들? 아니라면 나와 뿌꾸의 만남 그 자체……?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소장의 얼굴이었다. 소장에게서 느꼈던 기괴함의 정체란 그 자신을 향한 혐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수록 추웠고, 추워질수록 몸이 움츠러들었다.

울음을 그치게 한 것은 악취 때문이었다. 불쾌할 정도로 더러운 냄새였다. 나는 창문을 내리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전에 내가 버렸던 이불이 보였다. 이불에서 뜯어져 나온 올들이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죽은 것이 부패되어가는 과정의 한 순간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뒷좌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꽃돌이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어도 제대로 빠지지 않는 그 악취는 꽃돌이에게서 풍겨온 거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꽃돌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았다. 뿌꾸처럼. 나는 산에 홀로 남아 있을 뿌꾸를 떠올렸다. 아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평생을 함께했던 나에 의해 갑자기 산속에 묶인 채로 버려진 그 상황을. 나는 뿌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주체할 수 없이 화를 냈던 어느 순간마다 뿌꾸가 보였던, 겁에 질린 상태로 눈앞에 놓인 거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보기 위해 애쓰는 것 같던 그 얼굴일 게 분명했다. 나는 꽃돌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건 꽃돌이가 뿌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꽃돌이 역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였다. 어느날 버려져서 누군가에 의해 보호소로 보내진 것도. 몇년 동안 우울한 얼굴의 개들과 함께 지내게 된 것도.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나에 의해, 다른 개의 냄새로 가득한 차를 타게 된 것까지 전부 그럴 거였다. 심지어 나는 이 개 앞에서 갑자기 엉엉 울기까지 했다. 꽃돌이에게 내 모습은 꽤나 섬뜩하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꽃돌이를 들어서 조수석으로 옮겼다. 꽃돌이는 내 눈을 피하더니 조수석 등받이로 고개를 묻었다. 그런 꽃돌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닿은 털과 피부의 촉감으로 자주 씻겨지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소장 나름대로 관리를 했겠지만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꽃돌이를 만졌던 손의 냄새를 맡다가 의아해졌다. 손에서는 별다를 것 없이 밖에서 자란 개 수준의 냄새만 났기 때문이다. 꽃돌이의 몸 곳곳을 자세히 살핀 후에야, 나는 그 악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꽃돌이의 코 주위와 목덜미 부근의 접힌 살 사이사이로 진물이 굳어 있었고, 잇몸과 이빨은 염증과 치석으로 변색된 채였다. 악취는 그런 부위들로부터 퍼지는 거였다. 이 늙고 병든 개의 모습이 점점 슬퍼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애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티슈로 꽃돌이의 몸을 닦았다. 물티슈가 제대로 닦아낼 수 있는 것은 눈곱이나 항문에 들러붙은 변 찌꺼기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내가 꽃돌이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닦은 것은, 그것이 이 개의 마지막 목욕이리라는 확신 탓이었다. 나는 꽃돌이의 몸을 닦은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드디어 집 앞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 경찰 하나가 빌라 출입문 앞과 주차된 차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이유는 몰라도 무언가에 아주 신경질이 나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내가 주차를 채 마치기도 전에 다가온 경찰은, 운전석 창을 텅텅 두드리면서 선생님, 나와보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말을 끝낸 뒤에도 주먹을 꽉 쥔 채로 창 앞에 두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주먹으로 창을 깨부술 수 있어 보였다. 위축된 나는 문을 열지 못하고 차창만 슬그머니 내렸다. 혹시 선생님 개가 남자애 문 적 있어요, 하고 경찰이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경찰은 도대체 어디 있다 온 거냐고 물었다. 나는 두렵고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서 계속 돌아다녔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 거라고 답했다. 선생님, 이미 늦었어요. 다 개판을 치셨다고요. 그렇게 말한 경찰은 노골적으로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저 개냐고 묻는 경찰의 눈빛에 악의가 아주 강렬하게 서려 있었다. 꽃돌이는 몸을 달달 떨며 나와 경찰을 힐끔거렸다. 나는 경찰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금 물린 애가 어떤 상탠지 알아요? 좋게좋게 넘어가긴 힘들 거예요, 하고 말한 경찰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꽃돌이가 운전석으로 슬그머니 넘어와서는 내게 고개를 파묻었다. 떨고 있는 개의 공포가 몸으로 느껴졌다. 킁킁대는 불독 특유의 숨소리가 마치 법정에서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한 범죄자의 간청처럼 들렸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더듬거리며 반복하는, 절실함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믿으려는 듯한.

통화를 마친 경찰이 문을 두드리며 선생님, 일단 나오시라고요, 하고 말했다. 나는 꽃돌이를 바라보았다. 차를 몰아 경찰을 쳐서 넘어뜨리곤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뒤 생각 없이 꽃돌이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가는 상상이 지나갔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고 가능성이었다. 나는 운전대에서 손을 내려놓고 차의 시동까지 끔으로써 그 가능성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러자 나는 뿌꾸의, 우리의 미래가 완전해짐을 느꼈다. 나는 뿌꾸와의 시간을 떠올렸다. 아주 작던 그 몸을 실수로 밟아 터뜨릴까 싶어 조마조마했던 마음도,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과정을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매일도, 때로는 가족, 혹은 가구처럼 느껴졌던 광경도, 그 모든 순간에 섞여든 채 나를 응시하던 죄까지도. 뿌꾸, 하고 발음하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모여 따뜻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시선이었지만, 깊고 따뜻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그것을 부드럽게 껴안고 속삭였다. 네게 죄가 있다면, 그건 개로 태어났다는 거란다……

 

 

 

심사평

 

응모작 280편 중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단편은 10편이었다. 「밤의 온기」 「금붕어 건지기」 「조현(操絃)」은 필력과 기량이 뛰어났으나 스토리가 독자에게 닿았을 때 그 파급력이 충분치 않으리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설의 의미가 재미의 회로를 따라서 생성된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이후의 작품은 달라지고 새로워질 것이다.

「관람차의 방식으로」는 유원지의 미아가 된 두 인물의 탈출기로 요약되는데, 냉혹한 현실과 이들을 위로하는 환상 장치의 대비가 매우 인상적이다. 플롯과 밀도를 갖춘다면 잔혹서사의 진면목을 보여줄 재목이다. 「신두리의 낙타」는 사막처럼 건조한 이 세상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떠도는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좀더 폭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다면 생에 대한 깊은 시선을 담아내리라 기대한다. 「풍선은」은 이탈리아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연인에 대한 애도를 운구와 화장(火葬)을 통해 세심히 보여준다. 이국(異國) 서사를 흥미롭게 형상화했으나 ‘소설의 형식’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심사위원의 손에 오래 남은 원고는 네편이었다. 우선 「재호는 그저」가 보여준 캐릭터의 형상화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다. 남다르게 조성한 정황 속에서 인물의 대사와 심리가 눈앞에 보이듯 생동감이 넘쳤다. 무게감을 더한 ‘소설적 사건’을 포착한다면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작가로 거듭날 것이다. 「사사로운 것」은 창작자가 창조적 작업을 할 때 타인의 사적 영역을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의성을 갖췄다. 특히 화자의 시니컬한 태도와 툭툭 던지는 유머러스한 문장이 상큼하다. 영상문법보다는 서사미학에 좀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활로가 보일 것이다.

가장 길게 갑론을박이 벌어진 작품 중 하나인 「낙원 빌라」는 출생 후 어미 형제에게 버림받고 인간에게 목숨이 구제되지만 다시 버림받은 고양이 ‘사라’의 생애담이다. 사라는 낙원 빌라의 그녀 ‘영원’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는 중에 어느날 이유 없이 버림받는다. 길고양이의 세계에 편입된 후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안고 영원을 그리워한다. 고양이 눈으로 바라본 가난한 인간의 삶과 고양이의 한 생을 차분한 필치로 펼쳐 보인 수작이다.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순정이 개에 비해서 약하다는 선입견을 수정할 만한 이 작품은 상처받은 고양이의 심리묘사가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반면에 「죄」는 자신이 사랑하는 개에 대한 인간의 지독한 애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위의 단편과 대비를 이룬다. 시종일관 긴장을 유지하며 독자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가는 플롯의 짜임새와 주인공의 심리를 밀도 높게 서술하는 문장력이 압도적이다. 전개적 측면에서 다소 거칠고 불안정한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으로까지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 하등 개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인간이 지닌 이기성의 밑바닥까지 파헤치는 힘이 남다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문장으로 한 세계의 이야기를 크고 단단하게 베어내는 야무진 솜씨에 큰 신뢰가 간다. 이 작품을 뽑지 않으면 그야말로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이 응모자의 다른 소설을 읽고 싶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두 작품 모두 반려동물과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낙원 빌라」는 고양이의 생을 다룬 기성작품과 같이 어딘가 기시감을 주는 점이 있는 반면에 「죄」는 개를 지극히 사랑하는 인간을 상당히 낯설고 드문 캐릭터로 창조하였으므로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투고자들이 보낸 숱한 불면의 밤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당선자는 ‘넥스트 레벨’에서 우리 모두의 기대에 응답하기를 기원한다.

권지예 김희선 해이수

 

 

 

당선소감

 

소감을 쓰기 위해서 이번 소설을 다시 읽었다. 나름 슬펐다. 그것이 소설이 만든 감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처럼 이 소설을 읽고 슬픔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 느꼈던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물론 나는 내 소설이 좋다. 그러면서도 당당한 마음이 되기보다는 어딘가 자꾸 움츠러드는 것이다. 결국 근사하지 못한 자신을 닮은 소설을 쓰고 말았다는 생각에 유감스러웠다. 글을 쓰며 ‘다른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낯익은 얼굴의 내가 자세만 조금씩 고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자세라도 마주할 수 있기를……

십년 전부터 함께했던 동갑내기들, 혹은 누나 형들에게 먼저 감사를 보낸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나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한빛 누나와 지은 누나, 항상 제 글 읽고 한마디라도 거들어줘서 고마워요. 여전한 윤재도. 학교에서 만나 글을 주고받았던 동기들에게도 고맙다. 근처 작업실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실제로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설픈 내 글을 읽어준 이웃들에게도. 항상 잊지 않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모 선배 작가가 애써 좋은 말을 건네준 덕에 작년과 올해 열심히 쓸 수 있었다. 부끄럽지 않은 동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제게 용기를 주신 채호기, 김엄지 선생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 글의 시작점인 정일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에도 좋은 소식으로 안부 전하겠습니다.

언제나 나를 믿어준 수정에게도 고마워. 누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노력할 거야. 앞으로도 우리 서로의 손을 잡고 나아가자.

우리 가족들. 우리가 화목해졌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요. 제가 변화를 믿는다면 그건 여러분 덕일 겁니다. 엄마 아빠 동생 모두 사랑해요. 오래 건강합시다.

 

그리고 너는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박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