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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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2022

생태학살이 초래하는 환경위기와 인권위기를 직시하라

 

 

윤정숙

尹貞淑/녹색연합 상임대표, 60+기후행동 공동운영위원장 farlm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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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 출간된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봄이 왜 ‘죽은 듯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는지를 추적한 이 책은 ‘좌파의 음모’라는 비난을 넘어 단숨에 생태·환경 영역의 고전이 되었다. 살충제는 모든 생명체를 겨냥한 ‘살생제’이며,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침묵의 봄』 325면)는 카슨의 통찰은 지금 에코사이드(ecocide, 생태eco와 집단학살genocide의 합성어)의 참혹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생명들과 인간의 관계는 어리석고 위험한 살상의 관계로 추락했으며, 지구의 생명과 자원을 무릎 꿇려 착취해온 인간의 탐욕은 자연의 반격을 받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로 인해 삶이 뽑혀나가는 위험의 맨 앞줄에 놓인 이들은 언제나 세상의 피라미드 맨 아래의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인권사회학자 조효제의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의 연쇄적 살상을 초래하는 에코사이드의 가공할 실체와 맥락을 파헤친다. 저자가 서두에 밝힌 대로 총체성, 역사성, 전지구성의 관점을 가로지르며 에코사이드와 더불어 인권, 생명권과 자연권 등 기존의 사회적·생태적 개념들을 재개념화한다. 게다가 그 개념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과 지금은 강산이 바뀐 듯 판이하지 않은가. 현장 사례, 다양한 연구들, 국제협약과 선언 등을 교차하며 재개념화의 맥락이 풍부하게 제시되고, 각 개념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연결된다.

‘에코사이드’는 생명윤리학자 아서 갤스턴(Arthur Galston)이 1970년 ‘전쟁과 국가책임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베트남전쟁의 자연파괴 행위를 일컬어 처음 소개한 용어다. 이후 “평상시 경제활동에 의한 대규모 환경파괴”(113면)를 뜻하며 폭넓게 사용되고 있으며, 번역어 ‘생태학살’ ‘생태살해’로 읽힐 때 그 의미가 더욱 또렷해진다. 가령 에꽈도르 아마존강 유역의 원유 채굴, 인도네시아와 솔로몬제도 마을에서의 대대적 벌목, 산업화된 광산채굴과 단작 영농업 등이 대표적 사례다. 저자가 또 주목하는 것은 모래 알갱이에서까지 원유를 뽑아내는 오일샌드나 심해유전 개발 등 극단적인 기술 활용으로 ‘극한 에너지’(extreme energy)를 추출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행태다(111~12면). ‘세계포식자’(The Worldeater)로 비유되는 이들은 게걸스럽게 지구 자원을 뽑아 쓰고 다른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어디든 돈이 되는 곳을 찾아내 토착민의 오랜 생활터전과 동식물 서식지를 들어내는 자본의 탐욕은 지구생명체와 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가나 금광, 콩고 광산, 인도 북부 채석장 등의 생태파괴와 노예노동을 통한 인간착취 사례는 활자를 통해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처참하다.

에코사이드는 더이상 ‘침묵의 범죄’가 아니다. 남반구 국가의 숲과 산, 강과 바다, 광산 등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듯 점점 요란스럽게 퍼져가는 에코사이드는 오히려 노골적 범죄에 가깝다. 토착민 축출은 물론, 아마존에서 지난 십수년간 살해된 활동가들이 300명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랍다(138면). 남반구의 환경운동은 목숨을 거는 일이며, 적의 총구 앞에 노출된 전쟁터의 병사가 되는 일이다. 생태학살 돈벌이에 나선 초국적 포식자들이 방해가 되면 무엇이든 제거 대상으로 겨냥하는 것이 에코사이드의 참혹한 정체다. ‘사라지고 있다’ ‘앓고 있다’ ‘떼죽음이다’. 거의 모든 생태현장보고서에 등장하는 이 표현들처럼, 인간이 자행하는 에코사이드와 그로 말미암은 기후위기로 생태계 그물망은 찢겨나가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생명체들은 소멸의 한가운데 서 있으며, 그만큼씩 인권은 위기로 치닫고 있다. 더욱 폭넓게, 빠르게, 일상적으로.

인류가 지질학적 흔적을 남길 만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인류세(人類世) 시대에 인권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당연하고 시급하다. 저자는 ‘인류세의 새로운 권리로서의 자연권’을 전개한 제3장을 “응급병동의 긴박한 시선으로”(162면) 읽어달라 주문한다. 필자의 절박한 호소와 감수성, 인권사회학자로서의 책무감이 전해진다.

20세기 중반 국가억압의 대항담론으로 생성되기 시작한 인권 개념은 자유권, 사회권으로 확대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본격화되고 세계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된 지금, 제3세대 인권의 핵심 맥락은 자본의 자연착취가 급증한 가운데 도래한 인류세와 기후위기라 할 수 있다. 1944년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이 만든 신조어 ‘제노사이드’ 역시 초기에는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등에 초점을 두어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했지만, 근래에는 문화·환경의 파괴 등 어떤 집단의 통합적 정체성이 해체되는 ‘사회적 죽음’으로 확장되어 쓰인다. 세계 제노사이드 연구자들은 2021년 ‘기후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선언’을 통해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얽히면서 인간과 지구행성에 가하는 복합적 폭력을 직시”(118면)하라고 강조했다. ‘생태학살’과 ‘집단학살’의 명백한 인과성에 대한 주장은 기후·환경운동의 논리와 실천에 의미있는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학살의 연계야말로 이 책이 담은 가장 독보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다만 에코사이드가 기후위기를 어떻게 가속화하고 심화하는지, 에코사이드 범죄행위자인 초국적자본의 살상적 착취구조와 이를 방조하는 국가들의 연계성은 어떠한지가 좀더 비중있게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흥미로운 ‘생태교과서’이기도 하다. 필자의 말대로 “인류세적인 마인드”와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법”(316~17면)을 배우고자 하는 생태시민을 위한 좋은 텍스트이다. 여럿이 둘러 앉아 공동체 학습을 하며 “이 세상은 인간과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것”(『침묵의 봄』 325면)임을 배우고, “타자들과의 평화로운 공생의 삶”(김종철 「책을 내면서」, 『녹색평론』 172호, 8면)의 모습을 탐색하고, “미래의 운명은 인간과 지구가 얼마나 가까워지는가에 달려 있다”(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9면)는 오랜 생태 지혜를 나눈다면 이 책의 주제들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구멍 뚫린 배를 타고 항해하는 듯한 카이로스의 시기에 탄소중립과 에너지전환을 넘어서 인류세를 건너갈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충분히 다 채우지 못한 논리와 담론은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할까. 우리는 수프를 젓가락으로 떠먹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순간 각자의 칸막이에 머물며 연결될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많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이 책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다.

윤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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