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조규희 『산수화가 만든 세계』, 서해문집 2022

산수화에 담긴 문화적 코드를 해석하다

 

 

장진성

張辰城/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cschang@snu.ac.kr

 

 

196_472

산수화는 산과 물이 있는 경관을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는 표면적으로 가장 순수해 보이는 그림 장르이다. 아름다운 산천을 화폭에 옮긴 산수화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미적 만족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산수화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인물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산수화가 만든 세계』는 책의 제목처럼 산수화가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나갔는지를 알려준다. 저자는 “그림 속의 산수가 실제 산수 자연,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13면)고 주장하면서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산수화가 지닌 기능과 역할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였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산수화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 그림이 결코 아니다. 남송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주희(朱熹)는 유학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서원(書院)이 있는 산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당시 학자들은 특정한 지역의 자연과 그곳에 거주했던 저명한 학자들의 연관성에 주목하였다. 이로 인해 주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무이산(武夷山)은 주자학의 성지가 되었다.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사람들은 보편적인 자연이 아닌 뛰어난 주자학자들을 배출한 특정한 지역의 산수를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산수를 사랑하는 것인가, 산수화를 사랑하는 것인가’라는 저자의 질문도 흥미롭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윤기(尹愭)는 아름다운 자연보다 뛰어난 경관을 그린 산수화를 더 좋아했다. 그는 산수화에 대한 안목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그림 속에서 본 경관을 실제 ‘그림 같은’ 자연을 대했을 때도 떠올릴 수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윤기의 견해에 주목하여 “실제 세상을 그 그림처럼 바라보게 할 수 있는 힘이 산수화에 있다”(53면)고 하였다. 즉 산수화의 효과는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고 인식하는 데 있었다. “산수화는 순수한 자연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적 코드를 지닌 상징”(63면)이었던 것이다.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청색과 녹색이 사용된 청록산수화를 대신해 먹으로만 그려진 수묵산수화가 그림의 주류가 되는 흐름 역시 저자는 단순한 양식적·기법적 차원이 아닌 문화적 담론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의 4~7장은 산수화와 문화적·정치적 담론이 어떻게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여러 사례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북송시대에는 화면의 중앙에 웅장한 산이 자리 잡고 있는, 마치 거대한 비석을 세워놓은 것과 같은 ‘거비파(巨碑派)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저자는 거비파 산수화를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자 북송의 제국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메타포”(83면)로 보았다. 반면 11세기 후반에 그려진 송적(宋迪)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강이 중심이 되는 평원(平遠)산수화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조정에서 쫓겨난 소식(蘇軾)과 같은 구법당 지식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켜다. 저자는 이러한 평원산수화를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구법당 지식인들의 ‘수평적 관계’를 은유한 그림으로 해석하였다.

명승지와 그에 대한 시각이 권력자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소개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저자는 네 계절의 순환을 그린 「사시팔경도」를 농업과 양잠을 중시한 조선 국왕의 이상적인 국가 운영 및 통치 방식이 반영된 그림으로 보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태종, 개국 공신들은 한양을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을 능가하는 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한강은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세도가들은 한양 최고의 명승지가 된 한강에 별장을 짓고 권세를 과시했다. 중종반정의 공신이었던 심정(沈貞)의 별장인 소요당(逍遙堂)은 본래 한강의 명승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에 의해 소요당은 명승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정치·문화 권력이 있었던 인물들에 의해 그들의 주거지가 명승지로 바뀌었다.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으로 대표되는 장동(壯洞) 김문(金門)이 살았던 인왕산 일대가 그렇다. 남산을 대신해 인왕산이 한양을 대표하는 산이 된 것이다.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당시 새로운 산수미의 상징이 된 인왕산의 위상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와 같이 저자는 정치권력과 산수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하며 어떻게 권력과 명망이 있는 사람들과 관련된 장소가 명승지가 되고 그림으로 제작되었으며 새로운 산수미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청량산과 금강산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최고 명산이었던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였다. 반면에 유학의 성지는 청량산이었다. 16세기에 영남지역의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안동에 있는 작은 산인 청량산은 성리학의 성산(聖山)이 되었다. 영남 사림의 대표였던 이황(李滉)은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시기에 청량산을 성리학의 성지로 만들었다. 그는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으로 부르고 스스로를 ‘청량산 주인’으로 일컬으며 청량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명종은 이황을 위해 청량산 일대의 경관이 담긴 「도산도(陶山圖)」를 제작해주었다. 「도산도」를 통해 청량산은 더욱더 성리학을 대표하는 산이 되었다. 불교의 성지인 금강산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김창협, 김창흡 때문이었다. 이들은 금강산을 조선 최고의 명산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경기도와 강원도에 있는 별서를 거점으로 금강산을 여러번 여행한 이들은 시문을 통해 금강산의 산수미를 극찬하였다. 김창협과 김창흡의 시문과 함께 같은 장동에 살고 있던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금강산은 조선 최고의 명산이 되었다. 저자는 이와 같이 김씨 형제들의 ‘의도’에 따라 금강산이 산수미의 새로운 모델이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조명하였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산수화에는 화가 및 그림 주문자의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산수화에는 이러한 의도와 관련된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그려진 산수화는 제작 당시에 정치·문화 권력을 쥔 인물들에 의해 산수가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었으며 재해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반영된 산수화는 사람들의 산수 인식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산수화가 세계를 다시 만든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본 사람들은 정선의 ‘그림처럼’ 인왕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즉 사람들의 새로운 산수 인식이 산수화를 변화시키고 이 변화된 산수화가 거꾸로 사람들의 산수 인식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저자는 가장 순수해 보이는 그림 장르인 산수화를 결코 순수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 책의 학술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참신한 주장은 산수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미술사 연구에 혁신적인 시각과 방법론을 제시해주었다. 『산수화가 만든 세계』 의 장점은 쉽지 않은 내용을 다룸에도 자연스럽고 평이한 문장으로 인해 저자의 견해와 주장이 잘 전달되고 있는 점이다. 다만 책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도판이 더 많이 사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도판 중 일부는 상태가 좋지 않아 글의 품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점 또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