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시 | 제22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김상희 金相希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재학.

nagi2001@naver.com

 

 

 

말하는 희망

 

 

빵을 구웠다

오븐에서 부푼 빵을 꺼내면

얼마 안 가 푹 꺼졌다

나도 그런 모습으로 자주 희망을 잃었다

 

아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

붙잡고 소리 지르고 싶어도

입을 다물게 되는 사람들의 표정

 

나 너무 감격스러워

호수공원을 걷다가 네가 말했다

푹 꺼진 빵을 찢으면

고소한 냄새와 뜨겁고 아름다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다

발아래의 작은 것들을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현재가 훌쩍 지나갔다

트랙의 저 멀리에도

밟혀 죽을 것 같은 작은 것들은 너무 많았다

 

사랑하는 것들 나열하기

마지막엔 꼭 죽음이 붙었지만

그럼에도 호수공원 걷기는 멈출 수가 없고

호수에 비친 잎들을 보며 감격하기를 멈출 수 없고

찢은 빵을 너의 입에 넣는 것을 멈출 수 없고

 

빵을 접시에 담는다

할머니가 침대에 쪼그려 누워 있는 모습이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자

할머니는 지금 있는 요양원이

전에 있던 요양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 내가 오늘 빵을 구웠는데

너무 맛있었어 모양도 예쁘고

그래서 할머니 생각이 났어

 

자정이 되자 공원의 모든 불이 꺼진다

저 불은 곧 다시 켜질 것이다

 

너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다

이른 아침 건조대에는

많이 낡은 희망이

깨끗하게 닦인 채 하얗게 놓여 있었다

 

 

 

정오의 구분

 

 

버려진 가구들과

나의 책임은 비슷하게 생겼다

무게가 무겁고 크기가 커서

지나는 나를 압도시키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누워 있다 개가

 

나는 그곳을 우연히 지나는 중이었지

개는 짧은 줄에 목이 묶인 채

의아할 정도로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다

 

이상한 장면이다

너 평화롭니

하고 물으면

평화가 깨지고

나도 더이상 개를 볼 수 없게 될까봐

묻지 않았다

 

나와 개 사이에는 닫힌 문 하나가 있다

개의 세계는 문 안이다

정오를 조금씩 벗어나는 시각

날이 너무 뜨거워서

이번 여름에는

그늘도 없이 목줄에 묶인 개들이

멸종할지도 모른다

 

개는 고요한데

나는 조급해졌다

엎드려 혀를 내민 채

조용히 헉헉거리며

조금은 뚱한 표정을 짓는 동물

 

개는 알까

내가 모르는 것을

나는 개에게 언질해주었다

개의 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고

주먹을 풀었다

다시 쥐어봐도 잡히는 건 없었다

 

나는 문짝이 없는 가구처럼

자꾸 너덜거리는 표정이 되었다

 

주택가 골목 사이로

마르고 죽은 노인이 실려 나간다

너 평화롭니

나에게 묻자

평화는 깨지고 개가 고개를 든다

 

 

 

어떻게 생겼나요?

 

 

이 인공호수는 32년간 물을 간 적이 없다

사람이 죽어도 떠오르는 것만 건졌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인공호수 주변을 걷다가 갈피를 잃었다

그런 일은 나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뛰어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종종 그랬다

 

길고양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길에 고양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들도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새들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에 사람이 끼어서 죽었다는 기사를

수십번 보아도

컨베이어 벨트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을 저렇게 많이 그것도 여러번 죽인 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강한 이빨을 가졌을까

 

그렇지만 내가 아직도 컨베이어 벨트의 생김새를 모르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조깅을 하는 트랙 옆

인공호수에 32년간 무엇이 빠지고 또 건져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다

 

자동차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하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꾸만 죽고 다치는 것들이 있었다

 

트랙을 걷는데 앞서서 달리던 누군가 인공호수로 뛰어든다

인공호수는 금방 조용해진다

나는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금세 잊는다

당신 어디에 있나요?

그렇게 물어도 떠오르는 건 없다

 

사람들이 열심히 조깅을 한다

컨베이어 벨트는 어떻게 생겼나요?

이런 질문이 호수 아래 오랫동안 잠겨 있다

 

 

 

아기 돌보기

 

 

아기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잘 웃고 잘 울고 속마음을 쉽게 드러냈다

 

아기를 정성껏 돌보았다

아기는 금세 죽어버릴 것처럼 약하다가도

어느 밤에 비친 얼굴엔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끈기가 있었다

 

아기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종종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쉽게 까먹었다

까페 가기

책 읽기

오늘 저녁에 먹을 밀푀유나베 재료를 구입하기

일기를 쓰면

나는 자꾸 아기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났다

평화로웠다

나는 정류장에 앉아 아기 돌보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방에는 아기가 담겨 있었다

 

아기가 어디에서 왔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기는 내 생각을 전부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로 나를 꿰뚫었다

 

가방 속의 아기를 위해 기도했다

모은 두 손이 자꾸 희미해졌다

진심이 아닌 것처럼

 

아기가 잠들고 깨는 아침마다

나는 나를 돌봐줄 언어를 잃어갔다

이미 아기를 여러번 죽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떠보면

귀엽고 순진한 아기가

또다시 내 품 안에서 웃고 있고

 

나는 내 아기인 것처럼

아기를 돌보았다

무럭무럭 자라서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등을 토닥였다

 

 

 

서커스

 

 

차를 타고 멀리 들어간다

중심지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졌다

 

낡은 건물의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랫동안 어두웠다

변기 안에서 죽은 벌레는

빛이 깜빡이며 켜지는 동안

잠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흐르고 고였다가 다시 흘렀다

 

공연장에는 창문이 없다

순환하지 못하는 공기와 생각

타국의 어른은 타국의 아이를 높이 던졌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럴수록 아이는 더 높이 던져졌다

 

묘기를 보여주는 단원들의 표정은

길가에 생긴 의문스러운 구멍처럼

들여다보기 버거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지 않는 동안

제주의 도로를 거닐었다

 

제주의 도로는 넓다

2차선 도로도 4차선 도로처럼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무단횡단을 하면

여기서 고였다가 저기까지 흐를 것처럼

무궁무진하다

 

나는 자꾸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제주를 걸으면 걸을수록

물에 잠긴 채 죽고 싶다고 되뇌는

이미 죽은 곤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주의 해변에는 창문이 없다

나는 계속 숨이 막혔다

시가 나를 높이 던졌다

눈을 떠도

아이가 무사히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김상희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