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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오래된 기억과 듣는 사람들

 

 

김요섭 金曜燮

문학평론가.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나는 그 자리에 남았다」 「피 흘리는 거울: 군사주의와 피해의 남성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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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1

 

1. 고백하는 사람들

 

소설가 박완서는 한국전쟁에 휘말린 자신의 비극적 가족사를 반복해서 소설로 썼다. 등단작인 『나목』이나 첫 연재소설이었던 『목마른 계절』, 대표작 중 하나인 「엄마의 말뚝」 연작,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이하 『그 산』)까지. 얼마나 많이 반복을 해왔던지 『싱아』를 쓸 때는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2는 곤란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곤경(?)에도 박완서는 3년 뒤 『싱아』에서 다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완결하는 『그 산』을 발표한다. 그후 박완서는 『그 산』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온전히 밝혔다면서, 더는 이를 소설에 쓰지 않기로 한다.3 『싱아』를 발표한 시점에 이미 소설이나 산문을 통해서 이야기하지 않은 가족의 사건이 없었다고 토로하던 그가 『그 산』을 쓰면서야 가족사를 완전하게 밝혔다고 말한 사실은 모순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싱아』와 『그 산』으로 이어지는 90년대의 자전소설은 그 이전의 소설과는 달랐다. 『싱아』와 『그 산』에서 박완서는 자신의 가족사를 ‘증언’했지만, 이전 소설들에서는 가족사에 대한 ‘고백’이 더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1989년에 발표된 박완서의 중편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는 언뜻 비슷해 보이는 고백과 증언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의 개인사가 반영된 이 소설은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족사를 ‘고백’해왔던 이들의 삶을 증언한다. 민주화 직후 출판자율화로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되던 시기, 화자인 소설가 ‘이’는 자신의 스승 ‘송사묵’의 작품집에 들어갈 추천사를 부탁받는다. 그는 납북작가로 분류되는 송사묵이 실은 자신의 삼촌처럼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정치범이었음을 알고 고민 끝에 송사묵의 가족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가 송사묵의 실종에 대해 말을 꺼내자 그의 아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납북은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을 돌려서 이야기하는 말버릇, 즉 묵계일 뿐이라고 답한다. 국가에 살해당한 사상범의 가족으로 낙인찍히기보다는 납북자의 가족인 것이 덜 불행해지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즉 “불행해진 것도 억울한데 홀로 특별하게 불행해지는 거라도 면해보자는”4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이 묵계는 다른 이들에게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파편적인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적대적 시선을 피하는 방어적인 발화에 가깝다.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한 사회의 공식적인 언어와 행동규칙(‘공개대본’)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이를 속이거나 위반하는 은밀한 피지배자들의 행동문화를 ‘은닉대본’5이라 불렀다. 송사묵 일가의 묵계는 정치적으로 불온시된 이들을 식별하여 공격했던 국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은닉대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전 시기 박완서의 소설 역시 가족사의 많은 부분을 숨기는 방식으로 비극적 기억을 이야기해왔다.

『그 산』에서 오빠의 죽음은 한국군의 총기 오발 사건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 작품에서 죽음의 원인은 모두 달랐다. 『나목』에는 하나가 아닌 두 오빠가 등장하고, 그들은 폭격에 휘말려 희생된다. 『목마른 계절』의 오빠는 그를 의심한 인민군 장교가 쏜 총에 살해당한다. 「엄마의 말뚝 2」에서도 인민군 장교의 총에 맞지만, 즉사하지 않고 몇달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렇듯 박완서는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매번 다른 장면으로 그린다. 이는 그의 기억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재현의 내용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듣는 자에 의해 결정된다. 단편 「부처님 근처」에서 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나’와 어머니는 실종이라는 말로 사실을 가리지만, 그들은 가족이 우익에게 살해당했다는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얘기를 들어줄 사람의 비위까지 어림짐작으로 맞춰가며 요모조모 내 이야기를 꾸며”6가면서까지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한다. 소설에서는 ‘나’가 가족사를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돌리지만, 실상은 작가가 이야기의 또다른 청자인 독재국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항상 두려운 그 시선을 속이거나 안심시켜야 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박완서는 80년대 중반까지 전쟁 중 보았던 모든 죽음을 인민군의 탓으로 꾸며서 썼다.

가족사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듣는 이와 함께,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국가의 시선을 의식했던 이는 박완서만은 아니었다. 김원일 현기영 이청준 임철우 등 비극적 역사를 작품에 담은 작가 모두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기억하고 경험한 것들을 고백했지만,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자신을 노출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학자 김재웅은 북한체제 형성기에 자서전과 이력서가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된 양상에 주목한다. 그는 당시 북한이 인민을 분류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와 그 제도 안에서 체제를 속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활용된 고백이 충돌하는 격전장이었음을 기록을 통해 보여준다.7 북한 대중의 자기고백은 온전한 사실을 말하는 것도, 완전한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듣는 이들을 의식하면서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숨겨야 할 것들을 말하지 않거나 변형했다. 민주화 이전 한국 작가들의 글쓰기처럼 말이다. 고백의 문제는 문학이 역사를 재현할 때 듣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누락해왔던 것은 아닌지 되묻게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체험했던 앞선 세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는 최근 소설들 역시, 그 기억만큼이나 그것을 듣는 이들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2. 듣기, 증언의 조건

 

증언한다고 나온 사람들 다 잘 합디다만 그 말, 속엣말을 다 했을까… 지옥을 댕겨온 사람들인디 그 세상에서 겪은 일을 다 말했을까, 할 수가 있었을까…. 힘들면 굳이 말 안 해도 돼? 하지 말란께 또 하고 잡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려고 했던 말 해 볼라요. 들어주실라요? 나가 편하게 말 놓을라네. 선생님 아군 맞제? (정미경 「독사의 뱃가죽」, 96면. 강조는 인용자)

 

정미경의 단편 「독사의 뱃가죽」(『공마당』, 문학들 2021)에서 여순사건의 증언을 위해서 나선 화자인 ‘나’는 구술채록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나의 아군이 맞느냐고. ‘너는 어느 편’이냐는 질문은 이청준 소설과 산문들에 등장한 ‘전짓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8 단편 「소문의 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전짓불 일화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전쟁기 경찰과 공비의 각축장이었던 한 마을의 가정집으로 늦은 밤 밝게 빛나는 전짓불을 손에 든 남성이 찾아와 잠들었던 모자(母子)를 깨우며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모자는 밝은 전짓불 뒤편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그와 다른 편이라 답하면 살해되리라는 두려움 앞에 무력하게 방치된다. 「독사의 뱃가죽」의 화자 역시 자신의 말을 듣는 채록자에게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언뜻 비슷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그 말이 향하는 자리는 전혀 다르다. 전짓불의 질문은 적을 식별하는, 오로지 적과 아군으로만 나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9 반면 “아군 맞제?”라는 말은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간절한 목소리다.

「독사의 뱃가죽」의 증언자는 여순사건으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어머니는 할머니의 강요로 재가하면서, 사실상 고아가 된 인물이다. 그의 생애사 증언은 전투와 정치 중심의 남성적 기억과 구분되는 여성의 전쟁 기억을 보여준다.10 수년간 여순사건 피해자들과 만나 구술채록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 작가는 「독사의 뱃가죽」을 통해 구술채록자가 던지는 질문이나 반응 등을 의도적으로 지우면서 증언하는 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한다. 독자가 증언을 직접 듣는 듯한 체험을 하게 하는 이러한 장치가 효과를 발휘하는 지점은 증언이 잘 전달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주저하며 말하지 않았던 것을, 주저하면서도 말하는 순간에 주목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이야기 속 ‘빨갱이’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던 아버지가 실제 좌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소설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의 ‘(폭력으로) 뭉개진 얼굴’이라는 진실 대신 (유일하게 성한 신체인) ‘흐컨(허연) 발’이라는 거짓부렁만을 기억하며 버텨왔음을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이를 만나서, 그 앞에서 잊으려 애썼던 과거를 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독사의 뱃가죽」은 ‘뭉개진 얼굴’과 ‘흐컨 발’의 대비를 통해 기억하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간극이 좁혀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내지만, 『공마당』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은 소설적 형식보다 증언의 역할에 더 충실한 듯해 아쉬움을 남긴다. 국가폭력에 대한 사회적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편차는 때로 이야기의 절박함을 요구하지만, 소설이 증언하기의 유일한 수단이 아닌 이 시대에 문학에서만 가능한 말하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절실하기 때문이다. 구술채록 전문가인 작가가 ‘듣는 자’의 이야기를 후경화한 점은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다른 수록작 「금목서」에서처럼, 비극적 역사를 간직한 가족 안으로 들어선 제3의 인물이 던지는 파문은 때로 ‘사건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국가폭력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의 일을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 응답할 때, 그들의 말하기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11 그래서 피해자의 말하기는 듣고자 하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해지기도 한다.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가시화되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적대적 시선에 맞선 증언자들의 용기만큼이나 이를 공론화하고 증언을 채록했던 이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한 명』(현대문학 2016)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소설을 계속 써가고 있는 김숨은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2021)에서 듣는 사람을 전면에 내세워 망각된 기억이 다시 말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표적인 구술채록 작업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가 발간되던 9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위안부’ 구술사를 채록하는 연구원 ‘나’는 지방에 있는 70대 피해자를 만나 그의 증언을 기록하고자 한다. 고령과 질병, 무엇보다 말하기에는 너무 참혹했던 끔찍한 경험이 남긴 상처 때문에 제대로 증언이 말해지지 못하는 상황을 작가는 반복하여 보여준다. 게다가 그 상처만큼이나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주위의 환경이 그의 증언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가 ‘위안부’였던 사실과 그 때문에 얻은 질병들을 수치스러워하고 침묵을 요구하던 가족들 곁에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말할 수 없다. 그가 기억하기 위해서, 또는 그 견딜 수 없는 기억을 잊기 위해서 했던 말과 행동들은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때로 광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과거는 증언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고, 발언 자체를 억누르는 위협으로 작용한다. 소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자신의 죄로 돌리거나, 이미 신고할 때 밝혔던 내용조차 부정하는 사례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듣기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 피해의 기억을 말할 언어는 제대로 구성되거나 유지되기 힘들다.

『듣기 시간』의 채록자 ‘나’는 피해자가 파편적으로 증언한 내용을 연결하거나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기도 하며 피해자가 자신의 언어로 증언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힘겨운 과정을 함께한다. 이 과정에는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언어, 언어가 아닌 것으로 표현된 언어를 듣는 지난한 시간이 포함된다.

 

그 침묵이 아니다.

그녀의 방에서 들었던 그 침묵이 아니다.

침묵의 색채가 달라져 있다.

침묵의 질감이 달라져 있다.(139면)

 

김숨이 포착하는 듣기의 과정은 상실하거나 아직 회복되지 못한 언어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나’가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한 녹음파일에는 자신의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온다. 이처럼 피해 생존자의 증언하기와 이를 기록하는 연구자의 언어가 겹쳐지는 장면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열었던 윤정옥 교수 등 1세대 활동가와 학자들은 한국의 가부장적 성(性) 윤리에 맞서,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여겨지던 증언을 사회를 바꾸는 목소리로 전환하는 데 함께했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다른 이들의 개입 없는) ‘순수한 증언’과 그렇지 않은 증언을 나누는 방식으로 증언을 부정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증언은 개입의 노력을 통해 그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다. 이처럼 피해자의 증언하기와 기록자의 말이 겹쳐짐으로써 증언을 불가능하게 했던 해석의 맥락들은 변화될 수 있다. 김숨은 듣기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증언을 보여줌으로써, 증언하기가 연대의 과정이었음을 말한다. 피해자에게 계속 말을 거는 목소리, 피해자의 곁에서 그의 말을 듣는 목소리가 함께 녹음된 그 음성 속에서 증언이 시작되는 것이다. 듣기의 시간을 거치며 가능해진 바로 그 증언이 말이다.

 

 

3. 여성 가계도 혹은 주체의 회복

 

2010년대 한국문학장은 개인의 회복을 내세운 1990년대 문학이 주변화했던 정치성이 다시 치열한 쟁점이 되었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 가시화되는 양상 중에서 일인칭 ‘나’를 중심으로 한 소설들의 부상이 주목받기도 했다. 이 소설들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기존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지식이 더는 자명한 것이 아니게 되자 ‘우리’를 재현할 수 없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이 ‘나’의 재현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12

이러한 맥락을 경유할 때, 2020년대 연속적으로 등장한 여성 가계도 소설들은 ‘나’에서 출발해 새롭게 ‘우리’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에서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306면)을 짚어냈던 황정은은 이듬해 『연년세세』(창비 2020)를 통해 ‘이순일’ ‘한영진’ ‘한세진’ 모녀를 중심으로 기억의 가계도를 구성한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 2020)는 가부장제 사회에 당당히 맞섰던 여성 지식인 ‘심시선’을 중심으로 한 모계가족의 이야기다. 한국문학사에서 주로 역사적 금기로 묶였던 가족관계를 증언하거나 나아가 이를 회복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쓰여온 ‘제사(祭祀)’는, 두 소설에서 기성의 사회에 맞서 새로운 관계의 계보를 구성하는 매개로 쓰인다.13 이는 잊힌 역사를 다시 보여주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계보를 통해 현재를 사는 여성과 다음 세대를 뒷받침할 역사를 창출한다. 이러한 여성 가계도의 구성은 자명한 것이라 순응해온 ‘우리’의 폭력에 맞서온 ‘나’의 이야기가 이제 새로운 ‘우리’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근래 여성 가계도를 그리는 소설들 역시 박완서의 소설처럼 전쟁이나 민간인 학살 같은 한국사의 폭력들을 환기한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호명한다기보다 역사를 살아간 이들의 삶과 관계를 통해 ‘나’라는 주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박완서 소설에서 권력에 의해 억눌린 가족관계를 복권하려는 시도는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회복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여성 가계도처럼 여성의 역사적 계보를 그리는 작업은 관계의 회복 또는 창출을 통해 주체를 회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박완서적’이다. 그러나 그 계보와 관계 맺기가 혈연이라는 주어진 조건보다는 듣기의 능동적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수평적인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앞선 세대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주체의 서사를 다루는 최은영의 『밝은 밤』(문학동네 2021)과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은 그 탐색이 혈연이 아닌 계보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밝은 밤』은 외할머니 ‘영옥’의 이야기를 통해 증조할머니 ‘이정선’에서 손녀인 ‘지연’으로 이어지는 4대의 모계서사를 보여준다. 남편과 이혼 후 어린 시절 외할머니 영옥과 살았던 작은 도시 희령에서 우연히 영옥과 재회한 지연은 그의 집에서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여성의 흑백사진을 보게 된다. 그뒤 지연은 영옥으로부터 증조모 이정선과 영옥의 삶에 대해 듣는다.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한 뒤에도 삐걱거리던 지연의 생활은 할머니 영옥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들려준 정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점차 회복되어간다. 언니 정연의 죽음 이후로 모두가 결국은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던 지연에게 증조모 정선과 그의 친구 새비 아주머니가 서로를 지키고 위하던 마음 역시 큰 위로로 다가온다. 지연이 가족사 듣기를 통해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이처럼 다른 이와 대화하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연대의 역량이 성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밝은 밤』은 4대의 수직적 모계관계를 그리지만 서사의 중심은 정선과 새비 아주머니, 영옥과 새비의 딸 희자처럼 같은 세대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라는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처럼 수평적 관계가 두드러질 수 있는 까닭은 가족사가 할머니의 말을 통해서만 지연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선과 새비, 영옥과 희자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읽는 지연은 다른 시대, 다른 세대 속 대화의 수신자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체험한다. 편지 읽기를 통해서 지연의 듣기는 앞선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수직적 경험을 넘어, 자신의 다른 관계들과 포개어서 동일시될 수 있는 수평적 대화로 나아간다.14 그래서 지연이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돌보는 연대의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영옥과 희자 사이 단절되었던 소통의 복원과 겹쳐질 수 있었다. 이렇게 회복된 연대의 능력은 지연으로 하여금 자신을 긍정하고 타자와 자신 모두를 돌볼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지연의 수평적 듣기 방식은 그를 배신했던 전 남편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지연의 전 남편은 시간을 흐르지 않는 얼어붙은 강으로 비유한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173면)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시간이 얼어붙은 강이라면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된 것이며, 이미 결정된 시간에는 후회나 반성의 가능성이 없다. 얼어붙은 시간은 전 남편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지연을 수동적인 인물로 격하하는 언어이기도 했다. 반면 지연이 과거를 듣는 일은 다른 현재와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는 증조모의 과거를 들으면서 현재의 삶을 회복하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획득한다. 가족의 과거 역시 지연이 듣고 있기에 망각되지 않으며, 단절되었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기회로 이어진다. 이처럼 『밝은 밤』에서 앞선 세대 여성의 역사를 듣는 일은 얼어붙은 시간을 녹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밝은 밤』이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한 지역의 역사를 두고 여러 목소리가 교차한다. 액자식 구성의 소설 1, 3부는 소설가 ‘나’가 화자로 등장하고, 친구인 ‘진’의 할머니 ‘박지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2부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지영현(또는 종숙)’이 화자가 된다. 액자 밖 서사의 화자인 ‘나’는 쓰고 있던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아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던 중에 19세기 말 인천에 건설되었던 서양식 건물 ‘대불호텔’에 대해 듣게 된다. 1955년 대불호텔에서 있었던 ‘고연주’(다른 이야기에서는 지영현)의 죽음에 대해 박지운, 그의 딸 보애 이모, 대불호텔을 마지막까지 운영했던 ‘차오’의 조카 ‘이청화’는 ‘나’에게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을 쓰지 못하던 소설가 ‘나’는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소설의 극후반부까지 계속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기만 한다.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를 말이다.

『대불호텔의 유령』에는 그 악의에 찬 목소리가 울리는 귀신 들린 집들이 등장한다. 박지운의 이야기 속 대불호텔은 그곳을 나가려는 고연주를 위협하고 현혹하며, ‘나’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이 옹주라고 주장했던 노인이 살았던 적산가옥에 숨어들었다가 “너도 어디 한번 당해봐, 억울하게 지내봐, 외롭게 살아봐”(47면) 하는 저주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목소리는 어른이 된 뒤에도 ‘나’의 귀에 반복적으로 울리면서 그를 괴롭게 한다. 도저히 소설을 쓸 수 없어서 괴로워하던 ‘나’는 자신에게 들리는 악의에 찬 목소리를 돌려주기로 한다.

 

그래. 나도 원한을 품겠다. 너희들에게. 바로 너에게. 그 역겨운 목소리를 그대로 되돌려주겠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겠다. 반드시 쓰겠다. 아주 괴팍하게 쓰겠다. 잔인하고 못된 감정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쓰겠다.(57면)

 

하지만 ‘나’의 이야기하기는 반복적으로 유예된다. ‘나’는 써야 할 소설이 아니라 대불호텔의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게 되고, 대불호텔에서 있었던 한 여성의 죽음에 대해 각기 다른 이들의 말이 반복될수록 이야기가 전하는 감정은 타인을 향해 분출하는 원한과 원망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이동해간다. 한국전쟁기의 폭력과 화교에 대한 민족적 차별, 여성혐오의 역사가 원한의 연쇄를 반복했다면, 그때를 살아간 이가 가졌던 시대의 또다른 단면은 원한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소설은 부분적 진실을 담은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조금씩 겹쳐놓으며, 원한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실은 잃어버린 사랑의 공허를 덮기 위한 가림막이었음을 발견한다. “누군가에게 쏟아붓기 위해 만들어진 마음”(56면)은 원한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밝은 밤』이 여성 연대의 수평적 관계들을 수직으로 포개어놓으며 지연의 삶을 회복해간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비추는 이야기의 연쇄를 통해서 진실 속 진심을 발견한다. 소설가 ‘나’는 그 진심을 듣게 됨으로써 원한의 반복에서 벗어나고, 이를 통해 글쓰기의 능력을 회복한다.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그러지 못하리라는 불안에서 파생된 자기부정을 멈추고, 누군가의 말을 듣는 자로서의 작가라는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장화홍련 설화의 뒷이야기로 삽입된, 두 자매의 원혼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며 그 원한을 달래준 수령의 이야기는 듣는 자로서의 소설가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듣기의 과정을 통해 소설가의 역량을 회복해가는 서사는 임철우의 『백년여관』(한겨레출판 2004, 개정판 문학동네 2017)을 연상하게도 한다. 『백년여관』 역시 비극적 한국사에 묶여 있던 영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백년여관』이 근대성 외부라고 여겨진 유령의 목소리를 통해 은폐된 역사를 증언하는 기억술을 발견한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주류적 시선 속에서 역사적 언어로 인정받지 못했던 감정의 언어를 파고든다. 강화길이 전작 「음복」(『화이트 호스』, 문학동네 2020)에서 고모의 괴롭힘을 통해 가부장적 가족 질서의 폭력을 보여주었듯, 남성적 세계에서 여성의 언어는 악의와 분노라는 형태로만 가시화되기도 한다. 어떤 마음이 공격적 표현을 통해서만 남에게 들리는 폭력의 구조를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진실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 소설가가 듣는 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4. 듣기, 다른 삶의 탐색

 

최은영과 강화길의 소설은 오래된 기억을 듣는 과정을 통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해간다. 주체의 회복은 새로운 관계와 삶을 주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주체는 기성의 사회가 설정한 정상성의 경계가 과연 자명한 것인지 되묻는다. 박완서가 반공주의 사회의 안과 밖을 구분해온 경계를 되물었다면, 오늘날 작가들은 가부장제 사회를 재생산해온 성정치 구조를 해체하는 데 주력한다. 이 소설들이 한국전쟁기라는 배경을 소환하는 까닭은 이 시기가 민족 재건을 위해 (가부장제적) 가족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건설하려는 욕망이 분출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인 동시에, 가부장제적 가족질서를 견고하게 만들려는 힘의 반작용으로 젠더 교란이 빈번하게 나타났던 퀴어한 시기였다는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함이다.15 그래서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 퀴어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바라보는 일은, 견고해만 보이는 현재의 질서를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정현의 역사소설은 시대를 퀴어하게 읽어내며 새로운 ‘우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나서고 있다.

기억을 듣는 일은 추리와 닮았다. “동시대를 살았으나 너무나 비동시대적인 그들의 경험을 해석할 능력이 없”16는 사회의 공식적 언어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기억과 말을 해석하는 데 무용하다. 그래서 때로 듣기의 과정은 낯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 즉 추리를 필요로 한다. 역사 속 폭력의 구조와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하는 경계인들을 소설로 써왔던 한정현이 최근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탐정 셜록과 조수 왓슨의 관계를 뒤엎어서, 두 사람의 ‘왓슨’들(‘설연’과 ‘연정’)이 사라진 ‘셜록’(‘이지연’)을 찾아나서는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문학과지성사 2022)는 빨치산과 퀴어, 성형과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낯선 조합을 통해 어떻게 현재와 역사 속의 폭력을 기억할 수 있는지 탐구했다. 근작 『마고』(현대문학 2022) 역시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한국사회가 잊고 있던 기억을 들으려 하는 작품이다.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라는 부제로 알 수 있듯이 『마고』는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사설탐정의 추리를 따라 진행된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의(檢案醫) ‘연가성’은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조선 여성들의 사건만을 맡는 사설탐정 ‘세개의 달’로 활동한다. 미국 유학파 명사 ‘윤박’ 교수가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은 조선인의 반감을 의식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 당일 윤박을 만난 세 여성 중 한 사람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우려 하지만, ‘세개의 달’은 권력이 정한 결론이 아닌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려고 한다. 연가성의 친구인 기자 ‘권운서’와 신비한 의뢰인 ‘에리카’까지 등장하며 소설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은 범인의 정체와 범행의 과정을 증명해내려는 전형적인 추리소설 장르의 문법에서는 비껴나 있다. 윤박 교수를 살해한 이가 미군 병사였다는 것은 한국경찰과 미군정이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보경이 짚은 대로 『마고』는 용의자로 지목된 세 여성의 사연과 관계에 집중하며 살인사건이 아닌 다른 진실을 밝혀내려고 한다.17 연가성과 권운서의 수사는 윤박 교수로부터 폭력과 위협, 착취를 경험한 세 여성 용의자 ‘선주혜’ ‘윤선자’ ‘현초의’ 그리고 ‘세개의 달’에게 사건을 의뢰한 에리카의 삶을 조명하며, 작가의 전작들처럼 가부장적 사회의 공식 기억에서 이중으로 소외된 여성과 퀴어의 역사를 조명한다.

작품 속에 삽입된 소설이자 표제가 된 한국의 창조신화 속 여신 ‘마고’는 왜 범인을 알고 있는 사건(즉 이미 알려진 역사)을 다시 추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산을 넘어뜨리고 육지를 파괴해서 세상을 창조”하는 남성 신들과 달리 마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세계”(41면)를 만든 신이지만, 어느 사이에 신 ‘마고’가 아닌 ‘마귀’로 불리게 된다. 또한 소설 속에서 ‘제국’이나 ‘국가’와 같은 남성적 세계가 태양으로 상징되는 데 반해, 마고는 달로 상징되며 그 이미지는 “너무 밝아서 주변 별들의 빛을 다 가져가버리”(158면)는 태양의 환한 어둠과 대비된다. 윤박 교수 살인사건, 아니 미군정기와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대한 선명한 공식 기억은 너무나 강한 빛이 되어 다른 존재들을 지운다. ‘세개의 달’ 연가성과 권운서가 들으려는 것은 그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존재했던 사람들의 역사다.

달이라는 비유는 세상의 지배적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았던 이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식민지와 미군정, 정부수립과 전쟁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남성들 이야기”(153~54면)로부터 벗어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에필로그에서 권운서가 남성으로서 전쟁에 나서는 대신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관으로 전쟁의 피해를 조사하다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말이다. 강한 태양의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학자 디디위베르만(G. Didi-huberman)은 군림하는 권력의 강한 빛(스포트라이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잔존하는 피억압자의 역량을 ‘반딧불의 빛’으로 비유한 바 있다.18 『마고』의 달빛처럼 반딧불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강한 빛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주류의 역사는 의문에 붙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들리고, 그 큰 소리에 가려서 다른 삶의 방식들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사라졌거나 존재한 적조차 없다고 여겨진 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약한 빛은 그들이 존재했던 과거만을 증명하지 않는다. 희미한 빛, “‘반딧불-이미지’는 증언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생성 중인 정치적 역사에 대한 예언과 예견”19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의 기억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잊힌 과거를 듣는 마음에는 다른 삶에 대한 작은 낙관이 자라난다. “우리는 낙관할 수 있어. 우리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18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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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2, 268면.
  2. 박완서 「작가의 말: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 같은 책 8면.
  3. 수류산방 편집부 엮음 『박완서朴婉緖』, 수류산방 2012, 191면 참조.
  4. 박완서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문학동네 2013, 203면.
  5. 제임스 C. 스콧 『은닉대본』, 전상인 옮김, 후마니타스 2020, 69면 참조.
  6. 박완서 「부처님 근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문학동네 2013, 113면.
  7. 김재웅 『고백하는 사람들』, 푸른역사 2020, 76면.
  8. 서영채는 이청준의 소설과 산문에서 나타난 ‘전짓불’ 이야기의 차이를 정리하면서 산문 등의 내용과 달리 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전짓불의 장면이 개인사의 반영보다는 당대 한국사회가 경험한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분석한다. 서영채 「세 개의 ‘전짓불’ 삽화와 4·19세대 문학의 의미」,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출판사 2017, 301~303면.
  9. 서영채는 전짓불 삽화가 포착한 국가폭력이 적의 식별이 아니라 “적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서영채, 같은 책 302면 참조. 창조된 적은 폭력을 통해 만들어질 새로운 사회질서의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가 된다. 이러한 구성적 외부를 만들기 위해 전짓불을 들이밀던 한국의 반공국가는 국가의 질서 이외에 연대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관계들을 파괴하거나 통제했다. 권헌익 『전쟁과 가족』, 창비 2020, 164면 참조.
  10. 후방과 생계, 가족생활이라는 영역을 비가시화함으로써 한국전쟁기의 공식 기억은 여성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성숙 「한국전쟁에 대한 젠더별 기억과 망각」, 윤택림 외,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과 분단』, 아르케 2013, 60~61면 참조.
  11. 이호연·유해정·박희정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코난북스 2021, 110면 참조.
  12. 박혜진 「증언소설, 기록소설, 오토(auto)소설」, 『크릿터』 1호, 민음사 2018, 96~97면 참조.
  13. 한국문학사에서 가족사 소설, 특히 정치적으로 추모가 금지된 가족을 애도하는 가족의례로서의 제사와 매장 모티프는 새로운 관계성을 상상해내는 정치적 상상력을 품고 있다. 필자는 졸고 「제사의 행방」(『요즘비평들』 2호, 근간)을 통해 제사 문학의 문학사적 맥락에서 『시선으로부터,』와 『연년세세』를 분석했다.
  14. 김주원은 여성 가계도를 그리는 가족서사가 수직적 혈연의 계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를 새롭게 창출하며 전통적 가족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주원 「가족의 미래와 동맹의 정치: 최은영의 『밝은 밤』과 황정은의 『연년세세(年年世世)』 읽기」, 문장웹진 2022년 6월호 참조.
  15. 허윤 「전후 문학의 ‘퀴어’한 육체들」, 『남성성의 각본들』, 오월의 봄 2021, 169면 참조.
  16. 이호연·유해정·박희정, 앞의 책 129면.
  17. 김보경 ‘작품 해설’, 『마고』, 194~95면 참조.
  18.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길 2012 참조.
  19. 같은 책 1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