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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압둘라자크 구르나 『바닷가에서』, 문학동네 2022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들의 교역

 

 

박여선 朴麗仙

영문학자 kirillo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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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Abdulrazak Gurnah)는 과거 영국령 식민지의 난민 출신으로 일찍이 영국에 귀화하여 영어로 작품활동을 해왔다. 독자로서는 전형적인 탈식민주의 이주민 문학의 특성을 예상하기 쉬운데, 그의 작품은 이 예상을 무색하게 만드는 독특한 깊이를 보여준다. 이는 그가 태어난 동아프리카 연안에 있는 작은 섬나라 잔지바르(Zanzibar)의 특별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잔지바르는 16세기 포르투갈제국의 침공을 받기 오래전부터 인도양을 무대로 행해진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무심’이라는 계절풍이 아프리카대륙을 향하여 불 때는 아라비아, 인도,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바람을 타고 와서 동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교역을 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바람을 타고 되돌아갔다. 잔지바르는 19세기 초 아랍 엘리트와 술탄이 통치했던 오만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963년 보호령에서 해방되자마자 이듬해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잔지바르 혁명을 통해 영국과 결탁한 아랍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웃 내륙국가 탕가니카(Tanganyika)와 통합해 오늘날의 탄자니아의 일부로서 반(半)자치국이 된다. 간단히만 서술해도 식민경험의 역사가 상당히 복잡한데 다양한 인종 구성과 종교는 이런 복잡함을 한층 가중한다.

구르나의 작품은 이 복잡다단한 잔지바르 역사의 양면적 성격을 탐구한다. 특히 대표작 『바닷가에서』(By the Sea, 2001, 황유원 옮김)에는 이 역사의 양면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가 그 역사를 살아낸 개인들의 양면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맞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구 제국주의가 인도양 세계의 유동적 정체성을 파괴하고 획일적으로 재구성하기 전의 찬란했던 과거를 환기하면서도 그러한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지양하고, 서구 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로 인한 피해의식적 공격 역시 초월하는 한편,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아랍 통치하의 노예제 및 잔지바르혁명을 추동한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시킨다. 나아가 휘몰아치는 역사 속에서 삶의 부침을 견뎌냈던 개인들에 대한 단순한 연민이나 일방적 찬양도 지양하고, 그렇다고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했던 개인들에 대한 냉담한 판단 역시 초월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심오한 경지를 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모티프다. 이는 무역과 교환의 모티프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다시 이동과 이주의 모티프와 연결된다. 이야기들을 통해 무역은 다양한 장소에 숨을 불어넣고 활력을 제공해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한편, 탐욕과 환상과 거짓말 그리고 증오 역시 실어 나른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가 진실의 도구로 기능하는 동시에 환상과 오해와 증오와 폭력 역시 불러오는 것을 본다. 따라서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양면적이다. 이야기의 주체에게 자신의 관점을 표현할 자유와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한편 그 이야기에 화자를 속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속에 갇혀버린 개인은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 속의 인물로서 살기를 강요당한다.

구르나는 이런 이야기의 이중성과 터를 상실한 난민의 복잡한 운명을 엮어놓는다. 소설에서 우리는 과거로 항해를 떠나는 두 화자를 마주하는데, 살레 오마르는 아랍계 잔지바르인으로 삶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혁명의 수난을 겪어냈으나 끝내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강제된 추방자이고, 라티프 마흐무드는 이슬람 역사에서 가족사가 불러온 비극들에 치를 떨며 비난의 서사들만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폐쇄적 공간을 떠나 가족, 고향, 조국과 스스로 절연하는 자발적인 추방자다. 상속을 둘러싼 가족의 갈등사는 식민, 해방 및 혁명의 역사와 얽혀들며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을 산산이 부숴놓는다. 두 화자는 과거의 사건을 완전히 반대되는 시각에서 서술하는데, 같은 경험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서로 대립하면서 만나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스스로를 과거의 희생자로 보고 있다. 자신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이 존재들은 『낙원』(Paradise, 1994, 한국어판 문학동네 2022)의 주인공 유수프처럼 “추방당한 가슴”에 새겨진 단단한 외로움의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고 그로부터 끊임없이 삶을 방해받고 속박당한다. 과거의 이야기 속에 갇혀버린 자신들을 해방하기 위해 두 화자는 서로가 필요하다. 영국에서 두 화자가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짙은 향도 자극적인 향신료의 맛도 없는 헐벗은 이야기다. 두 화자는 이제 서로의 이야기를 교환하면서 회피하려고 했던 이야기 속의 공백들을 채워가고,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와 상대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화자로 서서히 발전한다. 이제 이야기는 더이상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사후적 기록 같은 것이 아니다. 화자들이 새로운 혹은 다른 이야기 속에서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이야기는 삶의 경험을 변화시키는 길을 열어준다.

이 소설에서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유명한 「필경사 바틀비」(1853) 이야기가 반복적인 모티프로 등장한다. 반인간적인 자본주의 세상을 등지고 적극적으로 자기소외를 택한 바틀비의 모습에서 차라리 삶을 대하는 어떤 우아함, 나아가 영웅적 면모를 보았던 오마르는 라티프와의 화해를 이룬 후에는 바틀비에 대한 영국인 레이첼의 세속적이지만 상식적이기도 한 비판을 이해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살았던 이야기의 폐쇄성에서 해방되어 다른 이야기 속으로의 항해를 시작하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쉬워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오마르는 『낙원』의 유수프가 그랬듯 “품위 없는 굶주림”으로 점철된 삶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오마르의 청결에 대한 이슬람적 예민함은 그의 자존감에 대한 은유다. 비록 그에게 허락된 청결이 타월 한장이 제공하는 미미한 공간일지언정 그는 이 작은 공간에 의지해 다가오는 삶을 버틸 것이다. 하찮지만 단단한 이 청결함에 대한 고집에 그의 이야기가 참으로 품위 있고, 그래서 더욱 쓰라리게 다가온다.

끝으로 번역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기에 조심스럽게 한마디만 적겠다. 번역본을 읽을 때 당연히 안고 가야 할 불편함 중 하나가 직역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직역으로 인해 의미가 심히 와닿지 않는 대목들이 몇군데 있었다. 작품 이해에 있어 중요한데다 의역이 필요했던 부분들이라 생각되어, 우리말 의미와 느낌으로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옮겨주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