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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강순전 편집 『현대 영미 철학에서 헤겔로의 귀환』, 세창출판사 2022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사월의책 2019

‘중생이 부처’라는 불교 화두의 서구식 명제

 

 

이종구 李鍾求

전 언론인, 한국헤겔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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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을 한번에 소개하는 이유는 두 책이 같은 얘기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기 때문이지만, 두 책을 따로 소개하기에는 그 대중성이 좀 뒤처진다는 생각에서 창비를 위해 약간의 배려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 영미 철학에서 헤겔로의 귀환』(이하 『헤겔로의 귀환』)은 ‘헤겔 연구 별책’ 시리즈 1권으로 강순전이 편집한 것이고, 남기호가 지은 『헤겔과 그 적들』은 ‘헤겔의 법철학, 프로이센을 뒤흔들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로 얘기를 시작해보자. 준법이 사회의 주요한 기준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법 영역의 처음 시작 부문, 그곳은 정치적인 것의 영역이고 정치적인 것의 근원에도 예외적인 상황이 있다. 이곳을 어떤 한 사람이 주무르려 하면 정치신학이 태동한다. 나치즘이나 유신(維新)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는 신(혹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내재화한 것이 개인이냐, 어느 집단이냐, 혹은 대중 모두이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평등한 내재화를 잘 표현한 것이 ‘중생이 부처’라는 불교의 화두다. 서구에서는 이 화두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이 확실해진 것은 예수의 출현에서이다. 아는 것, 사유된 것, 기억(Gedächnis)인 자기를 잊기도 하면서 이루어나가는 나(자기의식Selbstbewußtsein)는 그 자기를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Werden) 자체이다. 운동 자체인 틀(형식)은 아직 ‘비어 있는 것〔空〕’인 존재인데, 그렇듯 존재는 운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있음이 없음인, 없음이 있음인 시원(始原)이고, 바로 존재론이라는 형이상학의 시원이다.

그러나 이 세계와 역사가 평등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내재화를 독점해온 승려 계급에 항거한 루터의 종교혁명과 그것을 세속적으로 독점한 권력들이었던 황제·왕·귀족들이 신구믿음으로 갈라져 경쟁했던 30년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로 베스트팔렌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각 지역의 방어(邦語)들이 유식한 자들의 공통어인 라틴어로부터 독립해 모국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과정은 종교적 믿음을 양화하여 분석하고 지식화하는 역사였던 계몽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믿음을 지식화하는 이 길 위에 18세기 말, 19세기 초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이 위치한다.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믿음의 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통일되어 개별성으로 지향되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부처나 그리스도라는 씨앗이 중생 즉 인간에 내재한 채 전개해서 개별적인 그 나름의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기호의 책에는 이백년도 더 전인 그 옛날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일, 즉 왕권과 그 밑에 활동하는 종교성의 감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면서요?”라고 비꼬는 젊은 제자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에 헤겔이 “그 말은 이성적인 것이 모두 현실적이라는 말”이라고 대꾸하면서도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던 이유는 ‘이성적’이라는 말이 강조되면 그것이 신(神)을 대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프리스, 할러, 사비니 등의 학자들과 대결하면서 입헌군주제를 내세운 것은 물론 주권의 상징성을 살리면서도 그 상징을 실제 권력과 분리하려는 취지였겠지만, 그 당시 왕권의 감시로부터 회피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통치권의 상징성과 실제 권력을 어느 정도로 결합하고 조정할지 하는 문제는 대통령제, 이원집정제, 내각책임제를 둘러싼 현재의 논의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헤겔의 이 모든 개념들, 특히 시원으로서의 존재〓무〓생명(소멸) 개념은 칸트의 비판적·인식론적 과정을 거쳐 그 이전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형이상학인 존재론 그리고 논리학이 되는데, 『헤겔로의 귀환』은 이 문제를 현대 영미분석철학이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다루고 있다. 2018년 말 한국헤겔학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뼈대로 편자 강순전이 다시 보충 편집한 이 책은 칸트 이전과 이후의 모든 형이상학을 거부해온 분석철학자들이 헤겔이 다룬 존재론, 즉 시원의 문제로 어떻게 회귀하는지를 깊이있게 논한다. 크리스티안 슈판과 권영우는 분석철학이나 경험론에서 최종 근거로 삼았던 감각소여가 현상의 차원이었으므로 헤겔적인 시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논한다. 그러나 이 시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는 필자마다 칸트적인 비판철학으로 가능하다는 입장과 그 입장을 포괄하는 새로운 존재론이어야만 한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특히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보이탄은 사유 밖의(이전의) 독립된 존재를 다루는 존재론은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보고, 사유 밖을 인간이 다룰 방법이 없다는 칸트의 인식론적 비판 이후 형이상학은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와 사유가 동일하다는 데서 출발하게 된다고 말한다. 모든 표상은 존재자에 대한 표상이기 때문에 여기서 존재(~임)는 그것이 사유에 외면적이라는 표상을 포함한 모든 표상을 배제하지만(하이데거가 신이 표상인 한 존재에 속하는 게 아닌 존재자라 한 이유이기도 하다) 표상 및 자연적 의식(대상의식)에서 해방된 ‘순수사유’ 자체가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인 순수사유는 말씀 곧 로고스인데, 이는 헤라클레이토스 전통에서 말하는 시간, 즉 변화와 생성 자체인 과정으로서의 ‘존재하는 것의 이성’이고 바로 논리학으로 된 존재론이다. 논리학은 사유와 그것의 산물에 관계하지만 또한 존재이며 무이고 생성(시간)인 순수사유의 전개이다. 존재가 로고스 논리(학)이기 때문에 규범적이고, 또 그것이 자체적 전개이기 때문에 무제약적·절대적이다. 보이탄은 이 전개 과정을 매개연관으로 보고 이를 현대 미디어이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언어(푸꼬·하바마스 등)나 의미(루만), F. 키틀러의 기술형식 내지 기술선험성(Teknik-Apriori) 등 미디어 실증주의가 간주하는 매체(Medium)를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관계처럼 매체성에 관계시킨다면(매체연관) 매클루언의 미디어이론이나 이를 포스트구조주의 방식으로 전개하는 키틀러의 이론을 원초적·논리적 형식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또한 분석철학 이후의, 즉 포스트분석적 이론지평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분석적 전통의 두가지 역사적·체계적 전제는 언어의 우선성과 프레게함수(명제의 주어-술어 관계를 기호체계를 통해 수리적·논리적으로 표현한 함수—편집자)이다. 그러나 사유가 언어 속에서 움직인다고 해서 사유가 생산하는 규정들이 실증적 언어에서 도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언어적인 것들이 있다. 철학적 사유에서 자신의 규정들을 반성해서 얻어지는 개념은 언어공동체에서 ‘그럴듯한’ 것일 뿐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인 통사를 서술하므로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반면에 분석적 전통은 언어의 우선성으로의 전회를 통해 이러한 철학의 존재론적 관심을 과학의 영역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물질〓힘의 최소단위인 양자(quantum)를 프랑크상수인 쿼크(quark)로 미분해서 입자〓파동으로 이론화해 실증하고 의식이론의 물리주의가 감각의 최소단위를 감각질(qualia)로 미분했지만, 신경생리학 이론에서 뇌 속의 물질적인 힘인 전기신호가 어떻게 의식으로, 감각질로 비약하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분석적 전통의 언어우선주의는 비언어학적인 형식의 세계이해를 모두 배제해버렸다. 프레게함수 이후 함수와 독립변수가 분할되어 술어적인 함수가 분석적 전통의 주가 되었지만 함수의 불완전성에 따른 결핍은 비술어적 존재에 의해 충족되어야만 했다. 이 비술어적 존재는 프레게함수의 논리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헤겔의 매체성(존재〓무〓생성)도 계사(繫辭, copula)이자 존재사(存在辭)라는 존재(sein이라는 부정사), 즉 술어 규정들의 시원이자 규정(사유)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여기에 헤겔사유의 급진적인 반성성이 있게 된다). 논리학으로 형이상학을 풀어낸 헤겔철학은 ‘태초에 말씀(로고스·논리)이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는 요한의 말을 지식화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존재신학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학적인 것을 힘(〓물질)으로 대체한다 해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 수수께끼는 그대로 남는다.

이 두 책은 법철학의 연원을 살피는 법학도들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일반이 법과 법률의 근원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태의 근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특히 강순전의 첫번째 책은 구절마다 곱씹어보지 않으면 요점을 놓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