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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이정 金夷貞

경북 안동 출생.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 『네 눈물을 믿지 마』,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 등이 있음.

yijeong326@hanmail.net

 

 

 

만유당

 

 

영감댁과 참봉댁 사이 텅 빈 골목을 빠져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시멘트블록 담이다. 흙벽돌을 쌓아 얌전히 기와까지 올린 골목 양쪽의 고가의 담을 지나 느닷없이 맞닥뜨린 시멘트블록 담은 기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자경은 순간 외면이라도 하듯 지나온 골목 사이로 마주한 두채의 고가를 돌아본다.

영감댁이라 불리던 시절, 둘째가 분가하면서 형제끼리 집 안에서 서로를 건너다볼 수 있도록 지었다는 참봉댁은 안채가 남향인데 사랑채는 영감댁을 마주 보는 서향이다. 나지막한 담 너머로 사랑채 누마루가 난간까지 훤히 보인다. 형제는 각자의 사랑채에서 마주 보며 자신들의 선택에 흡족해했겠지만, 어차피 아침이면 모두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집집마다 문안을 다니던 시절인데 굳이 건축양식까지 바꿔가며 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싶은 유난한 우애가 이해되지 않는다. 몇년 전, 무너진 흙담을 새로 쌓고 얹은 참봉댁의 기와가 흠 하나 없이 검게 빛난다. 지은 지 이백년이 넘었지만 오랫동안 폐가처럼 버려져 있던 참봉댁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뒤에야 동네 어느 집보다 번듯하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과시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이 고가의 오래된 나무색과 대비돼 잔디는 더 정결한 연두로 보였고 흙갈색 기둥은 퇴적된 시간의 훈장처럼 빛났다.

그러나 참봉댁의 위엄을 드높이는 것은 무엇보다 집 앞에 세워진 어록비이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그 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한 참봉댁 장손이 1922년 모스끄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남긴 말이었다. 방명록에 썼던 문장의 뒷부분인 ‘공산주의를 희망함’은 비석 뒷면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서훈으로도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그늘이다. 그나마도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참봉댁은 이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자리매김했다.

주차를 해놓은 마을회관 앞에서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골목을 벗어나기까진 채 오분도 걸리지 않는다. 자경은 결국 눈앞의 시멘트블록 담을 마주 보고 만다. 일곱층으로 쌓은 시멘트블록이 기역 자로 꺾여 쓰러져가는 한옥을 건설현장 가림막처럼 두르고 있다. 동네의 제일 뒤에 숨어 있긴 하지만 오래된 한옥마을에 시멘트블록으로 둘러친 담벼락은 누가 봐도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아니, 누가 도대체 이런 미친 짓을 했나.”

답사를 온 사람들 몇이 지나가다 비명을 지르듯 내뱉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동네서 독립운동가가 스물네명이나 나온 걸 기념해 세운 광복공원 덕에 답사를 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가롭게 고가의 골목길을 걷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시멘트블록 담을 마주할 때마다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자경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시멘트의 물기조차 다 마르지 않은 담장을 처음 본 순간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차라리 담이 없는 게 낫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버려진 한옥 마당은 해마다 개망초와 질경이 밭이 돼버렸다. 봄이면 삐죽 올라오는 연둣빛 개망초는 여름이 되기도 전에 한자나 자라서 마당을 빼곡히 메웠다. 흰 꽃들이 가득 핀 마당으로 붉은 노을이 쏟아지는 저녁, 한적한 들판에라도 온 듯 탄성을 터트린 적도 있지만 무너져 내리는 서까래와 한 프레임에 잡히는 무성한 개망초밭은 폐가의 서글픔만 강조할 뿐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행랑채 왼쪽 서까래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십년 전 폭우 이후였다. 자경과 엄마가 서울로 가고 난 뒤 이십년 넘게 살던 순옥이네마저 떠난 후론 수세식 화장실도 안 돼 있는 빈집에 들어와 살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생활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곳에 올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을 비워둔 채 엄마가 일년에 서너번 들르는 게 관리의 전부였다. 전자제품 조립공장 공원으로, 수제 한과와 이바지떡을 만들며 단칸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엄마는 이 집을 팔지 않았다. 시골집이 큰돈은 안 되지만 그래도 단칸방 신세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는 절대 이 집은 팔 수 없다며 기를 쓰고 지켜냈다. 공장의 2교대 근무를 위해 새벽 골목에 발소리를 죽이며 나가는 엄마를 보며 자경은 왜 이 집을 놓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집은 노인의 척추처럼 매일 조금씩 내려앉았다.

“아이고, 어쩌다 이 집 하나 덜렁 남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자경과 함께 온 엄마는 검은 때만 더께를 더하는 집의 마룻장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적막강산이구나.”

한때 북적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허리가 굽어가는 노파와 나이 든 딸만 남은 것일까. 엄마는 기왓장이 깨지고 서까래가 썩어 반쯤 허물어진 행랑채 처마를 바라보며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임시방편으로 덮어놓은 비료포대가 폐가의 분위기를 한층 험하게 만들었다.

“이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참 북적북적했느니라.”

대한제국 시절, 법관양성소를 나와 검사가 되었다는 자경의 외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틀니가 맞지 않아 말이 어눌하던 외증조할머니는 가끔 그날을 회상하곤 했다.

“이 집 짓고 집들이날 집안의 남녀노소 모두 둘러앉아 논 적이 있었느니라. 어른들이 전부 다 모이라 해 이 대청에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둘러앉았는데 큰집 아지뱀이 난데없이 노래를 한자락씩 하자고 하시잖나. 다들 어리둥절했지. 우리가 언제 노래를 해본 적이 있나, 아는 노래가 있나. 너 할배 사 형제분들이 다 계실 땐데 이분들이 먼저 시조창을 한 대목씩 하시더라. 너 할배는 어디서 배웠는지 신식창가를 하더구나. 며느리들은 부끄러워 안 할라캤는데 그날따라 한명도 빠지면 안 된다고 아지뱀이 그러시잖나. 어렵디어려운 시삼촌과 시숙들 앞에서 노래가 안 되면 화전가라도 한마디씩 다 했다. 나도 그때 노들강변을 안 불렀나. 시집오기 전 침모한테서 배운 긴데 소리가 나쁘지 않았는지 너 할배가 당신 몰래 어딜 그리 놀러 다녔냐고 놀맀잖나. 그런 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서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집도 나도 제일 좋던 시절이랬다.”

영감댁의 네 형제 중 셋째였던 외증조할아버지는 결혼하면서 본가의 바로 뒷집으로 분가했는데, 십년 후 이 집을 새로 지어 만유당이라 불렀다.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었던 그는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격랑의 시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그가 상해와 만주, 연해주를 거쳐 이르꾸쯔끄까지 오가는 동안 그와 함께 집안까지 격랑에 휩쓸렸다. 미처 담을 쌓을 새도 없이 주인이 떠난 집은 적막강산이 돼버렸다.

 

삼년 만에 온 집은 많이 달라져 있다. 대문도 없이 덩그러니 둘러친 시멘트 담을 지나 사랑채로 들어선다. 흙이 허물어져 한쪽으로 기우뚱했던 죽담에 시멘트를 바르고 계단까지 반듯하게 만들어놓았다. 시멘트 죽담의 모서리가 날렵하게 꺾여 있다. 한복에 하이힐을 신은 꼴인 사랑채를 자경은 외눈박이처럼 쏘아본다.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가 묘한 수치심을 몰고 온다.

그가 왔다는 소식은 지구 자전이 잠시 멈추는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십오년이나 넘게 부재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떠나왔다는 곳이었다.

“기가 꽉 막히더라. 어떻게 거기서 왔다는 건지, 아니 거기를 갔다는 게 더 믿을 수가 없더라. 무슨 운명이 이렇게 끝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준 건 정보기관이었다. 엄마는 자경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정보기관에 가서 그를 만나고 와서야 자경을 불렀다. 평소 겁 많은 엄마는 이상한 데선 담대하기 짝이 없었다.

“야야, 너 아부지가 왔단다.”

자경은 엄마가 전한 소식보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란 단어가 낯설어 멍하니 엄마를 바라보았다.

“누구?”

아버지란 단어가 주는 생경함과 상상이 되지 않는 그 실체의 모호함에 자경은 되물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가득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정수리가 느닷없이 조여왔다.

“그 사람이 탈북을 했단다.”

순간 지독한 파열음이 들렸다. 아니, 오랫동안 은폐돼 있다가 어느날 불쑥 눈앞에 떨어진 견고한 사슬들의 마찰음 같기도 했다. 탈북이라니, 그가 왜 북에서 왔다는 것인가. 자경은 온몸에 한기가 몰려왔다.

“기가 막히더라. 깎은 옥 같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쪼그라들고 망가졌는지.”

엄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깎은 옥처럼 반듯하고 훤칠했던 사람이 늙고 참혹하게 망가진 것만이 진짜 놀라운 일이라는 투였다.

엄마가 갖고 있는 사진 속 젊은 시절의 그는 누가 보아도 미남이었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짙은 눈썹과 악의라곤 찾기 힘든 순한 눈웃음까지 드물게 좋은 인물이긴 했다. 친구이며 동지였던 양가의 할아버지들이 일찍이 자신의 손녀와 손자를 보증서 교환하듯 한 정혼이었지만 엄마는 초례청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다고 했다.

“옥골선풍이었다.”

그가 왜 북에서 왔다는 것인가. 자경은 엄마의 중얼거림에 아연해졌었다.

 

사랑채 마루를 손으로 쓸어낸다. 제법 매끈한 마룻장에선 윤기가 흐른다. 퇴락해가던 마룻장에 번지는 반짝거림과 생기가 당혹스럽다. 찌든 때가 켜켜이 쌓여 엉덩이를 붙이기도 꺼려졌던 마룻장이 고재의 우아한 회갈색 윤기를 슬며시 드러낸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나뭇결은 탄탄한 근육질 몸처럼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시골로 돌아다니는 고물상들이 빈 한옥의 문짝을 모두 떼어가 길가에서 사랑채 방 안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흙벽은 틈이 벌어지고 천장에서 떨어진 흙과 나뭇조각들이 방 안 한가운데에 쌓여 있었다. 엄마는 속수무책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잠도 자지 않고 바로 올라가곤 했다. 그런 사랑채에 한지까지 말끔히 발린 문 네짝이 모두 제자리에 달려 있다. 끝내 찾지 못한 분합문 두짝만 보이지 않는 마루는 애초에 구조가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다. 삐죽이 내려온 걸쇠 두개가 분합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뿐.

“빈집인 걸 아는 사람들 짓이지. 자물쇠를 뜯고 들어와 문짝은 물론이고 안채 항아리나 솥단지까지 싹 다 가져가버렸잖나. 집 꼬라지가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집을 비워둔 지 삼년이 되던 해, 시제를 지내러 엄마와 함께 왔을 때 맞닥뜨린 도둑맞은 집 꼴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채 문은 물론 안채까지 침입해 반닫이와 부엌의 놋그릇, 무쇠솥까지 모두 떼어가버렸다.

“아이고 반닫이는 할매 보듯 할라꼬 일부러 놔둔 긴데 그것마저 다 가져가뿌리면 어예노, 이 인정머리도 없는 놈들아.”

엄마는 폐가가 된 집을 둘러보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가져왔다는 오동나무 반닫이는 엄마에겐 집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저것이 눈에 밟혀 이 늙은이는 죽을 수도 없다오.”

인사차 찾아오는 친척들 앞에서 할머니는 엄마를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만석꾼 집안 출신이라는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에 이어 며느리까지 떠난 후 하나 남은 손녀를 지키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모두 떠난 집에서 그녀는 스스로 대들보가 되어 굳세게 집과 손녀를 지켰다. 손녀가 어른들의 약속대로 결혼을 하자 사위를 데리고 살기로 한 것도 할머니였다.

“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팔자를 대물림한단 말이냐.”

그러나 손녀의 사내마저 소리도 없이 사라지자 노인은 혼자 된 손녀를 껴안고 벽을 치며 통곡했다. 잃어버린 나라의 법률가로,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남자의 아내였던 여인은 남편과 아들이 사회주의사상의 광풍에 휩쓸려 떠났을 때도 버텨냈지만 손녀사위마저 사라지자 장마철 흙담처럼 무너져버렸다.

 

사라진 사내들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남아서 집을 지켰다. 노인의 며느리이자 자경의 외할머니가 열살 난 딸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노인은 손녀를 딸처럼 키웠다. 식구들이 사라진 집에서 할머니와 손녀는 필사적으로 서로를 지켰다. 95세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엄마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장례 후 엄마는 자경의 손을 잡고 더이상 지킬 게 없는 집을 떠나 서울로 갔다. 말없이 사라진 남편의 편지를 받은 직후였다.

벨깐또 창법의 테너였던 사내는 이딸리아에 가서 성악을 공부하고 싶었다. 대학 성악과 시절부터의 꿈이었지만 그는 국외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전쟁 때 북으로 갔던 고모가 어느날 나타난 게 탈이었다. 그녀를 숨겨주었던 가족들과 고모에게 심부름을 갔던 그는 모두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고, 나라 밖으론 나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 간절히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사내는 그러나 시립합창단 단원도 될 수 없었다. 이 땅 어디서도 붉은 줄이 그어진 신원조회의 덫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날 말없이 집을 떠난 사내는 부산의 부두에서 등짐을 지며 기회를 엿보다 밀항으로 일본에 왔노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꼭 이딸리아로 가서 공부하고 돌아가겠소.’

사내가 편지의 마지막에 쓴 약속이었다.

엄마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약속은 사십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죽은 걸로 알고 있던 자경은 대학 신입생 때 교내시위로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날 엄마에게 어깨를 잡힌 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니는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 친가 외가 할 거 없이 전부 세상을 구한다고 나섰지만 세상은커녕 집안만 다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어쩌자고 그 피가 니한테까지 내려온 건지 모르겠다만 절대로 안 된다. 니는 다른 애들하고 다르다. 잡히가면 니는 고구마줄기처럼 다 나올 끼다. 내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죽은 듯이 살그레이.”

엄마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손목에 말뚝이라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두려움이 실핏줄까지 가득 찬 엄마를 통해 자경이 알게 된 것은 자신과 엄마가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경이 지켜야 할 건 무엇보다 엄마라는 것도.

“밀항을 해보니 일본에서 사는 것도 어렵고 이딸리아는 더 길이 안 보여 북송선을 탔다는구나. 갈 데가 거기밖에 없더란다.”

정보기관에서 그를 만나고 온 엄마는 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엄마도 자경도 그가 있으리라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곳이었다.

그를 만나고 온 후 엄마는 탈진한 채 일주일이나 앓았다. 밥도 먹지 않고 누워서 식은땀과 열을 내뿜으며 소리 내 앓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갑자기 병원에 가서 영양제를 맞고 오더니 집 안을 치우고 그의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침대를 들이고 새 이불을 사고 남자용 잠옷을 사고 그가 좋아했다는 콩가루국수를 만든다며 생콩가루를 빻아왔다. 엄마는 하루하루 몸을 새로 얻은 것처럼 싱싱해졌다. 그런 엄마를 보며 자경은 몹시도 당황했다. 엄마는 마치 사십년 동안 오로지 그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 같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아니 살아 있어도 일본이나 이딸리아 어디일 거라 믿었다. 탈북이라니, 자경은 그가 떠나온 곳이 생각지도 못한 곳이어서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어쩌다 상상을 하곤 했다. 이딸리아의 작은 무대에서 「오 솔레 미오」나 「돌아오라 소렌또로」 따위를 부르고 있거나 어느 허름한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일본의 골목길을 떠돌고 있을 그의 모습을.

“아무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살아 있다면 풍문이라도 어디선가 날아오지 않았겠나.”

엄마는 그의 칠순 생일부터 탕국을 끓이고 전을 부쳐 술 한잔과 함께 식탁에 올렸다. 그런데 그가 닿은 곳이 북이었다니, 자경은 불온한 피의 운명에 전율이 일었다.

 

마당을 둘러친 시멘트블록 담 아래로 노란 돼지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키가 큰 줄기가 며칠 전 비에 쓸린 듯 마당에 몸을 뉘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감나무는 가는 가지에 커다란 대봉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늘어져 있다. 아직 따 먹기엔 이르지만 가을 햇빛에 하루하루 부피를 불리고 색을 덧입는 중이다. 노란 돼지감자꽃과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가 남의 집에 온 듯 낯설다. 지난해부터 엄마가 돼지감자를 먹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돼지감자 달인 물을 보약이라도 마시듯 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이 갔지만 자경은 굳이 묻지 않았고 엄마 역시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경과 엄마는 그가 온 직후의 부딪침에 지쳐 언제부터인지 서로 알은척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듯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뒤늦게 애인이라도 생긴 사람 같았다.

“어떻게 이리 매정할 수가 있나. 아이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애가.”

엄마의 눈물바람에도 불구하고 자경은 돌아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엄마가 못마땅했다. 어떻게 사십여년 세월, 죽은 사람으로 치고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 순식간에 다 허물어질 수 있단 말인가.

“왜 원망이 없겠노. 원망으로 치자면 내가 제일 크지 않겠나. 그래도 보자마자 불쌍한 맘이 더 크더라. 여기서 쫓겨나 거기까지 갔는데 거기서도 못 살아 다시 또 여기까지 떠밀려온 거 생각하면 무슨 인생이 이 모양인가 싶기만 하더라.”

엄마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경 앞에서 눈물바람을 했다. 그러나 자경은 엄마의 눈물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려고 간 것도 아니고 오려고 온 것도 아니라잖나. 다 세월 잘못 만난 탓이지 그 사람 잘못이 뭐 있겠노.”

어떻게 모든 걸 세월 탓으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자경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강경하게 선언했다.

그가 정보기관의 모든 신문과 교육을 받고 나와서 처음 집에 오기로 한 날이었다. 자경은 그것도 모른 채 저주파치료기를 전해주러 엄마에게 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엄마의 집을 뛰쳐나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와 맞닥뜨렸다.

“아이고 야야, 들어가자.”

엄마가 자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경은 손을 뿌리치고 그를 외면한 채 얼른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문 앞으로 다가온,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든 노인이 넋을 잃은 듯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눈이 마주쳤고 칠십대 중반의 나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고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대리석처럼 매끈했던 이마는 구불구불한 밭둑처럼 깊이 패고 듬성듬성 검버섯도 피어 있었다. 자경은 닫힘 버튼을 연속으로 눌렀다. 아파트 앞 주차장을 가로질러 걷는 꼭뒤에 무언가 와서 들러붙는 것 같아 차가 있는 앞 동까지 뛰었다. 엄마 집의 거실창으로 자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그의 시야에서 한시바삐 사라지고 싶었다.

“주옥씨는 따님을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구한 거예요. 언젠가 따님도 엄마를 이해할 날이 오겠죠. 죄책감은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에요. 건강하게 지내야 따님도 만나잖아요.”

탈북민 서주옥과 상담을 하면서 자경은 진심으로 마음이 저렸다. 탈북민들의 사연은 수없이 들어도 면역이 되지 않았다. 열살짜리 딸아이를 두고 홀로 탈북한 여자는 매일 밤 아이 꿈을 꾼다고 했다.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며 아이를 떼어놓고 강을 건넌 여자. 잠자는 아이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급히 빠져나온 집. 낯선 사람을 따라 강을 건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몸값이 붙어 있고 그 돈을 갚는 길은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챈 여자. 결국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팔려 가 낯선 남자의 아내가 돼버린 여자. 중국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지만 불법체류 신세를 벗어날 길 없어 다시 목숨을 걸고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여자 서주옥. 그녀는 늘 중국에 두고 온 세살짜리 아이보단 북에 두고 온 딸 이야기만 했다. 그애는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모를 거예요. 심장이 안 좋아서 방 안에 누워만 지낸다는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눈물바람을 했다. 닭갈빗집에서 일하는 그녀는 자기 손으로 딸에게 닭갈비를 해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집 옆 황소나무뚝을 지키는 느티나무에서 새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듣는 박새소리다. 자경은 삼년 전 엄마와 함께 잠깐 왔다가 반쯤 쌓은 시멘트블록을 본 후 발길을 뚝 끊었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의 고향이었지만 친가 역시 풍비박산이 나버렸으니 자경에겐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고향이었다.

“집을 좀 고쳐보겠다더니 이걸 해놨잖나. 탈북자 동료 한 사람 같이 와서 쌓았다더라.”

엄마는 자경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가 쌓은 시멘트 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무너진 행랑채 지붕과 서까래는 전문기술이 필요한 분야라서 할 수 없이 더이상 무너지지 않게 나무기둥만 받쳐놓았다 했다. 마치 부목을 대 깁스한 다리 같다.

“조금만 더 고치면 여기 와서 살아도 될 것 같잖나.”

엄마는 신혼집이라도 보러 온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환한 얼굴과 달리 자경은 아연했다. 무엇보다 시멘트블록을 쌓아놓은 담 때문이었다.

“집을 다 망쳐놨잖아!”

비명을 지르는 자경에 비해 엄마는 태연했다.

“뭐 어떻나. 담도 없던 집에 이거라도 둘러놓으니 길가에 내놓은 집 같지도 않고 안온하이 좋잖나. 할배가 담 쌓을 새도 없이 집을 떠나셨으이.”

엄마는 노망이라도 난 사람처럼 그에게 너그러웠다. 이해할 수 없는 환대였다.

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선다. 지은 지 백년이 좀 지난 집은 문마다 틀어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낸다.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이룬 문지방에 습기 때문에 하얗게 분이 피어 있다. 백오십년이 넘으면 지방자치단체에서 한옥 수리 지원금을 준다는데 이십년이 모자란 이 집은 곳곳에서 잘못 맞춰진 노파의 뼛조각처럼 자지러지는 소리가 난다. 이삼백년 넘은 한옥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 제일 늦게 지은 집이지만 가장 많이 허물어진 집이기도 했다.

미음 자로 앉은 안채 마당이 지붕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다른 세상처럼 환하다. 대청마루 안까지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문득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의 오후 한때처럼 안온하다.

그날은 더위가 막 가신 초가을 이맘때였다. 흰머리를 한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빗어 은비녀로 쪽을 찐 할머니와 곱슬머리를 커트한 엄마가 마주 앉아 할아버지의 수의와 검은색 남자 양복을 꺼내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할매요, 이렇게 철마다 옷 꺼내 거풍을 시키면 진짜 오실까요?”

젊은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해방 후 돌아온 할아버지는 잠깐 머문 후 다시 새로운 파도에 몸을 싣고 북으로 갔다. 아버지를 따라 아들마저 떠났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수의를 짓기 시작했다. 옷감 욕심이 많은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도 적잖았지만 인편이 있을 때마다 친정에서 보내준 천이 반닫이 가득했다. 손으로 짠 명주 옷감은 잠자리 날개 같았다. 할머니는 향물 들인 비단에 바늘자국도 보이지 않게 곱디고운 수의를 지었다.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어른 수의는 뭐 하러 짓는교?”

동네 친척들이 안쓰러운 얼굴로 할머니에게 물었다.

“미리 해놓으면 오래 산다 안 하나.”

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 할머니가 솜을 두둑이 넣은 한복을 다섯벌이나 만들어 연길까지 다녀온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추운 만주에서 돈이 없어 솜옷을 전당포에 잡히고 얇은 여름옷으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그날부터 솜옷을 다섯벌이나 짓더니 만주에 가야겠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신다 하니껴.”

자신들의 대리인이기도 한 동생을 멀리 보내놓고 돈을 끌어모아 부치고도 오매불망 걱정이 끊이지 않는 시숙들 모두가 말려도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할아버지의 편지가 어쩌다 한번씩 인편을 통해 전해지던 시기였다.

“앞장서라.”

끝내 아들을 앞세워 만주까지 간 할머니는 한달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돌아왔다. 그때 처음 버스를 타면서 할머니가 신발을 밖에 가지런히 벗어두고 차에 올랐다는 일화도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였다. 가마를 타던 버릇이었다.

“어디 있든동 옷이라도 티 없이 간수하면 잘 지내지 않겠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옷을 거풍할 때마다 엄마도 양복 한벌을 같이 내왔다. 대청 뒷문까지 다 열어 바람길을 낸 다음 할아버지의 수의와 그의 검은 양복을 대나무옷걸이에 차례대로 걸었다. 수의는 모두 세벌씩 하는 거라서 할아버지의 옷은 가짓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까지 담는 색색의 고운 주머니 오낭, 저승사자들에게 줄 정성이라며 명주수건까지 수십개씩이나 만든 수의는 꺼내놓는 데만도 긴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황금색 안동포로 지은 도포를 거풍시키는 것으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다. 할머니가 삼십년 동안 하나씩 만든 수의였다. 두 여인에겐 부적 같은 옷들이었다.

95세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할머니가 직접 만든 할아버지의 옷들을 할머니의 수의로 입혔다.

“남자 수의를 여자한테 입히는 법이 어디 있노.”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엄마는 굽히지 않았다.

“세상 어떤 옷이 이보다 곱고 정성스럽겠니껴. 옷 주인인 할배 아니면 이 옷 입을 자격은 할매밖에 아무도 없니더.”

어떤 일보다 장례에 엄격한 집안이나 누구도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린 자경은 남자 수의를 입고 떠나는 할머니가 장군으로 환생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자경은 대청마루에 올라간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정리가 더 잘 돼 있다. 마룻장은 검은 때가 말끔히 벗겨지고 기름병이라도 쏟은 듯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미음 자로 맞물린 지붕 위로 초가을 햇살이 기왓장 속을 파고든다. 한때 온갖 풀씨가 날아와 풀들이 덤불을 이루며 무성했던 지붕.

“풀밭 같던 지붕이 정말 말끔해졌더라. 풀 때문에 지붕 다 무너진다 걱정 안 했나. 지붕에 올라가 와송만 남기고 다 뽑아버렸더라. 면역력에 좋다고 소문난 거라 그냥 놔뒀단다. 거기서 사는 동안 민간요법에 훤해졌더라.”

기와 위에 드문드문 소나무 가지처럼 솟은 것들이 와송인 모양이다. 사십년 세월은 벨깐또 성악가를 집수리 기사로, 민간요법 치료사로 만들기도 했다. 엄마는 자경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그의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나 자경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이야기도, 그와 마주치는 것도 극구 피했다. 엄마에게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미리 연락해 그가 자리를 피하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만났다.

“지독하기도 하다. 애비한테.”

엄마는 자경을 달래다 지치면 화를 냈다.

“거기 갔으면 거기서 잘 살 것이지 왜 또 여기로 와요? 거기에 아들도 있다면서.”

자경은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그를 생각하면 그곳에 남아 있다는 모자, 대학생이라는 아들과 도서관 사서라는 새 아내가 먼저 떠올랐다. 그의 이탈로 인해 그들은 또 어떤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가. 자경은 두번씩이나 가족을 두고 떠난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오려고 온 게 아니라고 했잖나. 중국에 나갔다가 돌아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로 온 거라고. 그 사람들 생각하면 마음 저린 게 너만 그런 줄 아나.”

그 사정은 누구보다 자경이 잘 알았다. 자경이 만난 대부분의 탈북민들도 비슷했다. 중국에 가서 노동을 하려고 혹은 보따리장사를 위해 강을 건넜다가 돌아가지 못해 결국 이곳으로 왔다. 처음부터 이곳을 목적으로 탈출한 경우가 오히려 드문 듯했다. 중국에 있자니 신분이 불안정해 인신매매의 타깃이 되거나 이미 팔려 간 집에서도 공안이 무서워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결국 목숨을 걸고 다시 제3국을 경유해 이곳으로 왔다.

자경의 상담소에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 친구 미연이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만난 탈북민 한명을 상담해달라고 부탁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이곳에 왔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뿐더러 이용당하기 일쑤고, 무시당하고 때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들. 그런데 그 속에 그가 쌀독의 뉘처럼 섞여 있었다. 하필이면 그가.

대청에서 마주 보이는 기와엔 이끼들이 버짐처럼 피어 있다. 남향으로 들어앉아 볕이 넉넉잖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기와는 자경과 엄마가 떠나고부터 이끼가 돋기 시작했다. 아니, 이 집의 사내들이 집을 떠난 후부터인지도 몰랐다. 사람 입김이 지붕 위까지 전해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해마다 이끼를 더하는 지붕을 볼 때마다 자경은 집이 살아 있는 생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 덧대어 지은 건물의 시멘트 벽면이 이물스럽다. 의젓한 한옥 건물에 하얀 섀시 창까지 달린 시멘트 건물이 붙어 있으니 생뚱맞기만 하다. 그가 동료와 함께 만들었다는 주방과 화장실인 모양이다. 안방엔 기름보일러도 깔아 이제 겨울에도 갈 수 있다고 엄마는 좋아했다. 자경은 차마 그 시멘트 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흙벽은 못할망정 황토색 페인트라도 바를 것이지 어떻게 저런 형편없는 미감을 가졌단 말인가. 실용성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시멘트 벽과 블록 담이 자경은 여전히 용납되지 않았다.

“북한식인 모양이지?”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빈정거리던 말을 들었다고 엄마가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오래된 한옥마을에서 유일하게 시멘트블록으로 담을 쌓아 분위기를 망쳐놓고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한옥 수리 전문가를 불러 견적도 내봤잖나. 제대로 수리하려면 집 새로 짓는 게 훨씬 낫다고 니도 안 들었나. 임시방편이라도 이렇게 해놓으니 좋기만 하구마. 집이 사람 거처하기 편하면 됐지 뭘 그리 까다롭게 구노.”

엄마는 입식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로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정작 엄마가 아니라 그였다.

“엄마, 갈비 재워서 내일 갈게.”

자경은 늘 하루이틀 전에 방문 날을 미리 알렸다.

“갈비는 뭐 하러 하노. 그냥 밖에서 갈비탕이나 한그릇 먹으면 되지.”

엄마는 방문을 막아보려 했지만 자경은 굳이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못된 년 같으니라고.”

엄마는 그때마다 눈을 흘기며 말끝을 흐렸다.

이 집은 자경이 엄마에게 갈 때마다 그의 피난처가 되었다. 처음 느닷없이 그를 만난 이후 자경은 반드시 엄마에게 미리 전화를 했다. 처음엔 자경이 간다고 할 때마다 그는 동료 탈북인의 임대아파트로 가서 하루이틀 지내다 오곤 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되면서 그것도 미안해진 그는 언제부터인가 이곳으로 내려왔다. 작은방 하나를 치워 거처하다가 하나둘 손을 보기 시작하더니 결국 본격적으로 집수리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자경을 피해 와 기와의 잡초를 뽑고 시멘트블록 담을 쌓고 재래식 부엌을 고치고 수세식 변기를 들였다. 때로 자경은 일부러 엄마 집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다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안방에 들어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사흘 더 있다 오소.”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그애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니까. 내가 죄인인걸.”

한번은 엄마가 켜둔 스피커폰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상도 말씨에 북의 억양이 섞인 투박한 말투였다. 긁히고 닳고 쉬어 화려한 기교로 악기와 겨룬다는 벨깐또 창법이 도저히 연상되지 않았다. 엄마는 스피커폰을 일부러 켜두었지만 자경은 모른 척했다.

 

그런데 그가 쓰러졌다고 했다.

“자경아, 이 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배를 잡고 뒹군다. 저녁 생각이 없다면서 소파에 눕더니 갑자기 이러니 우야믄 좋노.”

자경의 전화기에 녹음된 엄마의 음성은 불안하고 다급했다. 엄마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며 전화를 끊었다.

자경은 원주 근교에서 미디어플랫폼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일박 이일 집단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화기를 꺼놓은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자경이 전화를 받지 않자 엄마는 자경의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그가 119에 신고한 후 병원으로 달려갔다.

위암 4기라고 했다.

“선고받은 지 두달이나 됐다는데 장인어른이 아무한테도 말씀을 안 하셨나봐. 통증이 심하셨을 텐데 진통제로 버티신 모양이야. 지독한 양반…… 장모님께는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어.”

좀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는 남편의 목소리에 물기가 흠뻑 배어 있었다.

아침 첫 프로그램이 끝나자 자경은 두명의 직원들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리조트를 빠져나왔다. 엄마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에게 가봐야 하는 것인가, 자경은 가을 안개가 자욱한 리조트를 벗어나며 혼란에 휩싸였다. 문막 IC에서 하이패스를 통과하고 막 서울 방향 진입로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자경은 갑자기 핸들을 반대편으로 틀었다. 원주 방향으로 들어선 차는 다시 만종으로 접어들었다. 그가 있는 서울의 병원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경은 쉬지 않고 달려 서안동 IC로 빠져나왔다. 안개가 퇴각하듯 소리 없이 밀려가고 있었다. 동네 입구에 늘어선 아홉그루의 늙은 느티나무에서 노랗게 물든 이파리 하나가 자동차 유리 위로 고요히 낙하했다. 추수기에 접어든 벼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샛노랗게 빛났다. 죽음을 떠올리기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유난히 안개가 많은 마을이었다. 어릴 적, 아침이면 장막처럼 드리운 안개 사이로 영감댁의 날렵하게 솟은 기와지붕과 참봉댁의 흙담이 환영처럼 보이곤 했다. 그즈음이면 종가로 난 골목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안개 자욱한 마을에서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집집마다 들러 유령처럼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 유난히 사라진 사람이 많은 동네여서 안부 인사가 그토록 중요했던 걸까.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까진 자경의 집도 아침 문안 행렬에서 빠지지 않았다. 빈 사랑채를 지나 바로 안채로 들어와 헛기침으로 방문을 알리던, 안개 낀 아침의 남은 자들. 그 안개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지워진 발자국은 오랫동안 금기로 봉인돼 있었다. 그들을 세상 밖으로 부른 게 무엇이었을까. 자경은 깊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화장실 위로 살짝 드러난 푸른색 경사면이 유난히 눈에 거슬린다. 자경은 발끝을 들어 푸른색의 정체를 쫓는다. 새로 들인 화장실의 지붕인 모양이다. 가린다고 가렸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코발트블루의 선명한 색채. 온통 무채색 일색인 기와집 사이에서 쨍한 푸른색을 칠한 무신경에 다시 화가 난다. 흙손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벽면 모서리와 기둥까지 덧칠된 시멘트도 눈엣가시 같다. 그나마 기둥을 살려 덧칠된 주방에 비해 화장실의 시멘트 벽면은 생경한 이물감을 지나치게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누가 봐도 한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본채에 겨우 붙어 있는 시멘트 건물은 마치 온몸을 웅크린 채 홀로 떠 있는 작은 섬 같다. 자경은 문득 그를 떠올린다. 쫓겨나고 떠밀려와 간신히 몸을 걸치고 있는 존재, 그는 이미 난파선인지도 몰랐다. 산산이 부서진 채 물 위를 부유하는.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면서 햇살이 빠르게 지나간다. 햇살이 지나간 푸른 지붕 위에 곧 그늘이 드리운다. 섬이 다시 바다로 나아가려 몸을 뒤척이는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박자박 물이 차오른다. 흔들림이 점점 거세진다. 자경은 떠나가는 섬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벌떡 일어난다. 손을 뻗어 휴대폰과 차 열쇠를 챙기고 서둘러 중문을 잠근다. 차가 있는 마을회관을 향해 달리는 자경의 다급한 발소리가 시멘트 담을 두른 골목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