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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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서련 朴曙孌

1989년 강원 철원 출생. 201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호르몬이 그랬어』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등이 있음.

hugmedarling@naver.com

 

 

 

나, 나, 마들렌

 

 

나는 목이 잘려 죽는다. 언젠가. 오늘은 아닌 미래에. 멀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사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감각한다. 마치 이미 나 자신이 목 잘려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또 그 꿈 꿨어

라고 말하려고 했다. 잠에서 깨어나 막 머리가 목에 잘 붙어 있다는 게, 그래서 목소리가 목을 지나 입으로 새어나갈 수 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목 잘리는 꿈을 자주 꾼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지. 나는 어릴 때부터 참수몽을 꿨다. 목이 잘리면 키가 컸다. 성장이 멈춘 후에도 수백번 머리를 잃었다. 마들렌은 내가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다지 특이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내가 꿈만은 조금 색다른 걸 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잠이 덜 깬 머리는 간신히 마들렌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마들렌은 교대역 근처 친구네 집에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변호사 사무실에 갈 예정이었다.

차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내 팔에 닿아 있는 이 미지근한 건, 누구 살이지……

전날 밤 나는 분명 혼자 누웠다. 무척 피곤했기에 맑은 정신으로 누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술은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내겐 실수를 저지를 만큼 가까우면서 물리적으로도 가까이에 사는 지인이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넬 만한 담력도 없다. 혹시 마들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와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린 나는 나와 동시에, 같은 속도로 내 쪽을 쳐다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듯이. 거울을 향해 돌아눕듯이.

소리를 지를 뻔했을 때, 상대방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나도 상대방의 입을 막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쪽도 나와 똑같은 크기로 눈을 키웠다. 내가 옆사람 입에 대고 있던 손을 가져오자 내 입도 자유를 되찾았다. 나는 자유로워진 입으로 누구세요 묻는 대신, 되찾아온 손으로 뺨을 힘껏 내리쳤다.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나와 똑같은 손으로 후려친 다음 아파하면서, 동시에 나처럼 놀라고 불안해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존재가 꿈이 아니었다.

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아무리 형설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도 이미 그것을 상상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또 정확히 이런 상황을 예견한 건 아닐지라도. 프란츠 카프카 식으로 말하기: 어느날 아침 목 잘리는 꿈에서 깨어난 나는 자신이 침대에서 두개의 몸으로 분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마르셀 에메를 인용하기: 그녀는 동시에 도처에 공재 가능했다. 즉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여럿으로 불어나게 할 수 있으며 원하는 장소들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나와 나는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는 평평한 자세로 누웠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고 소용도 없었다. 나와 나는 둘 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이런 일이 생긴 지금 마들렌은 집에 없다는 것. 나와 나는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의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았고 완전히 일치하는 반응을 동시에 했으며 따라서 그게 생김새만 닮은 타인이라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나는 나였고 나도 나였다. 나는 맞은편의 내가 스스로를 원본이라 여기는 듯한 기색이 불쾌했고, 그쪽 나도 이쪽 나에 대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복수의 1인칭이기 때문에 나와 나의 집합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은 일어나기로 했다. 무언의 합의를 통해 우리는 소모적인 감정 다툼, 예를 들어 어느 쪽이 원본인지나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책임 소재 따지기 등을 생략하고 일단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을 우선하기로 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마침 잘됐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당장 가야 할 곳이 두군데 있었고, 몸이 둘이 아니고서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내가 출근을 할게. 너는 법원에 가.

동시에 말한 후에 우리는 둘 다 놀랐다. 내가 이렇게나 자진해서 출근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으니까. 할 수 없지, 그럼 법원에는 내가 갈게. 내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둘 다 나인데 둘 중 누가 더 껄끄러운 곳에 갈 것인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건 조금도 의미가 없었고, 우리 둘 다 이런 상황이 처음임에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알았어, 수고해. 빠르고 원만한 합의에 도달한 우리는 차례대로 씻고 옷을 입었다. 정장을 옷장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따로 귀띔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알아서 잘 찾아 입고 나갔다. 공판 방청을 하려면 아홉시 반까지 법원에 가야 했다.

 

마들렌은 나의 과자친구. 나는 마들렌의 감자친구. 어느날 마들렌은 이제부터 여자친구 대신 과자친구라 불러달라고 말했고, 자기도 나를 여자친구 대신 감자친구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는 왜 귀엽게 과자친구고 나는 왜 텁텁하게 감자친구인가? 나는 듣자마자 느낀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알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제과공장에 다니고 너는 강원도 출신이니까. 물어보지 않았지만 마들렌은 이유를 알려주었고 물론 나는 그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었다. 우리 집은 농사 안 짓는데? 굳이 마들렌에게 그걸 상기시키지는 않았지만.

과자친구로도 여자친구로도 마들렌은 나의 첫번째다. 종종 나는 아무래도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실제로 여자와 사귀어본 것은 서른을 갓 넘어서가 처음이었다. 반면 나보다 네살이나 아래인 마들렌은 같이 살아본 여자 중에서도 내가 세번째라고 했다. 여자끼리 사귀면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도 같이 사는 게 자연스럽다는 게 마들렌의 주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구두로 같이 살기로 한 적은 없는데 언젠가부터 마들렌이 집에 가지 않기 시작했고, 마들렌의 짐이 우리 집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엄벙덤벙 같이 사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니 돌아가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모질지 못했고, 본인이 인정했으니까 말이지만 마들렌은 아무래도 염치가 좀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그래서 귀엽지?라고 마들렌이 물을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들렌은 정말 귀여운 과자친구니까.

나와 마들렌은 소설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 둘 다 무척 좋아하던 소설가가 지방대학 강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오랜만에 다시 연 사설 강의였다. 선착순으로 수강생 여덟명을 받는 수업에 열일곱명이 몰려들었다. 나를 비롯해 운 좋게 커트라인에 든 여덟명의 수강생이 모인 첫주 강의에서 소설가는 이런 말을 했다: 진지하게 소설 쓸 사람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인스타 작가, 웹소설 작가 잘나간단 얘기만 듣고 나도 투잡 한번 해볼까 하는 분들은 제 강의가 맞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과연 치열하게 쓰고 냉정하게 고칠 수 있는 사람인가? 소설가의 말이 마음을 움직여서든 재수가 없다고 생각해서든 두명이 수강료를 환불받아 갔고 두번째 주에는 예비 순번을 받아두었던 새로운 수강생 두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마들렌이었다.

나 언니네 집에 가면 안 돼요?

마지막 12주차 강의가 끝나던 날에는 뒤풀이가 있었다. 2차로 옮긴 술자리 중간쯤, 토할 것 같다는 마들렌을 화장실로 데려다주었더니 마들렌이 그렇게 말했다. 한참 토하고 나와서 입을 헹군 다음, 창백하고 물에 젖어 애처로운 얼굴로.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들렌의 감자친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여러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 자주 상상했다. 마들렌을 화장실까지 부축해준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2차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길 때 내가 마들렌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1차 끝나고 적당히 인사한 다음 빠져나오려던 결심을 실천에 옮겼더라면.

그랬다면 법원에 올 일도 없었을까?

정문에서부터 이를 악물고 달려 법원 본관인가 하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정확히 30분으로부터 몇초가량이 지나 있었다. 마들렌이 말한 시간보다 조금 늦어서, 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이중으로 마음 졸이며 일행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쪽이야 이쪽. 잠시 헤매다 나를 향해 손 흔드는 마들렌을 발견했다. 마들렌의 변호사는 내 또래로 보였고 나머지 일행 셋은 나보다 조금 어린 듯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전부 방청객이야? 다른 사건 때문에 왔을 거예요, 큰 사건은 방청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추첨으로 방청권을 배부하거든요. 변호사가 대답했다. 우리 사건은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거네. 일행 중 하나가 말했다. 시무룩해진 마들렌에게는 미안하지만 터무니없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건이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중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중요한 건 이기는 거죠. 변호사는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 사건인지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지만.

 

그즈음, 출근을 선택한 나는 사표 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출근 태그를 찍으면서까지는 오늘 연차를 쓰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차를 쓰기에는 너무 바쁜 시기였고, 물론 바쁘든 말든 회사를 빠질 구실은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과자친구의 재판은 좋은 일도 아니고 연차 사유로 적절하지도 못했다. 무슨 회사가 그래? 개인 사유라고 쓰면 되잖아. 마들렌은 섭섭해했고 나는 난처했다. 회사 다녀보면 안 그래, 사유란에는 그렇게 쓴다 쳐도 제출할 때 꼭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물어본단 말이야.

그럼 거짓말하면 되잖아.

나 거짓말 못하는 거 알잖아.

조금도 못해? 그냥 친구 재판 방청이라고 해, 과자친구 재판이 아니라.

세상에 누가 그냥 친구 때문에 회사를 빠져.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냥 연차를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과도하게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 회사 사람들의 중평이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마들렌은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자기는 재판 전날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연차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갈등은 재판 전날까지 줄곧 이어졌고, 밤 열한시가 넘어서야 파주에서 서울로 나오는 차에 몸을 실은 채 나는 어떤 각오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들렌이 나와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일 연차를 쓸 수 없겠다. 쓰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들렌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재판 전날 나는 회사에서 에어캡 봉투 천장에 택배 송장 스티커 천장을 붙이고 거기에 책 천권을 담았다. 물론 정규 근무시간 이후부터였고 우리 회사는 야근수당을 따로 쳐주지 않는다. 너무 영세해서. 영세한 우리 회사는 일전에 이십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기획도서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내서 꽤 재미를 본 이후 자꾸 비슷한 방법으로 책을 팔려고 들었다. 예약판매 방식으로 1쇄 물량을 한방에 소화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그 물류를 관리하고 발송하는 건 당연히 직급이 낮은 편집자와 마케터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우리 출판사 같은 곳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듯했던 스타 작가가 사장의 친구라 원고도 주고 친필 사인도 천부나 해주었고, 나는 그 책을 편집한 죄로, 마케터는 그걸 펀딩 사이트에 올린 죄로 지문이 닳도록 스티커를 떼고 붙여야 했다. 다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손 많이 가는 일은 어제 다 했으니까 이제 안심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와 마케터는 출근하자마자 회사에서 공동으로 쓰는 카트에 전날 포장한 책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요. 뭐 좀 깔고 해요. 나는 내 자리로 달려가 담요를 가져왔다. 더러워질 텐데요. 마케터는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요, 지난번 펀딩 때 봉투가 더럽다는 항의전화가 온 적이 있어서요. 마케터는 아, 하고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쌓아두었던 책 봉투를 치워주었다. 끈끈한 테이프 자국을 비롯해 여러 정체불명 오염물질이 묻어 있던 카트에 폴리에스테르 백 퍼센트인 파란색 체크무늬 담요를 완전히 덮고 그 위에 책을 쌓았다. 나와 마케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회사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계단으로 책 천권 나르기는 얼마나 고되고 개같았을까. 1층 현관 앞에서 택배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 계단 옆 경사로를 조심조심 구르던 카트는 비포장 바닥에 진입하면서 잠시 멈추었다. 이게 왜 이러지. 마케터는 당겼고 나는 밀었다. 그러자 담요 자락이 카트 바퀴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카트가 크게 휘청거렸고,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책 봉투가 땅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하필 바닥은 질었고 하필 담요는 책 봉투를 보호하지 못하는 방향으로만 흘러내려 있었다.

루쉰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하나의 종착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자기도 바쁜 사람이라고 택배기사는 화를 냈다. 죄송합니다.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흙탕물이 튄 책 봉투는 백개가 조금 넘었고 훼손된 봉투에 붙은 주소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다시 송장을 출력한 다음 새 봉투에 붙이는 데는 한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오전 중으로 발송하지 못하면 배송일자가 밀릴 텐데. 그러면 문의전화 항의전화 장난 아니게 올 텐데. 택배기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이 모든 일을 뒤로한 채 사표나 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슬그머니 솟아오른 내면의 항의도 있었다: 연차에도 그렇게 벌벌 떨면서 사표는 쉬울 것 같아? 그게 나 자신의 생각인지 내게 깃든 마들렌의 목소리인지 헷갈렸다.

대조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법원에 간 내가 마주한 분명한 당혹이었다. 법원에 간 나 역시 회사에서 내가 곱씹는 사표 생각을 함께하고 있었다. 큰 충돌이나 모순 없이 나와 나는 모든 경험과 감각을 공유했다. 먼 곳에서 나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침울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

 

재판에 대해서라면 나는 단 하나의 사례를 기억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머니의 장례식 날 슬펐습니까? 아니, 울었습니까,였나. 까뮈의 주인공은 외국인, 즉 이방인을 죽여서 기소되지만 수사관들과 법관들은 왜 어머니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를 묻는다. 이 소설 이후 내 의식 속의 상상된 법정은 그리스 비극의 공연장 같은 형태가 되었다. 코러스: 유죄, 유죄, 유죄. 혹은 길티, 길티, 길티. 단조 3화음. 당연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정도 상상과 비슷하다고 느낀 부분은 판사가 입장할 때 법정 내 전원이 기립해야 했던 것, 우르르 일어나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일제히 낸 부산한 소음 같은 것. 나는 끝나면 간식을 준다는 꾐에 넘어가 억지로 교회에 간 아이처럼 산만했다. 마들렌은 그 일에 대해 내가 알기를 원했으나 나는 마들렌이 겪은 일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인신문으로 마들렌이 호출되었다. 마들렌은 내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으며 나갔다.

이제 내가 정확히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마들렌의 감자친구와 나의 과자친구, 우리 둘 다 좋아하던 소설가가 마들렌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일.

마들렌은 눈에 띄는 수강생이었다. 소설가는 마들렌이 과제로 써온 꽁뜨 과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기성작가도 배울 점이 있는 훌륭한 글입니다. 어쩌면 기성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신선한 방향성을 견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소설가는 우리 중 정말로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가 마들렌밖에 없는 것처럼 말했다. 장차 실제로 동료 작가가 될 사람이라 여겼다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물론 내가 마들렌에게 느낀 최초의 감정은 시기심이었다. 좋겠다. 나도 선생님한테 칭찬받으면 좋겠다. 수업시간은 두시간으로 공지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시간, 네시간씩 이어졌고, 때문에 중간에 십오분에서 이십분 정도는 쉬어갔다. 소설가는 마들렌을 비롯해 서너명의 수강생과 함께 나갔다가 호호깔깔 웃으며 돌아오곤 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불 냄새를 맡으면서 매번 생각했다, 나도 담배를 배울까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설가에게서 칭찬을 들은 것은 7주차, 꿈을 소재로 한 꽁뜨를 발표했을 때였다. 문학에서 꿈을 사용하는 건 지금부터 치트키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이상 또는 의외의 효과를 반드시 발생시킬 자신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는 것이 좋겠죠? 자, 이 작품을 보세요. 목 잘린 인물이 자신의 독립된 머리와 대화하며 모종의 모성애를 느끼고 있지요. 기이한 장면을 흥분하지 않고 묘사한 것 또한 이 작품이 지닌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듯 이야기꾼이 먼저 흥분해버리면 청중은 오히려 흥미가 가라앉기 때문에……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나와 마들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어 내 위치에선 소설가와 반쯤 겹쳐 보이던 마들렌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귀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를 돌아본 것은. 마들렌이 내게 말을 건넨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소설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아, 네, 고마워요. 언니 소설……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언니 소설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마들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내가 가져간 꽁뜨는 내가 언젠가 실제로 꿨던 꿈과 같은 내용이었고 따라서 소설가의 칭찬처럼 분방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감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본 것을 봤다고 말하는 증언에 가까웠다. 아니에요, 무슨. 언니 소설은 비문도 없고. 그건 제가 편집자라서. 아, 그러셨구나. 역시 업계인이셨구나. 언니는 역시 소설, 진지하게 쓰고 계신 거죠?

그런 질문은 사건을 피해당사자의 책임으로 여기는 2차 가해에 해당합니다.

마들렌의 일행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항의했다. 소설가의 변호사가 마들렌에게 소설가가 강사로서 한 칭찬을 언어적 희롱으로 여긴 이유를 묻고 있었다. 판사는 그에게 경고를 주고 재판을 속행한다고 선언했다. 왜 마들렌의 친구가 경고를 듣고 있는 거지? 소설가의 변호사가 아니라. 나는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소설가는 몰라보게 핼쑥했고 추위를 타듯 몸을 팔로 감싸고 있었다. 나와 마들렌이 수업을 듣던 때의 그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꿈이었나 싶을 만큼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는 잠깐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실에서는 그 자신이 재판장인 양 당당했는데. 이 작품은 유죄, 못 썼으니까. 이 작품은 무혐의, 아무 흠잡을 곳이 없으니까.

역시 몸이 예뻐서 소설도 예쁘게 쓴다고 했어요.

마들렌이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 증언은 내가 그때 마들렌을 얼마나 심하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는가와 또 얼마나 소설가를 동경하고 추앙했는가를 떠올리게 했다. 만약 소설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그것을 희롱이라 받아들였을까? 소설가가 만진 게 마들렌이 아니라 나였어도 나는 마들렌의 감자친구가 되려고 했을까?

불경한 생각은 삽시간에 온 정신을 살라 먹었다.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이 소설가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만 같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법정에 오기가 싫었던 것은, 내가 이러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내가 누설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내 생각을 알 수 없음을 떠올렸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펀딩 물량 배송을 마친 나는 퇴근하고 곧장 피씨방에 갔다. 그대로 집에 갔다간 마들렌에게 왜 집에 있는 내가 또 돌아오는지를 설명해야 할 테니까. 법정에 갔던 나는 마들렌, 변호사, 마들렌의 연대인들하고 버섯전골을 먹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간 참이었다.

어? 언니 야상 어디 갔어? 나 입고 나가려고 했는데. 마들렌이 옷방에서 목소리 높여 물었다. 아…… 아마 세탁소 맡겼을걸? 맡겼어, 응. 마들렌은 이윽고 YOU NEVER KNOW라는 문구가 새겨진 후드 원피스를 입고 옷방에서 나왔다. 그것도 내 옷이었다. 그게 드라이해야 되는 옷이었나? 마들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주 빠는 옷은 아니니까 아무래도. 나는 옹색하게 둘러댔다.

마들렌이 나가고 오분쯤 지나 피씨방으로 퇴근했던 내가 집에 돌아왔다. 내가 샤워하기 시작하자 집에서 기다리던 나는 내가 벗어놓은 옷가지 중 마들렌이 찾던 야상점퍼를 건져 들고 세탁소에 갔다. 세탁소 사장님은 군말 없이 면 백 퍼센트 빈티지 의류인 야상점퍼를 드라이클리닝으로 접수했고 나는 그 길로 찜질방에 갔다. 마들렌은 자정 무렵 적당히 취한 채로 돌아와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잤다. 그 시각 또다른 나는 찜질방 수면실에 있었고 등이 배겨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계속 그런 식으로 지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출근했다가 퇴근은 찜질방, 피씨방, 모텔 중 한곳으로 하고 전날 출근했던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더운물로 씻고 편한 침대에서 자는 식. 마들렌은 당장 하는 일이 없어서 낮에도 집에 있을 때가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출근을 안 하는 나도 입은 입이라 하루에 두끼는 먹어야 했고 그걸 집에서 해결하지도 못하니 먹는 만큼 정직하게 지출이 났다. 사실상 나는 3인가구의 가장이었고 매일 1인분 식비와 숙박비가 고정지출분에 추가된 셈이었다.

안 되겠다, 외주 편집 원고를 늘리자. 나는 노트북을 들고 24시 무인 까페로 퇴근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외주계의 전설이 되는 거 아냐? 투잡으로 억대 연봉 찍는 거 아냐? 몸이 두개인 사람으로서 그리 막연하지만은 않은 상상 같았지만, 하루걸러 하루씩만 내 방 내 침대에서 자는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원고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나는 낮이고 밤이고 늘 흥건하게 피곤에 젖어 있었다. 언니 요즘 왜 그래? 마들렌이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너 때문이야라고 생각했다. 그걸 입 밖으로 낼 만큼 피곤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얘는 왜 일을 안 하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얘는 왜 집에 안 가지?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년을 사귀고 그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같이 살아온 사람치고는 새삼스럽게도. 곧 계절은 완연한 겨울에 접어들 것이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무인 까페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피씨방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을 때마다 무릎이 시려왔다. 더 추워지면 이런 식으로는 버틸 수가 없을 텐데. 반(半)노숙자인 채로 겨울을 나기에 나는 너무 나약한 인간이었다.

마들렌은 독립잡지에 글을 싣거나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모델을 서며 소소한 벌이를 했고 그런 보수를 받을 때마다 내게 거창하고 맛있는 것을 사주곤 했다. 나는 당연히 돈으로 직접 받는 쪽을 선호했다. 먹고 싸고 물 데우는 비용은 그렇다 치고 전세대출 이자라도 거들어주면 좀 좋아. 마들렌이 먼저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나는 가끔 마들렌에게 용돈도 주고 있었다. 친구들과 술 마실 때 얼굴 붉히지 않고 엔빵은 할 수 있게끔. 감자친구인 나에게서 용돈을 타 쓸 만큼 경제적으로 무능한 나의 과자친구가 소송비용은, 변호사 수임료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감당할 계획은 있는지가 내게는 크나큰 수수께끼였다. 부모님이 부담하게 되어 있는 걸까? 제과공장에 다니는 어머니가? 한두번을 빼고는 마들렌이 잠꼬대로도 언급한 적 없는 사람이?

나 중에 하나는 여권을 들고 다녔다. 주민등록증을 쓰는 내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지만 등록상으로는 한 존재다보니 법정신분증을 하나씩 지니고 다녀야 했다. 이참에 킬러 같은 걸로 전업해볼까? 목표물을 처리한 다음 손쉽게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는 나에게는 살인청부업이야말로 천직이 아닐까? 어느날 나는 나보다 먼저 잠든 마들렌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 얘를 죽이고 싶나? 두개의 나는 서로 멀리 떨어진 채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현듯 들었던 그 생각을 뒤밟으며 다시 불현듯 나는 반성했다.

얘를 미워하는 건 왜 이렇게 쉬울까?

마들렌과 나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비슷한 대화라면 가끔. 이런 식이다: 나 사랑해? 보통 마들렌이 먼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응. 때로 마들렌이 한마디를 덧붙이기도 한다: 나도. 늘상 주고받는 대화는 아니고, 전혀 주고받지 않는 대화 또한 아니다. 나는 마들렌을 그냥 사랑한다기보다,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를 미워하기는 마들렌을 미워하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일단 소설가는 나에게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소설가는 몰랐겠지만 또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가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 그를 학과 특강에 초청한 이후 줄곧 휴대전화 번호와 연동된 메신저에서 그의 프로필이 변화하는 양상을 지켜봐왔다. 계절은 고사하고 반년에 한번 바뀔까 말까 한 프로필인데다 얼굴 사진인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은 눌러서 확대해보았다. 말을 걸 것도 아니면서. 이런 내가 조금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 태도가 마들렌에 대한 마음보다 사랑에 좀더 가까울 수도 있겠지. 마들렌이 소설가를 고소할 거라는 뜻을 처음 밝혔을 때에도 나는 바로 이 지점을 떠올렸다. 그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아주 가까운 태도에 불과했지만, 대략 이년 가까이 살 맞대고 함께 산 과자친구에게보다 그에게 더 친밀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소설가를 미워하려고 노력했다. 노력을 통해서만 소설가를 미워할 수 있었다. 그가 마들렌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한편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내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어느 새벽 나와 마들렌이 심야영화를 보고 돌아와 현실과 영화 내용과 꿈의 경계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언니, 나는 이제…… 소설 같은 건 못 쓸 것 같아. 감자만 한 내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마들렌은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왜? 쓰고 싶지 않으니까…… 내 손 역시 마들렌만 한 마들렌의 가슴을 별 욕정 없이 문지르는 중이었다. 나에게 너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나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나는 그 밧줄을 잡고 기어이 여기서 탈출했을 거야. 그르륵 하고 코를 먹는 건지 고는 건지 헷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들렌에게 그건 걷잡을 수 없는 잠에 저항하면서까지 들을 가치가 있는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바로 잠들지 못했다. 나는 소설가의 애인이 되고 싶었다. 마들렌이 소설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들렌이 고정된 직업을 갖지 않는 이유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마들렌 머리 밑에 괴어주었던 팔을 조심스럽게 빼고 바로 누웠다. 마들렌이 소설가든 아니든 나는 마들렌의 감자친구고 마들렌은 나의 과자친구라는 점에 대해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러고는 잠들어 그날 본 영화와 아무 상관 없는 꿈을 꿨던 것 같다.

 

둘이 된 나는 세가지 정도의 선택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첫째, 어떻게든 분열의 원리를 알아내 그 역을 시도한다. 즉, 합체해본다. 어느 주말 나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한 손에 모자를 든 채 외출해서 또다른 나에게 씌운 뒤 한참 동안 껴안고 있었다. 맞닿은 뺨과 목에 땀이 돋을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의식될 만큼 오래 그러고 있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또다시 분열이 일어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원인 규명은 꼭 필요했지만, 보류. 아무튼 하나가 되지 못했으므로 무기한 보류.

둘째, 둘 중 하나가 희생하기로 한다. 우리는 다이소 키친용품 코너에 서서 녹이 잘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식칼(오천원)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단순하고 명쾌하며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 어느 쪽이든 나니까 한쪽만 희생해주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 되지 않나. 하지만 누가 누구를 정리하지? 둘 다 나라면 둘 중 누가 남는 게 맞지? 남은 시신을 처리하다 들키면 살아남은 쪽도 좆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모든 감각이 공유되는 이중의 몸을 갖고 산 채로 죽음에 이르는 통증을 맛보는 게 과연 안전한지는 어떻게 아는가. 따라서 이 역시 보류. 확실한 만큼 후폭풍도 대단할, 양날의 검이었다.

셋째…… 마들렌에게 고백한다. 나는 그애의 감자친구로서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진실을. 마들렌이 이런 나를 받아들여준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처참한 생활양식을 청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상적인 3인가정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수입이 늘고 덜 피곤해지겠지. 마들렌은 늘 집에 혼자 있을 필요가 없어지고. 세명부터 플레이할 수 있는 보드게임도 가족구성원끼리 할 수 있어. 물론 내 뇌는 형식상으로만 두개고 서로 클라우드 연동 같은 게 되는 상태라 마들렌이 훨씬 불리하겠지만 세 사람이 둘러앉아 카드를 나누어 갖는 그림은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에 마들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탓할 수 없겠지만, 당장 혹은 근미래에 나와 헤어진다면? 마들렌이 나를, 내 복수의 존재 형식을 비밀로 해줄까?

어떤 선택지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봉착한 나는 하염없이 허송세월을 했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혹독해졌으며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바스러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쌍둥이라고 사기를 쳐볼까? 마들렌은 내 가족등본을 본 적이 있다. 마들렌이 미쳐서 나를 둘로 착각하는 거라고 가스라이팅을 해볼까? 퍽도 먹히겠다, 당사자인 나조차 이 마당까지 와서도 가끔은 실감이 안 나는데. 아니, 왜 이렇게 마들렌 눈치를 보는 거야. 마들렌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헤어지자고 하고 집에서 내쫓을까? 그러기에는 내가 마들렌을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마들렌이 먼저 문제를 눈치채고 괜찮다고 말해주기만을 바랐다. 그것만이 내가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적인 방향이었다. 솔직히 아직까지 내가 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마들렌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한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수 있지 않나? 내가 그렇게 치밀하게 증거를 없애고 다닌 것도 아닌데.

나 할 말 있어

라고 마들렌이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요즘 이상해서 헤어지고 싶다거나 내가 요즘 이상해서 걱정이 된다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는 결착을 지어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알았어, 오늘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나는 마들렌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가 너무 궁금하고 불안해서 반차라도 쓰고 싶은 지경이었다.

언니 오늘 그렇게 입고 출근했던가?

집 근처 피씨방에서 핫바를 사 먹던 내가 반차를 썼다고 거짓말하며 들어가자 마들렌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 응. 나 출근할 때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보다 할 말 있다며, 무슨 일 있어? 내가 짐짓 걱정스레 묻자 마들렌은 말했다. 언니, 내 부탁 하나 들어줬으면 해.

무슨 부탁? 정말 헤어져달라는 부탁인가? 나는 불안감이 나를 앞질러 대답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경청했다. 마들렌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공판 기일에 증언해줄 수 있어?

그야 나는 당연히…… 뭐라고?

쟁점을 위계에 의한 강제추행인지 아닌지로 가져가야 한대.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라서 불리하대. 그렇게 말하며 마들렌은 피식 웃었다. 그 새끼가 나한테 피하기 힘든 직장 상사나 학교 선생 같은 게 아니라서 위계가 작용했음을 증명하기가 어렵대.

거기에 내 증언이 무슨 도움이 돼?

걔가 그때 얼마나 권위적이고 편향적이었는지, 같이 수업 들었던 언니라면 말해줄 수 있잖아. 나한테 너무 중요한 일이야. 해줄 수 있겠어?

솔직히 말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그간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아, 그랬지. 이 모든 일의 애초에는 마들렌의 송사가 있었지. 나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이미 끝난 것처럼도 느껴지는 그 일이 사실상 제대로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점은 한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멀리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가 손을 거두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맑은 정신으로, 온 마음으로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나는—나도—생각했다.

미안한데 나 못할 것 같아.

언니.

나는 네가 그 사람 얘기할 때마다 둘로 쪼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사람 실제로 보니까 더 그랬고.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들렌과 소설가를 동시에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소설가보다 마들렌을 미워하는 나를 발견했고 마들렌의 감자친구인 나는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소설가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연민했다. 그런 인간을 연민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그런 자리에 앉게 만든 마들렌이 소설가보다 더 미웠고 최종적으로는 나 자신을 가장 미워하게 되었다.

언니 정말 이기적이다.

마들렌은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내가 이기적이야? 네가?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든 네가?든 말하고 싶었지만 기가 막혀 말문도 막히고 말았다. 마들렌이 울며 계속 말했다.

언니는 언니가 우리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잖아. 언니야말로 엄청나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언니한테는 언니밖에 없어. 언니가 세상의 전부야.

그 순간 무겁고 날 선 도끼가 정수리 한가운데를 빡 하고 내리치는 듯한 격통이 있었고 나는 따뜻한 피자가 치즈를 늘어뜨리며 갈라지듯 찌익, 쩌억 하고 둘로 나뉘었다. 마들렌의 눈앞에서. 아, 이런 식이었군. 의식이 있는 채로 갈라진 건 또 처음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마들렌, 어느새 눈물이 그친 눈을 똥그랗게 뜬 채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이게 지금 실제 상황이야?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들렌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튼 경이감이 우세한 감정이었다.

이건 그…… 내가 설명할 수 있어. 이건 뭐냐면,

두명의 내가 동시에 말했고 우리는 서로 마주 본 후에 다시 마들렌을 쳐다보았다.

아니……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늦을 수도 있어.

마들렌은 아주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뒷걸음질 쳐 현관으로 나갔다. 허겁지겁 운동화를 발에 꿴 나의 과자친구는 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문을 나섰다. 나는 감히 마들렌을 잡을 수 없었다. 아마 겁먹은 것 같았지, 아아 최악의 방식으로 알게 해버렸다. 나와 나는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려고 그동안 그렇게 애를 쓴 게 아니었는데. 나는 마들렌이 몹시 미웠고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가 싫었다. 나의 마들렌이 나에게 질리지 않았기를 바랐고 동시에 이 모든 상황에 나 스스로 질려 있었다. 지긋지긋한 나들의 의식의 연쇄 속에 불쑥 하나의 목소리가 솟았다.

진정해. 또 쪼개지면 어떡할 거야.

나는 나를 향해 결심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결의를 표했다. 이것 말고는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 머리가 셋이라도 사람은 하나다보니 그보다 더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구나. 언젠가 목이 잘려 죽을 것 같았던 나의 오랜 예감은. 나는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 식칼을 꺼내와 나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와 나는 식칼을 가운데 두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곧 또 하나의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