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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선애 金善愛

1980년 경북 상주 출생. 대구서부고등학교 사서교사. 독서모임 ‘책톡’ 대구지부를 운영하고 있음.

01europe@hanmail.net

 

안상학 安相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안동소주』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등이 있음.

artandong@hanmail.net

 

임정균 林貞均

1985년 대구 출생. 2019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마음의 리얼리즘」 「운명을 모르는 페넬로페(들)」 등이 있음.

wolverine10@naver.com

 

 

 

 

왼쪽부터 안상학 김선애 임정균 ©신나라

왼쪽부터 안상학 김선애 임정균 ©신나라

 

임정균(사회) 안녕하세요. 문학평론을 쓰는 임정균입니다. 지난 봄호의 전남 순천에 이어 두번째로 수도권을 벗어나 진행하는 문학초점인데요. 이번에는 경북 안동에 있는 ‘시집도서관 포엠’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도서관 관장으로 이곳을 맡아 운영하며 장소를 내어주신 피재현 시인께 감사 말씀 먼저 드립니다. 저는 아버지의 고향인 봉화가 안동과 면해 있어 이 고장이 낯설지 않습니다. 마침 가까운 곳에서 문학을 읽고, 쓰고, 가르치고 계시는 두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상학 안녕하세요. 시 쓰는 안상학입니다. 제가 사는 이곳 안동에서 함께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좋은 시와 소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운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김선애 안녕하세요. 대구서부고등학교에서 사서교사로 일하는 김선애입니다. 문학초점에 초대받아 독자 여러분 그리고 대구·경북에 기반을 두고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안상학, 임정균 선생님과 책을 매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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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진은영 시집으로 시작해볼까요.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이후 10년 만의 신작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전작들은 멜랑꼴리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은데 사회와 현실정치로 시선을 많이 돌린 듯하죠. 그도 그럴 것이 10년 사이 한국사회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집의 주요한 모티브이기도 한 세월호참사, 촛불혁명 등 그 시간이 정말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듯한 시집이더군요.

 

안상학 저 역시 오랜만에 진은영의 새 시집을 읽어서 기뻤습니다. 전작에 비해 조금 더 현장에 밀접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인상적이었고요. 제목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첫번째 시 「청혼」에서 가져왔더라고요. 저는 이 구절을 ‘내 마음은 오래된 그 거리에서처럼 변함없이,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너에게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주고 너의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겠다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맹세하죠. 그러나 ‘슬픔이 담긴’ “쓴잔을 죄다 마”신다는 구절에서 읽히듯이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너는 일종의 이격된 시간과 공간에 있는 듯한데, 잃어버린 사랑의 크기만큼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시인이 이렇게 슬픔에 집중하는 것도 그 옛날 그 사랑의 거리에서처럼, 우리 사랑을 그 시절로 되돌려놓자는 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김선애 사실 저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 읽는 데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는」이라는 시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어요. 도대체 이렇게 어려운 시를 쓰는 시인은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던 거죠. 이 시에 따르면 “죽은 아이들 얼굴/우수수 떨어”질 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이자 “나를 안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면서 “여기 있”는 것,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내 속에 매달린/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입니다.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이 시를 읽는 동안 시인이 시집 전체를 어떤 마음으로 써냈는지가 보여서 좋았습니다.

 

임정균 특히 2부는 ‘한 아이에게’라는 제목과 함께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시가 헌사처럼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는 2부 수록작 몇편에 걸쳐 등장하는 세월호참사 희생자 ‘예은’이라는 학생인 듯하고요. 세월호참사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고통스럽게 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상학

안상학

안상학 세월호참사가 2014년이었죠. 1980년 광주를 겪은 세대의 문학이 있어왔다면, 세월호참사 역시 동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의문과 슬픔을 함께 던진 사건입니다. 진은영 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고요. 편지 형식의 시 「그날 이후」는 읽는 내내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은이 시인을 빌려 말하는 듯한 무척 긴 시인데,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같이 빠른 호흡으로 진행됩니다. 만약 지금 여기 없는 예은이 생일을 맞이해 단 몇초라도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대면한다면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말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빠 아빠” “엄마 엄마” 다급하게 반복해서 부르는 구절들 말이죠. 공교롭게 어제(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큰 참사가 있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임정균 김선애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계시니 이 시를 남다르게 읽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학교현장에서는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특별한 교육적인 활동을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선애 저 역시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그날 이후」)라는 구절에서 예은이 잘 있다는 안부를 들은 것 같아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운데요. 제가 사서라는 비교과 교사다보니 커리큘럼을 짜는 데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요. 또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의 분위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세월호참사 관련 이야기나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이에요.

 

임정균 맞습니다. 국민의 안전이란 보수와 진보, 정치나 지역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일 텐데 그런 부분이 많이 아쉬워요. 그리고 시집이 읽는 이의 감정을 많이 흔들리게 하는데 한편으로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언급해주신 「그날 이후」는 세월호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 서른네명의 생일에 맞춰 서른네명의 시인들이 아이들의 육성으로 쓴 시를 묶은 『엄마. 나야.』(난다 2015)에 수록되었죠. 아이의 시선으로 쓰는 ‘육성시’를 시도하는 것이 시인의 입장에서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재현의 윤리 문제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내화해야 했던 고통이랄까요.

 

안상학 저도 비슷한 기획에 참여해서 한 희생자의 약전을 쓴 적이 있습니다(『416단원고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 굿플러스북 2016). 그래서 진은영 시인이 시를 쓰기까지 어떤 고통과 고민을 겪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시인이라면 자기 아픔도 아픔이지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슬픔의 전모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는 그 극치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성경을 보아도 가난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돈을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집을 사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가난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타인의 슬픔을 함께 겪기 위해서 나도 그 슬픔에 육박해 들어가 그 자체가 되어보는 그런 진정한 슬픔의 자세를 읽어낼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임정균

임정균

임정균 부의 제목이 ‘사실’이라고 되어 있는 3부의 시들은 약간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령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말을 인유하는 「쓰지 않은 것들」에서 ‘사실’의 의미를 좀 헤아려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흔히 사실이라고 할 때는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사실 혹은 “원의 둘레에서 시작과 끝은 공통”이라는 경험조차 초월한 단단한 기하학적 사실을 떠올리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는 “공통이 아니라 고통”이라 중얼거리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등장시키며 사실 너머의 어떤 진실을, 특히 고통을 마주하려는 의지가 읽힙니다. 3부 전체가 사실이란 모두 인간의 해석을 경유한 것이라는 쪽으로 향하는 듯한데, 전작으로부터 10년의 공백 동안 상담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짐작도 해보게 됩니다.

 

안상학 10년의 시간을 보내며 하고자 한 이야기를 1, 2부에서 풀어낸 뒤 3부에서는 그후 어떻게 희망을 찾아가야 할지, 이 끝나지 않는 슬픔의 진원에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모색하는 듯했습니다. 물론 구절구절은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스타바트 마테르」), “내 귀는 익사할 지경이 되었다”(「죽은 마술사」), “월요일은 오지 않네”(「월요일에 만나요」)와 같이 끝나지 않는 슬픔과 절망이 지배적이에요. 다만 슬픔의 끝까지 내달리다가 절망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서는 모종의 희망을 끝내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 내비칩니다. 가령 이 시집의 마지막 시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의 마지막 구절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은 세월호참사처럼 해소되지 않는 슬픔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려요. 나아가 그 슬픔을 꼭 넘어서고 싶다는 시인의 의지를 얼마간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것이 이 시집 전체를 통해서 진은영 시인이 얻어낸 결론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김선애

김선애

김선애 3부의 「사실」이라는 시도 기억에 남아요.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라는 구절이 특히 마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미안함, 안타까움을 그리는 이 시의 제목이 왜 ‘사실’일까 오래 고민했는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는 없는 명백한 ‘사실’에 아파하는 시로 읽었어요. 마지막 행인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에서처럼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존재하는 사실이 아프듯이요.

 

임정균 결국에는 사랑이야말로 그러한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 도달하게 된 진실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두분께서 짚어주셨듯 1부에서 사랑의 “마법을 확신”(「사랑의 전문가」)했던 화자는 3부에 이르러 마술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죽은 마술사」). 마술과 같이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이 불가능해진 상황인 거죠. 그럼에도 슬픔의 진창에 매몰되어 있기보다는 “단 하나의 사물이 되고 싶다”라거나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죽은 엄마가 아이에게」)라는 구절에서처럼 단단한 사물의 물성을 닮은 마음 또한 엿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집 전체가 마술적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사랑을 마술의 세계로부터 손에 잡히는 구상의 세계로 돌려놓는 일. 그 단단한 사랑의 물성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공부하는 일.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향한 도정이 시인의 시 쓰기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용훈 『근무일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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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다음으로는 이용훈 시집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시집이고요, 시인이 경험한 노동현장을 바탕으로 쓰인 시들이 묶였습니다. 특히 현장의 생생한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제게는 이 현장성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첫 시 「당신의 외국어」의 첫 구절부터 “가다와꾸 가도(는) 가리고야, 가이당 가랑(은) 가라(고),”라는 현장 은어로 시작하죠. 시를 제법 읽어왔고 또 쓰고도 싶어하는 고등학생에게 이 시를 소개했는데, 최근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보다 훨씬 어려워하더라고요. 흔히 노동시, 노동문학은 시적 형식보다는 메시지가 강하다보니 읽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은 편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용훈의 시는 기존의 노동시와는 다른 면이 있어 보입니다. 낯선 노동도 계속 하다보면 몸이 절로 적응하잖아요. 그처럼 시를 읽으면서 시어들에 적응되는 과정 또한 느낄 수 있었어요. 독자가 그런 감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마치 현장 언어의 용례집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읽으셨나요?

 

안상학 한때 건설회사에서 몇년 일한 적이 있어 현장의 언어, 특히 일제 잔재 언어들에 익숙한 편인데도 이 시집에는 낯선 언어들이 있더라고요. 비단 건설현장뿐 아니라 쓰레기하차장, 모텔, 터미널 등 다양한 직업현장에서 쓰는 생경한 언어들도 등장하고, 비슷한 단어인데 쓰이는 용도가 다른 경우도 있고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렇게 낯선 언어가 차고 넘치는 공간이 있구나, 그런 언어가 이 시집에는 들어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시어, 나아가 우리 시의 확장성 면에서의 성과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김선애 제게는 언어뿐 아니라 내용도 무척 생소했습니다. 시집을 끝까지 읽고 시인의 의도를 짐작한 뒤에야 내가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미래에 대해 아주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이렇게 공부하다가 대학에 가서 입사시험을 치고 직업을 갖게 되겠지 막연하게만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누군가는 시에서 그려진 것처럼 일용직 노동자나 정신병원 폐쇄병동 보호사, 폐기물 분류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는데, 우리는 마치 모두가 CEO가 될 거라는 전제 속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있죠. 그러다보니 특히 젊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노동자’라는 자의식이나 현실감각이 희미해지고요.

 

안상학 이 시집이 노동시인가, 노동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저는 단박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유보하게 돼요. 1980년대 노동문학은 어떤 목적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지향점도 분명했습니다. 자본/노동의 적대적 관계도 성립되었고요. 그때의 노동문학은 투쟁의 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용훈은 제가 언급한 80년대식의 목적의식이나 지향점은 거의 없이 현실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거나 아니면 어떤 부분에서는 아예 추상적·관념적으로 접근하면서 시를 쓰고 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와 같이 생생한 현장감과 입말이 빚어내는 극사실미와 「나는 굶는다」처럼 현장이 제거된 자리를 채우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허기에 대한 몽환적 진술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80년대 노동문학이 추구하던 가치가 사라진 지금 그때와 같은 시를 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고, 그런 점에서 이용훈의 시집을 노동문학의 새로운 형태로 볼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극히 현장성이 강한 시집이라는 겁니다. 우리 시가 여러 ‘현장’을 떠난 지 꽤 된 것 같은데, 『근무일지』 같은 시집은 등장 자체로 반가운 일이고 이런 시를 앞으로도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정균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도 무색해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노동 형태가 초단기 임시노동으로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죠. 자본의 구조는 훨씬 복잡해져서 하청의 하청의 하청 형태로 노동자 안에서 계급차를 발생시키고 있고요. 시집에 나오는 직업만 보아도 다 다르고, 그 안에서도 격차가 느껴져요. “탕바리 이곳서 무너지면 너는 어디서도 쓰레기”(「밀가루 시멘트」)라는 구절을 볼까요. ‘탕바리’는 비정규노동자 중에서도 한탕 한탕 일하며 하루 먹고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잖아요. 저 구절은 얼핏 기능공이 보조공을 깎아내리며 하는 말 같지만, 정작 말하는 이 역시 탕바리이며 여기 밑바닥에서조차 무너지면 정말 갈 데가 없다는 자조가 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오늘의 노동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보여주는 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하게 읽었습니다.

 

김선애 울분에 차서 말하는 듯한 느낌이 시집 전체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화자와 그 주변의 삶이 있다면, 그 바깥으로 향하는 공격성 같은 것도 시에서 느껴진달까요. 시라고 하면 아름답고 평화롭고 섬세한, 그런 예술 장르라는 생각이 제게도 있었는지, 이렇게 날카로운 시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해서 놀랐던 것 같아요.

 

안상학 동의합니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언어를 풀어냈는데 도대체 누구에게?라고 물으면 뚜렷이 잡히는 게 없어요. ‘시인의 말’에는 “살아가십시오.”라는 한마디만 실려 있습니다. 이 말을 들어야 하는 쪽은 어느 쪽일까 마찬가지로 궁금해지더라고요. 자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말씀하신 그 바깥을 향해 ‘그래, 당신 잘 살아가십시오’ 비아냥거리는 것일까.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으니 시집 전체를 놓고 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삶의 자리를 만들어낸 시대나 사회에 던지는 말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김선애 「오무아무아」의 화자는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선호 형’에게 “요즘 시를 공부하고 있어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고 하죠. 그러다 이내 “형, 나는 다른 세계에 살았었나봐요”라고, “또다른 지구가 존재한다고” 문자를 보냅니다. 어두운 현실과 노동현장 속에서 시인이 찾아낸 “다른 세계” “또다른 지구”가 바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현장을 반영한, 하지만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일종의 문처럼 말이에요. 앞서 읽은 진은영 시인의 「그러니까 시는」도 그렇고, 시란 그런 일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의미가 있는 거구나 싶어서 저 같은 문외한도 더 열심히 읽어보고 싶게 되더라고요.

 

임정균 시의 제목인 ‘오무아무아’는 외계에서 태양계로 진입한 천체의 이름인데, 발견 당시 특이한 모양과 궤적 때문에 외계 지적생명체의 인공물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고 해요. 짚어주신 시의 의미와도 잘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이 전파신호를 쏘고 응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고 어떤 응답을 바라지만, “견고한 밤이 올 때를 기다리지만 단단한 밤은 영영 찾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리 긍정적인 전망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근의 SPC 제빵공장 노동자 사망사건 등 뉴스에서 접하는 인명사고나 산업재해 사건들을 떠올리면, 이 시집은 외부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만큼 이 시집이 쏘아 올린 신호들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신준영 『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걷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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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마지막 시집을 읽어보겠습니다. 신준영 시집은 서정시 문법을 따르고 있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구름 스캔들」이라는 시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런 구절에서 눈이 멈췄어요. “나는 발명가이며 조련사다 오늘까지 일만육천삼백스물여섯 개의 감정을 발명했고 이것으로 매일 나를 길들여 왔다”. 혹시나 해서 시인의 나이와 365일을 곱해보니까 이 정도의 숫자가 나오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매일매일 하나씩 감정을 발명했다는 말이고, 내일은 또 하나의 새로운 감정을 발명할 거라는 의지로도 읽을 수 있겠죠. 저에겐 이 구절이 시인의 시론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신준영 시인에 대해서는 안상학 선생님이 소개를 해주실까요? 안동에서 활동하고 계시죠?

 

안상학 작가회의 안동지부에 모여서 함께 시를 쓰고 합평회를 하며 문인들끼리 교류하고 있습니다. 신준영 시인은 같이 공부하던 동학 가운데 하나였죠. 그러다 2020년에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첫 시집 『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를 묶어 올해 발간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시인의 가장 큰 특징은 대립되거나 서로 이질적인 어휘를 동시에 쓴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한편의 시 안에서도 거리와 거리가 멀수록, 장소와 장소가 많이 이격될수록 혹은 시간이 떨어져 있을수록 그러한 틈을 통해 울림의 진폭이 결정되거든요. 이번 시집을 보면 간단히만 찾아도 낮과 밤, 겉과 속, 퇴화와 진화, 환호와 절규, 침몰과 인양, 앎과 모름, 이해와 오해, 슬픔과 기쁨 등 예가 아주 많습니다. ‘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는 제목에서도 느껴지고요.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이미지화하는 전략을 세운 게 아닌가 합니다.

 

김선애 저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좋았는데,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임팩트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한방’이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려운 문학작품을 읽을 때 저는 책에 함께 실린 ‘해설’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인데요, 이번에도 해설(최진석)을 읽다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인용구가 마음에 들어와 해당 시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해빙기의 얼음 속 박제된 전생을 보다니/그런데 이상하지/저 바다는 채우기만 하는데/넘친 적도 없다는 거”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배수 시설이 없는 호텔방에서 묵게 된 화자가 자신이 있는 공간과 바다를 연결시키면서 “살아서 혹은 죽어서 알 수 없는 곳에 하역”될 인생을 빗대는 시인데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강제이주의 역사에 대해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사의 경험과, 비우고 또 채우며 살아야 하는 인생의 깨달음을 연결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읽으면서 이런 시적인 형상화는 어떤 공부와 경험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새삼 해보았습니다.

 

안상학 강력한 한방 같은 것이 없다는 감상을 들려주셨는데 저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껴요. 시에 이런저런 선명한 대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평면적인 느낌이 들까. 저는 그 이유를 비교적 약한 서사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강력한 서사가 두어줄 정도 시에 자리 잡는다면 울림이 좀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임정균 저는 「압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압화’의 납작함이 시집 전체에서도 중요한 이미지 같더라고요. 시에서 압화라는 게 기억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 활자의 은유처럼도 보여요. 활자는 물론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테고요. 한편으로 시의 본질은 노래잖아요. 하지만 오늘날의 시인에게 시의 도구는 음성이 아니라 활자에 가깝죠. 그러고 보니 눈에 띄었던 게 ‘귀’라는 시어였어요. 언어가 사물의 죽음인 것처럼 소리 역시 귀라는 감각기관에 인식되는 순간 물성이 죽어버리니까, 활자의 납작함과도 자연스레 연결되더라고요. 시인의 말대로 “귀는 소리의 장지”(「소리의 장례」)인 거죠. 활자를 도구로 삼은 오늘날의 시인에게 귀는 “천형의 귀”(「Get out」)일 수도 있을 테고요. 인식의 주체가 감각기관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주관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인데, 주관성의 장르인 서정시의 화자가 스스로의 주관성을 의심하는 것은 서정시에서 한발짝 이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런가 하면 “귀를 죽여야 마음이 사는 건데”(「문」), “흔들림 없는 두 귀를 후회해”(「사선」)라고 할 때는 마음의 반대편에 놓인 ‘흔들림 없는’ 이성의 도구로서, 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완전히 손을 놓지는 못하는 느낌도 들거든요. 그렇게 볼 때 이성과 마음 사이의 간극에 대한 시로도 읽혔어요. 그 둘 사이에서 놓인 서정시의 아이러니가 안상학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립적인 시어의 충돌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불연기연(不然其然)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고요.

 

안상학 압화를 키워드로 말씀하셨는데, 신준영 시의 다른 특징으로는 압화처럼 눌리는 고통을 받아안는 ‘수용’의 자세를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 필요한 외부 자극을 모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시에 들여온다는 것이죠. 가령 이용훈이 바깥으로 소리를 내지르는 스타일이라면 신준영은 받아들이고 내면화해서 비춰보는 시인 같아요. 통곡이 아니라 가만히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듯한 시적 자세가 약한 임팩트와도 관계있을 테고요.

 

김선애 「콜라」라는 시는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당신에 관해서라면/머리부터 발끝까지 거품 무는” “당신에겐 정령이 되지 못한 채/음으로 양으로 떠돌다 허공중에/흩어지는”같이 콜라 거품에 자기를 빗대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기발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는 “당신에 관해서라면 무덤까지/침묵할 줄 아는 콜라”로 마무리하는데, 거품이 사그라들고 콜라가 컵 바닥에 검게 가라앉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한 듯합니다.

 

안상학 안동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에요. 그건 그 이전에 의병 활동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호남에 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영남에 많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이후에는 박정희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통혁당·인혁당 사건을 통해 안동·영남 출신 인사들이 크게 정리되는 아픔을 겪었죠. 지금은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안동에는 그런 역사가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된 장소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문학 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마 그러한 지역 감각이 자리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준영의 시적 저변에도 그런 정서가 있다고 보고요.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신준영 시인이 앞으로도 계속 시세계를 벼려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주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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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이제 소설로 넘어가겠습니다. 가장 먼저 이주혜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주혜 작가는 2016년 작품활동을 시작해, 중년 여성의 돌봄노동을 중심으로 가부장제를 예리하게 묘파한 장편소설 『자두』(창비 2020)를 펴낸 바 있죠. 소설집으로는 첫 책입니다. 단편에서도 여성 인물이 중심이 되어 ‘어머니’ ‘아내’ ‘딸’로서 겪는 삶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나요?

 

김선애 이주혜 소설과 김멜라 소설을 같이 읽다보니 어느 순간 헷갈리기도 하더라고요. 분명 문체나 분위기는 꽤 다른 두 작가인데 여성서사, 퀴어서사가 공통적으로 주를 이루다보니 소재적으로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표제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였어요. 이 소설은 오십대 여성 ‘구은정’이 수술대에 누워 그간의 세월을 반추하는 이야기인데요, 스무살부터 ‘처녀 가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정사,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은정을 항상 일본 출장에 대동했던 사장 때문에 시달린 추문 등의 일화가 이어집니다. 사장이 왜 은정을 데리고 다녔나는 일종의 서스펜스처럼 작용하기도 하더라고요. 나중에 사장이 일본 거래처의 ‘사토 상’과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스러움”(132면)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고 일본어도 못하는 은정을 수행원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죠. 은정은 지금 가족도 친구도, 여전히 ‘여성스러움’도 없는 인물이지만 인생을 통해 “빈자리의 무게. 그 없어짐의 무게”(155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은정의 삶이 상실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아 인상 깊었습니다.

 

안상학 저는 이주혜 작가의 문장에 반해버렸어요. 말을 굉장히 아끼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끝에 가서 터뜨리는 솜씨가 무척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을 누르고 누르다가 아주 약간 삐져나오는 기미 같은 것도 매력적이더라고요. 서사 역시 말하는 방법만 사용하지 않아요.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에서 보듯 사장과 사토 상의 관계, 또 ‘나’ 역시 ‘구루미’라는 일본인과 무언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 사실을 암시하듯 아주 살짝만 보여주죠. 부족도 과잉도 없는 얼개가 탄탄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긴 대교 한가운데서 사람을 만날까봐 무서웠고 정말로 아무것도 없을까봐 무서웠다”(「물속을 걷는 사람들」 185면) 같은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임정균 소설을 크게 두갈래로 나누어보면 가족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봄의 왈츠」와 같이 여성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둔 작품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편 모두 다양한 환경에 속한 각기 다른 여성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소설이에요. 「봄의 왈츠」는 저마다 가부장적 가정 내에서 상처를 받으며 자랐던 세 여성이 아이를 함께 기르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게 된 사연을 들려줍니다. “달고 시원”(246면)한 포옹을 나누는 결말에서 과거의 상처가 덮이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세 여성의 연대가 낭만적으로만 그려진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어요. 다른 두 작품은 그보다 더 지난하고 복잡한 연대의 실상을 그리는 편입니다.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는 ‘나’가 딸을 데리고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온’과 함께 일본 여행을 가서 겪는 일련의 사건을 그립니다. 여행 중 ‘나’는 부잣집 딸이었던 온의 무심한 행동 하나하나에 질투를 느끼고 상처받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나’는 애증이 뒤섞인 이 아슬아슬한 긴장 위에서 “우리에겐 내일의 걸음이 많이 남았다”(282면)라고 말하며 결코 매끈하지만은 않은 온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유지해나가려고 하죠. 세심하게 구현된 둘 사이의 관계가 저 구절을 무척 설득력 있게 만들어줘요.

 

김선애 저도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가 인상 깊어요. 한국사회에서 유자녀 기혼 여성으로서 느끼는 고립감을 공유하며 가까이 지내다가 코로나19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진 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중 하나가 딸에 대해 “제가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다”(113면)라고 말했을 때 “언니, 속 편한 소리 좀 그만해요. 언니처럼 다 가진 사람이 뭘 알아요?”(114면) 소리가 머리에 떠올랐을 거라는 식의 진술이 무척 실감 나더라고요. 백 퍼센트 친하기만 한 관계는 드물고, 특히 여성들 사이에 얼마나 미묘한 긴장을 가진 관계가 많은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까? 우리를 자꾸 고립시키고, (…) 경멸하기 좋은 얼굴로 변모시키고, 끊임없는 자기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120~21면)라는 질문이 핵심적이에요.

 

임정균 짚어주신 대목처럼 코로나가 이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아닌 듯합니다. 세 여성 모두 출산 후 돌봄노동이 가져오는 어떤 고립감을 느끼게 되고, 그 동질감이 관계의 출발점이었잖아요. 그러나 팬데믹으로 고립감이 일상이 되자, 오히려 셋 사이에서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요. 서로 다른 가족의 분위기라든지 직업적 경력, 심지어 자녀들 간의 관계에도 다름이 있었던 거죠. 결말을 보면 ‘나’는 다른 이들보다 뒤늦게 코로나 확진이 된 후에 “격리의 밤”을 기다렸던 듯 “우리는 함께 이 병을 앓을 것이다”(122면)라고 말하는데요, 질병을 통해서야 모종의 동질감이 다시 확보되는 상황이라 해도 현실의 비정함이 더욱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밤을 더욱 응원하게 되기도 하고요. 이주혜 소설을 가족서사 측면으로도 살펴보면 좋을 듯해요. 가족 역시 작가가 잘 구현해내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는 남성 가족원이 등장할 때 거의 동일인물처럼 보일 정도로 전형성을 띠고 있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도 듭니다. 물론 그만큼 진부한 남성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것이겠지만, 그 전형성 때문에 남성 인물들의 실감은 불가피하게 부족한 느낌이 들어요. 서사적인 긴장감도 덩달아 부족해지고요.

 

김선애 가부장제 속 남성의 실패를 대놓고 보여주고 있는 듯해요. 읽으면서 ‘와, 남자들이 왜 이렇게 찌질하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식을 넷 낳아 사계절을 뜻하는 한자로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우주적 소망”(10면)을 이루기 위해 밖에서 아들을 낳아 데려온 아버지(「오늘의 할 일」)나 “나는 무해”(69면)하다며 아내와 함께 “순백의 가정”(87면)을 이루었다고 믿는 ‘오종’(「여름 감기」) 같은 인물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요. 그래도 캐릭터 구축에 있어 어느정도의 실감을 주지 않나 싶습니다.

 

안상학 저는 「물속을 걷는 사람들」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학생운동의 기억과 그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또 그 기억을 어쩌지 못한 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질문이 잘 버무려져 있더군요. “이번 영화가 운동권 출신 감독의 후일담이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기역은 아직 그 시절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므로 후일담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176면)는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단 학생운동이 아니더라도 과거를 완벽하게 망각하거나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죠. 작가가 후일담 소설을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며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데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아까 김선애 선생님이 이주혜와 김멜라 두 작가의 작품이 헷갈리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세대의 여성서사인지 들여다볼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다루는 시대나 세대, 소재에 접근하는 방법 등에서 꽤 차이가 있는 것 같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주혜 작가의 작품에 더 밀착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김멜라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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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자연스럽게 『제 꿈 꾸세요』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김멜라 작가는 2014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입니다. 김멜라 소설에는 젊은 여성 또 퀴어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작법 차원에서는 꿈이나 유령 같은 장치를 통해 환상성을 가미하거나 비인간 객체를 화자로 내세우는 식의 여러 시도를 해나가고 있기도 하고요. 저는 「저녁놀」이 무척 재밌더라고요. 이 소설의 화자는 레즈비언 커플이 소유한 딜도인데요, 사물을 화자로 내세우는 소설이 그 자체로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딜도’가 가진 상징성이 레즈비언 소설에서 효과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화자가 말을 재치있게도 하지만 무척 점잖고 지적이라는 것도 상당히 우스운 포인트예요. 그 지점이 딜도가 상징하는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으로 해석되기도 하고요. 결국 한번도 쓰이지 못하고 안마기로 전락하며 굴욕감을 느낀 딜도가 “왜 나만 버려져야 하나. 날 위한 안전망, 법적 장치, 사회보장 시스템은 어디 있는가. (…) 어쩌다 여자들이 이토록 섹스를 업신여기게 된 걸까. 섹스 없인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들이, (…) 나는 두 여자가 미웠다. (…) 너희 여자들!”(118면) 하며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는 인셀(Incel),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의 언어가 떠오르더라고요. 여성을 욕망하기 때문에 혐오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모순이 잘 그려졌어요.

 

김선애 직접적으로 사회문제를 언급하진 않지만 퀴어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것 같더라고요. “고양이를 키우는 동료가 고양이가 아파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며 조퇴를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양이도 식구고 가족이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와 눈점이는? 우리는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관계도 못 되는 걸까”(129면) 같은 대목에서는 최근 논의되기 시작한 생활동반자법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안상학 「링고링」과 「나뭇잎이 마르고」는 연달아 실려 있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나 놀랐어요. 「나뭇잎이 마르고」는 초반에 나오는 신화적 이야기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체’라는 인물이 무척 매력적이더라고요. 체는 “옷이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을 입은 것처럼” 색채를 조합해 옷을 입고, “시와 전시회를 좋아”하며 “정치나 역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64~65면) 여러 학회에도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요. 사회가 장애인에게 강요하는, 혹은 으레 그러리라 추측하는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죠. “먼저 주고, 준 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75면)는 인물이에요. 체는 인삼 씨와 양귀비 씨를 산에 올라가 뿌리고 돌아오는데, 뿌린 곳을 다시 찾지 않고 그저 뿌리는 것에 만족하는 취미를 갖고 있어요. 그 행위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인삼 씨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묻는 것이고 양귀비 씨는 가꿀 수 없는 것이죠. 이런 특징이 동성애자이자 장애인인 체의 정체성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링고링」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게 청소년소설 같은 발랄함이 있더라고요. 두 작품이 붙어 있어서인지 그 차이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논리」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교통사고로 죽은 어머니가 유령이 되어서 딸을 지켜보는 내용을 담고 있죠. 딸의 성 정체성을 발견해나가면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임정균 죽음, 유령이 나오는데도 슬픔의 정서가 소설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 점이 돋보입니다. 화자가 자기가 죽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웃음도 나고요. 「논리」에서 죽은 어머니가 딸이 레즈비언인 것을 걱정하며 “이민을 알아봐야 하나”(197면) 하는 무척 현실적인 고민까지 하는 장면같이요. 예전에는 퀴어서사가 정체성의 고민과 내적·외적 갈등을 비장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분위기가 좀더 산뜻해진 것 같아요. 이성애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듯 퀴어 정체성의 내적 갈등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문제는 퀴어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과의 갈등과 고민일 테죠. 조금씩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는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편견과 차별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김멜라 소설이 보여주는 산뜻함은 좋은 돌파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김선애 “네가 뭐라고 불리든 너와 너의 연인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어”(「논리」 204면) 같은 문장은 감동적이지만 저는 현실과의 간극은 크다고 느껴요. 학교현장에서 만나는 학부모들은 이런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문학은 이렇게 다양한 존재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쪽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현실, 특히 학교는 아직 갈 길이 먼 듯합니다. 둘 사이의 간극이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기도 해요.

 

안상학 저 역시 충실히 따라 읽는 정도지만 작가들이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렇게 치열하게 써내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맙게 느껴져요. 현실과의 간극을 말씀하셨지만 문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앞서가야 한달까요, 먼저 고민하고 메시지도 던지는 역할을 계속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김선애 「설탕, 더블 더블」은 첫사랑 ‘희래’의 남편 ‘윤도윤’을 스토킹하듯 주시하던 화자가 도윤이 참여하는 전시회에 스태프로 지원해 전시 장소인 서울역사에서 첫사랑의 흔적인 설탕을 찾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에요. 화자가 도윤에게 말 한마디 붙여본 것도 아니고, 할머니가 찾는 설탕을 찾은 것도 아니라 저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는데 어떻게 읽으셨어요?

 

임정균 화자의 이야기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진정한 사랑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할머니가 80년 넘게 첫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첫사랑 ‘테루오’가 서울역에 숨겨둔 설탕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설탕이 없다는 것을 알면 사랑이 끝날 테고, 설탕이 벽 뒤에 ‘존재’하는 한 사랑이 이어지는 식의. 그러면 화자와 희래 사이에는 과연 어떤 사랑의 증표가 있었을까 궁금해지죠. 그래서 ‘설탕, 더블 더블’이라고 반복한 게 아닐까요. 어쨌든 성적 상호작용을 떠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친환경 무공해 사랑. 아무런 오염 물질도 배출하지 않는 사랑”(170면) 말이죠.

 

안상학 그러고 보니 김멜라의 소설에는 특유의 서정성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그 안에 포함하는 친밀성의 세계랄까요. 「설탕, 더블 더블」에서도 화자가 할머니와 비밀을 공유하는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유대감 같은 게 인상적이에요. 할머니가 “사랑에 빠지면 자기 신분을 깨닫게 되지요” 같은 말을 할 때 화자는 “할머니와 내가 같은 역의 선로에서 갈라져 나온 레일 같다고 느꼈다”(162면)고 해요. 설탕이 있고 없고보다 누군가를 끝까지 믿고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지점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김멜라 소설에서의 사랑은 무척 여러가지 맥락에서 다뤄질 수 있고,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처럼 작용하는 듯도 합니다.

 

김선애 “우리는 너무 많은 비밀을 나누었기에 연인이 될 수 없었다”(150면)는 구절도 어쩌면 연인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됐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네요. 「링고링」에서도 화자가 데이트를 할 때, 엄마와 엄마 여자친구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며 “영주와는 절대 그런 사이가 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53면) 하고 끝나잖아요. 마냥 연인인지 연인이 아닌지만 따지기보다 확장된 사랑을 일구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해요. 이러한 인물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 그다음이 궁금해지네요.

 

 

강성봉 『카지노 베이비』(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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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마지막 소설 『카지노 베이비』입니다. 올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강성봉 작가의 첫번째 책이에요. 첫 문장이 강렬합니다.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11면) 다들 이 문장에 매료되어 단숨에 끝까지 읽으셨을 듯한데요. 최근 읽은 소설 중 가독성과 흡인력이 손에 꼽히는 작품이었습니다. 가상의 도시 지음의 흥망성쇠와 함께 그곳의 카지노를 배경으로 ‘하늘’이라는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작가가 실제 카지노와 가까운 영월에서 출생하기도 했고, 잡지 기자로 일하며 쌓은 취재 경력 때문인지 마치 직접 보는 듯 풍경이 세밀하고 리얼하게 그러져 있습니다.

 

안상학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는 하늘을 전당포에 맡긴 뒤 사라지는 데서 소설이 출발하죠. 이 아이가 출생한 뒤 집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꼭 예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주인공의 이름이 ‘하늘’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이 됐습니다. 하늘이의 내레이션으로 작품이 진행되는데 이 아이가 비상해요. 들으면 대번 알아버리고 예지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신적인 느낌이 풍기게끔 해두었더라고요. 카지노와 거기에 빌붙어서 먹고살아가는 인물 군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던 소설은 카지노가 무너지고 다시 카지노가 들어설 만한 땅의 중심부를 하늘이 소유해 ‘알박기’를 하는 것으로, 다시는 지음에 카지노가 들어서지 못할 것을 암시하며 끝나죠. 하늘은 무너진 공동체를 새로 세우고 인간들이 다시 진정 조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져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해보면 천지인(天地人)사상이나 동학의 경천(敬天)사상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작가가 하나하나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상적 기반 정도는 되어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임정균 ‘하늘’의 이름에서 그런 의미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결말부로 가서는 하늘이 날아서 카지노 건물에 올라간 뒤, 카지노가 무너지는 모습을 전경으로 딱 보잖아요. 그 장면도 예사롭지 않게 보이네요. 책 소개글이나 소설 구성을 살펴보면 하늘의 성장담인 듯합니다만, 이 소설이 정말 하늘의 성장담이냐 하면 의문이 듭니다. 과연 하늘은 성장한 걸까요? 성장했다면 거기에 하늘의 주체성은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누가 소설의 주인공이냐를 따질 땐 그런 요소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은 단순히 화자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 관찰자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이에요. 저는 오히려 할머니에 더욱 주목하게 되더군요. 할머니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지음(사북)의 역사성,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가 소환되며 소설이 풍성해지거든요. 탄광촌에서 시작해 “올림픽다방”(255면)과 “월드컵전당포”(260면)를 거친 할머니의 인생은 한국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죠.

 

김선애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해요. “애들은 억만금 주고도 살 수 없는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라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맞춰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만들도록 어른들은 잘 맡았다가 세상에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262~63면) 이후 “이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어디선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295면)는 하늘의 말이 할머니의 가호 아래 하늘이 바르고 단단하게 살아나갈 것임을 알려주는 등, 여러 부분에서 할머니의 입을 통해 소설의 중심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임정균 결말에 할머니는 땅도 사고, 도서관에 기부할 정도로 큰돈도 모았던 사람으로 나오잖아요. 어떻게 보면 한국식 자본주의의 변화를 몸소 겪으며 자본의 논리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따르고 체현했을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도 없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탄광촌에서 남편의 사망 이후, 자식과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한 여성의 불가피한 억척과 고통을 가늠하자면 할머니의 삶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감정적 진폭이 다른 어떤 인물보다 큰 듯해요.

 

안상학 소설을 읽다보면 지음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태백 사북을 바탕으로 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건강한 삶의 공동체가 살아 있던 동네였는데 산업화를 거치며 탄광촌으로 변모하죠. 1980년 4월에 동원탄좌 광업소에서 어용노조가 회사와 담합하는 일이 일어나고 노동착취, 임금착취, 인격적 대우 등과 같은 문제가 결합하면서 큰 노동자투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사북항쟁이에요. 소설에서는 당시 할아버지가 협상 대표였고 투쟁 도중 지프차에 깔려 사망했다는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사북항쟁은 이후 다른 지역의 노동자투쟁에 영향을 끼쳤을뿐더러 당시 군부정권의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에도 영향을 주어 멀게는 광주와도 연결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며 에너지원이 바뀌어 탄광촌은 몰락하고 지금은 거기에 카지노가 들어서 있죠. 소설 속 지음도 동일한 역사를 거칩니다. 작가가 강원도 출신인데 장소성이 굉장히 치밀합니다. 비단 묘사의 생생함을 떠나 지역에 대한 모종의 애정 위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잘 드러나 있어요.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의 최첨병인 카지노가 지역을 망쳐놓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 반감도 읽히죠. 나름대로 체제에 한방 먹이는 결말도 그렇고요. 다만 첫 문장이 가진 폭발력만큼 서사가 끝까지 밀도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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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균 아쉬운 점을 덧붙이자면 ‘지장산’ ‘지장천’ ‘말고개재’ ‘소잡는골’ 등 실제 장소명을 그대로 가져오고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덕분에 소설이 생생함과 리얼함을 얻지만 같은 이유로 너무 현실과 일대일 대응해버려서 서사가 닫혀 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실재하는 공간과 역사가 오히려 상상을 제한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마을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변하는 과정, 그러면서 서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뒤엉켜서 사는 모습이 핍진하게 구현되어 있는 점은 좋았습니다. 지음은 모텔촌인 ‘슬립시티’를 사이에 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구역 ‘이스트지저스’와 카지노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부다스 랜드’로 나누어지는데, 같은 인물이라도 어떤 장소에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죠. 특히 ‘반 주사’라는 인물이 “입술을 뒤틀면서 웃는데 즐겁고도 괴로”(206면)운 얼굴로 블랙잭을 하고 있는 장면에서 하늘이 깜짝 놀라는 대목이 인상적으로 남아요. 이스트지저스 도서관에서 언제나 하늘에게 살뜰하게 대해주던 친절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죠. 카지노가 들어서며 마을 사람 개개인이 받은 영향도 있겠지만, 카지노가 몰락하고 난 다음 카지노와 연관된 일로 먹고살던 마을이 송두리째, 연쇄적으로 몰락해버리는 모습을 보면 오늘날 투기자본주의의 단면과 지방균형발전 정책의 안일함도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김선애 영화화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의 이야기를 좀더 보완해서 제대로 된 성장담으로 말이죠. 지역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며 한 인물의 성장을 잘 다룬다면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소설 시작 전에 공간 배경을 도식으로 표현한 그림을 보고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같이 판타지적 세계를 치밀하게 설정한 소설인가 기대를 했었는데요. 읽고 나면은 이 그림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더라고요. 결말 역시 새로운 세상을 일구고 펼쳐 보였다기보다는, 하늘은 몰랐지만 할머니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식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다소 손쉬운 정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임정균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앞으로의 기대도 크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자리도 아쉽지만 이만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동시에 많은 작품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요, 할 말이 없으면 어쩌나 앞선 걱정도 했습니다만, 이렇게 두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예정보다 긴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네요.

 

안상학 창비에서 이렇게 지역을 순회하며 문학초점을 진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덕분에 저는 가까운 곳에서 편히 좌담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시와 소설들을 가지고, 좋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김선애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신이 쓰는 단어, 문장, 글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고민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들인 노력에 비해 책을 읽고 나눈 서너시간의 대담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만, 독자분들이 저희의 감상과 비교하면서 여섯권의 책을 읽고 더 많은 해석과 풍부한 독후감을 남긴다면 작가에게도, 책에게도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2022.10.30. 안동 ‘시집도서관 포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