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논단

 

정치와 품행에 관하여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타오르는 시간』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연대와 열광』, 편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1980년대』 『87년체제론』 등이 있음.

jykim@hs.ac.kr

 

 

 

1

 

이태원참사가 벌어지고 몇개의 보도를 시청하자 곧장 후루룩 끼쳐온 심정은, 이 사건의 트라우마가 내게 전이해오는 것을 한사코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관련된 보도를 더는 듣거나 보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공감이라도 마음에 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압사…… 길거리에서 내 옆을 지나던 이웃들에게 갑자기 짓눌려 숨을 쉴 수 없게 되고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채 온몸이 으깨져가는 압사라니…… 이웃이 나를 눌러 죽이고 있는 동시에 그 이웃을 내가 눌러 죽이는 그런 끔찍함은 공감하기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보도와 사실보도가 홍수처럼 뒤섞여 쏟아지던, 그래서 공감으로부터 도피하는 게 불가능했던 세월호참사 때와 달리, 이태원참사에 대한 보도는 사망한 159명의 희생자의 얼굴, 사연, 유가족과 친지들의 처참한 심경,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거의 전하지 않았다. 얼굴과 이름과 사연을 전하려는 시도는 모두 ‘2차가해’로 몰아붙여졌고, 상주도 영정도 위패도 없이 애먼 국화꽃만 잔뜩 놓인 국가 공식 조문소를 혼자 반복해서 방문하는 대통령의 기이한 모습만 계속 보도되었다. 그렇게 죽음과 고통은 비가시화되었고, 피해자와 우리의 공통됨은 희석되었으며, 그런 만큼 그들의 아픔과 죽음에 정서적으로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이런 과정은 보수정부 그리고 보수언론이 세월호참사로부터 ‘배운’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연전에 필자는 박근혜정부에서 일어난 세월호참사를 이명박정부 시기부터 누적된 탈민주화(de-democratization)가 동반한 국가능력 약화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바 있다.1 이태원참사도 기본적으로 세월호참사와 같은 유형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태원참사는 국가능력의 퇴화를 세월호참사 때보다 더 순수하게 드러낸다. 세월호참사나 그 이전 용산참사가 보여주듯이, 커다란 참사는 항용 국가와 자본의 잘못이 겹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태원참사는 자본의 탐욕과 무관하고, 오롯이 국가가 마땅히 기울여야 했던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다.

국가능력의 퇴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세월호참사는 박근혜정부를 기준 삼아도 정부 출범 만 1년을 넘겨 발생한 사건이지만, 이태원참사는 윤석열정부 출범 5개월여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대형산불 방재나 코로나19 방역 같은 안전 영역에서 전임 정부가 보여준 능력에 비추어 보면 이런 능력 저하 속도는 놀라운 수준이다.

퇴행 범위도 전면적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대응 실패, ‘레고랜드 사태’와 잇따른 ‘흥국생명 사태’, 북한 무인기의 항공금지구역 침투 사태, 그리고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5세 아동 취학 논란 등은 국가능력의 퇴행과 혼선이 외교, 통상, 국방, 금융 그리고 교육 정책 등 여러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기구 가운데 ‘활력’을 띠고 있는 것은 전임 대통령과 전 정부 고위 관료, 야당을 대상으로, 그리고 윤석열정부에 도전적이라 생각되는 언론사, 노동조합, 시민단체를 향해 고도로 선별적인 고강도 수사를 전개하고 있는 검찰뿐으로 보일 지경이다. 검찰은 경찰, 감사원, 국세청, 그리고 마침내 국정원(국가정보원)마저 거느리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국정원은 최근 경찰과 함께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그리고 세월호 제주기억관 평화쉼터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 수색했는데, 국정원의 이런 행보는 현 정부와 지난 반년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 적극적으로 손발을 맞추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우리 정치의 무대에 좀비처럼 다시 올랐음을, 그리고 문재인정부가 국정원이라는 맹견에 씌우고자 했던 국내정치 개입 금지라는 목줄이 속절없이 풀렸음을 말해준다.2

이런 수준의 국가 운영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할 수는 없다. 실제로 윤석열정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국정 지지율 조사가 보여주듯이 싸늘하다. 그런 윤석열정부를 현재 지탱하는 것은 아직 그에게 임기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 검찰의 선별적인 고강도 수사와 기소가 그 대상자는 물론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그리고 여느 정부 시기보다 더 대자적(對自的) 의식을 획득한 엘리트 카르텔(이 카르텔을 구성하는 주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집권세력, 재벌, 보수언론이다)과 무모한 일부 극우단체의 연합 정도이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긴급성, 미·중 헤게모니 경쟁과 러시아-우끄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제정세의 복잡성, 분단체제의 모순과 폐해,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절박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현재 벌어지는 탈민주화와 국가능력 약화는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거나 강하게 반대하는 이들에게조차 걱정스러운 사태이다.

좀더 넓게 조망해보면, 윤석열정부의 등장과 그것에 이어지는 혼란은 촛불혁명이 담고 있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을 구현할 ‘대전환’을 감행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현 상황은 더 높은 봉우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기적으로는 어려움과 고통을 불러올 수도 있는) 계곡 앞에서 더듬거리며 소극적이었던 문재인정부와 그들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한 민주진보진영이 초래한 정치적 퇴행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러므로 윤석열정부의 수립에 반대해온 이들 또한 반대했다는 사실만으로 현 상황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는 없다.

여전히 요구되는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행의 계곡을 주파할 수 있는 식견과 통찰력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런 전환을 위한 하나의 작업으로서 우리의 정치적 인식을 관통하는 습속에 대한 성찰을 도모하고자 한다. 의식하든 않든 우리의 정치적 현실인식 배후에는 여러 가정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들의 행실에 주목하고, 그것을 그의 품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는 문화이다. 요컨대 우리는 정치를 정치인의 품행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데 익숙한데, 왜 그렇게 되는지, 그것의 댓가는 무엇인지가 이 글의 주제이다. 이 점을 보기 위해 우선 품행이 정치 변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사례를 되짚어보자.

 

 

2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서늘한 슬픔의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이른바 ‘친노 그룹’의 정치적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런 그의 죽음의 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논두렁 시계’ 논란이다. 문제가 된 시계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대표가 2006년경 농협 자회사 휴캠스의 헐값 인수를 위해 정관계 전반에 걸쳐 부정한 청탁을 시도하면서 노대통령의 형을 통해 노대통령에게 전달한 피아제사 시계이다(시계 이외의 뇌물 제공 여부에 대한 수사는 노대통령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피아제 같은 ‘명품’시계에 문외한이었던 권양숙 여사나 노대통령은 그것이 1억이 넘는 고가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고, 알고 난 뒤에는 ‘폐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 수사 중에 드러난 이 사실이 언론에 누설됐고, 그 과정에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식의 ‘고의적인 와전’이 일어났다(검찰과 국정원은 누설과 와전의 책임이 서로에게 있다고 우겨왔다). 보수언론은 즉각 입을 모아 노대통령이 ‘1억짜리 시계를 봉화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보도했는데, 자극적인 보도와 만평5이 쏟아지자 노대통령을 좋아했고 이명박정부와 검찰이 전임 대통령을 과도하게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이들 중에도 혀를 차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노대통령에 대한 평판 저하는 퇴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으로 그를 탄핵에서 건지고자 거리에 섰던 지지자들마저 불편하게 만들 때가 빈번했다. 노대통령은 대통령에게 부여된 ‘의전적’ 기능에 매우 소홀했던 셈인데, 그 결과 지지자들조차 점차 그런 품위 없음에 염증을 느껴 그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퇴임 후 그의 평판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손녀를 뒤에 태우고 봉하마을 ‘논두렁’길을 따라 자전거를 몰던 밀짚모자 차림의 수수한 모습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실망과 반감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논두렁’ 시계는 그 목가적 풍경을 갑자기 추악한 것으로 만들었고, 노대통령을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진창에 깊숙이 처박았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 길을 열었다.

품행이 정치적 공간 한복판을 휘젓는 힘을 발휘한 사례가 노대통령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는 ‘절제된’ 언어와 처신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정당 지도자로서는 적정 수준일 수 있었던 절제된 언행이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소통과 활동으로는 지나치게 모자랐다. 절제는 서서히 게으름의 징표 그리고 권력행사 방식의 이상징후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으며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 늘어갔다.6 그러다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8시간이 넘어 중대본에 나타난 박대통령이 했던 첫 질문, 즉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지극히 부적절한 발언은 그때까지 권력 상층부와 기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대통령의 자질에 대한 의심을 모든 국민이 품게 만들기 충분했다. 세월호참사 발생 시점부터 그것을 보고받고 대응조치를 하기까지 공백으로 남은 박대통령의 ‘7시간(또는 7시간 반)’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이어졌고, 제대로 해명하지 않는 대통령을 향해 옛 보좌관인 정윤회와의 만남설, 종교의식 참석설, 프로포폴 투약설, 미용 시술설 등 갖가지 의혹이 이어졌다. 품행을 둘러싼 그런 의혹들은 대통령의 평판을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탄핵으로 가는 길을 예비했다.

품행은 이렇게 대통령쯤 되는 인물의 운명에만 깊은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아니다. 환경운동가 최열, 윤미향 의원, 조국 전 법무부장관, 그리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가 유사한 일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 한결같이 처음 보도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들의 품행에 대해 놀라고, 허탈해하고, 혀를 찼다. 너무나 크게 논란이 되어 기억에 생생한 조장관의 예를 보자. 그의 법무부장관 청문회를 앞두고, 가족 간 아파트 ‘위장매매’ 의혹을 필두로 사모펀드 투자와 그 사모펀드가 투자한 기업에 대한 특혜 의혹 그리고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 보도가 말 그대로 눈사태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이런 보도들은 거의 매번 조장관의 교수 시절 발언을 인용하고 의혹들과 대조했다. 전형적인 기사 제목을 들자면 이렇다. “‘위장전입, 시민 마음 후벼판다’더니… 조국 본인도 위장전입”.7 조장관은 ‘내로남불’ 그리고 ‘위선적인 강남좌파’의 대명사가 되었고 법적 과정 이전에 사람들 마음속에서 도덕적 유죄 판결을 받았다.

타인의 품성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이나 판단은 일단 형성되면 반박하는 사실이 제시되어도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 최초 형성은 사회적 교류 속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지고 확산도 쉽게 된다. 정직하게 돌이켜보면 비난에 동참한 이들 대부분이 품행을 의심받은 이들에 대해 직접 확실하게 아는 정보가 없었다는 것,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점검할 만큼 사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의견과 주장이 실은 부정적 보도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신보다 확신에 차서 언성을 높이던 주변 사람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따금 말을 거들어주기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정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며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는 나르시시즘의 회로를 따라 발언을 주장으로 그리고 신념으로 굳혀가곤 한다.8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을 경유하며 부단히 일어나는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심미적 판단 융합, 그것이 바로 정치와 품행의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논의 주제로 삼아야 할 이유이다.

 

 

3

 

품행은 품성(마음가짐)과 행실 또는 처신(몸가짐)을 아우르는 말이다.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말이 여럿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헥시스(hexis)가 품성에 해당한다면, 에토스(ēthos)9는 습관적으로 몸에 밴 행동거지, 즉 행실/처신에 상응할 것이다. 이외에 영어의 ‘컨덕트’(conduct)나 부르디외(P. Bourdieu)가 정교화하고 널리 전파한 하비투스(habitus)10 개념도 품행이 지칭하는 것과 대략 그 외연이 일치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애티튜드’(attitude) 같은 말도 유사한 지칭으로 보인다.

아무튼 지금 거론한 몇개의 표현들만으로도 다양한 시대와 상황에서 계속 품행이 주제화되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타자의 품성에 대한 인지가 사회적 삶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람은 믿을 만한가?’만큼 중요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타자의 행실로부터 그의 품성을 알아내고자 하고, 자신의 행위를 잘 조율함으로써 좋은 품성을 지녔다고 인정받으려 애쓴다.

그러나 행실에서 품성을 추론하는 것이 늘 타당한 것은 아니다. 행위는 품성뿐 아니라 상황적 요인에서 비롯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품성과 상황 가운데 하나만이 행위를 유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둘 중 더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상황(더 폭넓게 말하면 사회구조적 요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점을 도외시하고 행위의 원천을 개인의 품성에서 찾으며 또 몇몇 행위로부터 과도하게 품성을 추론해낸다.11

품성을 강조하는 민속심리학(folk psychology)적 격언들과 달리 실제로는 평소 소신대로 행동하는 굳센 이도 낯선 상황에서는 타인의 행동을 살피고 그것에 동조한다.12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품성에 내장된 일관성과 통합성이 생각만큼 상황 초월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늘 자기 기준을 지켜 행동하는 행실 바른 사람의 모습은 다양한 상황에서도 일관성을 지켜내는 품성의 힘 덕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처한 새로운 상황이 실은 그에게 익숙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즉 정말로 낯선 상황 또는 한계 상황(limit situation)에 처하진 않은 덕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도 상황이나 구조보다 행위자와 품성에 눈길이 더 끌리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배경처럼 주어진 상황보다는 전경을 차지하고 활동하는 행위자가 인지적으로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상황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인물에 주목할 때보다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런데 주목을 위한 에너지는 매우 희소한 자원이라서 우리에게는 그것을 절약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책임 문제도 있다. 세상은 전쟁, 내전, 지진, 감염병, 미세먼지, 경기 침체, 정전이나 데이터센터 화재, 실족, 익사, 교통사고, 과실치사상, 건조물 붕괴 같은 무언가 나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나쁜 일에 직면해 우리는 책임을 묻게 되지만, 상황이나 관행 또는 사회구조가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 그리고 그의 의도와 품성에 주목한다.

정치 영역에서는 인물과 품성이 더 큰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것의 실행과 운영은 여전히 인치(人治)의 몫으로 남는다. 따라서 공직자의 도덕성과 품성은 중요한 정치적 검증 항목이다.13 대통령제에서는 이런 점이 내각책임제에서보다 더 크게 두드러진다. 내각책임제에서는 총리와 행정부 책임자들도 의원‘들’이며, 정치 과정도 대통령제보다는 한결 원내 정당들 그리고 의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수행되고 그렇게 관찰된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는 인민의 의지가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격화될 뿐 아니라 실제로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직 및 자원 분배 권한도 막강해서 그의 품행이 정치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래서 늘 정치적 관심은 현 대통령 그리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에게 쏠린다.

이런 조건에서는 언론도 정치인의 품성에 초점을 맞추어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보도는 정치인의 도덕성 검증이라는 언론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좋다. 또한 품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기사 소비자는 물론이고 생산자인 기자 스스로도 ‘이해’하기 쉽다. 가령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사를 쓸 경우, 외교 의제를 깊이 파고드는 것보다 의전을 다루는 것이 쓰기도 쉽고 대중의 주목도도 높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후자의 ‘가성비’가 훨씬 나은 셈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회, 즉 녹음기와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회에서는 품성을 시사할 처신과 발언이 아주 풍부하게 채집되고 제보되며, 그런 자료의 가치는 매우 크다. 정책적 의제를 다룬 기사에서 화면과 음성은 이해를 돕는 보조자료이지만, 행실을 다룬 기사에서 화면과 음성은 그 자체가 증거자료로 간주되고, 그만큼 큰 반응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4

 

행실이나 처신을 보고 품성을 판단하는 일은 단번에 이뤄지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사고의 징검다리 몇개를 경유한다. 우선 어떤 행위가 적절한 행실/처신인지에 관한 판단이 이뤄진다. 사실 어떤 행위가 적절성 범위 안에 있는지 그것을 벗어났는지는 사회문화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출근길 약식회견에 대통령이 눌린 머리에 뒤집어 입은 듯한 바지 차림으로 나타나거나 대통령실 출입기자가 슬리퍼를 신고 나온 것이 적절성의 경계를 넘어선 일인지는 애매하다. 어떤 이는 둘 다에, 또다른 이는 둘 중 어느 하나에만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14

일단 어떤 행위가 부적절한 행실/처신이라고 여겨지면, 그것이 ‘일회적’인지 ‘징후적’인지 따지게 된다. 둘을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은 반복 여부겠지만 한번 내비친 모습도 때로는 징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중요한 식사모임에 참석한 성인이 저도 모르게 콧물을 흘린다면 심한 감기에 걸린 탓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침을 주룩 흘리는 것은 징후적으로 보일 수 있다. 후보 시절 KTX에 탑승한 윤대통령이 맞은편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놓은 것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한번 포착된 일이었으나 “노매너 몰상식”의 징후로 비판을 받았다.15 하지만 장시간 이동으로 가벼운 다리 경련이 일어나 그랬다는 국민의힘 선대위의 해명이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도 상당수 있다. 이렇게 품행 판단은 폭넓은 모호성의 지대 안에서 이뤄지며, 그런 만큼 늘 갑론을박이 이어질 소지가 있다.

징후적인 것으로 판단된 때도 그것이 무엇의 징후인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국정감사나 회견 중에 상대의 발언이 초점을 잃었거나 타당성이 없다고 느껴지면 “흐흐흐” 웃곤 했다. 그런 ‘버릇’은 석연치 않게 보이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의 징후인가? 대선 예비후보 때 윤대통령이 논평했듯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한 것일까? 혹은 일부 국민의힘 지지자 단톡방에서 떠돌았듯이 ‘싸이코패스’의 징후일까? 발열은 질병의 징후일 수 있지만 발열을 유발하는 질병은 수십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징후는 해석 작업을 자극하지만 어디까지 타당하고 어디가 그쳐야 할 지점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도 품성 판단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 내면에서 재빨리 그리고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떤 인물의 품성에 대해 이미 내렸던 판단을 바꿀지 고민할 때 정도이다. 행실에서 품성으로 나아가는 판단은 왜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것일까? 타인의 품행에 관해 판단 내리는 기준이 자신의 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문제를 하비투스 개념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는데, 그의 논의를 빌리면 우리들의 도덕적·심미적 판단은 우리 자신의 품행을 토대로 하며, 우리의 품행은 가족이나 학교, 자신이 속한 사회적 장(field)에서 길러지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행실이 상황에 적합한지 판단하거나 그것이 어떤 품성을 함축한다고 판단할 때, 거기에 투영된 것은 판단 대상의 속성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의 행로 그리고 자신이 잘 처신하며 살고 있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깊이 생각해볼 만한 중요한 논란이 이대표의 ‘형수 욕설 파문’이다. 이 파문은 2014년 성남시장이었던 이대표가 형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설전을 벌인 통화의 녹취파일 유출로 일어난 일로, 201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 이대표가 뛰어든 모든 선거에서 그를 괴롭혔다. 여성의 성기를 훼손하겠다는 욕설을 퍼붓고 있는 녹취파일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심한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공포감마저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수진영 지지자라면 그의 욕설이 불쾌하고 혐오스럽기는 해도 인지적으로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진보진영의 지지자들에게 그 혐오감은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초래했다. 이런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혐오감 때문에 그가 민주당의 경기지사 후보, 대선 후보, 그리고 당 대표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쪽으로 나아갔다.16 다른 한 갈래는 그의 다른 능력을 좋게 보고 지지하면서 욕설 파문을 의식 한쪽 구석에 격리해버리고자 했다. 물론 감정적 확신뿐 아니라 정치산술 때문에라도 욕설 파문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려는 이들이 있는 환경에서 이런 격리가 충분히 성공적이긴 어렵다.

아무튼 민주진보진영 지지자에게는 혐오 아니면 의식으로부터의 격리라는 양자택일만이 주어진 듯이 보이지만, 둘 다 인지부조화를 서둘러 해소하려는 심리의 산물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7 인지부조화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인지부조화를 견디며 그것을 생각의 주제로 삼는 것, 이 경우에는 욕설 파문을 품행과 관련해 제기되는 쟁점에 비추어 찬찬히 살펴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대표가 형수에게 한 욕설은 어느 정도나 상황적이고 어느 정도나 품성 또는 기질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일회적인가, 징후적인가?

해당 음성파일을 공개할 때는 편집 없이 전체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 ‘덕분’에 좀더 소상히 알려지게 된 욕설 파문의 맥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대표의 욕설에 앞서 (정신적인 문제로 치료를 받고 있던) 이대표의 형, 고(故) 이재선씨가 먼저 모친에게 격렬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재선씨의 욕설에 분노한 이대표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형 대신 형수가 전화를 받았다. 형수는 극도로 분노한 상태의 이대표에게 계속 빈정거렸다. 그러자 이대표는 형이 모친에게 한 것과 같은 욕을 먹어보면 어머니나 자신의 심정을 알게 될 것이라며 널리 유포된 바로 그 욕을 형수에게 쏘아붙였다. 이재선씨 측은 그런 욕이 이대표로부터 터져나오게 사실상 유도했고 그것을 녹취했으며 결국 세상에 퍼뜨렸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이대표의 욕설이 상황적 요인에 의해서 유발된 면이 강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맥락에 대해 알게 되어도 음성파일로 욕설을 접한 사람은 처음의 오싹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격렬한 욕은 그냥 말이 아니라 찌르고 덮치고 난도질하는 말이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그런 욕을 듣는 것은 일종의 충격 체험이며 충격은 정서적 고착을 유발한다.

그런데 충격이 충격인 까닭에는 그것이 기대를 크게 벗어나는 체험이라는 점도 있다. 그리고 그 기대 안에는 우리 자신의 품행 또는 하비투스가 어른거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욕설 파문을 이대표의 품성과 연결하고 판단하는 시선 속에 우리 자신의 품행과 그것을 형성한 삶의 궤적이 연루되어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상의 가족들을 이해하는 모델은 자신의 가족이다. 다른 가족이 겪는 갈등의 양상이 큰 어려움 없이 이해되는지 아닌지는 둘 사이의 계급적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에 크게 좌우된다. 격차가 크면 이해는 쉽지 않아진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욕설 파문의 맥락을 보자. 그 속에서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가족과 그 안에서 벌어진 지독한 불화이다.18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모두 불화를 겪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행복과 반듯한 행실을 일궈낼 가능성을 쉽게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하면 할수록 그 행복이 수수깡처럼 연약해진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부는 한결 든든한 안녕의 조건일 뿐 아니라 좋은 품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2019)에서 기택(송강호 분)과 그의 처 충숙(장혜진 분)이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는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기택: 이 사모님이 참 순진해, 착하고. 부잔데 착하다니까.

충숙: ‘부잔데 착해’가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뭔 소린지 알어? 솔직히 이 돈이 다 나한테 있었어봐. 나는 더 착하지, 착해.

기택: 그건 그래. 네 엄마 말이 맞아. 부자들이 원래 순진해, 꼬인 게 없고. 부잣집은 또 애들이 구김살이 없어.

충숙: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좌악 펴줘.

 

더욱이 가난의 연약함이란 질병, 사고, 파산, 실업 같은 불운을 견딜 힘이 허약하다는 것만 뜻하진 않는다. 가족 가운데 하나가 거둔 이례적인 성취나 성공(이대표는 전형적으로 그런 사례이다) 또한 가난 속에서 어렵게 지킨 마음의 균형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그런 성취나 성공은 그것을 이뤄낸 이는 물론이고 나머지 가족 성원 모두가 자아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수치와 서운함 같은 감정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러다가 크게 어그러진 감정은 분노를 주고받으며 부풀어 올라 언제든 지옥도를 그려낼 수 있다.

아무리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고 해도 어떻게 그처럼 심한 욕설을 입에 올릴 수 있느냐고 여전히 반문할 수 있다. 그런 반문에는 자신은 같은 상황이라도 그런 격정에 휘말리지 않으리라는 가정이 들어 있다.19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사람들은 누군가의 뒤꿈치에 짓밟혀보지 않는 한 자신이 뱀인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장담하는 이는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나르시시즘이 지나친 것일 뿐이다(그런 의미에서 욕설 파문은 우리의 자신에 대한 성찰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다고 할 수 있다).

 

 

5

 

이제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자주 품행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어온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를 검토해보자. 윤대통령은 박근혜정부 시절 권력 상층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호쾌한 언사와 행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문재인정부에서 검찰총장이 된 뒤 대통령에 맞서며 대통령 측근, 특히 조국 전 장관과 그 가족을 ‘사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납게 수사하면서 그에 대한 평판은 둘로 쪼개졌고, 이후로 그의 품행은 줄곧 정파적 해석 아래 놓여 있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보기에 그는 성정이 포악하고 일거수일투족이 품위 없고 저속한 사람이지만, 지지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호쾌하고 강단 있는 정치인이다.

엇갈리던 평판은 대통령 취임 뒤 부정적인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반대자들뿐 아니라 정당 소속감이 약하거나 정치와 심리적 거리를 둔 시민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부적절한 처신이나 발언 사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가운데 신림동 수해현장을 방문해서 그가 보인 언동은 모든 국민이 개탄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사례는 지난해 9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해 바이든과 이른바 ‘48초 회담’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중에 했던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발언이었다.

사실 윤대통령의 수많은 부적절한 행실이나 처신 가운데는 양해해줄 만한 것들도 꽤 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고용노동부의 ‘주 52시간 근무’ 제도 개편 발표 다음 날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던 발언 등이 보여주듯이) 국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거나 (아랍에미리트 국가가 연주되는 중에 혼자 손을 가슴에 얹고 있던 것처럼) 의전에 서툴러서이다.20 다시 말해 그의 실수나 실언은 정치적 초보여서 저지른 것이 꽤 많은데, 초보인 걸 알면서도 그를 시의원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대한민국 보수 유권자들 아닌가? 물론 그런 점이 부끄럽긴 하나 드문 일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렇고, 우끄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 또한 그런 사례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이어진 정치적 양극화로 중도 중심의 국민정당이 신뢰를 상실하고 호전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는 일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런 면을 십분 인정한다고 해도 ‘바이든’ 발언은 타국 정상과 의회를 향한(그래서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지나치게 저속한 발언이었다. 이런 경우 상식은, 공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풀어진 상태에서 거친 언사를 내뱉는 것이 백보 양보해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그런 언사가 일단 공중에 포착된 한에서는 정중하고 진솔하게 사과해야만 한다,일 것이다. 그런 상식에 비춰 볼 때, 윤대통령의 사태 수습 방식은 자비의 원칙(the principle of charity)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그의 품성을 근본적으로 의심케 할 만한 것이었다. 사과는커녕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날조하여 사람들의 ‘감각적 양심’을 꺾으려 하고,21 그것을 처음 보도한 MBC만을 집요하게 괴롭히며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고 소송까지 벌인 것은, 그가 제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할 줄 모를 뿐 아니라 권력을 남용해서라도 그것을 지워 없애려는 품성의 사람임을 여실히 입증한다. 그러므로 언론과 국민을 윽박지른 대통령에 단호히 맞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감각적 양심에 대해 충실성을 견지하며 대통령의 잘못을 끝까지 추궁할 만큼 용기있지 못했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대통령의 품행을 둘러싼 논란은 짐작건대 점차 잦아들 것이다. MBC 기자의 무례한 질문 때문이라는 졸렬한 핑계를 대긴 했으나 어쨌든 실언과 망언의 ‘공장’이었던 출근길 약식회견을 중단했다. 그즈음부터 대통령의 모습과 발언이 대통령실에서 제공하는 통제되고 편집된 자료를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으며, 당연히 개최될 줄 알았던 신년 기자회견마저 ‘우발적’ 위험을 피하려 신년사 중계와 조선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로 대체됐다. 윤대통령은 그 인터뷰22에서 “윤석열다움이라는 건 ‘쇼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그래도 (지지율을 위해서는—인용자) 쇼라도 해야 한다는 유혹을 안 느끼나”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윤석열다움과 대통령다움은 좀 다르다고 본다. 윤석열다움이라고 할 때는 검사 때 타협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점 때문에 국민들이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대통령은 검사와 하는 일이 다르다. 국민들이 든든하게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 대통령다움 아니겠는가.

 

취임 8개월차에야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연하지만 아무튼 이 말이 함축하는 바는 대통령다움을 ‘전시하기’ 위해 더욱 통제된 방식을 취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다움이 윤대통령 머릿속 ‘다움’인 한에서 ‘윤석열다움’을 벗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대통령 부인의 품행이 대통령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논란거리가 될 때가 많으니 품행 논란의 소재가 쉽게 고갈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지율 하락에 예민한 상태에서 나름대로 공들여 편집한 영상을 보여준다면, 더구나 그것에 협조적인 언론매체가 다수라면, 품행 논란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관련해서 검토해볼 만한 사례가 올해 초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방문 중에 윤대통령이 했던 발언이다. 장병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는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고 말했다. 여러 보도가 이 발언을 “망언”이나 “설화”로 규정했다. 즉 또 하나의 품행 논란 사례로 다룬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윤대통령을 둘러싼 품행 논란이 줄어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하는 이들도 많다. 확실히 이 발언에는 국정 파악에 게으르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사안에 (이란 측 지적대로) “경솔하게 나대는”(meddlesome) 윤대통령의 품성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품행과 관련한 해석은 부차적이다. 복잡한 외교적 사안23이 네오콘적 세계관 안에서 오독됨으로써 빚어진 ‘참사’로 규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고 본질에 다가선 사태 파악이라 할 수 있다. 해당 발언이 기자들의 현장 취재를 통해 (우연히 또는 어쩌다가) 포착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제공한 영상자료를 통해 알려졌다는 점이 그것을 방증한다. 보도 조절과 통제를 통해 품행에 책잡히지 않겠다는 전략이 세워진 시기에 대통령실이 해당 영상을 내보냈다는 것은, 대통령이나 대통령실 관계자들 모두 이 발언을 문제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란이 주한 이란대사를 초치한 것에 대해 한국대사 ‘맞초치’로 대응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대통령의 실언이라기보다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비서들 그리고 집권세력 전반에 서린 위험한 세계관과 정책적 무능력에서 비롯한 ‘정상적 사고’(normal accident)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24

“UAE의 적은 이란” 발언이 정책적 사안이 품행 문제와 뒤섞여 초점을 잃은 사례라면, 중대한 정책 사안이 품행 논란에 떠밀려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할 때도 있다. 지난해 11월 동남아시아 순방 때 윤대통령이 발표했던 인도·태평양 전략 동참 선언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언론매체들은 이 심각한 선언을 논쟁과 비판에 회부하기보다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 배제와 그것에 연결된 대통령의 협량함을 다루는 쪽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이나 방송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전용기 탑승 배제가 언론의 취재권 침해 그리고 공적 자산인 대통령 전용기 운용 방식의 민주적 정당성과 관련된 중요 사안이긴 하다. 그런 점도 품행 문제에 가려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외교정책적 사안 또한 품행 논란에 묻혀 엄중하게 논의되지 않은 채 밀려났다.

이런 일들이 말해주는 바는 품행 논란이 심한 대통령일수록 역설적이게도 품행 비판에 수반되는 위험도 더 커진다는 것이다. 품행에 문제가 많은 정치인일수록 정치를 더욱 품행 중심으로 조망하도록 이끌고 그에 대한 비판도 품행에 집중되도록 유도하는데, 그 결과 정책적 비판이라는 더 중요한 과제가 시야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6

 

품행에 눈길이 끌리는 것을 피하긴 어렵다. 품행은 사람들이 흔히 가정하는 것만큼 일관성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대적 안정성을 지니고 있고 그만큼의 예측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사회구조적 요인이 더 중요하지만 복잡하고 논쟁적인 측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부담이 크다. 그러므로 사유의 경제성이라는 면에서 품행은 이점이 많다. 신뢰할 수 있는 대표자 선출이 정치적 중심과제인 유권자들 또한 그런 이유로 품행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품행 논란에 직면할 때, 특히 정치적 장에서 그러할 때, 우리는 좀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임할 필요가 있다. 일단 품행에 관해 판단을 내리고 나면 매우 강렬한 도덕적 감정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품행이 나쁘다고 판단된 사람에 대해 우리는 반감을 느끼고 기피하게 되며, 반감이 강렬하면 분노로까지 치닫고 대상에 대해 징벌 욕구마저 품게 된다. 감정은 주체에게는 자명하고 확실한 체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고 표출한 뒤에 그것을 면밀하게 다시 성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지며, 품행 평가의 기준에 깃든 자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성찰은 더더욱 힘겨워진다.

또한 품행 논란은 일반적으로 정치를 인격적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상황과 구조에 대한 인식을 뒤로 밀쳐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효과는 집권세력과 반대세력 가운데 전자에 더 유리할 때가 많다. 품행을 둘러싼 논란은 의도하든 않든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집권세력이 진행하는 사회적 세력 재편, 공유지 약탈 또는 음성적 자원 재분배 등이 비가시화되고, 그로 인해 집권세력의 기획에 대한 저항도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다.

에너지, 노동, 금융, 외교와 국방, 미디어, 남북관계 등과 관련된 중요 정책들보다 대통령의 품행에 더 주목하다보면 비판이 어느덧 그를 흉보는 것으로 퇴행할 위험도 있다. 이미 정파적으로 분화된 미디어를 소비하며 자기확증을 강화해나가는 경향이 심해진 상황이라 야권 지지자들이 규범적 정당성과 정책적 대안에 기초한 비판 문화를 잃고 일종의 험담 공동체로 퇴락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 가운데 이뤄지는 품행 조롱의 문화는 그럴 만한 소재를 계속해서 찾고 탐닉하는 행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으며, 그만큼 공론장은 허약해지고 사회운동적 역량도 퇴조하게 된다.

이런 경향에 함축된 위험 가운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조롱하고 경멸하면서 허구적 우월감에 빠져 자기성찰 과제를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자기성찰과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대안 마련을 향한 내적 동력이 강해지긴 어려운 법이다. 실제로 혐오가 비판을 대체하고, 경멸이 대안 모색을 대신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다들 지난 대선 패배의 핵심에 부동산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마땅하다. 전세자금대출이나 임대사업자등록 같은 ‘선의’의 주택 정책들이 ‘악덕’이 되어 되돌아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면밀한 성찰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토의가 조직되어야 할 텐데 그런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위성정당을 낳았던 지난 총선을 생각하면 선거법 개정 방향에 대한 논의도 지금보다 훨씬 더 공개적이고 치열해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현 대통령의 나쁜 품행과 무능력에 기대어 안이하게 다음 총선을 기다리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 대통령의 품행에 문제가 많다고 해도 품행 비판의 화살이 지금처럼 대통령만을 향하리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품행 논란은 지난 정치 과정이 입증하듯이 언제든 윤대통령의 반대파를 향해서 더 날카로운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 더구나 품행을 공격함으로써 정적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더 큰 자원을 보유한 쪽은 집권세력이다. 압수수색권을 가진 검찰과 프레임 구성에 능란한 보수언론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품행 공격을 눈사태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폭주로 만들어가는 일을 우리는 이미 자주 보아왔다. 언론 지형과 매체 성향 역시 이런 점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민주진보진영의 어떤 인물의 품행에 문제가 있다면 진보적 매체들은 원칙적 입장에서 비판에 나선다. 그 결과 진보적 매체와 보수적 매체 모두가 그를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그로 인해서 일종의 시너지 효과마저 발생하지만, 보수진영 인물의 품행 문제에 대해 진보 매체가 제기한 비판은 게토화되고 사회적 반향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인물과 품행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그것을 경유한 정치 인식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의 과잉을 경계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행실과 처신의 적절함을 문제 삼기 전에 논란이 제기되는 맥락에 대한 감수성, 품행에 대한 비판이 타당성을 갖는 범위를 가늠하는 분별력, 품행 논란 때문에 뒤로 밀려나는 의제를 놓치지 않는 안목, 감정적 동원에 휘둘리지 않는 침착함, 때로는 흥분한 여론에 맞서는 용기, 상황과 사회구조에 계속해서 주목하는 인지적 끈기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대전환’이라는 과제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작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은 공부의 하나일 것이다.

 

 

  1. 개방적이고 복잡한 사회체제는 국방, 외교, 치안, 재난관리, 방역, 금융과 산업 정책은 물론이고 주택, 교육, 보건 등 사회복지를 아우르는 국가의 공공재 공급 능력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데, 그런 능력은 국가의 민주화와 선순환 관계를, 그리고 탈민주화와 악순환 관계를 맺는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졸고 「바꾸거나, 천천히 죽거나: 87년체제의 정치적 전환을 위해」, 『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 15~41면 참조.
  2. 국정원의 행보가 어디로 뻗을지를 시사하는 또다른 사례는 2022년 11월 윤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촛불중고생시민연대’를 서울시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사 의뢰한 일이다.
  3. 백낙청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 2022.12.30 참조.
  4. 노대통령의 죽음이 ‘친노’ 그룹에게 운명과 같은 무게를 지녔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1년 펴낸 책의 제목이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울러 대통령 비서실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던 문 전 대통령이 정치에 복귀한 계기, 문정부에서의 검찰개혁과 그것의 실패 같은 일련의 사태는 모두 노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의 죽음에 연결된 일들이다.
  5. 만평 가운데 하나는 ‘봉하궁(宮)’으로 묘사된 노대통령 사저 앞 논두렁에 사람들이 몰려와 시계를 찾는 모습을 그렸다. 시계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1억짜리 시계 두개, 찾는 사람이 임자다”라는 말풍선이, 그들을 바라보는 노대통령에게는 “아직도 내 지지자들이 구름같이…”라는 말풍선이 붙어 있었다. 조선일보 만평 2009.5.15 참조.
  6.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대면보고 관련 발언 논란이 있다. 「장관들 돌아보며 “대면보고 필요하다 생각하세요?”」, 중앙일보 2015.1.13 참조.
  7. 조선일보 2019.8.16.
  8. 일단 신념이 되면 증거 부재와 반증마저 쉽게 이겨낼 수 있다. 가령 어떤 이가 악당이라고 믿으면, 그가 악당이라는 객관적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해도 오히려 그런 사실이 그가 진짜 악당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그냥 악당이 아니라 증거를 완전히 인멸할 정도로 치밀한 악당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9. 그리스에서 유래하여 습관 또는 습속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에토스는 ēthos가 아니라 ethos이다. 그러나 초성이 장음(ē)이냐 단음(e)이냐의 차이밖에 없는 두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하듯이 습관/습속과 행실/처신의 내적 연관을 드러내준다.
  10. habitus의 한글 표기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habitus는 고전 라틴어에서는 ‘하비투스’로 발음되었지만 중세 가톨릭 라틴어에서는 ‘아비투스’로 발음되었다. 프랑스인인 부르디외는 habitus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채택할 때, 프랑스인들에게 한결 친근한 가톨릭 라틴어 발음으로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표기할 때는 고전 라틴어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된다. habitus를 ‘아비뛰스’(또는 ‘아비튀스’)로 쓰거나 발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이 말을 불어로 인식하거나 완전히 불어화된 말로 받아들여서이다. 이렇게 되면 일상어와 거리를 둔 학문적 개념어로 쓰기 위해 굳이 라틴어를 활용한 부르디외의 의도와 어긋나게 되며, 우리의 경우에는 하비투스가 아닌 아비투스로 표기하는 것이 그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
  11. 사회심리학자들은 행위의 원인을 인격이나 품성에서 찾으려는 이같은 경향을 ‘근본적 귀인(歸因)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 부른다.
  12. 잘 알려진 사례로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동조실험이 있다.
  13. 정치인을 포함해서 공직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도덕성과 능력을 꼽을 수 있을 텐데, 둘 중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도덕성이다. 한 인물의 공직 적합도를 두 기준에서 받은 점수의 곱으로 표시한다면 능력은 언제나 가장 떨어질 때도 양(+)의 값을 갖지만, 도덕성은 음(-)의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고만고만하고(1점~10점 기준으로 5점) 도덕성도 고만고만하다면(-10점~+10점 가운데 2점) 그의 공직자로서 사회적 효용은 5×2=10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능력이 출중하지만(9점) 도덕성이 나쁘면(-2점) 사회적 효용은 9×(-2)=-18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공공의 삶에 최대의 피해를 안기는 공직자는 무능하고 부패한 공직자가 아니라 유능하고 부패한 공직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에 더 많은 사람이 불쾌감을 표시했던 것은 사람들이 이런 점을 직관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14. 어떤 행위는 적절성 범위 안에 있는 것을 넘어 탁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사학』이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aretē)을 중심으로 품행(에토스와 헥시스)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탁월성을 경쟁하는 문화를 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와 품성의 관계는 탁월성보다는 부적절성의 견지에서 다루는 것이 적합해 보이고, 다뤄야 할 예로 떠오르는 것들도 대부분 그런 것들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탁월성을 다투기보다 서로의 부적절성을 탄핵하는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 「‘쩍벌’ 윤석열, 이번엔 기차 좌석에 구둣발… “공중도덕 없냐”」, 한겨레 2022.2.13.
  16. 물론 민주당 내 이대표에 대한 비토 세력이 이 문제 하나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며, 역으로 이대표를 거부한 세력이 정치산술상 이 문제를 부각시킨 면도 강하다. 어느 경우든 욕설 파문이 비토 정서가 자라고 고착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17. 인지부조화 이론을 창설한 페스팅거(L. Festinger)가 지적하듯이,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려는 작업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인지부조화적 사태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사태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의지보다 인지부조화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지부조화에 직면해서 필요한 ‘진정한’ 작업은 무의식적이고 재빠른 부조화 해소가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그것에 머무르며 정면에서 응시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18. 이대표의 아버지는 시장 청소부였고 어머니는 (지금은 사라진) 유료화장실 수금원이었으며, 그의 여섯형제 가운데 다섯의 직업은 광부, 요양보호사, 청소회사 직원, 야쿠르트 배달원, 환경미화원이다. 이대표와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셋째 형 이재선씨는 회계사가 되었지만, 정신병으로 고생하다가 폐암으로 사망했다. 가족 내 갈등이 가장 ‘출세한’ 이대표와 ‘그다음으로 출세한’ 셋째 형 사이에 벌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19. 중산층 출신이라면 이대표가 한 욕설 비슷한 것도 입에 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중산층 출신도 엄청난 분노에 빠지는 일은 있다. 그러나 그럴 때 그는 하층(그리고 당연하게도 상층) 출신과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것이다. 그때 그 다른 방식이 욕설보다 더 끔찍할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20. 윤대통령의 부적절한 언행이 서투름의 징후일 뿐 아니라 게으름의 징후이기도 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대통령의 의전, 특히 외교적 의전은 비서진과 관련 부처에 의해 면밀하게 준비되므로 대통령 자신이 성실하게 준비하면 잘못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21. 양심의 파괴에도 수준이 있다. 도덕적 양심보다는 논리적 양심이, 논리적 양심보다는 감각적 양심이 파괴하기 어렵다. 감각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는 것은 환각과 감각의 경계 상실, 즉 병리적인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22. 「尹 “지역 따라 중대선거구제 검토… 편중인사? 지역·학교 안따져”」, 조선일보 2023.1.2.
  23. 이명박 전 대통령이 UAE 원전수주를 위해 맺은 어처구니없는 비밀군사협약으로 인해 우리가 당면한 외교적·군사적·헌법적 곤경에 대해서는 「尹 외교 설화, UAE 비밀군사협약으로 불똥 튀나」, 노컷뉴스 2023.1.20 참조.
  24. “UAE의 적은 이란” 발언을 싸고돈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발언은 물론이고 나토 정상회의에서 최상목 경제수석이 했던 ‘탈중국’ 발언을 비롯해 북한 무인기 침투에 대해 “확전 불사”를 외치고 올해 국방부와 외교부 신년 업무보고 자리에서 우리의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한 대통령의 발언 등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김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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