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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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다시 문 앞으로 돌아온 시인의 초상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등이 있음.

agbai@naver.com

 

 

‘나’와 ‘시인’

 

고형렬은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창비 2023) ‘시인의 말’의 제목을 「나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어느 시인의 문 앞에서」라고 지었다. 여기서 ‘나’와 ‘시인’의 관계는 뭘까. 이를 알려면 시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하여 2년 반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경험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1972년 2월, 고형렬은 가족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제주도로 향했다. 이때 잔설이 깔려 있던 길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금고에서 아버지의 돈을 좀 ‘빌려서’(시인의 표현이다) 안주머니에 넣고 작은 가방에 옷가지와 신발을 챙겼는데, 어머니가 저쪽에서 ‘형렬아, 어디 가냐’라고 묻길래 친구 집에 잠깐 간다고 한 뒤 그길로 집을 나와버렸다. 사실 그는 제주도로 건너가는 바다에서 자살을 할 결심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제주로 출항하는 배는 저녁에 출발해서 이튿날 새벽에 제주항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타서 계속 잠을 자지 않은 채로 새벽 2시쯤 고물로 나와 어둠 속에서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일으키는 물굽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안으로 들어왔더니 남루한 포대기를 두른 어떤 제주도 여자가 아이를 껴안고 있었다. 날이 추워 아이가 칭얼댈 때마다 여자는 아이를 달랬고, 그 모습을 보다가 그 여자 옆에 앉은 채로 제주항에 배가 떨어졌다. 거기서 며칠을 걷다가 제주시 남쪽 근교의 한 절에 들어갔다. 절에서 만난 한 보살이 말하기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방학이 되어 초여름에 내려올 테니 함께 살자고 했다. 자기 아들을 형제 삼아 여기서 일년만 지내면서 심부름을 해주면 아들이 다니는 서울의 대학에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 걷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보름쯤 있다가 절을 나왔다.

다시 걸어서 중문에 있는 제주 제2횡단도로를 뚫는 공사장 쇄석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충청도 노인에게 일을 하지 않는다며 심한 욕을 퍼붓는 젊은 십장과 싸운 뒤 나와 서귀포를 전전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진도 완도 목포 해남 광주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무작정 내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구례에 갔다. 거기서 초등학교에 식빵을 공급하는 제빵공장에서 화부(火夫)로 일했다. 연탄을 부수어 아궁이 안에 처바르고 불을 지키는 일이었다. 공장장과 함께 빵을 배달하러 구례 읍내와 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화부로 일했던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어 가출하여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그 시절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게 된다.

 

집을 나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생각에 많이 빠져 있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 반 동안 떠돌아다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공부를 해서 면서기가 되었죠. 저에게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트라우마가 사회적·역사적 트라우마 못지않은 가장 큰 아픔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언제나 나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여러개의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시인의 말 제목의 ‘나’와 ‘시인’은 같은 자아이긴 하지만 처음의 ‘나’에 가장 가까운 나에 다가가려고 하는 존재를 ‘시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에 고향 속초를 왔다 갔다 하면서 더 분명하게 느껴져요. 저는 여동생도 일찍 보냈어요. 어머니도 최근에 돌아가셨고요. 그래서 다시 한번 내 문학이 어딘가로 또 방향을 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문학에서 감춰지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가족사적인 상실이 어떤 사회적 상실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우리가 현실의 든든한 체제와 구조 속에서 아무런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시인은 시를 쓰든 쓰지 않든 간에 본질적인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장소의 신성성

 

그의 시집 제목에는 지명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첫 시집의 ‘대청봉’부터 ‘사진리’ ‘김포 운호가든집’ ‘미시령’ ‘에르덴조 사원’ 등이 그렇다. 그뿐 아니라 시 제목에도 지명이 많아서 이번 시선집에서도 다수의 시 제목에서 속초, 다도해, 거진, 금호동, 난지도, 영랑호수, 사북 등의 지명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존재를 지우는 시간을 이기는 것은 지리적 공간뿐입니다.

 

고형렬은 데뷔했을 때 약력을 ‘1954년 해남 출생’으로 했다. 그러다 ‘1954년 해남 출생, 속초 성장’으로 쓰다가 쉰이 되던 해 ‘1954년 속초 출생’으로 고쳐 썼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고형렬의 아버지가 목포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해남까지 인민군에게 단숨에 점령되었다. 아버지는 급하게 해남 신활리 집으로 돌아왔다가 가족에게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피해 집을 나와 정처 없는 길을 떠돌다가 정전되던 해 낯선 속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아버지는 속초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그에게 ‘너의 고향은 해남이다’라며 명절이나 할아버지 제삿날엔 마당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해남 쪽을 향해 절을 시키곤 했다. 아버지는 언젠가 귀향할 생각으로 속초는 잠시 정박한 항구일 뿐이라 여겨서 아들의 고향도 출생지도 모두 해남으로 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로는 그는 속초 모래기(한자 지명으로는 사진리)에서 태어나 속초 풍광 속에서 자란 속초 아이였다. 아버지는 휴전이 되자 귀향할 생각으로 아들을 먼저 해남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그래서 그는 1962년 국민학교 2학년 때 강원도 속초 영랑국민학교에서 아버지의 모교인 해남군 삼산면 삼산북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는 해남의 국민학교를 5학년 때까지 다니다가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싶어 매일 울고불고해 다시 속초로 불려왔고, 그뒤 해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가 사상적인 이유로 해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내 안에 마구 중첩되어 있어요. 놀라운 것은 해남으로 전학 가서 3학년인가 4학년 때 전쟁 이후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아버지의 벽장을 발견한 거예요. 하도 궁금해서 벽장을 뜯어보니까 책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읽던 문학책인데 이용악과 김소월과 백석의 시집, 홍명희의 『임꺽정』 등이 잔뜩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나는 그중에 상당수가 금서인지 모르고 읽었죠. 몰래 혼자 읽다가 숙부에게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어요. 제 인생 첫 문학적 경험은 『진달래꽃』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슬픈 사람도 있나 하고 느꼈던 때였어요. 그게 지금도 나에게는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창비에서 근무할 때 1980년대 후반에 이용악과 백석 시전집을 편집하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어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이용악과 백석의 시집을 참조하며 편집했거든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면서 뭔가가 마음에 뚫려 있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가도 그게 메워지지 못한 채로 이런 문학적 체험과 뒤섞여 내 안에 남아 있어요. 그런 결핍감이 내가 끊임없이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 아닌가, 또 그런 사람들이 시인이 되면 시인으로서 자기 운명을 감내하고 혼자서 자기의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봐요. 오늘 박형과 인터뷰를 하려고 속초에서 올라와 합정동, 용강동 쪽을 지나왔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예전의 아몬드치킨 호프집 있잖아요. 그 집 지금 누가 기억하겠어요.

 

그의 말을 듣고 나도 새삼스레 1990년대 창비가 입주해 있던 마포 용현빌딩 1층 호프집 아몬드치킨을 떠올려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기로 하자.

 

 

‘양평’이 ‘평양’이 된다는 것

 

공무원 시험을 쳐서 면서기가 된 그는 남한에서 가장 오지이고 전방인 현내면에 발령을 받았다. 면서기는 업무 영역이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아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했다. 공문 기안부터 가마니 짜기, 제설하기에 이르기까지 시골의 모든 일이 면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는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 것도 면서기의 일이었다. 그는 이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시인이 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시인이란 만사에 대해 걱정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어로작업 지도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문학적 대전환에 해당하는 인생 체험을 하였다. 고기가 북쪽에서 많이 잡히는 까닭으로 어부들이 어로저지선을 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를 지도하다가 북쪽 바다 가까이까지 갔다는 것이다.

 

스무살 면서기를 할 때 서북쪽 수평선 가까이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받은 금강산을 본 적이 있어요. 비로봉이었죠. 정월달이라서 엄청 추웠어요. 동터오는 새벽 햇살이 눈 쌓인 비로봉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 보면서 구체적인 분단 인식에 이를 수 있었어요.

 

그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청사 1985)에 「초산 사는 형렬에게」 「백두산 안 간다」와 같은 시편들을 수록한다. 앞의 시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초산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시인 자신을 타자처럼 설정한 시다. 그리하여 북한의 생소하면서도 구체적인 한 지점에 자신의 존재를 이동시켜 그곳으로 옮겨간 자신과 이쪽에 남아 있는 자신 사이에 발생하는 삶의 내용을 동시에 진술하고 있다. 「백두산 안 간다」는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과 우리가 일상인들로서 서로 교통할 수 있음을 돌발적인 상상력의 힘으로 실감나게 보여준다. 『대청봉 수박밭』을 간행한 뒤 한 대학생이 고발했다는 명목(군사독재 시절에 분명 거짓말이었을!)으로 그는 새빨간 벽돌건물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수사관들이 “북한을 대상으로 한 시편들은 물론 「대청봉 수박밭」 같은 서정시도 이상하다” “밭갈이하는 과정이나 오랑캐꽃 등을 표현한 시편 등 시집 전체가 체제 전복적이고 남한을 부정한다”며 조사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는 시 해석을 꼬박 이틀 밤에 걸쳐 썼다고 한다. 다행히 수사관들이 그가 쓴 해석을 아주 만족스럽게 여겨서(그의 탁월한 글솜씨 덕분에?) 구속되지는 않았다. 또 한번은 광산촌에 대한 글을 쓰려고 사북과 태백을 드나들던 어느 정월 초하룻날, 출근길 창비 건물 백 미터 앞에서 남산 안기부 대공수사실로 연행되어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로부터 “혼자 자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풀려났다.

 

원산에서 어물점을 차리고 있는 매제가

오는 가을엔 백두산 가자고

금년 경칩 날 새벽같이 전화를 했었는데

지난 말복(末伏) 한밤중에 전화가 또 왔다

백두산은 가을이 좋다고

그 전엔 나 자신이 참으로 그랬다

만사를 버리고 가겠다 했지만

지금은 사업이 바빠 못 가겠다, 그렇게 잘라서 말했다.

(…)

또 평양에서 오늘 아침, 포목점을 하는 숙부도 백두산 가자고

서울 조카에게 장거리전화를 걸었다

해주를 가는 길에 역에서 건단다

그러면서 시간이 나면, 일이 빨리 끝나게 되면

서울에 들르겠다 하는데

내가 거길 가느니 속초나 갔다 오겠다고

일본 영국 미국을 생각하며

난생처음 코웃음을 쳤다

—「백두산 안 간다」 부분(『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

 

그의 초기 시에는 분단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를 다룬 것들이 있다. 예컨대 화자가 분계선을 넘어 월경하는 시들이 그렇다. 이런 식으로 북에 접근하는 의식은 우리 문학사에서 고형렬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가 상상으로 북쪽의 삶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그의 시선이 닿았던 비로봉 꼭대기의 새벽 햇살로 인해 가능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펴낸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창비 2020)에도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연작시가 있는데, 교평리에 가서 냉면을 먹고 돌아오다가 여기가 ‘평양’ 하고 중얼거리는 것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그 연작시에서 양평이 평양이 돼버리는 것은 분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인위적으로가 아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데서 나온 거예요. 어, 내가 왜 평양에 와서 살지, 이런 착각을 일으키면서 비현실적이고 비역사적 측면에서 전도된 사유와 다른 언어의 세계로 분단 극복을 모색하는 거지요. 내가 어디 한군데에 머무르지 못한 채 살았던 삶의 행로는 해방과 한국전쟁기를 겪었던 부모 세대들의 삶으로부터 상속받고 유전받은 것들이에요.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삶의 과정과 분단문제가 현실적으로 거리가 있고 괴리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시에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함께 나타나는 겁니다. 하지만 2005년 7월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작가 방북단을 구성할 때 나는 방문 신청을 하지 않았죠. 이때의 상황을 「어둠속의 풍악호」에 담아내면서 배를 “유령선”이라 칭했어요. 방북하고 돌아온 문인들이 쓴 글 중에 북쪽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함부로 말하는 데 적이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죠.

 

ⓒ강민구

ⓒ강민구

 

 

설악산의 ‘눈’과 동해의 ‘파랑’

 

그의 고향 속초(束草)는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데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풀을 묶는다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속초는 ‘한단의 풀’이다. 풀을 묶는 방법과 일, 즉 ‘풀단’이 속초이므로 묶지 않고선 전할 수도 이동할 수도 먹일 수도 없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이란 모두 ‘속초’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속초에서 그는 설악산의 눈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 등에 업혀 길을 갈 때 옷을 막 때릴 정도로 큰 눈송이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설악산에 며칠씩 커다란 눈이 내리면 싹 숨죽여 엎드리는 느낌이 들어요”라며 그 꼼짝 못하는 느낌과 웅크라드는 의식에 대해 언급했다.

 

칠십살이 되었는데도 설악산을 보면 저 산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설악산에 슬픔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강원도 땅, 하나의 산으로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늘 새로운 전경의 이미지로 보이거든요. 그 산이 사실은 금강산까지 이어지고 오대산과 태백산으로 해서 지리산까지 뻗어 내려가잖아요. 동해안을 뻗은 긴 산맥인데 굉장히 아름답고, 주야를 지나 계절을 바꾸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내게는 이러한 설악산이 나로 하여금 다시금 거기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것밖에는 다른 대상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어떤 상징입니다.

 

하아얀 눈이 마당을 여드레 내리고 나니

눈이 정말로 무서워졌다. 아흐레 만에 날이 드니

눈물이 나는 오후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선처럼

해도 우물우물 빨리 서산으로 지려 하고

마을은 오랜만에 빨간 불빛들을 서로 볼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친구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언제나 어둡고 높고 촌스럽기만 하던 설악산이

사진리하고는 바닷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산이

그날 처음으로 야산이 되는 것을 보았다.

우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데 거만하게 하늘로 솟았던

산이 순하디순해져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사진리 대설(大雪)」 부분(『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

 

그는 설악산의 눈을 대상으로 여러편의 시를 썼는데, 이 중 「사진리 대설」은 자신이 얘기했던 바를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고 하였다. 눈이 무섭게 내리다가 아흐레 만에 눈이 그쳐 밖에 나가보니 설악산이 “순하디순해져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은 마을, 동네 사람들이 플래시를 켜고 나타나는 모습을 담아낸다.

 

이 시의 후반부는 아흐레 동안 내리던 눈이 그친 다음 내다보니 동해에는 무슨 일인지 물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것처럼 눈 한송이도 쌓이지 않았다는 놀라움으로 마무리돼요. 나는 이렇게 어느 하나만 높아지고 깊어지는 게 아니라 두 세계가 하나의 작품 속에서 서로를 끌어당겨서 같이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내 초기작 「해변의 나비」(『사진리 대설』, 창작과비평사 1993)를 보면 나비가 설악산을 넘어가고 싶은데 높이 때문에 못 넘어가는 내용이 있어요. 그런데 눈이 며칠 내리면서 아주 가벼운 눈이라는 존재에 의해 설악산이 순한 애가 되는 것입니다. 바다는 폭풍이 일면 성이 나 있는 반대 세계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심연의 바닥을 응시하고 싶으면 파랑을 보면 됩니다. 심연은 수면의 파랑을 보면 알 수 있고 산의 높이는 눈〔雪〕을 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상극적인 요소를 변증법적으로 하나에다 집어넣을 수 있다면 높이와 깊음을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혼돈이나 파괴적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봐요. 나는 서정시를 쓴다 해도 우리 시사에서 기승전결 일정한 사이클을 가진 정제된 정서로 시세계를 유지해온 전통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불완전하더라도 한편의 시를 제대로 쓰고 싶은 것이고 그것도 시대에 따라 자기의 개성에 따라 어떨 때는 건조하게 어떨 때는 비장하게 어떨 때는 신경질적으로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유머

 

『사진리 대설』의 발문을 쓴 김사인은 이 발문에서 “일상어법의 질서에서 묘하게 일탈해 있는” 말투와 독특한 정서들에 관해 언급하였고, 신경림은 이 시집에 대한 서평에서 “중언부언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 같은 참으로 특이한 형태의 시를 만들고 있다”면서 「사진리 대설」을 예로 들어 “그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사, 접속사 그리고 설명귀, 너스레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각각 제 자리를 잡고 앉아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바로 이 시의 맛이 있”(신경림 「시에 있어서의 선명함과 모호함」, 『창작과비평』 1993년 겨울호, 380~82면 참조)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 말의 밑에는 그의 시가 다른 곳으로 건너갈 징후도 함께 엿보인다. 그러나 고형렬은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던 1990년대와 인간에서 사물이나 식물로 관점을 옮겨간 2000년대의 시집들에서 훨씬 더 정제되지 않은 부수적 표현들을 시에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중요한 요소가 되도록 전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언어 문법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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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골에서 데뷔했잖아요. 고성군청에 있을 때였는데 이때는 순수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앞으로 이렇게 가겠구나 하고 언어적인 면에서 가야 할 길이 정해진 것처럼 의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공무원 생활을 8년 넘게 하니까 지치는 거예요. 1년에 캐비닛 두세개는 채울 정도로 공문이 수도 없이 많아요. 결국 속초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여름에 사표를 내고 12월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보니까 서울 시내가 매일 데모 행렬로 넘치는 거예요. 나도 젊으니까 또래 젊은 시인들과 광화문이나 종로, 서울역에 나가서 매일 싸웠죠. 그러면서 속초에서 곱상하게 썼던 시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안 되겠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시가 아름다워질수록 현실로부터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나간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현실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쎄요. 나 같은 심약한 사람은 현실로 들어가는 게 시에서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타개책으로 나만의 새로운 기법을 찾아서 고민하게 되고, 정치적 문제나 분단문제 등도 자꾸 설악이나 동해에 대한 기억과 결합하여 『사진리 대설』처럼 고향 의식을 회복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중기로 들어서는데 이때는 환경에 대한 문제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2010)와 같이 여행을 통해 분열적인 나 자신의 존재성을 성찰했습니다. 육십으로 접어들면서는 식물의 작은 감각기관이나 생물학적 용어 같은 쪽으로 관심이 가게 되는 부분도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유리체를 통과하다』(실천문학사 2012)에 나오는 ‘애체(나뭇가지에 새로 돋은 가지)’나 ‘DNA’ 혹은 ‘미토콘드리아’ 같은 생물학적 용어들을 활용한 시편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특히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에는 전작들과는 다르게 화법이 변화했는데, 본인 나름으로는 거기에 유머를 집어넣은 건데 대부분 못 읽는 것 같다고 했다. 고형렬 시인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다시 새롭게 이 책을 읽으면서 고형렬식 유머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고형렬은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를 펴내면서 다른 형태의 실험을 겸하고도 있다. 시선집을 낭송가 김성천이 읽고, 그 목소리를 담은 ‘소리 시집’을 함께 발간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도 고요 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 소리 시집은 문자와 소리를 직결시켜 시의 영역을 확장하고 동시적 공명을 감상에 더해준다.

 

 

현실과 사상의 접목, 장시와 산문들

 

고형렬은 시인일 뿐 아니라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시세계 또한 어느 한 결로만 묶이지 않는다. 개인 시집이 시인의 독특한 감성에 기초해서 혼란한 삶에 징검다리를 만든 것이라면, 장시 『리틀보이』(넥서스 1995, 복간판 최측의농간 2018)와 『붕새』(시평사 2010)는 전자에는 8천행을 이어가는 집요함이, 후자에는 「장자(莊子)」(1979) 발표 이후 30여년의 기다림이 소요됐다.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원폭의 비극을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풀어내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붕새』는 창비를 그만둔 뒤 시골에서 장자 철학에 파묻혀 보내며 무극한 내재적 초월의 언어에 이르려는 시로 토해낸 뒤 소량의 시집만 제작한 것이다. 60여명의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한권의 시집은 하늘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특히 『붕새』는 그가 미얀마의 어느 호텔에서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바다에서 커다란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장자 「소요유」 제1장의 첫머리가 떠올랐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상상의 세계를 확장하며 시를 쓰는 와중에도, 붕새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존재인데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서 책 안에 가두고 있으니 시를 완성하면 반드시 책 한권은 고향 사진리 바닷가에서 불태우리라 다짐했다. 책의 「서분(序分)」에 “동해의 아침 바닷물과 밤 설악의 별들에게” 바친다고 제사(題詞)를 달았는데 그런 이유로 자신의 자아를 해체하여 다시 혼돈과 무로 돌려보내는 제의의식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원래 고향 바닷가에서 불태우려는 애초의 계획이 불필요하게 여겨져 당시 살고 있던 양평 집의 텃밭에서 해질 무렵 한장 한장을 뜯어 몇시간 동안 불태웠다.

그는 또한 산문도 왕성하게 썼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은빛 물고기』(한울 1999, 복간판 최측의농간 2016)와 일곱권짜리 『고형렬 에세이 장자』(에세이스트사 2019)이다. 『은빛 물고기』는 탄광촌에 대해 집필하려고 태백 사북 고한으로 취재 여행을 다니다가 양양 남대천에 우리나라 최초로 연어를 방류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쓰였다. 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 기사를 읽고 연어라는 구체적인 생물체를 통해서 금강산을 가고 싶은 마음을 은유의 방법으로 표현하자는 결심이 섰다는 것이다. 연어는 베링해와 동해바다를 누비고 다시 남대천으로 돌아오며 바다의 분계선을 아무 장애 없이 가로질러 통과한다. 그는 분단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장소가 통제되고 획이 그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정치적 개념뿐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언어로 구사할 때조차도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연어의 자유로운 회귀를 통해서 돌파해보려고 한 것이다.

『고형렬 에세이 장자』는 약 300년 전의 원본 『남화경직해(南華經直解)』를 저본으로 삼아 번역하고 집필했다. 「소요유」부터 「응제왕」까지 전7편을 자연과 인간의 숙명이 담긴 예언적 시문으로 보고 원문인 한자에 없는 쉼표를 번역문에 찍어가며, 번역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집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자의 많은 판본에서, 번역가들이 누락한 「덕충부」의 한 대목 상계와 중니의 대화에 나오는 “正在萬物之首”을 『남화경직해』에서 찾아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가 고형렬 시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인상적으로 여긴 장면들을 삽화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 능력 부족과 지면 관계상 그의 시론에 해당하는 많은 말들을 옮기지 못했고, 그가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자료와 사진을 수집했던 탄광촌과 난지도, 그리고 스딸린의 명령으로 약 17만명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한 ‘고려인강제이주’를 글로 쓰지 못한 사연을 소개하지 못했다. 또한 그가 『시평』 등을 운영하면서 전개한 여러 활동들과 문학에서 왜 동인지 및 잡지 활동이 필요한지 말한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내 나름대로 그의 문학세계를 도식적으로 정리해보면 첫번째는 세상을 서정의 눈으로 본다는 것, 두번째는 다큐멘터리같이 사실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 세번째는 불교나 장자와 같은 사상의 눈으로 본다는 것, 네번째는 출판인과 편집자로서 항상 한국문학의 현장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각각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방식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한 사람의 동일한 사고방식으로는 쓸 수 없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선집을 계기로 그의 문학세계나 시세계 전반을 살펴보려면 위에 언급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그저 하나의 고형렬만을 편협하게 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고형렬은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냈다. 그의 문학적 여정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을 시인의 촉수가 뻗을 수 있는 모든 방향에 길을 내놓았고 그 길을 묵묵하게 걷고 있다고 바꿔 말해도 될 것이다.

 

박형 말대로 내 안에는 몇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아요. 먼저 면서기 시절 정월의 추운 겨울 수평선을 앞에 두고 세계와 동떨어진 채로 분리되어 있는 나, 극렬한 서정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나가 있지요. 또 하나는 일상 속에 살면서 밥 먹고 잠자고 지루하게 있는 나. 마지막으로 내가 꿈꾸는 어떤 언어적 세계의 나. 장자든 불교든 또는 무화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어떤 부분(앎과 무지 등)이 있어요. 우리 안에 본질적으로, 문학보다 더 근원적인 부분 말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시를 쓸 때 세개의 ‘나’가 있는 셈이잖아요? 하나의 ‘나’로는 하나밖에 못 써요. 나는 현실의 아주 구체적인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와 아우성치는 수많은 타자가 비유적으로 내 안으로 이사를 오는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절대 그걸 놓아줄 수 없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리얼리티이고 그것을 잡으려는 것은 윤리를 넘어서 어떤 본능적인 욕망의 발현이라고 생각해요. 40여년 동안 내가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개의 고형렬이란 줄기를 가지고 문학의 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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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아몬드치킨 호프집 앞 돌계단

 

그와의 인연은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문인들이 모여 정례적인 술자리를 가졌다. 개별적인 모임도 많았지만 출판사를 중심으로 벌어진 술자리에서 선후배들, 동년배들과 안면을 트거나 문단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당시 겨우 시집 한권 달랑 펴낸 20대 후반의 신출내기였던 나는 늘 구석진 자리에 앉아만 있었지만,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시를 두고 치고 박는 모습을 두렵고 또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여기서 두렵다는 것은 나의 소심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고 흥미롭다는 것은 술자리가 시를 두고 벌어지는 자못 딴 나라의 흥미진진한 싸움판 같아서였다. 시가 현실적이어야 되느냐 아니어도 되느냐, 혹은 누가 시를 잘 쓰고 못 쓰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그들의 설전에 싸움은 떨어져서 구경하는 맛이라고 여겼다가 나도 모르게 흥이 돋아 간혹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창비 술자리는 창비가 입주해 있던 마포 용현빌딩의 아몬드치킨 호프집에서 이루어졌다. 3층에 창비 편집실이, 2층에 병원 입원실이 그리고 1층에 아몬드치킨 호프집이 있었는데 편집실에서 주로 시집 펴내는 일을 하던 고형렬 시인은 그 공간을 “내 의자 밑에는 환자가 천장을 보고 있느냐”(「안 보이는 시」)라고 재미있게 표현해놓았다. 아무튼 고형렬 시인과 사적으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 아몬드치킨 호프집이었다.

그때 나는 ‘민중’이라는 말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 말에 여전히 압도된 무언가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 아몬드치킨에 정기적으로 모인 시인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괴리가 느껴졌는데 그것이 내 시에서 민중에 대한 문학적 체험이 부재하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여겨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 대한 비약과 선입견을 작동시켜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형렬 시인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은 적지만 까만 눈이 반짝이는, 순한 시골 초식동물의 기억을 가진 사람처럼 정겨운 뭔가가 있었다. 개중에 나의 시를 문학적이려고만 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의 말에 기운이 빠지고 술기운이 올라 나는 아몬드치킨에서 나와 어떤 돌계단 비슷한 곳에 앉아 있었다. 그때 바람을 쐬러 나온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는 잠시 당황해서 쭈뼛대었던 것 같다. 그 돌계단 비슷한 곳에서 그와 많은 말을 나누었다.

1950년대에 출생해서 1980년대를 주무대로 젊은 시절을 보냈을 그는 그렇게 잘 끓던 80년대라는 시절을 잘 끓지 않는 맹물같이 보냈던 사람처럼 여겨졌는데, 시에 관해서는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그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시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려 깊은 신중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쓰는 시와 똑같이 60년대 중반에 태어나서 90년대 시단의 말석에 있는 후배 시인의 시를 배려할 줄 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시단에 나왔고 시골 출신에 띠동갑 말띠였다. 거쳐온 시간이나 장소가 다르고 활동의 폭이나 관심사도 그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었지만, 그런 비슷한 점이 나에게 그가 좋은 인연으로 다가온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풀어지며 신출내기였던 나는 그만 감동을 받았다. 1997년 창비에서 두번째 시집을 내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고형렬 시인을 깍듯하지만 편안하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친척 형님을 만난 듯 시와 관련된 행사나 그런 일로 그를 우연히 만나면 90년대의 아몬드치킨 호프집을 떠올린다.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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