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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⑤

 

오지여서 좋고 오져서 좋은 봉화

 

 

허태임 許泰任

식물분류학자. DMZ자생식물원을 거쳐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음. 저서로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등이 있음.

celtisming@gmail.com

 

 

 

봉화에 삽니다.

아, 그 봉하마을이요?

아니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아니고 경북 봉화군 춘양이요.

 

경북 봉화와 강원 영월의 경계에 있는 산골짜기에 2017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들어섰다. 나는 이 수목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실험실에만 앉아 있는 건 아니다. 식물이 원래 사는 땅인 자생지, 그 현장에 더 많이 머무는 편이다. 수목원에 와서 내가 처음 기획한 연구과제는 봉화군의 산과 들에서 저절로 살아가는 자생식물의 종류를 조사해 밝히는 거였다. 지역의 식물상(相)을 구명하는 것은 식물분류학의 기본이다. 그중에서 당장 멸종의 위기에 직면한 식물은 없는지, 특별히 보호가 필요한 장소는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내 몫이다. 실제로 키워내면 좋을 자생식물을 파악하고 그 씨앗과 재배 기술을 지역민들에게 전달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다.

봉화의 길과 산골짜기를 찾아가는 것은 식물의 곁으로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일, 그러니까 식물과 연애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봉화군은 전체 면적의 83퍼센트가 산이다. 산마다 고개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중 도래기재가 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한반도의 가장 큰 산줄기가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방향을 틀고 서쪽의 소백산으로 나아가는 지점이 도래기재다. 그 고개의 서쪽에 수목원이 있고 동쪽에 우구치마을이 있다. 권정생 선생이 소설 『한티재 하늘』(전2권, 지식산업사 1988)에서 “우구치는 경상도와 강원도 중간에 있었다. 춘양 장터에서도 사십리나 들어가는 산속의 산이었다. (…) 산꼭대기로는 죽죽 뻗은 소나무가 빽빽이 서 있고 기슭으로는 참나무가 아름들이로 자라 있었다”라고 쓴 바로 그 마을. 선생은 마을에 대해 이렇게도 썼다.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뜸뜸이 외딴집이 오 리에 한 집, 십 리에 한 집씩 있었다. (…) 바로 집 옆 여기저기 손바닥만 한 밭떼기가 뙈기뙈기 비탈로 붙어 있고(…)

 

온갖 짐승들이 무섭게 울어대는 밤, 머루 다래 같은 열매가 흔하고 물이 깨끗한 산골, 시월 초순에 눈이 내리는 곳……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 풍경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소의 입을 닮았다는 우구치(牛口峙)마을. 이 마을에는 동네 전체를 연결하는 제대로 된 신작로가 없다. 일명 춘양목으로 통하는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고랭지 밭은 많다. 우편집배원은 마을 초입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걸어서 계곡 따라 띄엄띄엄 있는 외딴집에 우편물을 배달한다.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그 오지 풍경을 7년 전 처음 마주한 순간 나는 단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부터 풀 보러, 물 보러, 별 보러 마을 속으로 수없이 들어갔다. 걸어가기도 했고 뛰어가기도 했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동네 어르신을 만나 마을 이야기를 한참이나 귀에 담고 나오기도 했다.

금광이 발견되면서 한때 상상 못할 정도로 마을이 커진 적도 있었다. 그때 생긴 또다른 지명이 금정(金井)이다. 일제강점기에 동네 사람들은 일본에 가져갈 금을 캐는 일에 강제동원되었다. 더는 안 나올 만큼 부지런히 캤기 때문일까, 이제는 정말 금이 안 나온다. 그뒤로 마을은 금광을 발견하기 전보다 더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나무는 쇠락하지 않았다. 세종대왕 재위 시절부터 여전히 그 자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구치 철쭉은 올해 오백팔십네댓살 정도 됐다. 마을 어귀에서 이백년 넘게 산 소나무는 동네 서낭목이다. 이 신목(神木)에게 빌기 위해서 해마다 정월 보름에 마을 전체가 정성스레 음식을 차리고 동제를 지낸다.

이끼가 보고 싶을 때 나는 우구치마을의 폐광 입구를 찾아간다.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뚫었다는 터널은 금광이 문을 닫은 후 입구가 철창으로 막혔다. 터널 근처만 가도 한기가 느껴진다. 동굴 안의 찬 공기와 바깥의 온도가 달라서 입구에는 으레 물기가 맺힌다. 이끼가 좋아하는 환경이 갖춰진 거다. 초롱이끼, 깃털이끼, 구슬이끼를 비롯해서 많은 종류의 이끼가 입구의 철창을 에워싸고 있다. 어쩐지 이끼들이 금광의 흥망성쇠를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

우구치마을 뒷산은 구룡산이다. 말이 뒷산이지 해발고도 1,300미터가 넘는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걸으면 청옥산으로 이어진다. 청옥산에서 마을 사람들은 옥을 캤다. 옥 중에도 푸른 연옥이 청옥산에 많이 났다. 마을에서 청옥산 정상까지 직선거리는 15킬로미터 남짓인데 고불고불 돌아가는 차도로 1시간 정도 가야 산 입구에 닿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름길인 구룡산 임도를 이용한다. 청옥산에는 한여름에도 더위란 게 없다. 꼭 봉화의 대관령 같다고나 할까. 산의 동쪽에서 진입해서 정상을 지나 서쪽으로 넘어가며 조사하다보면 같은 날인데도 영동과 영서의 기온차가 확실히 느껴진다.

 

백두대간

백두대간

 

그곳의 돌은 곧 그곳의 흙이다. 청옥산 토양에는 그래서 옥처럼 귀한 여러 식물이 그 흙을 알아보고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같다. 청옥산에는 약효가 뛰어난 식물도 많다. 나는 백작약과 참당귀와 천남성과 같은 약용식물들을 찾아서 꼼꼼하게 기록해 약용식물을 재배하는 농가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며 그 결과물을 봉화군에 전달했다. 그중에는 너무 오랫동안 채취되다보니 자연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도 있다. 별도의 보호가 필요한 종들을 따로 모으고 이들이 처한 실상과 지켜져야 하는 중요성을 최대한 자세히 적어서 『백두대간 봉화군의 보호식물』(국립백두대간수목원 2020)이라는 도감을 엮였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큰 산줄기 하나를 뻗으며 소백산과 덕유산과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도래기재에서 동쪽으로는 산줄기가 우산살처럼 잘게 갈라지는데, 그 줄기 사이사이에 태백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흐른다. 태백부터 부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산들을 아울러 낙동정맥이라고 부른다.

봉화군을 지나는 낙동강 주변에는 연옥뿐 아니라 더 많은 광물, 이를테면 석회석과 운모와 규석과 아연 등을 생산하는 광업소가 있다. 낙동강 물줄기가 발원지를 벗어나 제대로 강의 모습을 갖추는 지점이 제련소가 있는 석포다. 1935년 일본인이 발견해서 운영하던 아연 광산을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영풍광업소(지금의 영풍그룹)가 매입했다. 처음에는 봉화와 강원도 일대의 아연을 직접 캐서 팔다가 아연이 전처럼 나오지 않자 광산 문을 닫았다. 그 대신 봉화 석포에 영풍제련소를 짓고 원료를 수입해서 자체 제련을 시작했다. 중금속으로 오염된 폐수가 강에 흘러들었고 낙동강과 근처 산들이 망가졌다. 제련소 서쪽에 오미산이 있는데 나는 봉화군 면적의 팔할 이상을 차지하는 45개 산지 전체를 3년에 걸쳐 조사하던 시기에 오미산을 만났다. 그런데 산 정상에 올랐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련소를 통과한 물줄기 주변 산들의 색이 희뿌연 페인트를 뿌려놓은 것처럼 온통 바랬기 때문이다. 특히나 근방의 명물인 춘양목 소나무 군락은 초록을 잃은 채 맥없이 서 있었다. 그곳의 생태계 변화를 모니터링하던 한 연구팀의 보고서를 읽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련소에서 흘러나온 중금속이 인근 산지의 토양에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을 관찰하다보면 의도치 않게 어떤 현장의 목격자가 될 때가 있다. 자본이 우선시되어 자연이 의도적으로 훼손된 광경을 직접 보게 될 때 특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영풍제련소 주변 기운 없이 서 있던 꼬리진달래 앞에서, 그 옆 동네 시멘트 채광장에서 뿌리째 뽑혀나간 꼬리진달래 앞에서 그랬다. 진달래와 같은 혈통의 식물이지만 꼬리진달래는 상록수이고 쉽게 만날 수 없는 희귀식물이다. 한여름에 하얀색 작은 꽃이 꽃대에 촘촘히 모여 피어 전체적으로 토끼 꼬리 모양처럼 보인다. 봉화를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과거에는 꼬리진달래가 훨씬 많이 자랐다. 제련소와 시멘트공장과 고가도로가 들어서기 전에 말이다. 그걸 알고부터 나는 방관할 수 없게 됐다. 제대로 지키기 위해 희귀식물의 터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던 기존 방식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알려지면 식물이 다칠지 몰라, 나만 알고 있어야 해, 절대 비밀스럽게 지켜야 해. 이렇게 감추기에 급급했던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많이 한다. 이 식물이 어떤 친구이고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니 다들 관심을 가져달라고. 혹시 그들이 위험에 처할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우리 다 같이 그 친구 좀 잘 지켜내보자고. 식물은 지구라는 행성의 공동체라고, 그게 결국 우리 인간이 사는 길이 될 거라고.

제련소가 있는 석포에서 벗어나면 남쪽으로 영동선을 연결하는 승부역과 양원역과 분천역이 있다. 역과 역을 잇는 골짜기가 워낙 깊어서 그 구간을 달리는 기차 이름이 협곡열차(V-Train)다. 낙동정맥과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서 최근 약 12킬로미터 구간에 걷기 좋은 길이 생겼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이라 부르는 ‘세평하늘길’이다. 그야말로 오지마을을 연결하는 그 길 위의 식물을 조사하다가 털개회나무를 만났다. 꽃이 한자 정(丁) 자를 닮았고 향기가 깊어서 정향나무라고도 부르는, 서양 라일락 시장에서 크게 인기가 있는 미스킴라일락의 원종이 털개회나무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군복무를 했던 미국 식물학자가 씨앗을 고국으로 가져가서 육종에 성공하면서 미스킴라일락은 전세계에 번졌고 라일락 계의 여왕이라는 칭송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무분별한 개발로 자생지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관상 가치가 있으니 팔면 돈이 된다고 캐가는 일도 늘었다. 나는 서둘러 털개회나무 자생지의 GPS 좌표를 확인하고 현장을 요약해서 노트에 적었다. 그곳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지를 논문과 보고서에 분명히 밝히기 위함이다. 그들뿐 아니라 위험에 처한 다른 많은 식물들의 이름도 일일이 기록했다. 그 씨앗들을 한톨 한톨 모아서 수목원에서 모종을 가꾸었다. 대량으로 생산하는 재배기술을 개발해서 주민들에게 알리는 일도 했다. 그러자 깊은 산의 자생지가 훼손되는 일이 줄어들었다. 지역 농가에서 직접 키운 꽃들로 수목원은 ‘봉자페스티벌’(봉화 자생꽃 축제)을 열기도 했다. 서양에서 수입해서 꽃집에서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파는 꼬리풀과 부처님 제단에 올릴 만큼 곱고 귀하다는 부처꽃이 수목원에서 대군락을 이루고, 수입산 재배품종에만 의존했던 지역 화훼농가는 봉화에서 나고 자란 자생식물로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석포역 바로 남쪽 간이역인 양원역은 최근 협곡열차 구간의 명소다. 지역주민의 손으로 직접 세운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역사라는 사연이 영화(「기적」, 2021)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이 양원역에 내려 오지마을 곳곳을 누비는 일이 늘고 있다. 역의 남쪽에 위치한 갈산리에서는 또다른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10·29 이태원참사로 힘들었던 2022년 가을에 매몰 열흘 만에 생환해 온 국민에게 희망을 안긴 광부 두분의 작업장이 갈산리 아연 채광장이다. 그러나 그전 여름에 같은 작업장에서 같은 사고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때 매몰자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갈산리에서 낙동강 물줄기 따라 좀더 내려가면 봉화군 최남단인 명호면 비나리마을에 이른다. 청량산에 바짝 붙은 마을이고 안동과 접해 있다. 나는 2007년 서울의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귀농학교 수업을 들었다. 그때 현장실습을 처음 나간 곳이 이 비나리마을이었다. ‘비나리’는 성주풀이굿을 할 때 외는 주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민들은 지금은 사람들의 행복을 비는 의미로 쓴다고, 그런 마을로 거듭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50여가구쯤 되었을까. 지금은 새로 지은 집이 많다. 마을 전체에 대략 백가구는 넘게 사는 것 같다. 이 마을은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면서 ‘귀농 일번지’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원주민들과 새로 정착한 귀농자들이 서로 잘 어울려 화합하는 마을, 강과 산이 만나고 농사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라고 동네 주민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옥수수, 감자, 배추와 같은 고랭지 작물이 주 종목이고 협업농장도 있다. ‘봉화농부’라는 작목반은 채소를 공동으로 수확해 학교 급식과 로컬푸드 매장에 내보낸다. 서울에도 들어간다. 혜화, 상수, 합정 등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농부시장 ‘마르쉐’에 갔다가 봉화에서 올라온 농산물을 만났다며 내게 안부 문자를 보내는 지인이 늘었다. 봉화 제품이 인기가 많다는 인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세차례씩 귀농학교도 연다. 2022년에 43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비나리마을이 정말 유명해진 건 아마 고(故) 정호경 신부 또는 권정생 선생 덕분일 거다.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권정생 선생이 사후 재산 관리인으로 지목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정호경 신부다.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르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다가 1994년부터 농부가 되었다. 교구청의 경제적 지원도 거절한 채 20년 가까이 혼자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마을 뒷산에 자라는 낙엽송을 구해다가 직접 집도 지었다.

낙엽송의 다른 이름은 ‘잎갈나무’다. 소나무과에 속하는데 상록수가 아니고 잎이 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봉화를 비롯해 남한에서 만날 수 있는 낙엽송은 전부 일본잎갈나무다. 실제 잎갈나무는 금강산을 기점으로 그 이북에 사는 북방나무인데 북한에서는 이깔나무로 부르고 우리는 그 둘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낙엽송이라 부른다. 낙엽송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때부터 꾸준히 심어서 키우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 낙엽송 양묘장이 봉화에 있어 오늘날에도 해마다 수만그루의 묘목을 생산한다. 지금은 남한 조림지의 무려 27만 2800헥타르(여의도 면적의 325배)가 낙엽송숲이다. 우리 민족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나무이자 한반도의 헐벗은 민둥산을 푸르게 변모시킨 장본인이 이 낙엽송, 즉 일본잎갈나무다. 우리에게 이토록 고마운 낙엽송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일기도 했다. 그 씨앗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이유에서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셈할 수 없는 아주 먼 과거에는 낙엽송이 한반도에도 널리 자랐을 것이라고 식물화석을 분석한 학자들은 짐작한다. 국경이나 이념이 있기 훨씬 전에 지구에 출현한 그들을 지금은 외래종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논리가 내게는 터무니없다.

정신부가 낙엽송으로 집 짓는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서 1999년에 펴낸 책이 『손수 우리 집 짓는 이야기』(현암사)다. 자연에서 낙엽송을 구하는 단계부터 어떻게 손질하는지도 자세히 담겨 있다. 낙엽송을 살뜰히 생각한 신부의 마음이 행간에서 읽힌다. 집을 다 짓고 신부는 ‘달이’라는 강아지 한마리를 들였다. 사람들이 산짐승 잡는다고 놓은 덫에 다리 하나를 잃은 강아지 달이. 지금은 주인도 강아지도 다 떠나고 낙엽송 빈집만이 적막하게 남아 있다. 나무의 동강이들을 모아 직접 만든 책상, 촛대, 찻상, 지게와 같은 살림살이가 신부님을 더욱 그립게 만드는 비나리마을 달이네 집. 신부님과 권정생 선생이 모두 살아 계시던 때 그 이야기는 권정생 선생이 동화(『비나리 달이네 집』, 낮은산 2001)로 엮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봉화 춘양의 낙엽송(사진: 허태임)

봉화 춘양의 낙엽송(사진: 허태임)

 

봉화에 또 많은 것이 오래된 고택과 정자다. 심지어 갓 지은 것처럼 멀쩡하고 또 후손들이 관리도 잘하고 있는 편이다. 그 이유를 봉화 사람들은 이렇게 자평한다. “저 산과 저 숲에 그 좋은 춘양목이 수도 없이 자라고 있잖니껴. 그 목재를 베어다 집을 지었으니 안 좋을 수가 없지요. 보통 백살은 넘은 나무를 대들보로 썼기 때문에 앞으로 몇백년이 흘러도 끄떡없습니더.”

비나리마을에서 머지않은 봉화 상운면 구천마을의 야옹정(野翁亭)이라는 정자는 고 전우익 선생의 선대인 전응방(1491~1554)이 짓고 오백여년간 이어져온 정자다. 퇴계 이황이 현판을 직접 쓴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야옹이라니, 선비의 점잖고 엄숙한 분위기나 케케묵은 느낌이 전혀 안 든다. 권정생 선생과 정신부와 같이 어울린 전우익 선생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 1993)를 나는 비나리마을로 귀농 실습 왔던 그 무렵에 읽었던 것 같다. 그 책의 발문에서 신경림 시인은 전우익 선생을 두고‘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던가. 선생은 고향 봉화의 소나무를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분이다. 소나무로 작은 책상이나 책꽂이를 만들고 대패를 베갯속으로 썼다고 들었다. 주머니에 소나무 토막 하나만 넣고 다녀도 부적처럼 몸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분이다. 평생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살았지만 나무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일찍이 깨우치신 어른.

봉화를 떠올리면 연달아 줄줄 생각나는 권정생과 정호경과 전우익 모두가 내게는 그렇다. 깊은 산속의 귀한 약초 같기도 하고 희귀식물 같기도 하고 봉화를 지탱하는 춘양목과 낙엽송 같기도 한 분들. 봉화의 오지마을에서 식물 한종 한종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분들의 말을 반복해서 받아적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과 사람이 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단순하게 들리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그 이야기를. 그래서일까, 봉화에서는 봉화 바깥에 있을 때보다 자연과 더 가까워진다. 만나는 사람도 더 귀하게 여겨진다. 봉화는 그런 힘을 가진 걸까.

마음이 흡족하게 흐뭇하거나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는 뜻의 ‘올지다’를 요즘에는 동의어‘오지다’로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오지여서 좋고 오져서 더 좋은 내가 사는 곳,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