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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문영 『빈곤 과정』, 글항아리 2022

과정으로서의 빈곤과 취약한 몸들의 연대

 

 

김윤영 金侖英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dear.yoon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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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울 봉천동에서 한 모자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탈북민이었던 이들의 집 냉장고에는 바닥을 보이는 고추장 정도만 있었다. 중국에서 살다가 이혼 후 한국에 돌아온 모자는 아동수당 등 사회보장급여 신청을 시도했지만, 외국인인 남편과의 이혼 사실을 입증해줄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는 조건 탓에 급여 신청을 포기했다. 간질이 있는 아이를 보낼 유치원도 찾지 못하고, 아이를 돌보느라 직장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다 결국 주검이 된 이들을 발견한 것은 수도검침원이었다. 정부는 이들이 ‘재개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어 공과금 체납에 따른 위기가구 점검 시스템에서 제외되어 있었다며 대책으로 재개발 임대아파트를 점검 시스템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한국사회 빈곤 문제는 가난한 이들의 죽음으로 표상된다. 송파 세 모녀와 방배동 김씨, 수원 세 모녀에 이르기까지 닫힌 문 너머 가난한 이들의 주검이 발견된 이후에야 사람들은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질문한다. 사회보장 신청 이력이 없다, 주소와 실제 거주지가 달랐다, 공과금 체납 사실이 없거나 짧았다 등 보건복지부나 지자체의 방어적인 설명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수습을 위한 대책이 이어진다. 일제조사 실시, 민간 자원을 통한 촘촘한 이웃 돌봄 지원, 개인정보 통합 및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빈곤 사각지대 발굴 프로그램 개선 등이 대표적인 ‘대책 상품’이다. 몰려든 카메라 앞에서 이같은 ‘대응 패키지’를 선보이고 나면 세상은 또다시 별일 없이 흘러간다. 다음 죽음이 나타날 때까지.

슬프게도 이 전개는 너무 오랫동안 반복됐다. 재개발 임대아파트를 점검 시스템에 포함시켜 수개월의 가스비 연체 뒤에야 찾아내겠다는 정부의 대책이 봉천동 모자와 같은 죽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아귀가 맞지 않지만 낯설지도 않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그 너머의 ‘삶’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탓이다. 원형의 트랙을 이어 달리듯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의 불충분한 대책이 나오고, 그다음의 죽음을 만나 문제제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지금 달리는 이 운동장 자체를 문제로 정의할 수 없을까 고민하는 때에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을 만났다.

인류학자 조문영은 『빈곤 과정』에서 그가 다양한 시공간에서 만난 사람과 경험을 통해 빈곤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주민운동, 활동가, 빈곤층의 역동 및 변화부터 중국과 한국의 빈곤층, 현재 소득과 재산을 갖고 있지만 빈곤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빈곤이 이들의 일상에 어떻게 개입하고 변형을 가하는지, 현대사회의 복잡한 그물망 어디쯤에 빈곤이 걸쳐져 있는지 한 장면 한 장면씩 건져 올린다. 어떤 빈곤은 한 사람의 삶에 들러붙어 촘촘한 함정이 되기도 하고, 어떤 빈곤은 두려움의 원천으로 타인과 자신을 혐오하는 기제가 되며, 어떤 빈곤은 한 사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는다.

책은 빈곤에 저항하는 공동체적 문제의식이 복지 담론에 갇히고 제도화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낙인과 규범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조명하며 시작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제정 당시 지역 현장에 일었던 변화와 혼란은 현재 사회보장제도가 가난한 이들과 맺는 관계의 뿌리를 돌아보게 한다. 무능력을 입증해야 도움받을 수 있지만, 능력을 통해 스스로 빠져나갈 것을 주문하는 사회보장제도는 가난한 이들이 비능동적임을, 즉 이들의 의존성이 가난의 원인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의존’에는 다른 역사도 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의존은 노동자가 개인과 사회의 표상을 포개는 언어였다. 노동자는 단위와 사회에 의존하며 함께 발전했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 이후 자력갱생이 노동자의 덕목이 되며 의존은 부정적 낙인을 얻었다.

얼핏 서로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 폭스콘(Foxconn)의 노동자 쭤 메이의 삶(3장)과 한국 대학생들의 해외 자원봉사 이야기(5~6장)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발전의 욕망, 제한된 자원 속에서 연속적인 선택과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가 긴 시간 만나온 두 중국 여성 쭤 메이와 쑨 위펀의 삶이 촘촘하게 기록된 점이 특히 흥미로운데, 하얼빈에 사는 빈민 쑨 위펀이 잃어버린 땅을 찾는 여정(4장)은 가난한 이들이 법과 제도 앞에서 어떻게 단념을 배우는지에 관한 생생한 보고다. 복잡한 제도 앞에 자격없음을 반복해서 확인받는 일은 ‘빈곤 과정’ 그 자체다. 저자는 ‘빈곤의 인류학’ 수업 수강생들과 빈곤 현장, 활동가들을 만나며 새로운 마주침의 가능성도 발견한다(8장). 모르던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좇다보면 막연하게 절망하긴 이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거쳐 제안하는 윤리는 ‘동거’다. 불평등의 결과인 가난을 떠안은 몸들의 느린 회복력과 함께 기대어 살아가자는 제안이다.

빈곤은 무엇인가? 조문영은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를 부단히 질문하자고 권한다. 독자의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빈곤은 어디에서 오는지, 어떤 모양으로 이 세계에 걸쳐져 사람들을 분할하고 통치하는지 들려주다가 불현듯 몸을 돌려 ‘어디로 가게 할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나아가 멀리서 관전하지 말고 동참하자며 책 너머 독자를 응시한다. 이 제안을 수락할 사람은 똑똑하지 않아도, 몸이 아프거나 가난해도 괜찮다. 세계를 빚어온 발전의 양식이 빈곤을 창조해왔다면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에 취약한 몸들을 살릴 가능성은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의존하는 기술에 있다.

이 책은 함부로 희망을 선언하지 않는다. 세계가 주조한 몇겹의 욕망에 우리 모두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에서 강 너머 번쩍이는 공업도시 이창을 바라보던 쓰촨의 한 농민공처럼(377면) 우리의 복잡한 욕망도 쉽게 잠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번 더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쓸모를 증명해야 살아남고, 살아남아야만 쓸모 있다 여기는 세상이 혹시 잘못된 것 같지 않느냐고.

빈곤에 대한 정책이나 제도에 가난한 사람은 숫자로만 등장하고, 개인의 가난을 말할 때 구조적인 문제는 그의 결함이나 병리로 쉽게 치환되곤 한다. 『빈곤 과정』은 지금까지 그렇게 미끄러지며 만나지 못했던 정치사회적 담론과 정책, 사람들의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저 죽음으로 빈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실망과 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다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야 한다. 죽음 이전에 삶이, 한 사람의 삶에 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