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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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재현 皮在睍

1967년 경북 안동 출생. 1999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이 있음.

ppppp2001@hanmail.net

 

 

 

딸 자랑

 

 

올해 결혼한 딸이 중학생 때 일이다

아홉시가 넘도록 딸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전화가 왔다

그날 다은이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섰고

찬 이슬이 가시지 않은 등굣길을 밟아가다가

지구대 건물 뒤에 쪼그려 앉은 한 여인을 만났다

아직 지구대는 문을 열지 않았고 필리핀에서 시집온

그녀는 아침부터 한국 남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갓난아기를 업고 집을 나와

지구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은이는 울고 있는 그 여인과 함께 앉아 아기를 달래며

순경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통역까지 해주고서야

부리나케 학교로 뛰어갔으나 지각을 하고 말았다

오전에는 지각을 했다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났으나

오후에 순경이 학교에 찾아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선행학생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구 딸이 서울대를 갔느니 누구 딸이

판사가 되었느니 자랑질을 해도

내 딸만은 못할 거라고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글날

 

 

한글날 공휴일이라 시댁에 들어온 며느리는

하루 종일 시어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고들빼기 다듬는다

신랑은 새벽부터 시아버지 따라 콩 타작하러

들에 나가고 없고

가을 해가 왜 그리도 긴지, 구름은 소풍처럼 희고

이제나저제나 손가락이 까매지도록

고들빼기 다듬다가

허리 한번 펴려는데 시어머니는 또

마른 양대콩 날라 와 코앞에 산을 만든다

확 짜증이 나려다가 문득

고추 심기 싫어 어린이날 없었으면 좋겠다 싶던

어린 시절 생각나 피식 웃고 만다

평생 농사짓는 집에서 컸으면서 왜 또

농사꾼 아들하고 결혼을 해서

콩 다 까고 집에 가면 허리 아파

내일은 아침밥도 못 먹고 출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