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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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朴城佑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웃는 연습』이 있음.

ppp337@hanmail.net

 

 

 

피아노

 

 

한때 나는 이 가족의 기쁨이었다

일곱살 아이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바짝 다가와 앉았다

건반 위로 올려지는 손은 작고 예뻤고

아이의 엄마 아빠는 마냥 뿌듯한 듯

아이의 표정을 살피면서 나를 만졌다

 

규연아, 체르니 몇번 쳐?

책을 보거나 빨래를 개던 아이의 아빠는

악보를 따라 연신 뚱땅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고는 했다

식구들이 모여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간다고 떠들썩하던 날은

늦은 저녁에야 불이 켜졌다

 

누구에게나 한때의 절정은 있다

아이가 「겨울왕국」에 나오는 노래를

능숙하게 연주하던 어느 봄날의 휴일은

유독, 가족 모두가 행복해 보였고

나조차 설레서 오래 들떠 있었다

그러나 내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한해가 다르게 커가던 아이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바빠졌고

아이는 머지않아 내 존재 자체를 잊었다

 

머리 위로는 액자와 양초, 급기야는

수건에 양말까지 올려지고 있었다

먼지가 수북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주위로는 책이며 잡동사니가 늘어갔다

외롭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이의 아빠는 혼잣말인 듯 말했고

중학생이 된 아이는 별말이 없었지만

나는 곧 대답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안 계화도 쌀

 

 

늦은 귀가를 하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쌀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골 방앗간에서나 볼 법한 나일론 쌀자루,

시골집 노모가 보내셨나? 쌀자루를 끙끙 들어

현관 앞 거실에 옮겨놓고 가만 살펴보니

105동으로 가야 할 쌀이 106동인 우리 집으로 왔다

보낸 이의 주소도 처음 보는 전북 부안 계화 소재였다

나일론 쌀자루에 쓰인 원래의 손글씨를 보니

5인지 6인지 애매하게 적히긴 했다

부안 계화도 쌀이라면 밥맛은 어지간하겠군,

시간은 벌써 밤 열시를 넘기고 있었고

더 늦기 전에 나는 곧장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쌀자루를 둘러메자 허리가 휘청했고

후들후들 옆 동으로 옮겨가 11층에서 내렸다

동만 다르고 호수가 같은 집 앞에

쌀자루를 부려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혹시, 쌀 시킨 적 있나요?

우린 그런 적 없는데요, 중년 사내의 목소리에는

경계심 가득한 퉁명스러움이 잔뜩 섞여 있었다

남의 집 문 앞에서 졸지에 난감해진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방에서인지 화장실에서인지 나온 듯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여보 내가 쌀 시켰어, 부부는 문을 열어주었고

가까스로 나는 쌀자루를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해서 그런가,

중년 내외는 뭔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딱히 나는 개의치 않고 공손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그것 좀 들었다고 땀이 다 나나,

넥타이를 풀어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양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보면서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