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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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철 安舟徹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등이 있음.

rire010@empas.com

 

 

 

등이 열린 사람

 

 

아파트 베란다에 들어온 몇마리 햇빛들이

지루한 고요를 반나절 넘게 덥힐 때

잠에서 깬 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눈곱 낀

눈으로 바라본다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 사내는

걸어가면서 발끝이 사라지고 발목이 사라지고

종아리가 사라진다

 

유리를 통과하면 사내는 다시 발끝이 생기고

머리가 생기고 두통이 생겼는지 덜 생긴 손가락으로

허공에 뜬 머리를 누른다 하지만

몸통이 다 생기기 전에 사내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

 

자연스러워서 놀라지 않았지만 다시 잠에 들면

내 등이 계속 열려 있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슬픈 일을 떠올린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고

 

새 한마리가 유리창을 쪼는 소리에

눈을 뜨면 새는 사내의 눈을 쪼고 있다 사내는

뛰어내리지 않고 몸이 다 생길 때까지

피를 흘리면서 서 있다

 

나는 인내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모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저 새와 저 사내 중

누가 더 아름답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을 한다

 

새가 날아가자 그제서야 사내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

 

 

 

우중산책

 

 

1

 

우산을 챙기지 않고 천변을 걷다보면

내리는 비가 하천 위에 펼치는 우산들

하나 둘 셋 번진다

 

숫자를 넘어서 멀리멀리

숫자를 지우면서 멀리멀리

 

저 수많은 우산들을 집어 들고 싶어도

손잡이가 없다

 

하나 둘 셋 보이지 않는다

 

 

2

 

이제 인정하겠어? 너의 지질함

끝끝내 반대하고 싶었던 너의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운 거야

 

인정은 하겠는데 이 괴물이 언제부터 내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궁금해

 

그걸 궁금해한다면 너는 또다시 거짓말

궁금해하면서 도망가고 싶은 것이겠지

이제 도망갈 곳도 없을 것 같은데 어쩔래?

죽은 것처럼 살래? 아니면 죽을래?

 

 

3

 

비가 내려서 흘러간다 아래로

 

물결을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리는 비가 만드는 둥근 물결을 담으면서

 

비가 내린다

나와 관계가 없는 비는 내리고

하천 수면 위에 떨어지면서 우산을 더이상 만들지 않는다

 

우산처럼 보이지만

 

한참을 더 걷는다 비는 내린다

나는 어떤 물방울일까

 

말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