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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다다서재 2021

우연 속에서 찾은 죽어가는 존재-됨의 윤리

 

 

최은경 崔銀暻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qchoie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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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急は具合が要くなゐ, 2019, 김영현 옮김)은 7년간 암을 앓고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암환자이자 ‘우연’을 연구해온 철학자 미야노 마끼꼬(宮野眞生子)와 우연히 그녀와 인연을 맺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磯野眞穂) 간에 주고받은 편지를 출간한 책이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학문적 배경에 걸맞게 의료와 환자 경험, 우연에 관한 다채로운 학문적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장으로 기대했으나, 마지막은 죽음과 삶에 관한 더욱 묵직한 질문으로 끝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끼꼬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편지를 이어가는 일 자체가 삶을 위한 여정이 되었기 때문이다.(마끼꼬는 책의 서문을 마지막으로 마친 뒤 긴급 입원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 책에 실린 첫 편지의 내용도 녹록하지 않다. 마끼꼬가 의사로부터 병세가 급속히 악화될 수 있고 호스피스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은 후 두 사람은 현대 의학이 얘기하는 확률, 그 속에서 선택의 의미를 되묻고 선택과 운명의 차이를 논한다. 둘의 이야기는 우연과 운명, 선택과 만남, 필연의 죽음을 함께 하는 과정에 관하여 길고도 깊게 이어진다. 마호와 마끼꼬의 취미인 복싱과 야구 이야기가 곁들여져 즐겁고 가벼운 삽화도 간간히 섞이지만, 기본적으로 수많은 우연 속에서 왜 우리는 삶을 받아들이고 나누어 지는가에 대해 묻는 여정이기에 질문도 답변도 가볍지 않다.

우연의 철학자인 마끼꼬가 설명하는 질병의 여정, 투병의 여정, 삶의 여정은 알 수 없는 우연의 총집합이다. 내가 왜 그 질병에 걸렸는지, 왜 아파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찾기 어렵다. 과학은 ‘어떻게’ 그 병에 걸렸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의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암의 원인으로 얘기되는 유전자, 식습관 어느 것도 확률적인 설명만 가능할 뿐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 삶에 갑자기 치명적인 사고나 재앙이 닥칠 수 있는 것처럼 암이라는 질병 역시 그러하다. 언제나 환자들은 수많은 우연을 경험하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여러 가능성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서로 다른 갈림길들을 미리 예측하고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일밖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지점, 수많은 우연의 역접 같은 순간을 마끼꼬는 도리어 질병의 가능성도 삶의 가능성도 피어나는 지점으로 사유한다. 우연의 집합으로 암에 걸려 죽음의 기로에 접어든 마끼꼬는 불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행은 불운이라는 부조리를 생에 고정시킨 결과물이라며 거부한다. 마끼꼬의 주 연구대상이기도 한 철학자 쿠끼 슈우조오(九鬼周造)의 말을 빌리면 우연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현실의 생산점”(103면)이다. 합리적으로 선택하며 살려고 해도 쉽지 않기에 ‘뛰어넘자’고 되새길 때, 선택은 우연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 마끼꼬에게 질병을 살아내는 것은 그동안 지나쳐왔던 수많은 운의 조합과 갈림길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마끼꼬는 현대 의학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착한’ 환자이다. 그러나 우연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부분에서 그녀가 현대 사회와 의료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오늘날 위험성 관리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우연과 확률을 분석하여 질병과 죽음을 예측하고, 시간과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먼 미래에는 식생활과 생활습관을 바탕으로 장래에 걸릴 수 있는 병을 예측해 자기 관리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죽어가는 환자와의 대화 기술을 발전시키고 죽어감에 관하여 교육함으로써 죽음 역시 모두에게 편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만들려 한다. 그러나 그런 관리된 가능성 속에서 환자들은 어떤 삶의 주체성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어떤 가능성을 보고 몸을 소진시킬 수 있을까. 마끼꼬의 표현에 따르면 리스크와 확률을 따지며 관리된 선택이란 것은 “미래를 향해 사라져가는 시간에 대한 공포로 (…) 만들어진 결과물”(225면)일 뿐이다. 그리고 리스크와 리턴의 끝없는 반복이 우리의 존재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죽어가는 사람은 소멸해가는 존재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무화되는, 나답게 있으려는 것조차 근본부터 철저하게 뒤흔들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끼꼬는 도리어 죽어가는 존재-됨의 윤리를 설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웰-다잉’하는 기술의 대척점이다. 그녀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모르핀을 맞아가며 글을 이어간다. 관리되며 소멸하는 점이 아닌 점을 이은 선의 궤적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에 어쩌면 최악의 민폐일 수 있는, 죽어가는 사람과의 친구 됨을 마호에게 제안한다. 그리고 둘은 편지로 떠나는 여정을 함께 겪고 피할 수도 있었던 우연을 받아들이면서 만남을 운명으로 승화시킨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을 내 삶의 일부로 마주하며 상실을 각오하고 살아가겠노라는 용기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새롭게 ‘나’라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서간집은 소멸해가는 삶의 가능성을 질문하며 긍정하는 기록으로 빼곡하다.

죽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도 상실한 것일까. 소멸해가는 사람과의 관계 맺음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은 무의미한 것일까. 질병의 회복만을 바라보며 그 이후에 여행이나 다니면서 삶을 다시 누릴 수 있으리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마끼꼬는 비판한다. 회복 이후의 시점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수많은 우연이 빚어내는 가능성을 놓치게 된다. 상실을 마주하지 못할 때, 지금의 만남이 주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도 알지 못하게 된다. 암과 질병이 주는 치명적인 불확실성과 우연 속에서도 운명을 만드는 선택의 용기들은 존재한다. 때로는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더라도 죽음에 고정되지 않는 삶의 여정도 필요하다. 그것이 투병을 하거나 소멸해가는 와중에도 서로 말을 건네고 기록을 남기고 함께함을 제안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