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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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黃圭官

1968년 전주 출생. 199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동백 씨

 

 

시골에서 동백 씨 한움큼을 가져와

먼지 쌓인 책장에 얹어두었다

 

갈퀴손 그대로 세상을 떠난

슬픔처럼, 길가에 떨어져 있던

동백 씨를 담아 서울로 서울로

해고통지에 가까운 전출명령을 받고

갓 낳은 아이를 안고 왔던 그날처럼

나를 따라온 동백 씨,

 

혼자 빈방을 지키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둠을 품고 고독을

틔우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면

서울에 가면 심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생활이 등골을 일으켜 세운다

서울은 악마의 땅이라는 비웃음이

차라리 친근해진다

 

동백 씨가 지금 가진 것은 너무 적고,

적어서 꿈은 자꾸 깨지고 말지만

어둠에게도 강물과 동녘이 있어

비루한 비굴을 이고 사는

시간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동백 씨의 기억과 마치지 못한 기다림과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과

꽃잎처럼 아팠던 사랑들이

눈 내리던 저수지처럼 빛난다

울음 섞인 노래도

병에서 막 일어난 목소리도

점점 깊어지는 동굴이 된다

 

가을비에 한 세계가 지고 있지만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지만……

 

 

신대륙

 

 

숲을 태우는 불길이 캥거루를 쫓고 있을 때

바다 건너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흰 눈은 들판을 가슴 뛰게 하지만

도시에서는 쓰레기가 된다

절망은 이제 가면도 쓰지 않는다

 

바다가 달빛에 이끌려

다른 대지를 내밀어 보여주듯

시간이 쌓이면서

내쉬는 숨소리는 지평선이 되었는데

 

길은 언제나 산을 가로지르고

물장구도 없이 강을 건넌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진리라고

낯익은 영혼들이 저물녘 술집에 모여

맥락 없이 떠들어댄다

 

요즘에는 주식 사서 돈 못 번 사람이 없다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망했어 조용히 좀 해, 재수 없게 말이야 짓고 있는 아파트도 무너지는 세상이야 어느 시대나 떨어져 죽는 사람은 있어 인간이 원래 그렇지 뭐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바이러스도 끝내 입을 닫게 하지 못해

안이나 밖이나 소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사는 게 아니라 창고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그것에 미래를 맡기는 것일까

과거 없는 현재를 여기저기에 건설하는 것일까

 

이따위 세상은 끝나야 돼 이 자식이 얻다 대고 반말이야 고향 집 앞에 가로등 좀 달았으면 좋겠어 아직도 어두운 논바닥이라니까 그것 팔아서 아파트 중도금 좀 보태달라고 해봐 비트코인이 낫지 않을까?

 

어둠이 반동인 세상에서는

빙하가 무너져야 마땅하다

서정시가 떨리는 자아를 한땀 한땀

옮겨 쓴다고 불빛을 한층 더 밝히자

변압기의 체온이 어제보다 더 오른다

 

검은 숯덩이가 된 코알라 새끼 사진은

잠시 말을 끊어놓지만, 동물을

그동안 너무 학대했다고

공원에는 잘 단장한 반려견들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고공농성이냐? 민주노총 놈들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니까 언어가 상품이 돼서 페이스북과 언론이 붙어먹는 거라고 이 자식이 아직도 반말이네! 참아라, 이게 다 인공지능 때문이다 이번에는 재계약이 안 됐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네

 

거짓말들과 함께

불탄 자리에 홍수가 났고

홍수가 끝나면 폭설이 내린다고 한다

바다에 배 대신 플라스틱이 떠다닌다고 한다

 

신대륙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듯

 

무엇보다, 단골 식당이 폐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