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이훤

2014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 등이 있음.

PoetHwon@gmail.com

 

 

 

귀로

 

 

몸뚱이만 한 수하물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나온다

 

가방 몇개가 돌아오는 데 17년이 걸렸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그를 미워하는 얼굴이 아직 없다 앞으로도 모르고 싶다

 

모르기로 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

여권을 건네고 검지를 댄다

 

저가 모르는 자신의 지문이 스크린에 입력된다

 

서랍에 쌓아두는 호치키스 심처럼

이름과 신상이 보관된다

 

안경을 벗고 검문 카메라 쪽을 쳐다본다 화면에 돌아온 사람이 있다

 

왔구나

 

그는 보아주는 얼굴을 곧 갖게 될 예정이다

 

게이트를 지나면 너무 크게 소리치는 간판을 지나

많은 정말이지 너무 많은

술과 담배와 초콜릿과 향수 시계 화장품을 팔다

세금과

시간이 멈춘 가게들을 지난다

 

자동문이 열리면

 

오랫동안 주소였던 도시가 마침내 광경이 된다 새 나라가 된다

 

몰랐겠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여기 와 있었다

 

69킬로그램짜리 신체와

몇번의 사랑과

서너개 직업과

계속 태어나는 서류들이

나보다

오래 걸렸을 뿐

 

들이치는 건조하고 찬 바람에 놀라지도 않고 그는

 

버스에 혼자 올라탄다

 

허벅지만 한 이민가방 네개를

차례대로 싣고

만난 적 없는데 좋아하게 될 사람들이 머무는 도시로 향한다

 

 

 

열일곱번째 오모크1

 

 

봄이다

 

몸속에 생선과 새우를 채워 올 시간이다

 

모부(母父)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달이든 갈 수 있다

돌아갈 네가 있다면

 

크릴새우는 해조류를 먹고

해조류 먹은 크릴새우는 나의 아이들이

먹고

 

뭍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간다 새우로 몸을 꽉 채운다

 

돌아가면 계절이 바뀌어 있다

배 밑에서 기다리던 부리들이

저를 닮은 부리에게 식사를 건네받는다

 

이 동네 오모크에서는 펭귄들이 도미노처럼 무리 지어 겨울을 지난다

영하 40도에 텐트를 만든다

팔과 팔을 이어

갈퀴로 갈퀴를 덮어

 

타인을 찾는 마음이 집을 만든다

 

나는 너희 엄마를 열여섯번째 오모크에서 만났어

 

한해 만에 모부와 아이들은 헤어진다

그게 오모크의 유대 방식

 

아주 오랫동안 다시 보지 못할 거야

그리고 겨울이 죽이지 못하는 몸을 갖게 될 거야

 

너는 혼자

 

사냥하고 해빙을 지나고 폭설을 견디고

얼음을 건너 오모크로 갈 거야

거기서

어쩌면 사랑이 일어날 거야

운이 좋으면 새끼를 낳고

바다로 가서 네가 아닌 것들로 몸을 채울 거야

행군하는 동안 자꾸 용감해질 거야

 

너의 생보다 긴 바다를 건너게 되는데

 

어떤 눈망울 때문에 사는 내내 우리가 횡단한다는 걸 알게 돼

 

돌아오면

운반한 새우를 토해 그들에게 먹인다

범고래를 피하고 큰풀마갈매기로부터 널 닮은 얼굴을 지키면서

 

바다가 울고

땅이 너무 빨리 녹고

고향이 없어지고

작년보다 오모크가 더 멀어지지만

 

행군이 새 행군으로

 

우리는 사랑으로 메워도 녹지 않는 나라를 찾고

 

겨울을 모르는 나라에도

겨울이 하나씩 지나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열일곱번째2 오모크가 온다

 

 

  1. 황제펭귄들이 사랑을 나누는 곳. 펭귄들은 그곳에 가기 위해 때로 수십 킬로미터를 여행한다. 거기서 아이를 낳고, 그들을 먹이기 위해 모부가 번갈아가며, 필요하면 둘 모두 사냥을 떠난다. 새끼가 자립하도록 일년 후 이별한다. 적잖은 수의 어린 펭귄이 모부로부터 멀어지며 죽는다.
  2. 황제펭귄의 평균 수명은 15~2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