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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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金言

1973년 부산 출생.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등이 있음.

kimun73@daum.net

 

 

 

오후 8시경에 비

 

 

휴대폰을 보니 ‘오후 8시경에 비 예상됨’이라는 안내가 뜬다.

구글에서 보내온 날씨예보다.

정말 8시에 비가 올까?

지금은 7시 38분. 조금 전에 해가 완전히 졌다.

창밖은 캄캄하고 멀지 않은 농구장에서 누군가 혼자서

농구공을 튕기는 소리가 들린다.

두시간 전에는 ‘오후 6시경에 비 예상됨’이라고 떴다.

6시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7시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

8시에는 정말로 올까?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

비가 오면 얼마큼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빗속을 통과하는 운전, 우중 운전을 해야 한다.

퇴근해서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길어야 30분.

30분 동안 비를 맞으며 나의 차는 갈 것이다. 정말로 비가 온다면,

비가 오는 시간에 맞춰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집까지 운전해서 가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딱 그 정도만 생각하면서 창밖을 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농구공 튕기는 소리만 들린다. 비가 오면 저 누군가도

어딘가로 가겠지. 집이 아니면 어딜까?

집이 아니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할까?

갈 곳이 없다. 어디로든 가야 하는데,

휴대폰의 시계는 이제 막 7시 47분을 찍고

8시를 향해 간다. 비가 온다면 좋겠다. 적당히 와도 좋고

폭우가 쏟아져도 좋겠다.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듯이

때가 되면 오는 비. 그 비를 예상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와중에도

비는 온다. 때가 되면 온다. 영영 아니 올 듯이 시간이 간다.

 

 

 

저지대의 발

 

 

저지대에 빠졌다. 저지대에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저지대는 고지대보다 낮고 푹푹 빠진다. 빠지기 쉬운 저지대에서 더 빠지기 쉬운 저지대로 발을 옮겨가면 거기에도 발이 있다. 남보다 먼저 도착한 발이 이 저지대에도 있고 저 저지대에도 있고 그 저지대에도 있었다. 없다면 없는 대로 저지대가 있고 저지대로 가는 발이 있고 저지대에서 나오는 발도 있을 것이다. 저지대에선 추측하지 말자. 추리하지도 말자. 상상만 하다가 푹 빠진 저지대에서 더 저지대로 가는 길을 생각하려니까 두렵다. 두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생각을 중지한 저지대. 저지대의 발은 생각하지 않는다. 저지대의 발을 생각하지 않는다. 저지대의 발에게 더 저지대인 것이 무얼까 질문하지도 않는다. 답변은 저지대의 것이 아니다. 답변은 더 저지대의 것도 아니다. 답변은 푹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저지대를 저지대답게 고지대로 옮겨가지도 않는다. 저지대는 저지대다. 어찌할 수 없는 저지대다. 발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옳다. 저지대에서 가장 가까운 물건이 발에 붙어 있다. 발바닥에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