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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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근 『특권 중산층』, 창비 2022

중산층 내부의 분열과 욕망을 조명하다

 

 

신진욱 申晋旭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socioshin@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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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근 하와이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특권 중산층: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은 1974년 박사학위 취득 후 반세기 동안 학문의 길을 걸어온 노학자의 저작이라곤 믿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면을 갖고 있다. 적잖은 학자들이 이른 나이에 자신의 학문을 결산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 달리, 그는 이 책에서 여전히 자신의 연구 관심사를 발전시키며 계급과 불평등에 관한 최근 세계학계의 쟁점들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된 그의 저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Korean Workers, 2001, 신광영 옮김, 창비 2002)이다. 그래서 이번 『특권 중산층』을 접한 독자들은 어쩌면 그의 관심사가 노동계급에서 중간계급으로 바뀌었거나, 이론적 입장이 계급에서 계층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수십편의 논문들을 돌아보면,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자본주의와 산업화, 불평등과 계급·계층, 그리고 국제환경과 정치·문화의 영향을 이해하려는 집념을 느낄 수 있다.

구해근은 학문적 삶의 초기부터 몇가지 커다란 사회학적 질문을 던지고 평생에 걸쳐 그 대답을 모색했으며, 한국과 세계의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문제의식을 거기에 결합시켰다. 1970년대 중반 그의 최초 연구주제는 발전도상국 또는 제3세계에서의 이농과 사회이동, 특히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화’였다. 그는 이후 1990년대까지 한국·대만·필리핀 등 여러 아시아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사회변동과 사회계급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후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편으로 불평등과 계급구조, 계급형성과 계급갈등에 관한 연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정치경제적 환경인 세계체제와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전략에 관한 연구를 이어갔다. 1990년대, 그리고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시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연구 주제들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중간계급의 특성과 형성, 민주화 과정에서의 역할, 노동계급의 내적 분화와 균열, 세계화와 ‘글로벌 중간계급’의 등장과 같은 주제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오랜 학문적 여정의 맥락 속에서 두 한국어 저작을 이해한다면, 더 깊고 풍부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초점은 한국에서 산업노동자 1세대가 무엇을 경험했고, 그것이 어떻게 문화와 정치에 의해 매개되어 투쟁과 계급의식으로 이어졌는가였다. 여기서 구해근은 젊은 노동자들이 공간적으로 집중된 노동·주거 환경, 그리고 유사한 사회·인구학적 특성 및 숙련 수준을 배경으로 하여, 가부장적·전제적인 노동체제에서 겪은 착취와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 및 교회·학생·민중운동 등과 교류하면서 집합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민주화 이후 대기업 중심의 강력한 조직노동이 성장하면서 노동계급 내에 격차가 확대되는 ‘딜레마’ 또는 ‘아이러니’를 고민하고 있었다. 계급 내적 분화와 이질성 증대, 계급관계의 다변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특권 중산층』에서도 동일한 문제의식이 관통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 형성된 정치경제적 맥락과 과정 위에서, 2000년대 이후 중간층 계급 내 양극화를 집중 조명한다. 저자는 1990년대 후반의 국내외적 환경 변화 및 금융위기 이후의 불평등 심화 과정에서 중산층의 규모가 감소했을 뿐 아니라 중산층 내의 질적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주목한다. 중산층의 중·하층은 상황이 악화된 데 반해, ‘특권 중산층’ 또는 ‘부유 중산층’은 그들과 구분되는 상류집단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기술직, 관리직, 경영자, 글로벌 엘리트 같은 집단으로, 부동산 등 불로소득과 더불어 학벌·국제경험 등에 기초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특권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같은 중산층의 구조적 변화 과정을 저자는 1980년대 이후 노동집약형에서 기술·지식집약형으로 변화한 경제체제, 1997년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성과기반 체제 강화, 세계화 과정에서 고소득 전문직 및 신흥 부자의 증가, 그리고 부자 감세나 부동산 부양책 등 정책 환경의 영향으로 설명한다. 2000년대 이후 중산층의 분화가 ‘현상’이라면, 그 저변에는 국내외에서 진행된 거시적 사회변동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시적 수준에서 구해근은 특권 중산층이 여타의 계층들과 ‘구별짓기’ 하는 실천들을 주목한다. 주거 공간의 분리를 통한 계층화, 소비·생활양식에서의 신분 경쟁, 교육 측면에서 학벌과 영어능력, 그리고 문화자본으로서 코즈모폴리타니즘적 하비투스(habitus)가 대표적이다. 일반 중산층은 하층으로의 추락을 두려워하면서 특권 중산층을 ‘준거집단’으로 삼아 비교하고 욕망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권 중산층은 자식 세대에서 부모의 특권적 지위가 유지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특권 중산층』은 이처럼 중산층 내부의 양극화와 구별·욕망·불안의 역동성을 보여줌으로써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 계급관계 전반의 변화로 우리의 관심을 확장하도록 자극한다. 한국사회는 1950~60년대에 농민과 자영업자가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1970~80년대에 노동계급이, 1990년대에는 고학력 신중간계급이 급증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기업규모와 고용형태에 따른 노동계급 내 격차, 중산층의 양극화, 그리고 새로운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확대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계급 간, 계급 내의 동맹과 갈등,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접합하는 헤게모니 투쟁의 조건 역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의 지배 블록이 어떤 계급들로 구성되며, 현실을 변혁할 주체들은 누가 될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이 우리 앞에 있다. 계속해서 분화하고 변해가는 오늘날의 계급현실에서, 라끌라우(E. Laclau)가 말한 바와 같이 부유하는 정체성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연결시키는 ‘국면적 접합’의 정치는 과연 어떤 문화와 관계를 만들어내야 할 것인가.

신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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