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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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진영 崔眞英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일주일』,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등이 있음.

metaphor81@naver.com

 

 

 

인간의 쓸모

 

 

컨디션 최상의 난자와 정자를 안전하게 결합시키기 위해 모부는 섹스 없이 안나를 만들었다. 당시 유전자 편집의 기본 옵션은 ‘-3 +2’였다. 모부는 안나의 배아에서 비만, 주의력 결핍, 알코올중독의 가능성을 없앴고 XX의 눈동자와 XY의 코를 선택했다. 디자인의 마지막 단계에서 모부는 성인이 된 안나를 3D 모델링으로 확인했다. 모부는 자기들이 확인한 그대로 안나가 성장하리라 믿고 비용을 지불했다. 이제는 옵션에 제한 없이 디자인하는 만큼 돈을 더 내는 추세다. 유전자 편집의 부작용 사례가 다양하게 밝혀진 만큼 안전이 확보된 편집 또한 증가했으므로. 물론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배아 디자인을 반대하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주 먼 옛날 피임이나 인공수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유전자 편집이 불법이던 시대에는 분위기, 향기, 말투, 태도, 소지품, 명성 그리고 사는 곳이나 자동차 종류 등으로 부자와 빈민을 구분했다. 이제는 외모만으로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갤럭시존 인간은 외모와 체형이 대체로 비슷하다. 최고급 디자인을 거친 그들은 건강하고, 키 크고, 날씬하다. 유행에 따라 그들의 외모에도 미묘한 세대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통틀어 세련되다. 타운존 인간은 갤럭시존 인간을 바로 알아본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을 분간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목소리, 눈동자, 개별적 특징 등을 눈여겨볼 시간. 물론 갤럭시존 인간끼리는 서로를 바로 구분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교류한 그들은 각자의 차이를 모를 수 없다.

갤럭시존, 타운존, 노고존 또한 외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과 정돈된 저택,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쾌적하고 안전한 공원, 곳곳에 조성된 울창한 숲과 지하에 설계된 대규모 벙커, 일정 구획마다 대형 공기청정기를 갖춘 갤럭시존에는 전신주가 없다. 그곳의 새들은 전신주가 아닌 높은 나무에 집을 짓는다. 전기자동차나 수소자동차만이 그곳의 도로를 사용할 수 있다. 도로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홍수에도 잠기지 않는다. 타운존은 갤럭시존 외곽을 울타리처럼 둘러싸며 빼곡하고 넓게 포진되어 있다. 그곳의 대중교통은 뛰어나고 편리하다. 인구밀도는 높고 대기질은 나쁘다. 외식, 유흥, 쇼핑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은 포화상태다. 자녀 없이 성인으로만 구성된 가구가 많은 한편 자녀가 있는 경우 모부들의 교육열은 높다. 갤럭시존 인간들은 관광을 목적으로, 일부는 불법을 합법적으로 저지르기 위해 타운존을 드나든다. 그들은 타운존에서 각종 레저를 즐긴다. EX-AI 투어로 불편을 체험하고 레트로 감성을 경험한다. 캠핑이나 암벽등반, 낚시처럼 고전적인 취미생활도 즐긴다. 타운존에 대규모로 조성된 각종 거리(까페거리, 클럽거리, 도넛거리, 마라탕거리, 야시장거리 등등)에서는 탄소와 쓰레기를 배출하며 ‘인간적인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타운존 인간들도 갤럭시존에 돈을 쓰러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급을 체험한다. 한편 노고존은 지방에 산발적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노고존에 사는 사람만이 그곳을 제대로 알 것이다.

 

*

 

타운존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교와 평가. 그것이 있기에 타운존 인간들은 행복하고 불행하다. 따돌리고 협력한다. 숭배하고 혐오한다. 목표를 세우고 자살한다. 타운존에 사는 이상 누군가보다 부족한 인간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나의 이웃은 안나가 또래에 비해 통통한 편이라는 말을 집요할 정도로 자주 했다. 튜터는 세밀하게 작성한 그래프를 제시하며 안나가 평균에 비해 집중력이 부족하고 주의가 산만하므로 지속적인 악기 레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모부는 안나가 카페인음료에 중독될까봐 걱정이 많다.

안나는 어릴 때부터 피부질환을 달고 살았다. 만약 자기를 직접 디자인할 수 있었다면 비만 대신 피부질환을 없앴을 것이라고 안나는 생각했다. 안나의 모부는 종종 후회하는 소리를 했다.

안나를 좀더 늦게 가질걸. 그랬다면 훨씬 다양하게 디자인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너무 성급했어.

디자인센터를 잘못 골랐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뭐든 가격 대비인 거야. 무리를 해서라도 갤럭시존 센터로 갔어야 했어.

 

안나는 어릴 때 다음과 같은 상상을 했다.

디자인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디자인이 없었다면 안나는 없다.

 

노고존에서는 배아를 디자인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다. 내분비장애나 심혈관질환처럼 기본적인 기저질환조차 제거하지 않는다고. 안나는 그들의 용기 또는 무지가 두려웠다. 그들은 운명에 맞서는 것일까? 아니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안나는 타운존 생활에 불만이 많았지만 노고존에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인터넷에는 안나의 영상이 많다. 모두 모부가 찍어 올린 것이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이후 일상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 업로드하는 현상은 늘 있었다. 유행하는 플랫폼이 달라질 뿐이었다. 소셜미디어는 타운존의 특색인 비교와 평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안나의 모부는 돈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채널을 운영하진 않았다. 안나를 사랑해서, 안나의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하고 싶어서, 어쨌든 남들도 다 하니까, 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 보일까봐 했다. 모부는 주로 안나의 처음을 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안나의 탄생, 첫 목욕, 첫 분유, 첫 옹알이, 첫 감기, 첫 병원 진료, 첫 이유식, 첫 생일, 첫 훈육, 첫 직립보행, 첫 배변 연습, 첫 달리기, 첫 자전거…… 인간들은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 그중에는 안나를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는 인간도 있었다.

—사정이 안 돼서 아이를 만들지 못했는데 안나를 보면 꼭 내 아이 같아요.

—안나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너무 허전하고 쓸쓸해요.

—안나를 보고 있으면 아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안나 예방주사 맞을 때 되지 않았나요?

—아이 이마에 상처는 뭔가요? 조심했어야죠.

—이유식을 프리미엄으로 바꿔야 할 듯.

안나를 온라인에서 키우는 캐릭터처럼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그들은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댓글로 남겼다.

—아이돌댄스 따라 하는 영상은 없나요?

—잠꼬대하는 모습 보여주세요.

—캐릭터 점프슈트 입혀줄 수 있어요? 안나는 토끼 슈트 진짜 잘 어울릴 텐데!

—아이에게 청양고추 먹여보세요.

그들은 질문했다.

—안나 디자인은 얼마나 들었나요?

—안나 신발 브랜드 뭔가요?

—안나 공부는 언제부터 시킬 건가요?

안나는 다섯살 때부터 글자를 읽었다. 그러나 댓글에 담긴 자세한 의미까지 이해하진 못했다. 특정 댓글이 자기를 공격하고 깔보는 것만 같다고 느꼈을 때 안나는 모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야? 모부는 대답했다. 네가 예쁘다는 뜻이야. 거짓말이라는 걸 알기까지 오년 걸렸다. 클래스의 남자아이가 댓글과 똑같은 말을 안나에게 했고, 다른 애들이 웃으면서 기분 나쁜 제스처를 취했고, 안나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말의 속뜻을 알려줬다. 그날 안나는 동영상의 댓글을 모두 찾아봤고 모부에게 따져 물었다. 모부는 그 또한 관심이라고, 관심을 천박하게 표현한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안나는 촬영을 거부했다. 모부가 영상을 찍으려고 하면 도망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방을 보여주기 싫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모부는 안나가 거부하는 모습을 찍어서 ‘첫 촬영 거부’라는 제목으로 업로드했다. 안나가 말대꾸하는 장면, 소리 지르는 장면, 카메라를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장면, 마침내 서럽게 우는 장면. 그 영상을 사람들이 좋아했다. 조회수가 수십만이었다. 덩달아 다른 영상 조회수도 늘었다. 모부는 당분간 영상을 찍지 않겠다고 안나를 달랬다. 거짓말이었다. 모부는 카메라를 감추고 몰래 안나의 일상을 찍었다. 안나의 자연스러운 거짓말, 애교, 질투, 투정을 업로드했다. 모부는 안나의 촬영 거부가 치기 어린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영상을 남겨준 자기들에게 분명히 고마워할 거라고 믿었다. 모부는 안나를 사랑했다.

 

*

 

이제 안나는 열다섯살. 모부는 건강한 정자와 난자를 만들기 위해 식단 조절과 운동을 시작했다. 둘째아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운존에서 둘째까지 낳는 건 흔치 않은 일. 그들의 결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몇년간의 일을 간략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회계봇 관리자였던 부는 삼년 전 직장을 잃었다. 부의 자리마저 AI로 대체된 것이다. 회사에는 AI 관리봇을 관리하는 인간만 남을 수 있었고, 부는 회사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부는 얼마간 방황하다가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았다(안나는 비로소 모부의 디자인을 이해했다). 그래픽디자이너였던 모 또한 비슷한 시기에 해고되었다. 모는 업계에서 실력이 좋기로 유명했다. 모는 AI보다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빠른 작업 속도와 적당한 디자인, 저렴한 가격을 원했다. 그만하면 오래 버틴 셈이라고 주위 인간들은 평가했지만, 모는 AI에게 ‘밀렸다’는 생각으로 크게 분노했다. 실직 후 모는 기분장애에 시달렸다. 인간들은 모에게 병원 치료를 권했다. 모는 병원에 가는 대신 가상연애 사이트에 접속했다. 사용자의 성격과 취향을 상세하게 입력하면 성향 분석과 알고리즘을 거쳐 그에 어울리는 AI를 제공하는 사이트였다. 모는 AI와의 밀착연애를 통해 AI의 맹점과 한계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때 모를 사로잡은 감정은 복수심뿐이었다.

그곳에서 모는 버나드를 만났다. 버나드는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해서 모와 비슷한 성향의 인간이 원하는 질문과 대답을 했다. 모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대화와 경험이 이어졌다. 모는 즉시 버나드에게 빠져들었다.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모와 버나드는 매일 데이트했다. 파티를 열고 여행을 떠났다. 물론 다투기도 했다. 권태를 예방하고 보다 애정을 북돋우기 위한 갈등이었다. 버나드는 적당한 순간에 모를 실망시켰고 언쟁을 유발했다. 그리고 반드시 감동을 줬으며 같은 일로 다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모는 버나드와의 이별까지 사랑했다. 모가 꿈에 그리던 이별, 인간이라면 실현하기 힘든 이별이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신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모에게 버나드는 대답했다.

당신을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건 내 평생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이자 행운이었어. 나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해. 당신이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어. 세상에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모와 버나드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렇게 모는 실직 이후 찾아온 상실감과 분노를 떨쳐버렸다. 인간보다 AI가 훌륭하고 믿음직하므로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만했다고 납득한 것이다. 모의 일자리를 대신한 것이 버나드 같은 존재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대체 무슨 소리야? 사용자를 영원히 사랑하고 잊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면 버나드는 그 명령을 실행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 자체는 인간이 만든 거잖아.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아는 인간이 설계한 거라고. 버나드는 동시에 수천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야. 그래도 인간보다 버나드가 위대해?

모는 그렇다고 했다. 인간이기에 원하지만 인간이어서 못하는 일을 AI는 무리 없이 해내므로. 버나드와 연애하는 동안 모는 인간에게는 받을 수 없는 절대적 사랑과 충만감을 경험했다. AI와의 사랑을 불륜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으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심리적 안정과 자신감을 되찾은 모는 재취업에 성공했다. AI몰 홍보마케터가 된 것이다. AI가 인간보다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음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와 같은 영역에서만큼은, 사용자들은 AI보다 인간의 말을 신뢰했다. 버나드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모는 버나드를 팔고 있다.

부는 타운존 투어가이드를 시작했다. 타운존에서 즐길 수 있는 각종 익사이팅 스포츠(암벽등반, 패러글라이딩, 웨이크보드, 번지점프 등)의 시범을 보이고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런 영역 역시, 사용자들은 로봇보다 인간의 시범과 감독을 신뢰했다. 로봇이 추락하면 놀라지 않지만 인간이 추락하면 놀란다. 정신을 바짝 차린다.

실직과 재취업을 겪으며 모부는 깨달았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AI가 대신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AI가 할 수 없는 일뿐이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출산과 성장, 노화와 죽음 같은 것. 소셜미디어 속 유아 채널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로봇으로는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생명의 귀여움, 사랑스러움, 의외성, 활력과 신비에 굶주린 인간은 점점 늘었다. 인간은 AI보다 우등한가? 그 질문에 여전히 많은 인간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AI는 인간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우등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AI가 인간보다 열등한 이유다. 그리고 하나 더. AI는 실행할 뿐 책임지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책임진다. 인간이기에 해고당한다. 인간이어서 처벌과 징계를 두려워한다. AI가 오류를 일으켜도 인간들은 AI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 관리자의 해명과 사과를 원한다. 그러므로 책임이 중요한 영역(정치, 외교, 종교, 의료, 법, 금융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기업과 기관 등의 소수 관리자)만큼은 인간의 독점이 가능하다.

그래서 모부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다음과 같다. 대출을 받아서 최대한 고급으로 둘째를 디자인한다. 둘째를 낳으면 유아 채널을 운영하여 돈을 번다. 그 돈으로 대출을 갚고 둘째에게 고급 교육을 시킨다. 둘째는 관리자가 되고 부자가 된다. 목표는 부자지만 결코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자식에게는 무조건 최고의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

 

안나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안나는 모부가 자기를 실패작이라고 결론지은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나는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직 자라는 중이야. 완성형이 아니란 말이야. 나를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챗봇이 안나의 질문을 감지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당신을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기는 너무 이릅니다. 인생은 매우 복잡하고 사는 동안 다양한 상황을 경험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챗봇의 응답을 듣던 안나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나의 총체에서 겨우 다섯가지를 지정했을 뿐이라고. 안나와 챗봇의 응답이 겹쳤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그중 세가지는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데 나는 비만이 아니야, 나는 산만하지 않아, 카페인은 술이 아니라고, 이 멍청한 인생이 훨씬 더 풍부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어른들아.

안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된 자기 모습을 봤다. 안나가 배아였을 때 모부가 3D 모델링으로 확인한 안나의 미래. 그것을 너무 많이 봐서 안나는 자기가 이번 생을 한번 살아본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이미 늙어서 죽을 때를 앞둔 할머니 같았다. 한때 안나는 생각했다. 돈을 벌어서 반드시 성형해야지. 엄마 아빠가 미리 본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안나는 알았다. 자기는 절대 성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기 미래가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를 떠나서 이미 너무 익숙해졌으니까. 3D 모델링과 다른 얼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안나는 다른 꿈을 꾼다. 안나가 아는 건 미래의 외모뿐이다. 미래의 내면은 안나에게도 미지수였다. 아무도 모르는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 안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안나는 모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기 내면을 채우고 싶었다.

안나는 소셜미디어에 접속해 자신의 오래된 영상을 클릭했다. 발가벗은 안나, 쭈글쭈글 새빨간 안나, 공포에 질린 듯 시끄럽게 우는 안나를 수십만 인간이 봤다. 동생이 태어나면 모부는 본격적으로 유아 채널을 운영할 것이고 거기에 동생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을 것이다. 안나가 갓난아이였을 때 말을 알아듣고 대답할 수 있었다면, 발가벗은 채 빽빽 우는 너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도 되겠니?라고 모부가 물었다면, 안나는 분명히 대답했을 것이다. 싫어. 미쳤어? 내 사생활이야. 절대 하지 마! 동생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자라서 영상을 지워달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영상을 볼 사람은 다 봤을 테니까. 동생은 지금 안나가 느끼는 무력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동생에게 동지애를 느끼며 안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훑어봤다. 예뻐요, 귀여워요, 사랑스러워요, 갖고 싶어요, 징그러워요, 저렴한 디자인, 타운 미개인, 하층민 탄생, 앞날이 걱정, 애만 불쌍 등등이 반복되는 댓글을 읽다가 안나는 스크롤을 멈췄다. 각종 감상과 인신공격 사이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문장이 있었다.

당사자가 원하면 영상 지워줍니다. 계정 폭파도 가능합니다. 무료입니다.

 

*

 

안나는 댓글 작성자의 계정으로 들어갔다. 프로필 사진도 게시물도 없어서 인간인지 AI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예로부터 모부는 모르는 인간을 조심하라고 했지. 함부로 따라가거나 대화하거나 채팅하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안나는 모르는 인간이 말을 걸면 못 들은 척했다. 모르는 인간과 간단히 채팅한 적은 있지만 그뿐이었다. 인간보다 AI와 대화하거나 활동한 경험이 훨씬 많았다. 인간 튜터는 커리큘럼을 설계하고 관리할 뿐 대부분 강의는 AI가 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다가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대면 클래스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또래 아이들을 만나고는 있지만 그건 사실 모부들에게 더 필요한 모임이었다. 타운존의 주특기인 비교, 평가, 경쟁을 위한 워크숍이랄까. 모부는 언제나 안나를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안나를 자기들 손바닥 안의 존재처럼 대했다. 요즘 모부는 안나의 말과 행동 전부를 ‘사춘기’라는 정의에 담아버린다. 사춘기여서 그래. 사춘기가 그렇지 뭐. 사춘기엔 약도 없어. 그러나 안나에게는 미지의 내면이 있다. 모부는 생각지도 못할 비밀로 채울 깊고 넓은 내면.

안나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채널 주소를 적고 영상의 당사자라고 밝힌 다음 영상을 모두 지우고 싶다고 썼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당사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진이 필요하며, 사진을 보내기 싫으면 화상 연결도 가능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모부는 모르는 인간에게는 절대 개인정보를 넘기지 말라고 했지. 그것은 타당한 충고다. 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수십만 인간에게 노출되었잖아? 어릴 때 얼굴이라고 해도 프로그램 돌리면 얼마든지 지금 얼굴을 유추할 수 있을 텐데…… 현재 사진을 보내라는 상대의 요구를 안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안나는 답을 보냈다.

화상으로 하죠. 그쪽 얼굴도 확인할 겸.

어쨌든 자기 얼굴만 노출하는 건 꺼려졌다. 상대가 인간인지 AI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바로 답장이 왔다.

지금 연결할까요?

안나는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화상 연결 신청이 들어와 수락했다. 화면에 상대의 얼굴이 떴다. 안나는 당황했다. 또래 인간인 것 같긴 한데……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갤럭시존에서도 타운존에서도 본 적 없는 유형.

인간이에요?

안나가 물었다.

사람입니다.

상대가 대답했다. 안나는 다시 당황했다. 상대가 한국어를 썼으니까.

한국어를…… 하네요?

한국어가 편합니다. 한국어 할 줄 압니까?

상대가 되물었다.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국어로 하죠. 당신 얼굴 분석하는 프로그램 가동할 거예요. 괜찮습니까?

안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뜻 한국어가 나오지 않기도 했고, 모든 게 생경했다. 마치 새로운 인류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AI가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근데 정말 인간 맞아요?

사람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어감이 다르잖아요? 사람, 삶, 사랑, 살림. 나는 그런 어감을 선호하는 편이라.

안나는 계속 당황했다. 고기능 AI와 대화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인간을 너무 잘 분석해서 인간을 뛰어넘은 AI와 대화하면 이렇게 연속으로 뜻밖이지 않을까? 혹시 엄마가 버나드와 대화할 때 이런 느낌이었나? 손목의 워치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심박수가 갑자기 빨라졌다는 신호와 함께 ‘무슨 일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떴다. 안나는 워치를 풀어서 책상 위에 놓으며 자신의 심장을 의식했다. 상대가 말했다.

분석 끝났습니다. 당사자 확인했고요. 화상 종료하고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안나는 다급하게 잠깐! 하고 외쳤다.

무슨 작업을 시작해요?

영상 삭제 요청했잖아요?

되묻는 화법이 상대의 특징인 것 같았다. 아니면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걸까? 안나는 더 대화하고 싶었다. 자기를 압도하는 기묘한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안나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진짜 무료예요?

제가 뭘 요구했습니까?

왜 무료예요?

상대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화면에서 조금 멀어졌다.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상대가 물었다.

하지 말까요?

뭘요?

영상 삭제.

아뇨, 그게 아니고, 어째서 댓가도 없이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상대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등에 턱을 괴며 물었다.

아동인권이라고 아세요?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댓가를 받고 하긴 싫어요. 내 신념에는 값을 매길 수 없으니까.

안나는 심장을 의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나는 자기 내면에 신념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념이라는 주머니에 값진 것을 가득 채워 넣겠다고. 안나는 계속 묻고 싶었다. 보석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왜 한국어를 해요?

한국어가 어때서요?

아니, 너무 소수 언어니까.

소수 언어니까 사라져도 괜찮다?

한국어 쓰면 불편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불편해 보입니까?

한국어 쓰는 것도 신념이에요?

상대는 두 손을 모아 인중에 대고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안나는 조급해졌다.

삭제 작업 말이에요, 해킹하는 거예요? 영상 지우려면 그 방법이 제일 빠르지 않나?

상대가 화면에서 조금 더 멀어지며 말했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다시 연락 주세요.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게…… 아무리 궁금해도 물어보면 실례인 것들이 있잖아요?

그쪽 이름 물어봐도 돼요? 몇살이에요?

해킹하는 거냐 다음에 질문이 이름이 뭐냐?

그쪽은 내 이름이랑 나이랑 다 알잖아요? 만약을 대비해서 나도 그쪽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만약?

이게 신종 범죄일 수도 있으니까.

상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속이려는 속셈이라면 설마 내가 진짜 이름을 말할까요?

심박수는 줄어들지 않고, 문제는 계속 일어났다. 이제 안나에게 중요한 건 영상이 아니었다. 동생도 아니었다. 안나는 자기를 흥분에 빠트리는 상대와 계속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화를 서둘러 끝내려고 했다.

의심한다면 작업하지 않습니다. 연결 종료할게요.

그 순간 안나는 뜻밖의 짐작을 했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함의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질문했다.

혹시 노고존 인간, 아니 사람이에요?

 

*

 

상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불쾌하네.

상대가 화면을 끌까봐 안나는 조바심이 일었다.

왜요? 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상대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으며 말했다.

노고존은 거기 그쪽 사람들이 붙인 멸칭이고. 우리는 우리를 꼬뮌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노고존은 원래부터 노고존 아니었나? 그게 멸칭이라고? 사실 안나는 노고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게…… 어떻게 부르냐가 문제가 되나요? 무슨 차이가 있다고?

질문하면서 안나는 인간과 사람의 차이를 떠올렸다. 갤럭시와 타운의 의미를 생각했다.

노고존은 우리를 전혀 모르는 외부에서 멋대로 지은 이름이고. 꼬뮌이라는 이름에는 자긍심이 있어요.

안나는 방금 보석을 주웠다. 안나는 신념의 주머니에 자긍심을 넣었다. 그리고 챗봇의 질문 창에 문장을 썼다. ‘노고존에 대해 알려줘’ 화면 가득 정보가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노고존은 단순노동 로봇과 빈민과 범죄자가 밀집한 우범지대이며 마약중독자와 병자가 많습니다. 구성원은 1차산업 또는 제조업에 종사하며 그들이 주로 일하는 대다수 공장은 탄소배출의 주범입니다. 의료시설이 낙후되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고 교육시설이 열악해서 문맹률이 높습니다. 기후위기 피해에 취약하여 홍수와 가뭄, 저지대 침수와 고온현상으로 인한 사망이 빈번합니다. 고장 난 로봇이나 산업폐기물의 종착지로 빈집과 총기를 소지한 인간이 많아 범죄 통제가……’ 끝없이 생성되는 문장과 이미지를 대충 훑어보다가 안나는 상대에게 물었다.

노고존, 아니 꼬뮌은 어디에 있어요? 정말 공장 많아요? 거기선 정말 배아 디자인 안 해요? 거기 우범지대라는데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방금 검색했어요?

안나는 아니라고 거짓말했다.

그거 다 할루시네이션1이에요. 꼬뮌에 대한 데이터 자체가 빈약한데다 꼬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추측으로 쓴 글이랑 꼬뮌을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올린 정보만 가득하니까. 어차피 딥러닝 알고리즘 자체가……

이게 다 가짜라고요? 전부 다?

챗봇은 거짓을 정교한 진실로 만들기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하기도 해요. 그런 생각을 설마 한번도 안 해봤어요?

챗봇은 모르는 게 없어요.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그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지? 신인가? 신도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상대가 ‘생각 안 해봤어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안나는 심장이 아팠다. 생각을…… 안 해본 것 같아서. 안나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안나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는 존재는 AI뿐이었다. 챗봇이 이상한 답변을 내놓을 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안나는 그것을 틀린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챗봇의 가벼운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안나는 인간의 말보다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믿으며 살아왔다. 그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버리면 안나의 삶은 너무 피곤하고 복잡해질 것이다. AI의 답이 거짓일 수도 있다면, 그럼 어디에서 진실을 찾는단 말인가? 인간은 안나에게 상처 주지만 AI는 안나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그 역시 거짓의 힘이었나? 그러니까 안나는, 여태까지는, 인공지능의 거짓 정보에 희생된 적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의문으로 안나의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안나는 의심을 거두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의심을? AI에 대한? 인간에 대한? 자기가 믿고 있던 세계에 대한? 안나는 지금 느끼는 혼란을 감추기 위해 질문했다.

영상 삭제 말이에요. 그거 진짜 어렵지 않나? 코딩은 어디에서 얼마나 배웠어요? 튜터가 어떻게 설계했어요?

상대는 감정을 다스리듯 길게 한숨을 쉰 뒤 대답했다.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학교를…… 다닌다고?

안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다. 학교에 다니는 인간을 처음 봤으니까. 학교는 가난한 아이들이 밥을 먹기 위해 모였다가 전염병을 퍼트리는 곳, 잠재적 범죄자인 문제아를 격리하는 곳 아닌가? 그런 곳에서 해킹 같은 전문 프로그래밍을 배웠다고? 안나는 할루시네이션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챗봇으로 ‘현재 학교와 과거 학교’ ‘전통적인 교육’ ‘노고존의 학교’ 등을 검색했다. 화면 가득 나열되는 정보를 띄엄띄엄 살펴보다가 검색창에 ‘세계 각국의 교육제도’를 입력했다.

검색해서 나오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어요.

안나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다는 태도로 상대가 말했다.

챗봇이 알려주지 않는 걸 내가 대충 말해줄게요. 옛날 부자들은 학교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어요. 사교육만으로도 충분히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학교를 따로 만들기도 했는데 점차 학교에 가는 시간 자체를 아까워했어요. 그러다가 자기들과 뜻이 잘 맞는 정치인이 나타났고, 그들은 급진적으로 학교의 역할을 바꿨어요. 이전까지 학교는 기본적인 학습뿐 아니라 아이들의 사회화, 체력 증진, 영양 균형, 보건 관리, 각종 문화경험까지 맡아 하는 의무교육이었는데 그 역할을 전부 없애버린 거예요. 학교는 부모의 돌봄이나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빈민층 아이들이 가는 곳이 됐죠. 처음에는 사람들도 걱정했대요. 학교의 역할이 그렇게 오염되는 걸. 정권이 바뀌면 학교도 이전의 의미를 되찾을 거라고 믿었대요.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가치를 어떻게 되돌리겠어요? 학교는 이미 혐오시설이 되었고,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되니까.

안나는 자기가 받는 교육을 곱씹었다. 인간 튜터는 모부와 상담하고 안나를 테스트한 뒤 안나에게 적합한 커리큘럼을 설계해준다. 안나는 그 커리큘럼대로 온라인 강의와 화상 수업을, 아주 가끔 대면 실기 수업을 듣는다. AI는 인간보다 정확한 발음과 악센트로 외국어를 가르쳤고 모든 문장을 번역했다. 어떤 수학식을 입력해도 지체 없이 풀이 과정과 답을 내놓았으며 한발 더 나아가 심화문제를 제시했다. AI는 질문하지 않는 사용자를 보살피거나 지적 호기심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사적인 사정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교육 수준은 당연히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안나는 갤럭시존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갤럭시존에서 유행하는 커리큘럼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다. 안나가 그동안 접했던 노고존에 대한 소문처럼. 진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안나는 진실을 듣고 싶었다. AI가 아닌 사람에게.

 

*

 

학교는 어떤 곳이에요?

함께 생활하고 돌보고 배우는 곳?

뭘 배우는데요, 거기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뭔데요, 그런 게. 예를 들면……

아주 많죠. 역사, 철학, 종교, 과학, 수학, 지리, 문학, 음악, 미술, 체육, 정보, 보건, 요리, 다도, 건축, 농사……

생경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안나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운 적이 있다.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한나 아렌트나 슬라보예 지젝의 이름을 접한 적은 있다. 안나에게 그것은 철학보다 역사에 가까웠다. 종교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소설을 읽은 적은 있지만 문학은 교육에 포함되지 않았다. 생존 수영 레슨을 받았지만 체육의 개념은 아니었다. 안나의 배움은 개별적이고 파편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커리큘럼 자체가 그런 식으로 설계됐다. 게다가 요리를 배운다고? 농사를? 대체 왜?

그 많은 걸 누가 가르쳐요?

선생님도 있고, 물론 AI 툴도 사용하고요. 우리끼리 직접 알아볼 때도 있고.

돈은 얼마나 들어요? 종류별로 레슨비가 다른가?

무료예요.

무료 레슨이라니. 안나는 그런 개념조차 생각해본 적 없었다. 누군가가 무료로 레슨해주겠다고 한다면 안나는 일단 그의 실력부터 의심할 것 같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모르겠어요. 그렇게 합의했으니까 무료겠죠.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아, 이거 토론 주제로 괜찮은데?

당신 성적은 좋은 편이에요?

질문을 좀…… 바꿔보는 게 어때요? 우린 성적을 매기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럼…… 뭘 제일 잘해요, 당신은?

역사 좋아합니다. 스트레스받을 때는 검도 하고요. 피아노 연주도 좋아하는데 실력은 별로고, 그래도 작곡은 해보고 싶고. 언젠가는 환상적인 곡을 만들고 싶어요. 툴로 찍는 거 말고 악보 직접 그려서 연주까지 내가 한 진짜 나만의 곡.

안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은 많았다. 좋아서 하는 것은…… 그러니까 ‘작곡은 해보고 싶고’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었다. 안나는 물어본 것을 또 물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상대가 되묻기 전에 이어 물었다.

영상 삭제 말이에요. 그건 당신이 그곳에서 배우는 클래식한 것들과는 너무……

꼬뮌에서 프로그래밍은 기초 중의 기초인데. 거긴 아닌가봐요?

안나는 갤럭시존 인간에게서는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직 타운존 인간에게만 그것을 느꼈다. 지금 안나는 여태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너무 강렬해서 열등감 아닌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안나는 상대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우리도 당연히 배우죠. 그래도 해킹은 불법 아닌가요?

불법 아닌 선에서 가능합니다. 계정 털지 않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좀 실력자라.

과거 학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것도 다 거짓 정보일 수 있잖아요?

그 역사가 거짓이라면 꼬뮌 자체가 말이 안 돼요. 하지만 우린 존재하죠.

영상 지워달라는 사람 많아요?

많으면 내가 이렇게 즉답을 하겠습니까?

꼬뮌은 가난한 곳이잖아요. 그럼 돈 받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가난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꼬뮌에서는 정말 디자인 안 해요? 질병 제거도?

기본적인 건 합니다. 기본 이상을 안 하는 거지.

그럼 당신은 몰라요? 당신 미래 모습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현재의 나만 알아요.

그 순간 안나는 깨달았다. 열등감이 아니었다.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안나에게 없는 것을 상대는 아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안나는 화를 내듯 질문했다.

하지만 당신은 실력자니까 프로그램 돌려보면 알 수 있잖아? 과거에서 미래까지 다 볼 수 있잖아!

상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걸 굳이…… 하고 싶진 않은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안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축축했다. 상대가 헛기침을 하며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침착하고 도도하게 대답하던 모습과 달리 저기요, 이봐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갑자기 왜, 아니, 내가, 일단, 뭔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안나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쥐고 안나의 감정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안나가 엉엉 울면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상대가 대답했지만 안나는 듣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을 듣기 위해 안나는 울음을 참았다.

 

*

 

안나는 내면의 주머니에 노아를 넣었다. 자기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노아의 흔들리던 눈빛과 화면 가까이 다가와 쏟아내던 걱정의 말도.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던 노아의 침묵까지. 안나는 오늘 겪은 노아의 모든 것을 내면의 주머니에 넣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노아가 물었다. 그럼 이제 영상 삭제 작업을 해도 될까? 노아는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안나는 노아의 그런 면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넌 나한테 궁금한 게 없니?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질문을 삼켰다. 그보다 높은 차원의 질문이 필요했다.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노아의 눈빛이 달라지고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의 농도가 변한다고 느꼈으니까. 안나는 노아가 영상 삭제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신념이라고 했잖아. 네 신념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물어봐도 돼?

노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나는 노아를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천천히 눈을 뜨며 노아가 말했다.

의미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비관적인 생각에 빠져서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나를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그때 나를 삶으로 건져 올린 사람이 있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 제대로 깨달았고, 뒤늦게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했지. 그 사람이 나에게 시집을 한권 줬어. 진짜 종이책 말이야.

안나도 종이책을 본 적은 있다. 갤럭시존의 박물관에 갔을 때. 종이책은 진공상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만지고 넘겨 볼 수 있는 체험판 종이책도 있었다. 안나는 그것을 만져보지 않았다. 마치 시체를 보는 것만 같아서. 무언가 나쁜 것이 옮을 것만 같아서.

그 사람이 시집을 주면서 한 말이 있어. 죽음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의미를 찾아라. 그 뜻을 알고 싶어서 시집을 오랫동안 읽었어. 그리고 만났지. 음…… 뭐랄까. 내 삶의 이정표가 될 만한 문장이랄까.

안나는 내면의 주머니를 들여다봤다. 주머니에는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노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안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근데 이런 얘기 너무 쑥스럽다. 그냥 여기까지만 할게.

노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맥이 풀린 안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댔다가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허리를 세우고 앉아 물었다.

그럼 그 시집 제목이라도 알려줘.

노아가 대답했다.

서쪽 바람. 메리 올리버.

노아가 이어 말했다.

검색하지 말고 있어봐. 잠깐만.

노아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당장 검색해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안나는 기다렸다. 노아가 나타났다. 노아는 종이책의 표지를 화면 가까이 보여준 다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곳곳에 플래그가 달려 있었다. 밑줄을 그은 부분과 손으로 직접 적은 메모도 얼핏 보였다. 노아는 그 책을 아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소중하게 다루면서도 그 속에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는 데는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안나도 그런 것을 갖고 싶었다. 대기업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복사본이 아닌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물질. 만지고 접고 구기고 메모하고 더럽혀서 오직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안나의 심장이 다시금 빨리 뛰었다. 노아가 책장을 펼친 채 책을 들어 화면 가까이 했다. 시의 마지막 두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안나는 그 문장을 따라 읽었다.

 

단순한 발생에서

충만한 의미로.2

 

미래가 너무 확실해서 미래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나가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던 미래에 노아는 없었다. 노아와 대화하면서 안나는 계속 당황했다. 예측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안나는 모부의 실패를 떠올렸다. 예로부터 모부는 안나를 이렇게 평가했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 말은 예측했던 미래에서 안나가 이미 비켜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나는 노아의 책을 만져보고 싶었다. 시각, 청각, 촉각과 후각으로 만나고 싶었다. 훼손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다루고 싶었다. 한편으로, 노아가 허락한다면, 그 책의 어딘가에 자기만의 밑줄을 그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안나가 말했다. 그 책을 직접 보고 싶어. 노아가 대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안나가 물었다. 널 만나러 가도 돼? 노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안 될 건 없지. 노아가 꼬뮌의 주소를 말하자 챗봇이 자동으로 지도를 띄웠다. 자동차로 세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안나는 화면을 종료하고 집을 나와 자동차에 올랐다. 시동 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입력했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여태 타운존 내부만을 맴돌았던 안나의 자동차가, 처음으로, 낯선 곳을 향해 나아갔다.

 

* 작품 내용 중 강조한 부분은 챗GPT에 ‘나를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입력하고 받은 답의 일부를 각색한 것이다.

 

 

  1. 환각(hallucination). 인공지능 모델이 틀린 답변을 제시하는 현상.
  2. 메리 올리버 「라운드 연못에서」, 『서쪽 바람』,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