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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일그러진 나의 어떤 것

 

 

박정민

朴正民 / 배우. 다수의 한국영화에 출연, 저서 『쓸 만한 인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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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본업과는 무관하게 나란 사람에게 책과 관련된 작업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굉장한 다독가도 아니거니와 그럴듯한 문장가도 아닌데, 배우라는 직업 덕에 써낸 한권의 책과 몇편의 글이 그렇게 만든 것도 같으니 어쩌면 본업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힘들겠다. 좌우지간 책과 관련되어 가장 오래 들어온 질문은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냐는 것이었다. 세상에 도통 ‘가장 좋아하는’이 성립되는 것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래, 가장 좋아하는 것이 하나일 이유도 없다’는 생각으로 마치 복권통에 든 숫자공을 굴리듯 여러 책 제목들을 머릿속으로 굴려댔다. 그리고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책 중 하나가 박민규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지하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작가 지망생 남자가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84면) 여자를 만나 “이상할 정도로 슬퍼지는”(83면)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하고, 맺는 이야기. 굳이 책을 한문장으로 줄이자면, ‘아주 못생긴 여자와 나름 준수한 것으로 짐작되는 남자의 가슴 절절한 사랑’ 정도가 되겠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여자를 향한 동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책을 몇차례 더 읽으면서 ‘동정’은 ‘공감’으로 ‘거부’로 ‘인정’으로 ‘방관’으로 결국은 다시 ‘공감’과 또한 ‘용기’로 바뀌어갔다. 이 변화는 분명 책을 다시 읽는 순간순간의 내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고, 결국 이 작품은 내 안의 심히 일그러져 있는 작고 깊숙한 부분을 계속해서 건드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연민하고 동정하고 공감하고 거부하고 인정하고 방관하고 재차 동정하는 청춘을 지나왔다. ‘아주 못생긴’ ‘여자’ ‘나름 준수한’ ‘남자’ 그리고 ‘사랑’까지, 수많은 단어들로 치환이 가능한 청춘이었다. 때로는 ‘미래가 불투명한 배우 지망생과 나름 성공한 친구의 우정’이라든지, 때로는 ‘무능한 남자와 자기혐오에 빠진 여자의 사랑’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버려지거나 그립거나 애달프거나 아프거나 그러니까 고요한 마음속 계곡이 무언가로 인해 넘쳐흐를 때 이 책을 찾아 읽었다. 비관이라는 공감. 그것이 이 책이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내가 소설 속 여자처럼 벼랑 끝에 몰려 있었느냐 하면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은 나를 그때의 자리에서 조금 더 벼랑 쪽으로 밀어내는 마법을 부렸다. 그리고 그 마법에 취해 나는 수많은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예를 들면,

처음 만난 날, 나를 발견한 당신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뒤꿈치가 살짝 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스팔트는 젖어 있었고, 그 뒤꿈치가 내는 작은 찰박 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발견한 듯한 반가운 모양새. 그것이 당신에 관한 첫 기억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거기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고,

도무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어둠입니다. 빛이라는 물질은 거대한 어둠 속에 박혀 있는 그마저도 점점 스러져가는 작은 별일 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희망이라는 것을 버린 이유입니다. 제게 더이상 ‘그럼에도’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 쪽이 더 편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리도 못난 사람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로 끝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열등감과 자기혐오의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이 책은 그런 것이었다. 20대의 나는 인간 실격을 외치며, 마치 내가 그녀와 같은 처지인 것처럼 태생적으로 자신이 잘못됐다는 인식으로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알고 보면 건실한 공무원의 자제고, 그리 무능하지도 그리 못생기지도 않다고 세상이 아무리 증명을 해주려 해도 자기 자신에게 온갖 프레임을 덮어씌웠다. 애써 부러움의 대상을 찾아내고, 스스로를 부끄러운 사람으로 끌어내려가며 이 책을 더욱 ‘나의 책’으로 만들었다. 재능 있는 배우들, 앞서나가는 친구들, 인기 많은 남자들, 하다못해 전 여친의 현 남친, 현 여친의 전 남친에게도 부러움을 가졌다. ‘죄다 공짜로 얻어서 사는 삶인데 왜 너와 나의 현생은 이리도 가격 차이가 나느냐’며 내 안에 일그러진 열등감을 더욱더 찌그러뜨렸다. 무수히 많은 단어들을 치환해가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내게 왜 그 ‘지랄’을 하면서 이 책을 끼고 사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그럴 거면 당장 가져다 태우라고도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이 책은 내겐 공감이고 용기다. 이런 사람도 살아갈 수 있다는 무책임한 희망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안도. 그 안도가 필요할 때면 늘 이 소설을 펼친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그녀를 써낸 작가는 존재한다는 것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이토록 애처로운 인물들의 숨을 주관하다니 참으로 부럽고, 그가 내 전 여친의 현 남친이 아닌 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의 청춘은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몹시 궁금하고, 그를 만나볼 수 있다면 ‘제 기준에선 이상한 그 선글라스를 좀 벗어주실 수 있나요? 아, 이상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작가님의 눈에 무엇이 담겼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습니다’라는 부탁을 해보고도 싶다.

이 작품은 통상적으로 ‘가여운’ 인간들이 아니더라도, 찌그러진 무언가를 지니고 사는 모두를 품는다. 지금은 저마다 인생의 ‘가격’이 다를 수 있어도 아픔이라는 것은 감히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것. 우리는 그렇게 소설 속 여자에게 각자의 열등감과 부족함과 아픔과 슬픔을 대입해보고 스스로를 동정하고 연민한다. 과연 내가 어떤 내면을 찌그러뜨리면서 살고 있는지, 왜 포기하는지, 왜 우는지, 그리고 왜 그리도 분노하는지, 나아가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흐르는 이 눈물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을 다시 들춰볼 가치가 충분하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수많은 자아가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중 가장 안타까운, 너무 어두워 그림자도 지지 않는 깊숙한 곳의 ‘나’에 대해 책의 끄트머리에 적어놓았다. 그리고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대책은 없지만 인식은 하게 되었고, 유쾌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게 되었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상담사를 만났을 때처럼, 이 책에 또 한번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랄’을 몇번이고 동반하고서라도 잘 지냈느냐고, 보고 싶었다고, 난 잘 지냈다고 멋쩍은 인사를 나누며 앞으로도 내 삶과 함께할 ‘복권통 속 소중한 숫자공’으로 함께할 것이란 확신과 함께.

10년 전,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수소문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를 준비하는 감독을 만나기도 해보고, 출연한다는 배우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을 표한 적도 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제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보다 나이가 많아지고 말았다. 더이상 내가 그들을 연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현실과, 꼭 영화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묘한 감정이 든다. 과연 어울리는 배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일그러진 나의 어떤 것’에 관한 것이니 충분히 잘해낼 수 있는 동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꼭, 이 작품을 눈과 귀와 여전히 비뚤어진 열등감으로 바라보고 싶다.

 

추신.

37세 혹은 그 이상의 배우가 이 작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곰을 파는 희망의 사장 정도일 테지만, 혹시 관심 있으면 전화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