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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나종석 『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 도서출판b 2017

대동민주 유학론이 넘어서야 할 의심들

 

 

김상환

金上煥 / 서울대 철학과 교수 kims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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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200호 기념 촌평란에는 어떤 책이 어울릴까? 이런 질문에 먼저 떠오른 책 중 하나가 나종석 교수의 『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 한국 민주주의론의 재정립』이다. 미중 패권경쟁 시대에 부응하는 동서 비교사상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적 근대성은 물론 한국적 민주주의에 실체적 내용과 개성을 부여하려는 노력도 책에 담긴 좋은 토론거리다. 1,000면 이상을 가득 채우는 저자의 열정과 확신은 거기에 담긴 방대한 내용만큼이나 강렬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 어렵다. 생산적인 대화를 위해서 주요 논점 몇가지만 간략히 돌아보도록 하자.

이 두꺼운 책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논쟁의 장소를 종횡무진하면서 이 땅의 고유한 사상적 잠재력을 복원하고자 한다. 우리 역사(특히 정치사) 흐름의 배후에서 꾸준히 축적되어왔고, 그런 만큼 결정적인 시기마다 역사적 경험 자체를 조형하는 힘으로서 분출했던 유교적 전통과 사상을 명확히 드러내려는 의지가 남다르다. ‘대동민주 유학’이라 명명된 이 배후의 사상은 멀리는 조선의 의병운동부터 가까이는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문화를 규정하는 어떤 유사 선험적인 바탕에 해당한다.

이런 유사 선험적 바탕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작업은 서양 중심의 근대성 이해나 문화적 오리엔탈리즘과 대결하는 길 위에서 펼쳐진다. 서양적 사유의 패권 아래 잊힌 유교적 근대성을 확증함은 물론, 그러한 유교적 근대성을 토대로 서양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 고유의 근대화 경로를 추적한다. 이런 한국식 근대성 탐구는 우리의 사상적인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자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는 규범으로서의 관점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서양적 사유, 특히 실천적 사유의 특성과 한계는 대칭성과 상호성 그리고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로 집약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칭성과 상호성을 중심으로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개인주의적 사회규범을 형성하는 것이 서양적 사유다. 반면 대동민주 유학은 의존성과 비대칭성을 기본 논리로 삼는다. 타인의 보살핌을 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취약성에 부응하여 비대칭적 의존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대동민주 유학이다.

대동민주 유학을 정초하는 기본 개념들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자율성의 균형을 추구하는 대동적인 인(仁), 충서(忠恕—인용자)적 개인주의, 백성의 볼모로서의 성왕, 화이부동의 조화 및 대동적 평등, 천하적 세계평화(평천하적 세계시민주의) 그리고 생명 존중 지향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것이다.”(33면) 이런 개념들에 기초한 대동민주 유학과 우리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실현된 대동 민주주의는 서구 모델의 근대성이나 서구 중심의 민주주의를 상대화하기에 충분한 이상이자 그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빛이다.

이런 철학적 개념화 작업 외에도 한국 근대사를 독특한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시선을 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근대 정치사는 유가적 이상이 대중으로 일반화되는 과정이자 선비의식이 국민 전체로 확산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대중화된 유가사상은 우리나라가 서구 문명과 제도를 받아들일 때 외래의 충격을 흡수하고 남의 것을 우리식으로 변용하는 매개체로서 오늘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이르는 역사를 꾸준히 뒷받침해왔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7세기의 공론 정치(붕당), 18세기 개혁 정치(탕평), 19세기의 민란(갑오농민전쟁), 20세기 초의 독립운동을 지나면서 소수의 전유물이던 유가사상은 일반 민중에게까지 내면화되는가 하면, 세계시민주의와 만날 만큼 보편성의 수준을 더해왔다. 언젠가부터 민족의 습속으로 자리 잡은 유교적 선비의식은 먼 옛날부터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는 주요 정치적 사건의 배후 동력이다. 이 땅의 역사는 드높은 대동유학의 이념이 점점 더 넓은 범위의 현실과 맞닿아 육화되는 과정이자 세계평화를 약속하는 미래의 이념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유사 헤겔적인 명제와 마주친다. 저자는 대동민주 유학이 맹목적인 서양중심주의와 ‘묻지 마’ 동양중심주의를 동시에 배제하면서 제3의 길을 열었다고 외친다. 동시에, 그 유학적 이상이 다른 어떤 이념보다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그 최고의 가치가 한국의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산 및 실현되어왔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찬란한 이상이 객관적 현실과 완전히 합치할 미래의 소실점을 가리킨다.

엄청난 양의 문헌과 첨단 사상을 소화하면서 개진된 대동민주 유학론에 살짝 의심을 지니게 되는 것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의심은 이념과 현실, 두 차원에서 개진될 수 있다. 사실 자유, 평등, 민주 같은 최고 이념은 과학적 개념과 달리 환원 불가능한 애매성을 지니므로 언제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 정치선동과 기만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평자가 보기에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저항의 문맥과 지배의 문맥을 구분하는 일이다. 폭력에 저항하는 상황에서 이념은 아무리 이상화되더라도 별 탈이 없을 것이다. 저항은 힘의 비대칭성을 극복할 주관적 확신을 동력으로 한다. 이념은 그런 주관적 확신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일으켜 세우는 마법의 에너지다.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바깥을 불러들이는 암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을 행사하고 현실을 통치하는 상황에서 이념은 일반화되거나 절대화될수록 그늘을 만들기 쉽다. 소외와 불균형 관계를 낳을 가능성이 커지고, 그만큼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

저자는 대동민주의 이념을 이상화하기 위해서 유학의 인 개념에 여러가지 서양 이론의 정수를 주입하기도 한다. 레비나스(E. Levinas)의 환대의 윤리, 페미니즘과 연관된 보살핌의 윤리, 환경운동과 결부된 생태주의 같은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본래 서양의 근대 주류 사상에 맞서는 저항담론으로서 소수자의 편에서 주류 담론이 가져온 비대칭 관계(폭력)를 시정하는 위치에 자리해왔다. 즉 기존의 비대칭 관계(가령 부성적 관계)를 역전된 비대칭 관계(가령 모성적 관계)로 교정하는 이론들이다. 평자는 그것들이 권력을 위임받아 현실을 조직하는 실질적인 담론이 되려면 제한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령 레비나스의 경우에 특정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윤리적 응답이라는 문제는 모든 타인에 대한 법률적 책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대동민주의 이념은 과거 의병운동, 갑오농민전쟁, 독립운동, 하물며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은 저항담론의 원천이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있을 정치적 불의에 맞서거나 외래 담론의 제국주의와 싸울 때 유효한 해방의 깃발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위기상황이 아닌 일상의 평범한 현실을 지속적으로 조형하던 적극적 원리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유교는 과거 민중에게 평등 지향적이고 해방적인 정치의 원리였다기보다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의 원리였던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여기서 이념형 담론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지혜로서 헤겔적인 객체화의 기준을 불러들일 법하다. 즉 법과 제도를 통해 객체화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아름답고 숭고한 이념이라 해도 실재성이 모자란 허구일 뿐이고,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가치가 없다. 이 또한 지나친 바가 없지 않지만, 반대의 지나침을 막기 위해 떠올릴 만한 주장이다. 언급했던 것처럼 대동유학의 이념은 위기상황을 돌파하고 불의한 지배에 맞서는 저항운동 속에서는 그 실효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는지 모른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속에서 대의명분으로도, 민중 동원을 위한 반란의 구호로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 상태를 조형하는 통치원리로서 법제화된 적은 별로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종석 교수의 저작은 우리나라 인문학이 어느정도 자생적 생태계를 갖추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주변 학문의 풍요한 성과를 반영하고 관련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를 돌아보며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구축해가는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교적 공공성, 유교적 능력주의, 그리고 유교적 민족주의의 세계적 보편화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앞서 제기된 의심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있고 주변 학문에 기여할 놀라운 성과다. 이제 막 태어난 대동민주 유학이 우리의 질문을 양분 삼아 그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