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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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인 崔志認

1990년 경기 광명 출생. 2013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등이 있음.

youngerpoet@nate.com

 

 

 

사건

 

 

1

 

머리를 겨누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표정입니까

 

 

2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가자

북으로

거리의 사랑들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임은

 

정신이 맑은 할머니가 제사상 앞에 앉아

우리의 영혼이

길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네가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

다음을 적었다면 아마

적의 문체를 빌렸을 것이다

 

린든 존슨을 ‘전쟁 미치광이’라고 일갈한 북베트남 시인은

무덤에서 일어나

정글을 떠돌고 있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가고

오라

남으로

아버지와 그의 시대에는

슬퍼할 틈이 없었다

생존과 생활은 얼마나 다른가요

 

오래 굶주리면

누군가를 해칠 수 있겠구나

 

나는 내가 살지 않은 어제를 그리워하고

 

 

3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비 없이 자랐습니다.

가난했고 종종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겨우 학업을 마친 아버지가

공사장에 나가면 어머니는 홀로

집을 지키다

바다를 보러 가곤 했습니다.

방파제에 앉아

불러오는 배를 붙잡았습니다.

돈을 모아야 했습니다. 나는

걸프전이 일어난 해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집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위성방송이

전쟁을 생중계했습니다.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전차와

사막을 건너는 군인, 그리고

AH-64 아파치 헬리콥터. 실직한

아버지가 두꺼비 한병을 사 오라고

소리쳤던 건 나중의 일입니다. 그 여름을

다시 떠올린 것도, 그 사내가 빼앗은 삶과

빼앗긴 삶을 들여다본 것도 아주

나중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나는 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을까요.

쇠로 된 팽이가 장판에 구멍을 내고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지나간 나는

왜 슬퍼하는 걸까요. 지나간 날은

왜 꾸며낸 이야기 같을까요.

 

 

4

 

시인이 말했네

이제 알았노라, 시가 무엇인지

그는 평생 시를 썼네

영원 되어

영원의 영원 되어

 

구렁이가 머리에 세상을 이고 있네

구렁이 몸에서

나무 한그루 자라나네

천년 되어

천년의 천년 되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지

믿을 것 하나 없었지

나는 당신의 무수한 실수였지

새들은 이미 알았지 일찍

떠나고 없었지

 

 

5

 

러시아를 둘러싼 서방세력은 우크라이나에 지원을 약속했지만 수시로 말을 바꿨다

각국의 수뇌부는 평화를 빌미로 분단을 제안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

곤경을 외면당한 사람들

 

나는 모른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누군가 죽어가는 때에도

살 궁리를 하고 있다

 

무심히 자라는 머리카락

그대

나와 닮은

나약한 자여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술을 진탕 마신 날에는

한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벽에 걸린 영정이 핏줄을 내려다보고

 

폭발

한번 더

폭발

 

하늘에서

쏟아지는 섬광을 향해

 

죽은 개가 크게 짖었다

 

 

6

 

우리 인간 태어날 적 뉘 덕으로 태어났나

 

뼈를 빌고 살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나 너 찾아 여기 왔소

 

저승길이 멀다더니 문전 밖이 황천이네

 

 

7

 

어젯밤엔 바람이 세게 불었다.

 

네가 벽에 기대어 앉아 새로 쓴 소설의 한 단락을 소리 내어 읽었다. 멈추지 말아줘. 이 다리를 건너면 다른 동네야. 더는 참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네가 눈처럼 하얗고. 네 손이 내 어깨를 쓸어내리고.

 

사과나무 톱밥에서

 

사과 냄새가 났다.

 

벽시계의 시각이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