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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감염병의 사회적 형식과 돌봄의 탈가족주의

 

 

이지은 李知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 「역사적 존재의 탈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 등이 있음.

rararra01@naver.com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알베르 까뮈 『페스트』1

 

까뮈는 『페스트』의 초고를 집필하면서 소설의 제목을 ‘페스트’가 아니라 ‘수인(囚人)들’이라 고치려 했다.2 까뮈가 감염병을 마주한 인간의 삶을 집단적 감옥살이로 이해했던 것은 방역정책이 도시 봉쇄의 형태로 이루어진 탓이 크다. 『페스트』의 배경이 되는 해안도시 ‘오랑’은 감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봉쇄되고, 시민들은 어느정도의 계층적 차이를 지닐지언정 ‘공동운명체’로 단단히 묶인다. “페스트라고 하는 저 꼭대기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형무소장에서부터 말단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처지였으니, 아마 사상 처음으로 감옥 안에 절대적인 정의가 이루어진 셈이다.”3 그러고 보면 『페스트』의 서술자가 오랑의 사람들을 ‘우리 시민들’이라고 즐겨 불렀던 것도 도시 주민들의 공동운명을 강조했던 탓인 듯싶다. 얼마 전 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이 진행되는 중에 유럽과 중국 등 몇몇 국가에서 도시 봉쇄정책을 시행했던 점을 상기하면, 까뮈의 ‘감옥살이’ 비유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감염병은 물리적·지리적으로 세계를 재조직함으로써 새로운 패턴과 질서를 만들어낸다.

반면 한국은 빠른 역학조사와 정보공개 그리고 시민사회의 협조를 통해 극단적인 봉쇄정책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선진 사례로 꼽혔고 정보기술사회의 새로운 방역정책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가격리’ ‘집콕 생활’로 마련된 사회적 거리는 지역공동체 대신 ‘자가’와 ‘가족’을 생존의 기본 단위로 묶었고, 이에 각자의 ‘집’은 시민정신의 실천과 통치질서에 대한 순응이 교차하는 기묘한 장소가 되었다. 아울러 방역 당국은 감염자들을 순차적으로 번호 매기고 그들의 동선을 시간순으로 배열하며 이를 실시간으로 전국민에게 전송했다. 열린 도시는 ‘의인화된’ 바이러스가 활보하는 위험한 장소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이곳에서 ‘우리 시민들’이라는 집단적 주체는 오직 ‘그 적들’에 대한 대타항으로만 성립되었다. 생존이든 실존이든 인간의 삶은 주로 ‘안전한 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막 통과해온 디지털 시대 감염병이 만든 삶의 ‘형식’(form)4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부여한 삶의 질서와 패턴은 기존의 질서와 얽히고 겹친다. 예컨대 같은 감염자라 하더라도 그의 국적, 인종, 종교, 섹슈얼리티 등에 따라 낙인과 혐오의 정도가 달라진다. 감염병이 개인을 관리하고 재배열하는 질서는 기존의 차별적 권력과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특히 ‘가족’이 생존 단위로 표상되면서 ‘효율적인’ 가계 운영을 위해 가족주의나 차별적인 성별분업이 합리화되었다. 돌봄과 방역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돌봄의 사회적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돌봄노동의 여성화와 젠더규범을 강화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각 가정의 방역 주체인 주부들은 다른 누구보다 감염병 예방에 철저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부당한 비난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처럼 감염병이 야기한 새로운 형식은 구체적인 삶의 국면에서 기존의 지배질서와 착종되어 우리 삶을 규율했다. 이제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생존주의에 밀려 논의되지 못했던 것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할 시간이다. 미래를 과거의 반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다만 팬데믹의 규율이 미시적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성찰은 삶의 내밀하고 취약한 부분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팬데믹을 관통하며 발표된 최은미의 연작소설 「우리 여기 마주」와 『마주』를 통해 감염병의 형식이 왜곡한 우리의 삶을 살펴보고, 이에 대응한 문학적 상상력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5

 

 

감염병 재현을 둘러싼 착시와 도착

 

「우리 여기 마주」와 『마주』는 2020년 봄부터 2022년 초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집단감염과 대유행이 전개되는 시기를 소설의 주된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들 소설이 처음 발표·연재되던 시기가 2020년 가을부터 2021년 겨울까지라는 점을 상기하면, ‘마주’ 연작은 감염병이 창궐하던 바로 그 현장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한국사회를 재현한 문학적 기록이라 하겠다. 두 소설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초등학생 딸의 엄마, 동시에 ‘나리공방’의 ‘캔들 샘’이기도 한 ‘나’(이나리)를 서술자로 삼는다. ‘나’는 2020년 2월 ‘홈 공방’ 운영 구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어 공방을 열지만, 그러자마자 감염병의 대유행을 맞닥뜨린다. 「우리 여기 마주」가 공방 오픈부터 절친한 이웃 수미의 코로나 확진까지, 즉 2020년 봄부터 그해 5월까지를 다룬다면, 이어지는 시간을 그리고 있는 『마주』는 어릴 적 ‘나’를 돌봐주었던 만조 아줌마를 매개로 ‘나’와 수미가 각자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며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두 소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그 시간에 진입하기 앞서 우선 소설 속 여자들의 삶의 ‘기본값’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우리 여기 마주」의 ‘나’는 홈 공방을 하는 동안 살림, 육아, 일 모두를 해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집을 공방으로 만든 데 대한 미안함도 가져야 했다. 그러니 ‘나’에게 감염병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위기로 체감된 것이라기보다 이 부대끼는 노동과 죄책감 위에 얹힌 것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듯한 기분은 매우 익숙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층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나’를 덮친 것이다. 소설의 또다른 중심인물인 수미 또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수미는 운전과 차량보조 둘 다 해주는 ‘여자’ 기사이기 때문에 승하차 도우미를 따로 두지 않으려는 학원 운영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수미는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학원 차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아이들 엄마들이 불안해하고, 그 불안은 수미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와 수미 둘 다 워킹맘의 처지에 놓여 있지만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돌봄’은 이들에게 각각 다르게 작동한다. 수미의 경우 그녀의 직업에 요구되는 전문 능력이 1종 대형면허라면, 아이들 돌봄은 남성 기사에게는 기대되지 않는 부가적인 일이다. 반면 ‘나’는 전문적인 ‘지도자’로 보이길 원할 때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버”린다. 물론 그 노동을 지운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가 주부로서의 얼굴을 감추는 것은 ‘나’의 일이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요컨대 사회는 아내/엄마의 역할로부터 독립된 여성에게 ‘전문성’을 부여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전문 여성’에게 아내/엄마의 역할을 기대한다. 그러니 ‘나’는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여자이기보다는 차라리 “편하게 사는 여자들 중 하나”로 보이길 원하고, 따라서 공방에 모인 여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을수록 “얼굴이 지워진 채로 다른 여자에게 다른 여자가 되어”가는 외로움 속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나리공방은 여자들 사이의 호감과 긴장이 모순적으로 뒤엉켜 있는 공간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 모순만큼 이 공간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자 이곳을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만들고 싶어”했고(「우리 여기 마주」, 74면,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 서로의 동선을 공유하려 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이토록 방역에 철저한 것은 정말 질병 그 자체가 두려워서였을까?

 

이런저런 시국 얘기를 하다가 누군가 말했다. 그래도 여긴, 공방은, 동선 공개돼도 욕은 안 먹을 거라고. 그 말에 수미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공방에서 감염자가 나온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취미질을 하던 여기가 확산의 진원지가 된다면, 수미가 말했다.

“우린 아마 총살을 당할걸?”

다들 말이 없었다. 자신들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갈지를 문득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봄 내내 봐왔으니까. 살짝만 당겨도 죽는 집단과 제대로 당겨도 죽지 않는 집단.(80면)

 

이태원 클럽발 2차 유행이 시작되었을 때 “맘 카페는 폭발했다. 이태원 게이 클럽에서 아침 여섯시까지 놀다 온 기정시 53번 확진자, 그가 거주한다는 D 오피스텔이 어디인가. 그가 증상 발현 전에 들렀다는 K 편의점은 또 어디인가. 시청은 동선 공개를 이따위로 할 것인가? 정체를 숨긴 놈들이 지역사회를 활보하고 있는데!”(78면) 방역 당국이 감염자에게 번호를 매기고 그들의 동선을 시간순으로 공개할 때 감염자는 바이러스의 인간화된 표상이 된다.6 순차적으로 배열된 정보는 마치 바이러스 또한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듯한 착시를 주고, 이 착시는 관리와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로, 불충분한 정보에 대한 불안으로, 감염자에 대한 혐오로 연쇄된다. 그리고 이 연쇄 속에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데 대한, 지극히 사적인 삶이 공개되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도착(倒錯)된다. 그러니 공방에 모인 여자들은 혹시 감염이 되어 동선이 공개될 경우, 이곳이 건전한 장소이니 욕을 먹지 않을지 아니면 이 시국에 ‘주부들이 취미질’을 하고 있었으니 매도당할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는 수미의 확진 과정에서 좀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어느날 ‘나’는 딸의 영어학원 화상수업에서 수미의 딸 서하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목격한다. 분노조절에 실패한 수미의 폭력적인 모습이 화면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급히 서하를 공방으로 데려와 수미에게서 분리한다. 수미는 뒤늦게 울면서 찾아오지만 딸을 만나지 못하고, 그로부터 이틀을 내리 앓은 뒤 기정시 67번 확진자가 된다. 이후 수미가 역학조사를 받는 과정은 장편소설 『마주』에서 이어서 제시된다. 역학조사관은 전화통화로 수미에게 양성임을 통보하며 셀카 사진을 요구한다. 수미가 자신의 얼굴을 보내자 그는 동네 CCTV에 찍힌 수미의 사진들을 보내며 그녀가 맞는지 묻는다. 그렇게 수미는 증상 발현 전 며칠 동안의 동선을 확인해야 했고, 그 가운데는 울면서 딸을 부르던 모습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날이 수미의 인생에서 많이 아픈 날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지우고 싶은 날 중 하나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지워주고 싶은 날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수미는 인생의 어떤 날보다도 그날에 대해, 그날의 접촉과 동선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를 받았을 것이다.(84면)

 

수미가 역학조사관에게 받은 CCTV 사진 중엔 아마도 새경프라자 앞에서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3층 공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울던 확진 전 마지막 모습. 그때 공방 안엔 서하가 있었다. 나는 어쩌면 수미가 완전히 낯선 타인을 통해 그때의 자신을 확인해야 했을 거라고, 이게 내가 맞다고, 내 딸이 내게서 도망쳐서 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여자가 내가 맞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마주』, 144면,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

 

소설은 수미가 “인생에서 많이 아픈 날”, 그러니까 딸을 위험에 빠트리고 그것이 온 동네에 드러난 그날을 감염병에 걸린 날과 겹쳐놓고 있다. 학원 차량 기사인 수미는 밀집시설을 드나드는 불특정 다수의 학생들과 접촉하므로 슈퍼전파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진짜 비극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역할 수행 중에 발생하지 않는다. 사적인 치부가 ‘역학조사’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고 심문당할 때 그것은 수치가 되고, 수치는 직접적인 폭력 없이도 매우 효과적으로 주체를 위축시킨다. 소설에서 수미는 언제나 썬캡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감염병이 유행하자 여기에 마스크까지 썼다. 그러나 확진 판정을 받자 수미는 눈물과 고열로 얼룩진 자신의 “그 ‘역겨운 면상’을”(142면) 스스로 찍어 역학조사관에게 전송해야 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수미가 “내 딸이 내게서 도망쳐서 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여자가 내가 맞다고” 시인할 때, 당국의 역학조사는 엄마의 도덕성에 대한 심문과 겹쳐진다. 팬데믹 기간 동안 특정 종교시설이나 클럽 이용자에 대한 혐오가 폭발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방역을 명분으로 도덕성을 심문하는 것이 그저 ‘상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방역을 앞세운 통치질서는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확진자에게는 그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명령은 매우 쉽게 사적 영역까지 파고든다. 결국 여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질병 그 자체라기보다 그로 인해 까발려질지도 모르는 내밀한 삶이었고, 그 삶은 이미 감염병 이전부터 위태롭던 것이었다.

 

 

‘면역정치’를 교란하는 ‘잠복성보균자’

 

「우리 여기 마주」에서 마스크/썬캡 뒤에 숨겨져 있던 얼굴7은 『마주』에서 “역겨운 면상”으로, 그것도 누군가 물리적으로 벗긴 민낯이 아니라 스스로 찍어 제출한 ‘셀카’로 나타난다. 사생활을 드러내야 한다는 수치심과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방역정책의 폭력성이 숨기 좋은 삶의 취약성이었다. 이는 『마주』의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두번의 취재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호흡곤란으로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뒤 포토라인 앞에 서서 사람들의 질문 세례를 받는다. 첫번째는 잠복결핵 보균자, 두번째는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뒤이다. 이 장면들이 실제인지 아닌지 모호한 것은 질문과 답이 우스꽝스러운 대화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원 문을 막 나서는 ‘나’에게 병명을 묻더니, 이어서 치질이나 불안증, 스마트폰중독 등 개인적이고도 일상적인 병증까지 캐물으며 그것을 도덕성과 과도하게 연결 짓는다. 이는 팬데믹 시국에 만연했던 불안과 억측을 풍자하는 장면인 동시에 그 불안과 억측에 소설적 상상력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귀띔하는 두개의 힌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는 첫번째 검진에서 자신이 결핵균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면역력으로 억제하고 있는, 즉 ‘잠복성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나’는 유년 시절 일주일에 하루씩 자신을 맡아주었던 만조 아줌마를 떠올린다. 결핵이 그녀를 환기한 건 당시 그녀가 결핵약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두번째 검진에서는 공황장애를 진단받고, 이번엔 ‘딴산’이라는 지명이 떠오른다. 평범한 산이었던 그곳은 결핵환자 몇명이 자리 잡은 것을 시작으로 간질환자, 정신질환자, 부모가 없는 아이들, 집창촌에서 도망 나온 여자, 수몰민 등이 모여들어 바깥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소설은 의사의 입을 통해 공황장애가 “내 안의 미해결된 감정과 단절될 때, 내가 나한테 벽을 쳐버릴 때”(124면) 나타난다는 힌트를 준다. 그렇다면 『마주』는 ‘나’의 깊은 곳에서 깨어난 어떤 것, 곧 ‘나’가 해결하지 못하고 묻어둔 어떤 것과 ‘마주’하는 서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어떤 것’은 전염성이 있는 탓에 이 소설은 ‘나’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먼저 첫번째 진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주』는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인데 왜 갑자기 결핵이 등장하는 것일까. 요양원, 아파트 등에 대한 집단격리가 일어나고 있던 팬데믹 시국에 환기된 딴산의 존재는 질병에 대한 공동체의 관심이 상당히 선택적임을 드러낸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이 어려워지자 그제야 딴산 주민들이 마을 과수원에 고용되는 장면은 ‘공중보건’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격리가 사회적 배제와 밀접히 붙어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 결말부에는 요양원에서 이탈한 노인도 등장하는데 이 또한 우리가 낯선 위기처럼 받아들이는 고립과 이동 제한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상시적 조건임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가 결핵환자가 아니라 결핵균에 면역력이 있는 ‘잠복성보균자’라는 점이다. 이때 잠복성보균자의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팬데믹과 함께 다시 활발해진 면역 담론을 거칠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면역(免疫, immunity)은 본래 법적·정치적 용어이지만,8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몸속에 들어온 병원체(病原體)에 대한 자기방어 작용’이라는 뜻의 면역 개념은 19세기 생의학의 발전으로 본격화되었다. 개념에서 알 수 있듯 면역은 근본적으로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의 구분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기동일성을 구축하고 타자성을 변별·배제하는 면역 개념은 인식론적·정치철학적 문제와 유비적으로 이해되어왔다. 대표적인 논자인 이딸리아의 정치철학자 에스뽀지또(R. Esposito)는 사회적·정치적·법적·의학적 차원을 아우르는 서양 근대의 프로세스를 ‘면역화 패러다임’이라 지적한다. 즉 법적 소유권이든 정치적 국민국가 형성이든 혹은 의학적 차원이든 근대성에는 ‘타자의 부정을 통한 자기보호’라는 면역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주』의 ‘나’, 곧 잠복성보균자는 면역학의 이분법적 인식론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결핵은 코로나19와 유사하게 공기와 비말을 통해 전파되는 대표적인 호흡기감염병이다. 그러나 잠복성보균자는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감염자와는 다르다. 결핵균을 가지고 있지만 면역력으로 그 균을 억제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타인에게 병원체를 전파하지 않는다. 다만 보균자의 면역 상태에 따라 결핵균은 (비)활성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따라서 잠복성보균자는 전파자냐 아니냐 하는 이분법적 질문을 비껴난다. 상태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서너명 중 한명이 잠복결핵 보균자이며, 이들 가운데 5% 정도가 활동성 결핵으로 전환된다고 한다.9 더욱이 소설의 ‘나’처럼 자신이 보균자인지, 심지어 과거에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잠복성보균자는 질병을 타자의 침입이 아니라 자기와 비자기의 관계 리듬에 따라 (비)활성으로 전환되는 ‘상태’로 인식하게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발병하지 않은,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잠복성’은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인식체계를 교란하는 것이다. 곧 잠복성보균자는 타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기실 불완전한 환상이라는 걸 드러낸다.

 

 

전염되는 질병, 확산되는 돌봄

 

두번째 진단인 공황장애는 소설 속 엄마들—‘나’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수미—이 딸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비롯된 진단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딸을 자신으로부터 독립된,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령 수미는 자기혐오의 연장선에서 딸 서하를 못 믿는다. “수미는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나한테서 나온 애가 멀쩡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161면) “수미는 서하를 서하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확장으로 여겼다.”(166면) ‘나’가 수미의 심리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엄마가 정확히 수미의 반대편에서 딸을 자기의 확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있을 때면 나를 옆에 앉혀두길 좋아했다. 마치 내가 당신이 정상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표지인 것처럼.”(93면) 심지어 ‘나’는 엄마의 구속에 괴로워했음에도 “나는 은채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쉽게 잊곤 했다.”(108면)

그런 점에서 유년 시절 ‘나’가 일주일에 하루 만조 아줌마를 따라 시장을 누비고 간식을 얻어먹던 일상적인 시간은 실은 엄마의 팽팽한 신경으로부터 비켜날 수 있었던 예외적인 이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만조 아줌마와의 시간은 ‘나’의 실수로 중단되고 만다. 당시 만조 아줌마는 법으로 금지된 양조주를 집 안에서 만들고 있었는데, 호기심에 그것을 떠먹은 ‘나’가 취해버려 아줌마의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당시 동네 사람들이 수세(水稅) 문제로 당국과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실수는 동네 전체에 폐를 끼치게 되었다. 공황장애의 원인이 된 미해결된 감정이란 어린 ‘나’가 감당해야 했던 엄마로부터의 구속감이자 만조 아줌마에 대한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이는 어른이 된 ‘나’가 다시 만조 아줌마의 양조장을 방문했을 때 해소된다. ‘나’는 홀로 아줌마의 술항아리들을 둘러보던 중 딸 은채의 생일이 적힌 숙성조를 발견한다. 만조 아줌마는 과거 이웃의 아이인 ‘나’를 돌봐줬던 것처럼, ‘나’의 딸에게도 마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술항아리를 보면서 ‘나’는 과거 만조 아줌마가 겁에 질려 있던 자신에게 해준 말을 기억해낸다.

 

만조 아줌마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나는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만조 아줌마는 내게 그 말을 했다. 열두살의 내게 그 말을 들려주었다. 나리 니 탓이 아니라고. 너를 그렇게 둬서 미안하다고.

아이를 낳은 날짜가 적힌 항아리 옆에 앉아서야 나는 그 말이 지난 삼십년간 내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수미를 보았다. 저쪽 숙성실에 서서 수미가 나를 보고 있었다.(254~55면)

 

그러니까 만조 아줌마는 ‘나’에게 결핵균만이 아니라, 이웃집 아이에게 향하는 돌봄의 마음까지도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은 단지 만조 아줌마의 사려 깊은 마음뿐 아니라, 그 마음이 혈연관계도 아닌 이웃 아이에게 향했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수미와 함께 만조 아줌마를 찾았던 것이고, 수미 또한 ‘나’의 의도를 이해했기에 만조 아줌마에게 정확한 질문을 건넬 수 있었다.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이에 만조 아줌마는 “이나리와 이나리 엄마한테 동시에 가지고 있던 어떤 연민에 대해서”(282면) 말하고, 그 마음은 과거가 아닌 현재, ‘나’뿐 아니라 수미에게도 미친다. “나는 서하와 수미가 그들의 집이 아닌 곳에서, 그들 둘만의 고립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서로를 의식했다는 것이, 대면의 시간이 다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시간을 짧게나마 경유했다는 것이, 그것이 고마웠다.” 만조 아줌마의 양조장은 서하와 수미가 그들을 염려하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간은 그녀들의 문제가 오직 그녀들‘만’의 문제로, 고독하고 외롭게 헤쳐가야 할 문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알려준다. ‘나’ 또한 수미와 서하를 위해 “만조 아줌마가 예전의 나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내주었던 것처럼”(262면) 자신의 공방을 기꺼이 열어두고자 한다.

 

나는 수미와 서하가 겨우내 서로를 충분히 겪길 바랐다.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마주 보길 바랐다. 수미가 실감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내 공방 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304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마주’ 보기가 가족이 아닌 이들 사이를 통과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를 살피는 마음은 가족과 이웃을 넘어 확장된다. 양조장에서 만난 ‘선글라스 여자’는 서하에게 마음을 쏟고, 서하는 딴산 마을 노인들을 위해 글을 쓴다. ‘나’는 은채의 낡은 서랍장을 가져간 낯선 여자에게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돌봄의 전염과 함께 ‘나’는 은채와 서하가 자신들의 세계로 건너가는 환상을 본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나’가 엄마로서 ‘마주’해야 했던 ‘타인으로서의 딸’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자, 그녀 자신도 엄마로부터 받았던 구속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장이 수미, 은채 모녀와 더불어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로써 ‘나’가 단절되어 있던 과거의 문제—엄마로부터의 구속감과 만조 아줌마에 대한 죄책감—그리고 현재의 문제—딸 은채를 타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가 해결된다. 가족이 아닌 이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이질성의 인정과 공동성의 확보를 ‘돌봄의 탈가족주의’에서 시작하길 제안하는 『마주』는 어쩌면 최은미 소설세계의 전환을 예고하는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민들레가 환하게 피어 있는 만조 아줌마의 비탈과수원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와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마주』가 질병, 고립, 노동 등 삶을 고되게 하는 것들에 대항하는 힘을 사람들 ‘사이’ 오래전부터 ‘잠복해왔던’ 것에서 발견해내고 있어 작가가 인간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재발견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재난적 상황을 다룬 근작 「그곳」에서도 확인되듯 팬데믹, 기후위기 등 압도적인 규모의 재앙을 직면했을 때, 작가가 눈을 돌린 곳은 ‘늘 있어왔던 것’ 그러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이웃의 아이를 연민하는 마음, “트럭이 나를 보면 멈출 것이라는 걸 내가 알”10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 같은 것. 역시 중요한 건, 이 소중한 마음이 실은 너무 사소하고 당연한 것이라 혈연이나 국적 혹은 그 무엇으로 사람을 나누고 배제하기 이전에 이미 저질러져버린다는 것이다. 『마주』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평상시에는 알지 못했던 인간 공동체의 면역이다.

 

 

발효되는 인간

 

은채의 생일이 적힌 숙성조가 보여주듯, 만조 아줌마가 빚는 술은 사람에 대한 은유이다. 아줌마는 과수원 노임을 종종 최고급 사과로 받아갔고 그것으로 술을 담갔다. 사과는 그해의 햇빛과 바람에 따라 각기 다른 산도와 당도를 지녔을 테고, 따라서 술도 매년 다른 맛과 향으로 익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항아리의 술은, 혹은 한명의 사람은 보살피는 사람의 정성에 힘입어, 그리고 항아리 안의 무수한 미생물 혹은 비자기와 들끓으며 각자 다른 빛깔로 숙성해가는 것이다. 익어가는 술이 언제나 조금씩 증발하면서 주위를 취하게 한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로운데,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만조 아줌마의 술은 인간에 대한, 인간사회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된다. 술은 혹은 사람은 냄새를 풍기고 주위에 녹아들어 공기를 메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기 중에 녹아든 술은 가족이데올로기나 편협한 이해관계로 혹은 폭력적인 권력으로 사람들을 구분 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조장 근처에서는 천사들마저 취해 있기 마련이므로.

 

 

  1.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책세상 1992, 229면.
  2. 김화영 「부정을 통한 긍정」, 같은 책 421면.
  3. 같은 책 232면.
  4. ‘형식’(form)에 관해서는 캐럴라인 러빈의 논의를 참조했다. 캐럴라인 러빈은 푸꼬를 따라 형식을 구성 요소에 형태, 패턴, 질서를 부여하는 특정한 배열로 본다. 다만 일상적 경험을 구조화하는 형태와 배열이 거대한 권력체제로 모두 수렴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푸꼬와 거리를 둔다. 캐럴라인 러빈에게 문학은 형식적 복잡성을 포착하는 도구이자 형식을 체현하는 언어적 구성물이다. 형식이 요소들을 분할하고 배열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랑씨에르의 ‘정치’ 개념과도 상통한다. 캐럴라인 러빈 또한 사회적 형식과 미학적 형식을 구분 짓지 않는다. 캐롤라인 레빈 『형식들』,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 서문 및 1장 참조.
  5.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최은미 「우리 여기 마주」, 『눈으로 만든 사람』, 문학동네 2021; 최은미 『마주』, 창비 2023. 두 작품은 각각 독립된 소설로 발표되었으나 등장인물 및 그들의 관계, 시간적 배경과 사건 등이 이어지고 있어 연작소설로 다룬다.
  6. 최정우는 확진자가 바이러스의 ‘(가려진) 얼굴’로 인식된다고 지적한다. 확진자는 마치 끔찍한 범죄자처럼 우리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상상되지만, 그것은 언제든 ‘우리’의 얼굴이 될 수 있기에 소설의 인물들은 ‘우리’와 ‘우리 아닌 이들’ 사이의 경계를 살피고 또 살피게 된다고 해석한다. 최정우 「얼굴과 마스크, 상처와 가면들」(1회), 『문학들』 2021년 가을호, 262면.
  7. 서희원은 「우리 여기 마주」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씌우고 있었던 사회적 마스크에 가려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특히 감염병의 대확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역의 주체가 되어 돌봄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니고 있는 여성들의 고통”을 읽어낸 바 있다. 서희원 「팬데믹 시대의 소설과 개인」, 『인문과학연구논총』 42권 3호,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1, 27면.
  8. 면역 또는 면제를 뜻하는 라틴어 명사 ‘임무니타스’(immunitas)는 의무를 의미하는 ‘무누스’(munus)의 결핍 혹은 부정을 뜻한다. 임무니타스는 의무와 봉사에서의 면제/제외(특권이자 배제)인 것이다. 이는 동일한 어간 무누스(munus)를 공유하고 있는 ‘코무니타스’(communitas)와의 대립 속에서 더욱 명확한 의미를 드러낸다. 공동체를 뜻하는 코무니타스는 ‘함께’라는 뜻의 ‘쿰’(cum)과 무누스의 합성어로 타인에 대한 의무의 일반화를 실현한다. 즉, 임무니타스는 코무니타스의 부정으로서 성립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임무니타스』, 윤병언 옮김, 크리티카 2022, 14~15면 참조. 한편 황임경은 임무니타스를 동양의 맥락에서 흥미롭게 설명한다. 신체의 자기방어 능력을 가리키는 면역(immunity)은 면역(免疫)으로 번역되는데, 이때 돌림병을 뜻하는 한자어 ‘역(疫)’이 본래 부역(負役)을 의미하는 ‘역(役)’에서 왔다고 한다. 저자는 부역, 군역이 이루어지는 집단생활 공간에서 집단적 발병이 만연하여 이와 같은 의미관계가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요컨대 “동양에서는 역(役)과 역(疫)을 매개로 하여 질병과 정치, 사회적 체계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황임경 「자기 방어와 사회 안전을 넘어서」, 『의철학연구』 16권, 한국의철학회 2013, 119면.
  9. 「잠복결핵 국민 3~4명 중 1명이 보균자입니다」,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서부지부 2022.3.24.
  10. 최은미 「그곳」,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