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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내가 사는 곳 ⑧

부안, 시골 살 결심

 

 

유수정 柳水晶

스튜디오 유크리 대표, 디자이너.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부안교육지원청 마을교사, 전북청년정책조정위원, 전북 거점형 양성평등센터 2023 청년사업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음.

gkflgkfk@naver.com

 

 

부안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필요가 없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너른 들판, 야트막한 산등성이, 수평선 너머의 하늘이 보이기 때문이다. 산, 들, 바다가 모두 있어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불리는 이곳은 아름다운 나의 고향 부안이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 중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반도형 국립공원 내변산 주위를 도넛처럼 둘러싸고 생활권이 형성된 부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변산이다. 채석강, 다섯개의 해수욕장, 바닷길이 열리면 걸어서 갈 수 있는 하섬, 낙조가 아름다운 솔섬,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지는 마실길 4코스 등. 늘어놓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아름다운 곳. 그런 변산이 영화 속에서 볼거리라곤 노을밖에 없는 가난한 고향으로 묘사되는 것은 주인공 학수의 개인적 서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 핵폐기장 유치 반대투쟁을 거쳐 최근엔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파행까지. 근 30년간 전국 뉴스에 이름을 올린 부안의 굵직한 사건들은 어째 투쟁과 아픔의 역사다. 세 사건의 공통점을 거칠게 꼽자면 단 하나다. 모두 부안군민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사업이라는 점이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누군가는 대규모 건설사업을 환영하거나 그로부터 득을 봤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을 유치해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의 도약을 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는 간척사업을 마무리 짓고도 정책적 합의를 찾지 못해 10여년간 생태계만 파괴한 채 버려진 땅만 남겼다. 후자는 범군민운동으로 번져 긴 싸움 끝에 사업 전면 백지화를 이끌어내었으나, 직후 타 지역에서 빠르게 사업 유치를 신청해 부안군민에게는 상처를 안겼고 서로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국제적 청소년 야영행사는 코로나19 이슈로 두번의 연기 끝에 겨우 성사되었는데 준비가 미흡하여 조기철수로 이어졌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대원들은 물론, 군민들에게 어떠한 선택도 주어지지 않은 행사였다. 군과 도 나아가 국가 차원의 행정기관, 행사를 주최한 세계스카우트연맹 등 책임을 나눠 져야 할 곳들이 있으나 뉴스에서는 정치적인 대립에 이용되는 모습만 다뤄질 뿐이었다. 대회 참가자들의 실제 만족도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 군민들의 심정보다 앞서서 정치 이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부안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부안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얼마나 멋진 곳인지는 뉴스에 좀처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십대를 보낸 사람 중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계속 그 지역에 머무르고 싶을까? 시골은 가난하고 불편하고 일자리가 없는 곳이라고들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깨끗한 자연,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은 그만큼 산업화되지 못한 지역이다. 부안 역시 대기업은 고사하고 중소기업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이 지역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많은 노동자가 농업에 종사한다. 노동자의 권리와 워라밸이 중요해진 사회에서 시골의 고된 노동환경을 택할 이는 많지 않다. 지역에서 사업을 크게 성공해 젊은 나이에 지역 의원이 된 지인도 처음부터 부안에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시골 출신에게 고향에서 쭉 살아가는 사람은 출세하지 못한 실패자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청소년기에 내가 겪은 시골은, 꿈을 꾸기에 비좁은 곳이었다. 친환경 유기농업과 농민운동을 하면서 훌륭히 귀농 정착한 부모님께 귀한 가치를 배우며 자랐지만 내 꿈은 부안에 있지 않았다. 그림을, 그중에서도 만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부안에서는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수소문을 해서 그림만 배우러 다닌 입시 미술학원 원장님은 만화 그리는 습관이 선을 망치니 그만두라고 가르쳤다. 꿈을 꾸러 간 학원에서 꿈을 부정당한 것이다. 「변산」의 학수도 래퍼라는 꿈을 부안에서 실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거다. 나 역시 부안에서 만화가를 해서 먹고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화 입시는 포기했지만 미대에는 가고 싶었다. 마침내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했을 때는 향후 20년쯤 부안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작 미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입시 기간 내내 유별난 아이 취급을 받았던지라 세상 별난 사람이 다 모여 있는 홍대가 너무 좋았다. 방학 때도 고향에 잘 가지 않고 학교 근처에 머무르며 친구들과 여행을 다녔다. 밖에 나가야만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종종 “사람은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십대 때는 그 말을 듣는 게 발목 잡히는 기분이 들어 참 싫었다. 밥 먹고 그림만 그린 사람이 사방이 논밭인 시골에 가서 뭘 해 먹고살겠냐는 생각으로 고향에서 눈을 돌리고 살았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멈춘 2020년, 얼어버린 서울을 떠나 부안에 돌아오게 됐다. 등교가 중단된 아이들의 가정에 보낼 농산물을 선별하는 친환경 급식센터에 일손이 필요해서였다. 잠깐 다니던 직장도 팬데믹으로 운영 사정이 나빠져 그만두게 되었고, 전염병 탓에 새 직장을 구하거나 잠시 알바를 하기도 두렵고 어려웠다. 코로나 시국의 장기화가 예견되고 서울의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고립감에 지쳐갈 때쯤 돌아온 고향이었다.

농산물 꾸러미 알바를 할 때는 아침 먹기도 힘든 이른 시간에 나가, 천막이나 그늘 아래 야외에서 작물을 고르고 파레트로 실어 날랐다. 집에 가면 뭘 할 새도 없이 잠들었다가 또 아침이 오면 눈을 비비며 출근했다. 해가 질 때쯤 잠에서 깨고 동이 트면 침대에 눕던 서울생활과 정반대의 매일이었다. 그런 생활이 2주가 넘어가자 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삼시세끼 밥을 잔뜩 먹는데도 살이 빠졌다. 매일 해를 보며 지구의 리듬에 맞게 몸을 움직이니 정신이 맑아졌고, 농사일에 잔뼈가 굵은 할머니들의 농담을 들으면 기분이 유쾌해졌다. 볕을 쬐고 갓 수확한 농산물을 만지는 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울적한 생각을 할 틈이 없었고, 주먹보다 큰 양파와 감자 따위를 분류하다가 갑자기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이곳은 아침과 저녁 냄새가 다른데 맑은 공기를 들이켜면 숨이 달다. 그걸 느낄 때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 강남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숨이 턱 막히던 매캐한 감각이 대비되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알바가 끝난 후에도 바로 서울에 돌아가지 않고 잠시 머물렀다. 그 대신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왔다. 같이 밭에도 가고 바다도 가고 맛있는 전라도 음식을 먹여주니 다들 행복해했다. 젊은 사람이 적은 동네라 어른들이 우릴 보면 신기해하기도 하고 반가워하기도 했다. 노란 탈색머리를 한 친구에게 외국인이냐고 물어보는 분도 있었다.

 

소소하게 기쁘고 잔잔한 날들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애써서 하지 않아도 즐겁고 평온했다. 그래도 가끔 서울로 언제 돌아갈지 가늠해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날 나는 특이한, 아니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오디농장 대표인 ‘하이디’는 서울대 출신에 프랑스에서 오래 유학한 사람이다. 우리는 나이에 대해서 길게 대화를 나눈 적 없지만, 내 출생연도와 하이디의 학번이 가깝다. 중요한 건, 그는 내가 부안에서 본 적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23번국도를 타고 쭉 내려오면 중간쯤 위치한 부안군 보안면. 이웃한 줄포와 진서를 포함해 넓은 농지와 곰소 염전이—이곳이 영화 「변산」에 나오는 ‘폐항’일 것이다—있는 부안 남부에서, 하이디는 다양한 주민 공모사업과 도시재생사업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 하이디는 나에게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 기획을 제안했다. 남부안의 먹거리, 볼거리를 알릴 수 있는 플리마켓형 행사 ‘각기각색의 소풍’이었다. 호기심과 흥미가 일어 냉큼 동참하기로 했다.

하이디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그가 설명하는 것들을 나는 처음에 반 정도만 알아들었다. 그러나 행사가 다가올수록 기획의도와 구성이 맞아 들어가는 걸 보고 감탄했다.

우리는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 자랑을 들으며 지역 자원을 발굴했다. 일회용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드리며 말씀하신 자랑거리들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는 손주들을 찍고, 논밭이나 예쁜 마을 풍경을 찍는 분도 있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인쇄해 포토월을 만들어 전시했다. 모아놓고 보니 모두가 작가였고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행사 당일에 나는 미술 체험을 맡아 진행했다. 곰소 염전의 천일염 제조 과정이 타일을 이용한 재래식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타일에 그림을 그려 벽을 만드는 체험이었다. 마을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다녀가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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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안 지역 플리마켓 행사 ‘각기각색의 소풍’이 개최된 곰소 염전. 염전 바닥이 타일로 되어 있다. (사진: 유수정 제공)

 

기획부터 현장까지, 지역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밤을 새우며 준비하느라 앓기도 하고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함께하는 주민들의 열정과 에너지에 힘이 났다. 그리고 모든 과정에서 하이디도, 나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빛이 났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뭔가를 해본 게 처음이었다. 부안에서 이렇게 멋지게 살 수 있다고? 하이디를 만나 부안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고향이라서 잘 안다고, 기대할 게 없다고 여겼는데 나도 몰랐던 부안에 대한 애정을 발견했고, 여기서 뭐든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디 이후에도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다들 만날 때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를 반겨주었다. 내가 대학에 갈 때와 비교하면 부안 인구가 반절로 줄었다는데, 그때보다 아는 사람은 갑절로 늘었다. 그즈음 나는 종종 기획자나 활동가로 불렸다. 자연스럽게 프리랜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지역 소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안에서 사는 재미가 붙기 시작하니 부안에 살지 못해 떠나가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지역 소멸, 단어가 참 얄궂다. 지방에도 많은 사람이 산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인구감소, 소멸 위기지역이라는 말은 막연한 두려움을 준다. 숫자로 계산되는 소멸지수에는 내외부적인 요인이 너무 많아서,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개인으로서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부안에서 회복의 가능성을 봤다. 바로 부안이 가진 포용력이다. 농촌이라서가 아니라 부안이라서 사람을 아껴준다고 생각한다. 부안과 비슷한 시골 중에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곳이 있고 밀어내는 곳이 있다. 특히 청년으로서 느낀 부안은 전자였다.

서울에서 지낼 땐 그 도시가 사람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여기는 듯했다. 인간의 존엄보다 자본이 앞서는 사회, 성실보다 성과가 중요한 세상. 풍요를 위해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절대적으로 풍족한 인구는 한정된 구조. 도시 안에 있을 때는 비판할 줄도 몰랐는데 몇발 물러나서 바라보니 기형적이었다. 서울에서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기 어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 싫다기보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가, 서울에서 사는 인생이 성공한 삶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서울에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부안에서 살아볼 생각이 들었고, 이제 전입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물론 시골에서 먹고살 걱정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다만 부안은 사람 귀한 줄 아는 동네다.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어준다. 함께하는 건 사람일 때도, 기관일 때도, 마을일 때도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든다. 작은 지역에서 좋은 사람만 만난 건 아니지만, 작은 지역이기에 그런 사람은 오래 못 간다는 확신이 들었다.

최근에는 선배 청년들과 부안군이 합심해 청년을 위한 공간을 지었고 그밖에도 다양한 청년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부족한 문화시설을 대신하는 행사도 여럿 생겨났다. 인구감소 국가에서 지자체가 청년정책을 만들고 행사를 늘리는 게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부안에서는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소통이 이뤄지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지키기 어려운 가치 중 하나다.

가장 희망적인 점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부안의 변화를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정책과 지원이 있는지 몰랐다.” “부안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재미있는 행사도, 놀러 갈 공간도 많아진 것 같다.” “부안에서 한번쯤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차례로 부안 토박이, 부안을 떠난 사람, 부안에 방문한 타지 사람의 말을 옮겨봤다. 특히 마지막 말을 한 지인은 내가 전한 부안의 삶뿐만 아니라 부안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소식을 직접 찾아보고 해준 말이라 인상적이었다. 고맙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긴장됐다. 아직 타지인이 와서 겪는 크고 작은 갈등, 주거 문제, 불편한 교통, 다양하지 못한 일자리 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더 늦기 전에 지역살이의 장벽을 낮춰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했다. 부안에 사는 사람, 돌아오고 싶은 사람, 살아보고 싶은 사람 모두를 환대하기 위해서.

 

‘지역에 청년이 없어서 문제’라고들 한다. 정말 그런지 되묻기 위해 청년모임을 만들었다. 작년 9월 말에 시작해 현재 인원은 약 80명이다. 이름은 ‘부안청년건강모임’이고 몸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에 힘쓰는 친목모임이다. 이 모임은 건강한 관계맺기를 추구한다. 내가 이미 경험한 연결의 힘을 믿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며 다양한 가치를 찾는다. 또래를 만나 교류하니 지역 청년으로서 고립감이 사라지고, 재미없다고 생각해왔던 부안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니 지역에 대한 애정도 함께 커진다. 올해 연말에는 시골에서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들을 위한 ‘육아 프리 데이’와 재주꾼이 많아서 기획하게 된 ‘건강모임 연말 가요제’를 계획 중이다. 주제가 다양해 대체 정체성이 뭔가 싶겠지만 모든 기획의 시작은 모임원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있다. 엄마도 청년이고 놀고 싶어하니까, 가무를 즐기는 사람이 많길래 하고 툭 던지면 된다. 이 모든 활동이 ‘재미’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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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청년단체 ‘시고르청춘’과 ‘별마음’이 기획한 청년 문화 사업 ‘우리는 지는 해를 좋아해’의 힙합 버스킹 공연. (사진: 유수정 제공)

 

건강모임은 비영리단체이지만 단 하나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모델을 실천한다. 바로 ‘모임을 낳는 모임’이다. 취미 관련 소모임은 만들어도 금세 없어지기도 하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지만, 일단 모임이 생기면 다들 의욕적으로 이것저것 하게 된다. 나는 필요하다면 고유번호증을 만드는 법부터 지원사업 신청 및 수행 방법을 공유하거나 멘토를 붙여주고 사업을 만들어보라며 독려도 한다.

실제로 모임 사람이 물어봐서 가볍게 알려줬다가 환경예술단체가 생겼다. 곰소의 햇살에 하얗게 익어가는 소금처럼 세상을 빛으로 밝혀주는 ‘소금단’이란다. 총 네명으로 구성된 멤버 중 두명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원래 알던 두 사람도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새로 알게 된 둘 중 한명은 영화감독, 한명은 독특한 미술실을 운영하는 선생님이었다. 어디에 이런 재미있는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지, 탐나서 물어봤더니 원래 낯을 가리고 단체생활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밖으로 나온 계기를 만든 건 물론 소금단 단장의 역할이었다. 다만 그중 한 사람이 내가 운영하는 주민 공간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나와보니 너무 좋다고 말하는 걸 듣자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부안에서 오래 살아온 어른들은 물론이고, 청년인 우리도 이 지역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래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우리가 발견하는 가치를 부여하고, 문제에 부딪히면 질문하고 풀어보려고 노력한다. 가끔 이런 과정을 무작정 못마땅해하거나 ‘원래 그래왔다’는 말로 새로운 시도를 막는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도 문제없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밖에 안 해봤다는 뜻이다. 고인 물은 썩고, 물길은 새로운 물과 만나 부딪혀야 더 큰 강물이 되는 법이다. 나를 포함해 부안의 청년들은 무작정 고향이 최고라고 외치는 지역 예찬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문제에 대해 뼈저리게 체감하고 깊이 알고 있다. 지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만한 관계에 의한 일처리, 소통이 어려운 사람은 부안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그런 방식이 용납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되길 바란다.

부안 하면 ‘시골’이라는 인식에 위축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네, 시골이에요! 부안에 한번 놀러 올래요? 알고 나면 그 매력에 빠지게 될 거예요,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노을밖에 볼 게 없는 곳이 아니라, 그 무엇을 견주어도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노을을 가진 곳이 부안이다. 그런 부안에 노을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부안이 사라질 리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