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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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25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박연준 유병록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승희 신용목 최원식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통해 아래 총 10종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김기택 『낫이라는 칼』, 김상혁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박소란 『있다』, 박판식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서대경 『굴뚝의 기사』, 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오은 『없음의 대명사』,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장옥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가나다순).

본심은 10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모든 후보작이 저마다의 개성과 어법으로 뛰어난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심사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숙고와 토론이 있었으나 수상작을 꼽는 데에는 이견 없이 송진권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창비 2022)으로 한목소리를 모았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에서 시인은 ‘현대성’이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시를 관념의 세계에서 끄집어내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데려온다. 능수능란한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을 통해 얻어진 감각적 이미지들은 놀라운 ‘감칠맛’으로 시에 생기를 부여한다. 시간으로부터 간신히 건져낸 향토적 정서를 살아 있는 현재로 만드는 성취는 그 자체로 백석 시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바, 이 시집을 올해의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김승희(金勝熙) 시인

다양하고 개성적인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박소란 손택수 송진권 이설야 장옥관 등 좋은 시집이 많았고 특히 탄탄한 언어의 다양한 변주가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다. 그리고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곳에 아직도 ‘거리의 빈소’가 차려져 있나?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애도의 종결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나? 거리에는 애도의 포스트잇이 난무하였고 고통스러운 울음이 끊이지 않는 빈소가 여기저기 세워졌다. 애도의 지연성은 사람들에게 공분을 일으켰고 시인들에게 너무도 처절한 시를 쓰게 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에는 온통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속의 삶뿐이었다. 죽음에는 내비게이션이 없고 그래서 슬픔의 네거리에는 우리의 우울과 방황이 너무 많았다.

손택수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는 타인과의 연대, 공존, 공동의 애도 등을 거부한다. 스스로 시대와 인간의 짐을 지고 혼자 가는 고독한 인간의 힘을 느끼게 된다. 타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을 고쳐줄 수 없고 타인의 상처가 나의 상처를 고쳐줄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담론은 공존, 연대, 연민과 공감, 깊은 페이소스 등인데 이 시집은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 혼자만 가지는 유일무이한 슬픔 등을 절대고독으로 보여준다.

장옥관의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는 서정적이면서도 단아한 동시에 언어를 벼리는 날카로운 힘이 있다. 사라져버린 사람의 부재, 함께 살아온 반려의 개가 주인의 살을 뜯어 먹고 뚱뚱해지는 죽음, 시취가 이웃의 비강 일부가 되는 고독사의 처절한 상황을 그려낸 「없는 사람」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장옥관의 시에는 아름답고도 잔혹한 미학이 냉수처럼 흘러 현대인의 끔찍한 초상이 절제의 칼처럼 들어 있었다.

이설야의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디아스포라, 노동자, 여성, 자본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리면서도 분방한 레토릭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타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부조리한 실존의 문제도 능숙하게 그려낸 것은, 시인의 말이 진정성있고 자유롭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이 되어”(이바라기 노리코,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처럼 고정희와 허난설헌 같은 아름다운 빛의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송진권의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토포스(topos)라기보다는 아토포스(atopos)를 연상시킨다. 고향이라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송진권의 고향은 유동적인 공간이자 없는 장소로서 아토포스이다. 아토포스적 타자는 ‘그 사람’이나 ‘나 자신’이 아닌 우리라는 관계다. 백석 시에 등장하는 토속적인 마을 ‘여우난골’이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가족·친척·우리의 사랑의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송진권은 의성어나 의태어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들의 놀라운 ‘감칠맛’을 통해 그러한 장소를 생기있게 구현한다. 백석의 감각적이고 근육운동적인 이미지가 이렇게 생생히 녹아 있는 시들을 최근에 본 적이 없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그러한 감탄을 자아낸다. 올해 백석문학상이 백석 시인의 시세계와 유사한 송진권에게 돌아가서 마음이 기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신용목(愼鏞穆) 시인

우주 시대에도 땅속을 파고들어가는 광부가 있다. 그들은 거꾸로 선 점성가들이다. 수십 미터 흙을 헤집고 들어간 지하갱도에서 곡괭이에 걸리는 별빛으로 반지를 만드는 사람들. 거리의 황홀 한편에 쓰러져 잠든 절망을 지우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그들이 파낸 광물을 녹여 우주선을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는다. 그래서 우주에 가닿는 수많은 시들의 이유가 결국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김상혁의 시가 생활을 끌어안는 아주 긴 팔로 어느 순간 생활이 버린 마음까지 끌어안는다면, 박소란의 시는 어두운 난간에 서 있는 자를 돌려세우기 위해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자에게 스미는 밤공기 같다. 손택수는 자신의 언어 위에 세계를 전부 올려놓을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가리지 않아서 기껏 숨긴 내 치욕을 후렸고, 장옥관은 물에 뜬 밤빛처럼 밀려와서는 상어의 흰 뼈를 해변의 달 아래 꺼내놓아 나를 떨게 했다. 아무래도 이들의 학교에서 나는 졸업하지 못할 것 같다.

송진권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원근법 배우는 시간』이 붙들고 있는 ‘장소성’(place-ness) 때문이다. 장소는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 그래서 장소를 잃은 인간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상실한 자이며, 불가피한 관념을 자신의 자유로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감각적 사유를 튼튼한 언어로 재구성한다 해도, 삶의 이면에 대한 통찰로 일상의 양식을 다 채운다 해도 그들의 말은 나무를 떠난 가을 잎처럼 삭제된 대상 주변을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간’(space)이 인간의 경험과 만나 장소가 되고 경험이 미래를 현재화하는 과정이라면 ‘장소’는 끝없이 미지를 만든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우리에게 ‘현대성’(modernity)이 무엇인지 되묻기 위해 감각의 벽돌로 쌓아올린 관념의 성에서 시를 꺼내, 사람의 발이 빠지는 진흙과 손이 젖는 여울의 마을로 데려간다. 그곳은 수수깡 물복숭아 노루궁뎅이버섯 두꺼비 올뱅이 자체이며 기어이 인간의 모습으로까지 번져나온 ‘장소’이자 저녁 간식거리로 삶은 감자처럼 아무렇지 않게 꺼내놓은 세계의 시원(始原)이다. 이때 ‘경험하는 인간’은 바로 그 장소가 시간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꽃이 되고 별이 된 이들의 내력”처럼 도라지꽃 앞에 앉아 “누구여?/그 속에 들어앉은 이 누구시냐고”(「누구여」)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집의 시적 대상은 화자의 감각과 인식으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통해 감각과 인식을 생산한다고 말해야 한다. 거기에는 발견과 전환을 통해 성찰에 가닿는 낡은 시적 방법론이 끼어들 틈이 없고 언어의 모호성을 시적 전략의 전부로 삼는 빈약한 미학적 변론도 필요하지 않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세권의 시집에 주목했다. 손택수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송진권의 『원근법 배우는 시간』, 그리고 장옥관의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세 시집 모두 최근 우리 시단이 거둔 성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거니와, 그중 시력(詩歷)이 오랜 장옥관 시인이 가장 젊었다. “아득하다/알지 못할 그곳은 아직도 멀다”(‘시인의 말’), 여전히 시의 불온한 미래를 투시하는 시인의 뜻이 가직하다. 제목이 강력하게 암시하듯 이 시집은 그동안 우리 사회를 엄습한 죽음들, 그 치명적 부재에 대해 사유한다. 고독사를 노래한 「없는 사람」은 최고다. 개인적 죽음이 왜 정치적 죽음이 되는지를 이 시만큼 보이는 시는 일찍이 없었다. “팔월에도 폭설이 내리는 (…) 여기는 대구”(「1987」)가 단적으로 가리키듯, 시인의 의식은 불편하다. 그 옹색함에 투철했기에 고발을 넘어 우리 사회의 차마 저버리지 못할 약속을 시의 구경(究竟)에 걸어놓을 줄 알던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시집에는 귀와 눈이 등장하는 시편들이 유독 많다. 마스크 홍수 속에 “마음이 골똘해”(「귀의 가난」)진 시절을 표상할진대, 시집은 ‘스페인독감’ 이후 거의 1세기 만에 엄습한 코로나19, 그 팬데믹 시대의 기념비적 비망록이다. 시인은 침묵의 순례자다. 세상의 변방들 곳곳에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들을 발견한 시인은 기꺼이 그들의 혀가 되는 것인데, 시인은 “황홀한 분리주의자”(「바다로 간 코뿔소」)다. 소수자를 중심 바깥에서 경건히 사유하는 이 시집은 미답(未踏)의 종교로 들어선바, “찻잔 하나도 두 손으로 받”(「동백에 들다」 22장)드는 상호경배의 공동체를 꿈꾸는 시인은 나와 우리, 또는 시와 정치의 기우뚱한 균형 속에 우리 시대 서정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송진권의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처음에 낯설었다. 혹 사투리를 적당히 섞어 쓰는 낯익은 향토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모더니즘의 세례를 너무 안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다른 의구심이 솟치기도 하였다. 어느덧 일독하매, 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계가 맹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습격을 뚫고 성취되었다는 심증이 저절로 믿어졌다. 이야기가 사람이 사람 되는 하나의 핵심을 이룬다는 믿음이 얇아진 우리들의 시대에, “그 이야기들을 믿던 마음까지도 돌아와”(「누구여」)라는 대목에 닿는 순간, 문득 감전된 듯싶었다. 함께 비를 맞는 심정으로 못골 사람들에게 다가간 시인의 마음이 간절하다. 못골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시인이 시간으로부터 간신히 건져내 우리에게 전달한 이 황금의 고리는 그대로 살아 있는 현재이거늘, “아, 그이덜은 혼자배끼 없는디 워뜨캬/나래두 가서 해야지”(「음덕」) 하는 그 마음이 미쁜 것이다.

심사위원회는 세 시집을 두고 토론하였다. 장옥관은 뛰어난 시편들이 제한된 점에 주춤했고, 손택수는 다양성이 일관성을 초과한 데 새삼 미쳤다. 고심 끝에, 소수자의 비애를 해학으로 전복하는 마술의 시인, 송진권을 수상자로 선택했다.

 

 

 

수상소감

 

묵은 논의 둠벙을 들여다보듯이

 

습작 시절에 백석이라는 큰 시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드문드문 들었습니다. 시에 대해서 막연할 때라 그런 분이 있구나 했다가 어느 책에선가 「여우난골족」 「가즈랑집」 「고야(古夜)」라는 그분의 시를 만났습니다. 아! 이런 시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백석 시인의 소박한 이웃들과 친척들을 노래한 시편들은 제가 그때까지 만났던 시와는 많이 다른 시였습니다. 한 가족의 내력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고 제가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이 정답게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외울 만큼 많이 읽었고 빼곡하게 필사를 했습니다.

백석 시인이 북쪽의 말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듯 저는 제 고장 말로 고향의 산하를 그렸고 거기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 이야기들을 옮겨 적기만 했을 뿐인 것 같기도 합니다. 받아쓰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전해준 말로도 쓰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이웃들이 제게 들려준 말로도 썼습니다. 제게로 와서 말을 건넨 사람들의 삶에서 저는 사람의 선함과 진실을, 눈물과 웃음을 담아보려고 했습니다. 백석 시인이 그러하셨듯이, 그분이 생각하던 세상에 조금이나마 닿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백석 「하답(夏畓)」 부분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백석 「선우사(膳友辭)」 부분

 

하늘바라기 천수답 귀퉁이에 우멍한 눈을 뜬 둠벙을 들여다봅니다. 쉬고 있던 물매암이들이 빙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소금쟁이가 물 위를 미끄러지며 달려가고 미꾸라지가 숨을 쉬는지 물거품이 피어오릅니다. 둠벙 가에는 머위가 돋았고 부들이며 갈대도 껑충하니 자라나 있습니다. 물 위에 비친 얼굴이 이젠 낯설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입니다. 제 얼굴엔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백석 시에 나오는 물총새가 된 아이와 다람쥐 동무하고 자란 아이가 저인 것도 같습니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에 나오는 오박골에 가려면 길이 없어서 도랑물을 밟으며 올라가야 합니다. 신발이 젖으니 바짓단 둥둥 걷고 맨발로 가야 합니다. 그 골짜기엔 묵은 밭이며 논들이 있습니다. 물봉숭아가 드문드문 피었고 고마리도 쩔어 붙게 돋아 있습니다. 지악스럽게 땅을 일궈먹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뒤라 농약을 치지 않으니 가재가 있습니다. 돌을 들추면 빠르게 뒷걸음질로 달아납니다. 오박골 밭엔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제 부모님이 잠들어 계십니다. 감나무 아래 점심을 드시던 어머니 아버지와 품앗이로 우리 밭에서 일하던 일가들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새참으로 막걸리 심부름을 오던 저도 있고요, 뭔 지랄을 하느라구 이제사 오느냐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아가, 넘어질라 찬찬히 와라” 하는 큰어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뛰어난 시인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제게 이런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게로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가 되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젊은시, 동시마중 친구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백석 시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낮아지겠습니다. 묵은 논의 둠벙을 들여다보듯이 숨을 죽이고 지금도 거기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 것들의 내력을 새기며 정진하겠습니다.

 

宋鎭權 충북 옥천 출생. 200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자라는 돌』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 『어떤 것』 등이 있음. 박재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등을 수상.

송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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