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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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틀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등이 있음.

 

 

 

블랙 아이스

 

 

눈발은 눈이었을 때 아름답다

쌓인 눈이 눈석임물이 되었다가 얼어붙으면 가장 위험하다

 

눈이 그쳤는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본다

 

설원이 녹고 있다

도로와 개펄이 드러난다

항구 기능을 상실한 저 월곶포구에는 아침 어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침, 눈, 엄마

제니스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도 좋아한다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

 

제니스는 기지개 켜다 말고 베개를 껴안으며 말한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나랑 닮았겠지?

죽진 않았겠지?”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을 들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제니스가 내민 구주소를 들고 그의 부모 집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사십여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한국에 온 제니스와 생전 처음 시흥에 온 나는

을씨년스러운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마전저수지 사거리에서

제니스가 양팔을 벌린 채 돌다가 웃다가 넘어진 건 해가 질 무렵

 

“히죽거리며 말하지 마, 제니스!”

“그럼 울어야 되겠어?”

 

뜨거운 물에 빨아 널어둔 장갑은 수축되어 작고

어제 입었던 스웨터는 여태 축축하다

작년에 룸메이트가 던진 말이 떠오른다

실수로 놓고 가는 줄 알고 챙겨준 물건들이었다

버리기는 그렇고…… 너 가져

갖기 싫으면 버려줘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장갑도 껴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제니스가 태어난 곳을 향해 간다

생후 팔개월 동안 살았던 곳을 향해 춤을 추듯 걷는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던 검은 승용차가

반바퀴 돌며 도로를 벗어난다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서 뭐 할까

 

범인을 잡는 데 회의적인 소설 속 형사는 이해가 되지만

확신 없는 가이드이자 친구로서의 나는 우리의 행방을 모르겠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영원한 햇빛

 

 

달콤한 정적 햇빛이 가득했네

톱자국 지니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보였어

 

생일처럼 외로운 날

낮에 꾼 그 꿈속의 숲 이야기

 

부적 팔찌 사주겠다는 친구

내게 자꾸 흉한 일이 생기니까

정초부터 넘어져 깁스했으니까

 

해가 다 저무는데 인사동 골동품 가게 앞에서 만났다

 

무거워

색깔도 칙칙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거니까 끼고 다녀

귀신 쫓아준대

복을 부른다잖아

 

가판대 가득 쌓인 행운들

 

천연 벽조목이 이토록 많다면

멀쩡한 대추나무를 고온고압으로 변형해서 파는 장사꾼들은 없을 텐데

 

그을린 너의 얼굴

무른 마음

이야기를 들려줄까

 

톱자국 도끼날 자국 품고 아름답게 자란 나무들이 보였어

달콤한 정적 햇빛만 가득했어

 

꿈같은 소리 집어치워!

뒈지게 맞아봐라 진짜로 칼 맞아봤냐고

 

우리는 낙지칼국수 먹으러 왔다

 

어둠이 없는 데가 지옥이죠

밤에도 불을 꺼주지 않는 곳이 감옥입니다

 

칠십여년 만에 무죄 선고 받아 명예를 회복한 할머니

수감생활을 말하신다

 

우리는 머리 맞대고 뉴스를 본다

밥 먹으며 휴대폰 보는 습관을 나는 못 고쳤고

너는 스스로 만든 흉터 가리려고 소매 잡아 늘리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