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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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金正煥

1954년 서울 출생.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기차에 대하여』 『희망의 나이』 『순금의 기억』 『해가 뜨다』 『레닌의 노래』 『거푸집 연주』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 『소리 책력』 『황색예수』 『개인의 거울』 『자수견본집』 『황색예수 2』 등이 있음.

maydapoe@hanmail.net

 

 

 

우리 모두의 교수님

최종길(1931.4.28~1973.10.19)

 

 

교수님.

그곳은 온 세상 돌멩이들이

소리쳐도 소리가 되지 않는

의문사가 없겠지요.

여기서는 온몸이

언뜻언뜻 추락입니다. 그럴 때는

직전도 직후도 없어요.

오늘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걷던 길을

처음으로 걸어왔습니다.

50년을 걷는 동안 교수님과 더불어

아드님은 세상 가장 과묵하고 당당한

중년이 되고 우리들은

죽음이 질문이자 대답인 돌탑을

우리들의 민주주의에 쌓았습니다.

그렇게 교수님은 50년이 매일매일의

새날이고 여기도 슬퍼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교수님.

이 세상의 모든 의문사가 사라지는

광활하고 깊고

명징한 음악이 바로 우리의 슬픔일 것입니다.

그뒤로도 교수님이 우리 모두의 교수님이고

우리 모두가 교수님의 학생이던

50년은 영영 이어질 것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교수님.

제 이름은 김정환,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 2학년입니다.

 

 

 

성 쌓는 시간

 

 

꿈에 나오고 꿈에 그리는 현재

그 소녀의 집은 건물 아니라

저택 아니라 건축이었다.

그 안에 살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거(住居) 기억이 가장 광범한.

그 안에 살아도 아주 협소한

기억만 눈에 보이는 건물 아니라.

건축에 묻어나는 것은 최근의 건축사

그리고 가장 국제적인 건축의 지명들이다. 주거의

언어로 말이지.

진짜 창조는 내가 내게 내린 벌 같다. 다 쌓지도 않았는데

벌써 성 밖에 시간이 없다. 그리고 성을 쌓는 일, 시간을 쌓는 일

아니고 남은 시간을 허무는 일이다. 나 말고 다른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고립의, 성 쌓는 시간이 곧장 탑 시간이다.

불분명한 국적들 너무 젊은 나이와 마구 뒤섞이는

무덤의 왕성(旺盛) 같은 음악의 약소국 시절을 지나 이제

나 노년의 단계 아니라 장(場)에 들었고, 순서의

의외(意外) 없이 쌓는 일은 예전의, 허물었던 일이니

누구를 탓할 일도 없다.

사실은 의외로 괜찮았던 점들이 보인다. 젊음과의

연대가 집착 아니었다. 젊은 쪽들도 못지않게 부드럽고

기네스 톱 텐, 까루소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최소한

잘났다고 설치지는 않지 않나 무대 밖에서 아주 수줍고

겸손한 것만 보아도 대가는 대가다.

그들은 천해지지 않고 본의로 망가졌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 보여도 벌써 꿈틀댄다 천하려는 충동이

내 안에서. 그리고 그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비열한 쾌락으로 내 몸 떨며 무너져내리는

삽시간이다. 그러니 끝내 알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니 말로 표현한다고 꼭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처음에 아름다워서 그랬으나 이제는 그래서 아름다운,

그러므로 그 깊이를 파헤치고 싶을밖에 없는

형식 자체의 형용 불가, 난해가 내게 필요하다.

혼자 부르는 노래에 코러스 아니라 기악의

반주가 필요하고 그 반주에 이를테면 피아노 쏘나타 피아노

소리에 소리보다 더 형용 불가인 소리 속이, 속의 속이, 갈수록 더

형용 불가인 사실의 형식이 필요하다. 성은 어쨌든 사랑에 달하는

sex보다 더 치열하게 제 안으로 쌓이는 성이 제 밖으로 쌓이는

성이고 쌓여가는 계단의 모양이 바로 나이를 먹는 붕괴

형용이라서 아름다운 성이다.

고생 끝났다. 여기는 변방 아니다. 나의 성 쌓는 시간의

주변이 모두 변방인 것도 아니다. 치매를 닮은 중심이

번져간다 팔자를 운명으로 격상시키며. 운명의 남은

궁상마저 벗겨내면 변방이란 게 도대체 뭐지, 뭐였지, 그게 도무지

가능한 단어였나, 단어 아니라 단어의 소외 아니었나, 인간이

인간이라서 불행한 상황의 시작의 표현 아니라 시작 그 자체 아니었나?

왜냐면 성 쌓는 시간을 장소로 만들며 성(城) 그림자 같은 인접의,

인접인 시공이 괴테 파우스트보다

더 난해했기에 문장이 중세 암흑 속을 더 파고든 크리스토퍼 말로우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이다. 성 쌓는 시간의

성 쌓는 시간이지, 포스터스 박사 아니라

말로우가, 그의 난해의 명징이 너무나 명징하지 않나 끝까지

생각을 놓치지 않다가 너무 늦지 않게, 문명 전파 경로의

너무 뻔한 명석에 포섭되기 전에 죽은 다른 한편

북으로 또 북으로 바이킹 야만에 달하기 전에 죽은 그

죽음의 두겹이 검정의 권위를 인간화하는, 그렇게

북향하는, 나날이 변방인 바그너의 과잉을

남향하는, 나날이 예술인 브람스가 우울의

명징으로 수습하는 그 속, 속의 속, 무운(無韻)의

『탬벌레인 대왕』과 무슨 스파이 영화 제목 같은 『몰타의 유대인』,

그리고 『에드워드 2세』의 에드워드 어감 같은 것들 말이다.

왜냐면 명퇴한 마누라 생전 처음 미국 여행을 장장

3주 일정으로 갔다. 내가 애써 의젓하려고 메모지에

창작 단상들을 평소보다 좀 주접스럽게 늘리지만

미국에서 온 첫 메일에 아내의 살 내음 물씬하고 거기에

잔소리 더한 것이 살림이고 위대하고 아내가 깨알 글씨로

A4 용지 두 페이지에 걸쳐 써서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여놓은

무슨 성명서 본론, 서론, 결론 같던 1. 음식, 2. 청소, 3. 세탁

안내문이 창작 메모보다 더 소중한 느낌이고 자세히 읽으니

냉장고 냉장실 냉동실과 김치냉장고에 구비된 음식만으로도

잔치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물걸레

대걸레 전자레인지 프라이팬, 비닐 랩 햇반 화장실 변기 쓰레기

봉투 등등 사용 설명이 아주 자세한 제품 사용설명서보다

더 자세하고 무엇보다 자상한, 생활의 부재의

각주(脚註)들 같다. 아무렴. 나와 가장

상관없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2010년 은행에서 영화사로 옮긴 첫아들이 직장에서

받은 선물 중 제법 그럴듯하다며 내게 넘겨준 탁상용

플래너 일일계획표 부분이 몇장 남지 않았다. 창작 메모들

전혀 쓸데없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영화계 추석 선물이 30년 넘는 나의 시력(詩歷)

수준을 가뿐히 능가했지만 그 플래너도 받침대와 축

재활용하라는 크고 흰 투명 스티커 2010, 2011, 2012, 2013

글씨체가 그해를 모두 넘긴 지금도 제법 품위 있다.

하지만 메모지로 거의 다 쓴 플래너를 이제 와서 플래너로 들여다보니

아들이 고단하다.

매일 양면 펼침의 몇년 몇월 며칠 있고

오늘의 우선 업무 ABC 있고 예정 일정 있고 일일지출 있고,

오늘의 기록사항 있다.

냉장실에는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 cornucopia

음식이 있고 음식 종류가 있고

플래너에는 기록사항보다 더 작은 글씨로 왼쪽 상단에

돌이켜보고 내다보기도 하라는 그달 달력 있고 오른쪽 상단에

‘마음의 구호’ 격으로 ‘정보-아이디어-회의-일기-대화’가

일렬종대로 섰고, 왼쪽 맨 아래 깨알보다 더 작게

완료, 연기, 취소, 위임, 진행 중 부호 설명 있고 그러고 보니

오른쪽 상단에 올해가 며칠 지났고 앞으로 며칠 몇주

남았는지 적혀 있고, 그냥 보이는 크기지만 늘 제일 늦게 보이는

매일 달라지는 잠언 있다. 골 빼는구나. 수첩 두면에

그것들이 다 들어 있고 그게 다가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나머지가 더 다그치고 더 명령적이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법이 너무 어려워

아예 음식물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고 있다. 세탁기는 돌려,

보았나? 역시 중요한 것은 현재의, 현재라는 총정리 아니겠나,

그런 전언으로 탁상용 플래너 받침대 검고 두껍고 튼튼하고

바닥에 붙은 연도 스티커들 노고가 큰 아이 얼굴처럼

아담하게 노총각 나이 들었다.

집 안 청소는 그럭저럭 자주 했다. ‘화장실 변기 뚜껑 위아래

휴지로 닦’거나 ‘욕조 배수구 부근 머리카락 제거’는 물론 안 하고

성 쌓는 시간이 거저먹는 시간이다.

인천국제공항 국제선 B Gate 도착이다. landed,는 아직 안심할 수

없고 arrived,가 이제 마음 놓아도 된다는 뜻, 아니면 거꾸로?

하늘이 과연 하늘이다, 육지와 바다에 없는 착륙과 도착

사이가 있으니. 짐 찾는 시간이 길지만, 도착하였다, 육지.

교통사고가 훨씬 더 잦지만 하늘에 비하면

자잘하여 비길 바 못 된다. 아니, 그게 아니고…… 불안이

국제적이다. 국제선 도착을 기다리는 B Gate 대합실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전광판 두루마리가

항공편 각각의 도착 예정시각과 연기 여부와 착륙, 도착을 순서대로

뻔질나게 알리며 상향하다가 전광판 밖으로 사라지는데,

그러기 마련인데 전광판 전체적으로 어딘가

뒤집어지는 것 같다.

갖은 대륙 갖은 나라의, 주로 관광이지만 또한

사랑을 포함한 갖은 용무의 갖은 흑과 백,

그리고 황인종의 시끌벅적한, 눈물도 겨운,

감격스러운 국제적 만남이

더 큰 헤어짐 같다.

‘국제적’이 바로 헤어짐 같다. 아무도 이별의

규모와 수준을 따지지 않는 공통의 이별로 사람들

저리 북적대므로 스스로 북적댐을 모른다.

아내가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울컥한 까닭.

분리수거는 쉽다. 분리수거 안 되는 쓰레기가 어렵지.

비품은 언제나 비품보다 비품 두는 곳이 성가시고,

왜냐면 비품이 바로 ‘두는 물건’ 아냐? 아내의 여행 선물은

그랜드캐니언 석화목(石化木), 수천년 혹은 수만년

생명이 눌려 돌보다 더 단단한 나무 조각이다. 엄지손가락보다

아주 조금만 크고, 아주 조금만 얇고, 수천 수만년

혹은 수천만년 나무 한그루가 그렇게 작아졌다는 듯이

단단하다. 무적이지. 역사의 더 짧은 설화의 응축인 역사

지도 앞에서 완전 똥배짱이다. 왜냐면

이 작고 단단한 응축에서 우리가 본다, 역사지도의

역사 속으로의 무한 확장을. 고대문명,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바이킹, 대영제국 역사 세계사 지도가 모두 헛되고 챙길 것 다 챙긴

석화목이 너무나 흡족하여 슬픔이 더 단단하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지도보다 슬픈 지도의 세계가 태어난다.

원시 벽화 당시 원시 벽화 삽화나 설명이 있을 리 없지만 있는 모든

호미니드, 호모, 휴먼의 처음인 식민(植民)과 식민인 처음이 달할 수 없고,

농업 광업이 방해만 되고, 선과 면과 색만으로 기를

쓸 일도 아니고 아무리 놀라운 국가와 직업의 아무리 놀라운

동시 등장으로도, 지도를 넘치는 군락지와 군락지를 넘치는

인구와 인구를 넘치는 수(數)의 새로운 발굴과 새로운

작명으로도 달할 수 없는, 지도

물(物) 세계다, 지도 속에 묻을 수 없고 지도에서 파낼 수 없는

그릴 수 있지만 지도 속에서 이동할 수 없고

진화할 수 없는, 그러므로 그릴 수 없는 그림,

미래 전망과 정반대인 지도 물 세계다.

미래 전망 행위가 없으므로 전망이 없는 시대에 내가

지도의 세계 속에서 오랫동안 간직만 하고

읽지 않은 헌책을 한권 한권 꺼내어

읽지 않고 함께 논다, 하이델베르크가 네안데르탈

못지않게 오래된 고유명사 될 때까지.

끝까지 어렴풋한 내용과 이제는 눈 감아도 보이는

디자인이 어울리고, 하나 되고, 내용이 디자인화하는

디자인이 내용 바깥으로 디자인의 내용을

세울 때까지 논다.

지도 물 세계로 보자면 역사지도가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일찍이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을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빨빨거리며

나아가고, 돌아다니고 만나고 장사하고 사기 치고

도둑질하고 겁탈하고 간혹 사랑도 하고 그랬는데

당사자들이 그걸 몰랐고 주변에 몇 안 보였고 심지어

고독했다는, 그리고 공포에 아직 물들지 않은(그것에

미달했으므로)절대고독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일 때까지 논다. 아가멤논,

기괴하거나 영웅적이기는커녕

쪼잔했군. 그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원정에

나서기에는 트로이가 너무 미약하다. 왕국도 아냐.

그러니 호메로스든 공동창작이든, 우리 짐작보다

훨씬 더 위대해 보일 때까지.

이따금씩 스코틀랜드가 당긴다.

영화 「브레이브하트」도 14세기 스코틀랜드 음악도 있지만

이따금씩 스코틀랜드가 당기느라

그것들 또한 좋았지 거꾸로 아니다.

내가 아는 스코틀랜드 실물은 스카치테이프와 스카치

위스키뿐이지만 스코틀랜드,

아주 오래된 지방인 바로 그만큼 지도 속에서

지도의 세계를 벗어나고 참회할 것 하나 없는 흙덩어리의

결정(結晶)일 것 같다. 스코틀랜드

인구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어도 그럴 것 같다.

글에 비하면 목소리도 건축도 너무 빨리 늙지만

죽은 소프라노 이소벨 베일리의 살아 있는 노래도

죽은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살아 있는 건축도

스코틀랜드, 아주 오래된 만큼 참회할 것 하나 없는

흙덩어리 결정의 미래 전망이다. 글래스고우 미술학교,

그 빛으로 빚었기에 오래될수록,

일제시대 지었으나 참회할 것 하나 없는 나의

모교 같다. 짐작보다 훨씬 더 긴박하고 긴밀하게 디자인의

내용이 세워진다. 아내가 돌아왔고 살림이

정상화했다. 아내 부재에도 정상적이었다는

착각을 버리라고 집 안의 실물, 사물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여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러니

제자리가 영원한 착각이라는

슬픔도 돌아왔다.

큰아이 회사 출근, 새삼스럽다. 아니 쥐 한마리

찬장 문 박차고 나와도 그만큼 깜짝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간의 가족이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어쨌든 행복과 불행의 양이 상쇄되지 않고

행복의 질을 애당초 슬픔의 질이 동반한다는 것을 아는

인간의 가족이다. 아내도 외출했고 나는 여전히

성 쌓는 시간이 거저먹는 시간이다.

예수와 부처는 성을 쌓을 수 없다. 둘 다 돌이킬 수 없고

그렇게 예수가 대문자 신의 아들로 석가모니가 대문자 신의

대문자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