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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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영 林裕永

1986년 진주 출생.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오믈렛』 등이 있음.

daymoyr@gmail.com

 

 

 

연해주

 

 

박력분 135g

버터 135g

달걀 3개

설탕 75g

베이킹파우더 1t

바닐라향 0.5T

소금 2g

바닐라빈 1개

생크림

과일잼

슈거파우더

 

뜨거운 냄비에 버터를 넣고 바닐라빈, 바닐라향, 과일잼, 설탕을 넣어 볶는다. 휘저은 달걀과 물 한 컵을 붓고 함께 졸이다가 계란물이 끓어오를 때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거품기를 이용해 마구 뒤섞는다. 끈적해지면 불을 끄고 식힌다. 딱딱해지기 전에 이구아나 모양으로 성형해 오븐용 그릇에 담는다.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어 120분간 굽는다. 이구아나가 구워지는 동안 주방을 정리한다.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다. 120분.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딱딱하고 검은 그을음이 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싫다. 이해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싫다. 나는 마지막에 우는 자. 엉망진창으로 통곡하는 자, 늘 지는 자, 넘어지고 뒤처지는 자다. 불 꺼진 뒤 도착하는 자, 빈 잔을 받는 자. 나의 빈 자루는 이보다 더 빌 수 없고 터진 곳도 구멍도 많지만. 나의 소중한 자루, 꽃도 빵도 없지만. 자루 속에 작은 것을 넣을 수는 없다. 예컨대 밀가루나 곡식이나 소금을 넣을 수는 없다. 큰 것은 넣을 수 있다. 이를테면 블라지보스또끄. 연해주, 러시아, 유라시아대륙.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마리의 이구아나. 당신이 멕시코시티에서 칠리소스를 발라 먹은 것. 자루 입구를 쥐고 열렬히 흔들어 내용물을 잘 섞는다. 눈을 감고 손을 넣어 가장 먼저 잡히는 것을 꺼낸다. 그것은 연해주다. 그것이 연해주다. 불타는 이구아나 모양의 덩어리.

 

“시를 읽고 있었어요.”

고개를 든 당신이 말한다.

 

 

 

예언

 

 

올 4월에 지구를 지나는 폰스-브룩스 혜성의 주기는 71년이라고 한다. 이번 관측을 놓치면 71년을 더 기다려야만 같은 별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71년 후의 폰스-브룩스 혜성은 올해의 폰스-브룩스 혜성과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71년 후에도 내가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이번 혜성을 못 본다면 아쉬울 예정인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예전이라면 크게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올 4월의 나는 연초에 혜성 소식을 들은 걸 기억한다. 다이어리의 4월 밑에 작은 글씨로 ‘혜성’이라고 메모도 해두었고, 4월이 시작되면서 나뿐만 아니라 혜성 출몰 소식에 들뜬 세계의 언론인들이 부지런히 혜성의 소식을 전해준다. 나는 그런 뉴스를 보면서 혜성이 오는 날짜를 하루하루 세어보기도 하지만, 아뿔싸, 하필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드는 바람에 그 밤은 그저 그런 밤으로 끝나버린다.

 

그러나 나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평범한 숙취의 고통을 느끼며 태양 아래 깨어난다. 핸드폰을 켜서 지난밤 지구를 지나간 혜성을 가장 멋진 모습으로 촬영한 사진을 찾아본다. 생각보다 그렇게 굉장하진 않군. 하지만 내가 별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면 멋진 밤을 보냈을 만도 한 모습이군. 이 밤은 보름이 아니었고, 날씨도 청명했고, 미세먼지가 심하지도 않았군. 정말 다행이군.

 

예측 가능한 사건을 놓치는 건 아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라도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분명히 일어나리라고 예측되고, 실제로 그 사건이 발생하고, 그 양상도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면 된다.

 

몰라서 못 본 미욱한 빛이 내 안에도 참 많았는데. 지금은 붙잡고 싶어도 다 떠나고 없다.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커먼 어둠 속에 손을 욱여넣으면 축축하고 물렁거리는 것만 잡힐 뿐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정말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새까맣게 몰랐다면 그것들이 있다가 없이 된 건 어찌 알았을까.

 

저기 봐라. 먼 하늘에 내 얼굴 하나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