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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켄 리우의 포스트휴먼 소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공저서 『개벽의 사상사』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역서 『단일한 근대성』 『아메리카의 망명자』,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우리, 인간은 되지 말자?

 

‘인간’이라는 것이 이토록 문제적이던 때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우리 시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 ‘되지 않기’에 골몰하는 듯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규정이 만악의 근원을 지칭하는 낙인처럼 유통되고, 인간이라는 데 대한 통렬한 반성의 요청이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것 같다. 때로 자기혐오에 근접하면서 동시에 어딘지 너무 후련한 청산처럼 느껴지는 이런 비판이 그간의 역사를 통해 차곡차곡 축적되고 숙성된 인간적 지혜가 스스로를 성찰한 끝에 다다른 결론이라 믿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외부적 충격, 곧 기후위기가 대표하듯이 지금까지의 인간문명이 지속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위기와 재난, 그리고 그런 위기와 재난이 조만간 ‘세상의 종말’급으로 닥치리라는 예감에서 촉발된 반응에 가깝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가’라는, 파국을 직시한 악당의 뒤늦은 회한처럼, 인간은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이런 짓을 한 ‘나, 인간’은 도대체 누구냐를 부랴부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른 모양이다.

그렇듯 떠밀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을 문제화하는 ‘겸허한’ 자기반성과 ‘지당한’ 자기 재인식에 어떤 병리적 증상이 묻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이상을 내세운 휴머니즘이 비판받아온 지 이미 오래건만 이제 와서 인간중심주의라는 더 손쉬운 표적을 역대급 강적인 듯 타격하는 것이 그렇고, ‘이런 짓을 한 인간’을 제대로 직시하기도 전에 ‘포스트휴먼’을 운위하는 움직임이 특히 의혹을 부추긴다. 인류세로 명명될 만큼 압도적 강도로 찍힌 자신의 발자국을 지울 방도를 찾지 못한 인간이 포스트휴먼의 이름 뒤로 스스로를 숨겨 책임을 모면하려는 태도, 자신이 초래한 세상의 종말이 닥쳐오기 전에 서둘러 스스로의 죽음을 가장하는 태도가 숱한 ‘인간-되지 않기’의 배후는 아닐까?

포스트휴먼의 추세는 대개 ‘비인간’의 부상을 동반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지우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여러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 담론들이 보여주듯이, 동물이든 사물이든 비인간의 역량을 합당하게 묘사하기 위해 인간에게만 부여되던 속성, 가령 행위능력(agency)이나 생기(vitality) 같은 것들이 소환된다면,1 인간을 합당하게 재현하는 일에는 이제껏 비인간적인 것을 설명한다고 여겨졌던 표현들이 동원된다. “돌은 세계를 갖지 않고(worldless), 동물은 세계가 빈곤하며(poor in world), 인간은 세계를 형성한다(world-forming)”2고 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명제 역시 두 방향에서 공격받는다. 비인간도 세계를 형성한다는 반박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한편에선 인간이 의미를 만들어 세계를 형성하는 역량을 상실한 끝에 이미 ‘세상의 종말’을 맞이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3

비인간의 부상에 좀더 초점을 두는 입장은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서 인간 이후의 무엇으로의 역사적 발전을 함축한다”고 비판하면서 그와 거리를 두기도 한다.4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내부에서도 획기적으로 개량된 버전의 인간을 기대하는 “트랜스휴머니즘으로 경도된 (휴머니즘 ‘이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확장판’인) 포스트휴먼”을 경계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비판적 포스트휴먼’으로 정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5 이런 차별화에도 불구하고 비인간과의 경계가 근본적으로 지워진 인간 이해가 기술을 통해 대폭 보강된 존재로의 ‘진화’를 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용이하게 해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는 로지 브라이도띠(Rosi Braidotti)의 주장을 잠시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포스트휴먼 조건의 공통분모는 생명 물질(living matter)이 생명력 있고 자기조직적이면서도 비(非)자연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가정”이다. 자기조직하는 생명력이란 “지능적 생기성”이고 지능성은 “정보 코드들에 의해 추동”된다는 의미로 ‘비자연적’이라 일컫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체들” 역시 “자신의 물질성과 생기적 능력을 나타내는 정보 기체(substrate, 基體)”로 파악된다.6 이런 조건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전략은 ‘생명’이라 말하면서 실은 인간을 중심에 놓는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생명의 인간-아닌 생기적 힘”(non-human, vital force of Life)에 주목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른 한편 포스트휴먼적 변화는 또한 자본과 권력이 더욱 미시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포획할 위기를 동반하므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의 터”를 확보하는 포스트휴먼 ‘주체 이론’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생명의 인간-아닌 측면들과의 연대,” 곧 “‘동물-되기, 지구-되기, 기계-되기’” 등을 통해 “우리 시대의 생명공학기술로 매개된 신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브라이도띠는 말한다. 대략 이렇게 종과 범주의 구분 일체를 무너뜨리며 질주하는 서사구조가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의 기본적 특징으로 보이는데, 그런 질주 속에서 생명 물질의 정보적 힘에 대한 자본주의적 상품화나 “과장된 탈신체화와 트랜스휴머니즘적 도피의 판타지”를 향한 경고가 제어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7

비유적 차원에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한 모든 논의를 ‘포스트휴먼’ 담론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브라이도띠처럼 ‘포스트휴머니즘’을 명시적으로 표방한 입장은 사이버네틱스나 생명공학 같은 분야의 기술적 발견들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챗 GPT로 대표되는 이즈음 AI 기술의 비약적 발전 조짐은 여기에 또 한겹의 현실성을 더한다. 문학에서 SF장르가 부쩍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SF 특유의 사변성은 이 장르와 (특히 기술적) 이론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SF가 ‘문학’ 장르인 한 그저 ‘이론 + 컨텍스트’라는 구조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론이 마음 놓고 펼치는 현란한 무대의 이면을 일부라도 또 암시적으로라도 보여주리라 기대할 수 있다. 대략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켄 리우(Ken Liu)라는 탁월한 SF작가의 포스트휴먼 스토리를 읽어보자.

 

 

2. 포스트휴먼-되기와 포스트휴먼-만들기

 

먼저 켄 리우의 작품세계가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로 한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주제에 한하여 접근하는 어떤 시도도 부당하게 여겨질 만큼 그의 작품들이 다채롭고 풍성하며 무엇보다 ‘그 자체’로 읽혀야 마땅함을 밝혀두어야겠다. SF와 판타지 분야의 권위있는 문학상을 휩쓴 점이나 150여편에 달하는 중단편과 더불어 장편 연작까지 써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중국 란저우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한 개인적 배경과 프로그래머와 변호사 등으로 일한 경력 같은 것들이 이 작가의 위치를 대략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사항이다.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8는 그 자신의 토로가 말해주듯이, 그에게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안겨준 「종이 동물원」(2011)이 판타지를 가미함으로써 중국계 미국이민자 모자의 세대갈등과 화해를 한층 절절하게 그려낸다면, 더 최근작인 「추모와 기도」(2019)9는 미래기술적 장치를 들여오는 방식으로 총기사고와 시각적 센세이션 중독이라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10 댄다. SF에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소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화적·기술적 유산을 활용하여 장편 연작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들을 썼으며, 가령 「파자점술사」나 「매듭 묶기」 같은 단편에는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도 뚜렷하다. 그밖에도 명말청초의 양주대학살(「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이나 일본군 731부대의 잔혹행위(「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같은 역사 이슈를 다루기도 하고 우리로서는 매우 흥미롭게도 임진왜란이 배경으로 설정된 이야기(「북두」)도 있다. “아마 모든 형태의 존재에서 이야기를 발견하는 그의 능력이 이토록 많은 작품을 쓰게 해주는” 것이리라는 어느 인터뷰어의 말이 이 작가에 대한 적절한 묘사로 들린다.11

기술이 변화시킬 미래와 관련해서도 켄 리우의 작품은 다양한 각도와 시각으로 흥미로운 탐색을 수행하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단편집 『종이 동물원』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12 곳곳에는 인간과 기술뿐 아니라 환상과 기술 사이의 낯선 접속을 통해 기술이 제기하는 도전들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포스트휴먼 주체’라는 이슈를 뚜렷이 전경화한 몇몇 작품에 한정하여 살피기로 하자.13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카르타고의 장미」(Carthaginian Rose, 2002)에는 “두뇌를 아주 높은 해상도로 스캔하는 기술”(187면)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 영역으로 옮기는 프로젝트가 등장하는데, 두뇌 스캔은 일찍이 한스 모라베크(Hans Moravec) 같은 로봇공학자가 곧 가능해지리라 언급했고14 SF소설들이 심심치 않게 다루어온 기술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자매 ‘에이미’와 ‘리즈’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히치하이킹으로 미대륙을 횡단할 만큼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낙관적 활력과 총명함을 지닌 리즈는 인공지능 컨설팅 회사인 ‘로고리즘스’에 입사하여 원 없이 출장을 다니며 살게 되고 그때마다 ‘집순이’인 에이미에게 세계 곳곳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보내곤 했다. 에이미를 화자로 하여 이제 세상에 없는 리즈를 회상하는 이 이야기에서 리즈의 죽음은 로고리즘스가 수행한 ‘데스티니’라는 프로젝트와 얽혀 있다. 로고리즘스는 인공지능 기술이 부딪힌 한계를 돌파하고 “우리 손으로 정신을 창조하는 방법을 진정으로 깨우”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정신의 플랫폼”, 곧 살아 있는 인간 두뇌의 청사진이 유일한 실마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망 후 냉동한 두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의 두뇌를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187면). 리즈는 이를 “세상을 바꿔 놓을 프로젝트”(186면)이자 “만에 하나 실패한다고 해도, 아주 멋진 여행”(189면)이리라 생각하며 자원한다. 그렇게 스캔된 리즈의 “전자 연산 패턴”은 “스캔 결과를 토대로 구축한 신경 그리드 위에서”(190면) 고작 5초 동안 지속되고 “와해되었”(191면)으나 수많은 실리콘 복사본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회사에 귀속되어 추측건대 몇번이고 되살리려는 시도를 겪는 중이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또다른 논자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는 바로 이런 두뇌 스캔이라는 발상에 담긴 전제, 곧 인간의 의식이 신체와 아무 관계가 없고 따라서 거기 담긴 “정보가 아무 변화 없이 서로 다른 물질적 기층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믿음”을 비판한 바 있다. “신체는 수천 년 동안 퇴적된 진화사의 최종 결론이며, 이러한 역사가 생각과 행위의 모든 차원에서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얕은 생각”이고, “모든 신체화된 존재(embodied being) 중에서 으뜸”인 인간의 “신체화의 복잡성은 인간 의식이 사이버네틱스 기계에 신체화된 지능의 의식과는 무척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5 17세기 스피노자의 일원론이 일러주듯이 데까르뜨적 심신이원론에 관한 비판 자체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지만 ‘포스트휴먼’적 상황에서 다시금 적실성을 띠게 된 셈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인간의 신체화가 그토록 고도화된 데는 인간 신체를 둘러싼 비인간 신체들의 작용에도 힘입은 바 크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카르타고의 장미」는 에이미의 말을 빌려 그렇듯 확장된 의미의 신체와 의식 사이의 불가분성을 말하고 있다.

 

내가 캠리슬을 세상에서 으뜸가는 곳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 놓고 이제 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상상이 안 될 뿐이다. 나는 내 방 바닥 위로 움직이는 그늘이 좋다. 계단을 올라갈 때 들리는 삐걱삐걱 소리도 마음에 든다. 한 단 한 단이 내는 소리가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다. 사과나무들이 보이는 풍경도 좋다. (…) 집, 언덕, 그늘, 사과의 맛. 그런 것들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들은 내 신경 세포의 수상 돌기와 축삭 돌기가 서로 이어지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고, 아직 여리던 시절의 내 살갗과 두뇌와 몸에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미세 포토 공정처럼 스스로를 새겨 넣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캠리슬의 홀로그래피 지도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내 발가락이나 손가락 같은 다른 부분들처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184~85면)

 

그늘과 계단과 사과나무 같은 비인간 신체들이 자신의 신체화에 얽혀 있고 ‘반도체 회로’나 ‘홀로그래피’의 비유가 함축하듯 자신의 의식의 형성에도 작용한다는 에이미의 느낌은 여하한 ‘되기’도 구태여 개입할 필요 없이 인간이란 이미 일정하게 인간만은 아닌 존재임을 일러준다. 소설이 궁극적으로 승인하는 포스트휴먼론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고, 이런 의미의 포스트휴먼적 요소에 힘입어 우리는 인간 일반이 아니라 에이미나 리즈 같은 개별 인간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로고리즘스가 리즈의 유해랍시고 건넨 실리콘 웨이퍼 스무장을 에이미가 한치의 주저 없이 밟아 없애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럼에도 ‘복사본’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소설에서 리즈의 스캔 자체는 일단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스캔의 기술적 성공 여부가 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장미」가 두뇌 스캔을 다루는 방식의 두드러진 특징은 헤일즈가 지적한 정보의 ‘탈신체화’가 정보의 존재양식을 둘러싼 사이버네틱스의 (잘못된) 기술적 가정 같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물리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신체를 제거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리즈의 스캔은 뇌를 “얇게 저미는”(188면) 방식으로 진행되며 더욱이 “마취를 하면 측정 결과가 왜곡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상태여야”(189면) 했으므로 가장 정밀하고 잔혹한 고문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된 물리적 잔혹성은 이 기술이 현실화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캔’이나 ‘복사’ 같은 중립적 표현을 통해 평이한 ‘이전(移轉)’처럼 포장된 이 과정이 실제로는 엄청난 ‘변형’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

인공지능 기술을 진전시키려는 프로젝트 목적에 비추어보면 고문을 거쳐 얻게 된 ‘청사진’이 전에 없던 새롭고 유용한 정보라는 점이 중요하지, 그것이 인간에 신체화되었을 때의 정보와 동일한가 여부, 더욱이 ‘리즈’라는 개별 인간에 신체화했을 때와 동일한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의식은 단순히 신체와 무관한 정보처럼 (잘못) 다루어지는 정도를 넘어 신체에서 뜯겨 나오는 방식으로 가공되어야만 정보로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란 인간 내부의 동물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이 된다고 한 아감벤의 ‘인간학적 기계’론16을 빌려 말하면, 신체 자체를 제거하는 이 거대한 폭력은 ‘포스트휴먼적 기계’의 작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브라이도띠가 말한 ‘포스트휴먼 조건’이란 이미 주어져 있었으나 이제야 과학적으로 밝혀진 조건 같은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기획된 변화이며 더욱이 엄청난 상실과 고통을 동반하는 변화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의 비유처럼 기술적 ‘발견’이 아니라 기술이 실현되기 위해 취해진 ‘강제’인 것이다. 헤일즈는 탈신체화를 비판하면서도 “인간이 지능을 가진 기계와 매끄럽게 접합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런 기술적 가능성에 “묵시록적인 공포”17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매끄럽게’ 접합되지 않는 것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을 두드려 맞추리라는 것이 탈신체화라는 발상의 진짜 위험이다.

브라이도띠가 그렇고 헤일즈도 마찬가지인데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대개 인간중심주의 비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율적 의지와 자기결정권에 토대를 둔 휴머니즘적 인간 주체가 더 강화된 형태로 재등장할 위험을 가장 경계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다시 살아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전보다 10억 배 더 빠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왜냐면 나한테는 이제 몸이 없을 테니까. 그 일을 다 해내면 앞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돼. 이 연약한 육신이 우리 감옥이 아니게 되는 거야”(189면)라는 발언이 일러주듯 리즈에게도 ‘트랜스휴먼’적 욕망이 없지 않다. 하지만 리즈의 욕망과 무관하게 스캔 프로젝트의 초점은 앞서 언급했듯 기술 자체의 발전이지 리즈라는 휴먼 주체를 트랜스휴먼화하는 데 있지 않다. 더욱이 리즈가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소설의 세목에는 다른 성격의 요소가 스며 있다. 리즈가 신체를 무엇보다 취약성과 연결하고 그런 취약성을 혐오하게 된 이유는, 에이미의 몸에 삐걱거리는 계단과 새콤한 사과의 맛이 새겨졌듯 리즈의 몸에 새겨진 어떤 것들 때문이다. 인생 최초의 대모험이던 대륙횡단 여행에서 리즈는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고, “내가 세상 끝까지 여행을 가 봤자 이 기억은 언제나 나를 따라오겠지. (…) 내 정신은 언제까지나 내 몸에 갇혀서 이 기억을 살고 또 살 거야. 나는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거야”라고 에이미에게 털어놓으며 몸이란 “약하고 불완전”하여 “결국엔 우릴 버리게 마련”이라 잘라 말한다. 에이미는 에이미대로 리즈를 위로하면서도 “리즈가 어떤 기분일지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았으므로. 내 본능으로는, 내 몸으로는”이라며 안타까워한다(184면).

취약한 그 ‘몸’을 보살피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불어넣어”(184면) 생기와 역량을 회복하는 일, 공감의 주된 매개이면서 동시에 장벽이기도 한 몸의 경계를 넘어 연대하는 일, 이런 일들이 더없이 지난하고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과정임은 ‘언제나’ ‘언제까지나’ ‘절대로’ 같은 리즈의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 정신’이 다름 아닌 ‘내 몸의 정신’임을 너무도 선명하게 일러준 그 사건을 일거에 전복하기 위해 리즈는 몸의 말살을 하나의 기회처럼 선뜻 붙잡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리즈가 겪은 사건에서 엄밀히 몸은 본래의 취약성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취약한 무엇으로 폭력적으로 환원된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리즈가 업로드되는 절차와 정확히 동일한 성격이다. 리즈의 선택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기술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태가 혹시라도 벌어진다면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일지를 예시해준다. 포스트휴먼 조건이란 몸을 대하는 태도와 몸의 취약성을 대하는 태도를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가는 힘과 연결되어 있다. 대다수는 인간의 뇌에 컴퓨터 칩을 심고야 만 일론 머스크처럼 더 많은 권력을 향한 트랜스휴머니즘의 욕망 때문이라기보다 컴퓨터 칩을 심어넣음으로써 칩 없는 인간의 뇌를 불완전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기술의 ‘수행성’에 의해 포스트휴먼으로 내몰릴 것이다. 기술이 취약성을 만들어낸다는 말은 단지 상대적으로 취약해 보이게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칩을 넣는 바로 그 기술적 선택에 의해 칩이 없는 두뇌와 스캔되지 않은 몸을 향한 적극적인 방기와 훼손이 부추겨지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뒤에 남은 사람들」(Staying Behind, 2011)은 바로 그런 내몰림의 과정을 그린다. 이 소설은 리즈가 겪은 스캔 기술이 ‘싱귤래리티’로 공식화되고 심지어 저렴해지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로 ‘업로드’되기를 택하게 된 이후의 시점을 그린다. 기술을 시행하는 회사는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라는 낙관적 메시지를 선전문구로 삼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업로드를 택하는 것은 영생의 기대보다 생존의 요구 때문이다. “그 무렵 세상은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중”이고 많은 지역이 “무인지대로 변했”으며 전쟁과 살육과 정복이 이어졌던 것이다(206면). 대다수가 업로드 되고 나면 이제 ‘잔류자’들의 사회를 굳이 유지할 이유마저 사라진다. 소설의 화자이자 잔류 가족의 아버지는 간신히 유지되는 공동체에 속한 채 “이 버림받은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방식을 책임지고 이어 나갈”(207면) 사명을 딸에게 설득하고자 애쓰며 어렵사리 삶을 꾸려가는 중이다. 하지만 화자가 보기에 진짜 인간의 “모방 알고리즘”(223면)에 불과한 ‘망자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벌이는 선전선동은 나날이 교묘해지고 “짐승과 약탈자”가 어슬렁거리는 “담장 너머의 바깥세상은 갈수록 거칠고 위험해지기만 한다”(210면).

화자가 이토록 확고한 잔류파가 된 데는 의사가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어머니가 “진짜 죽음을 맞고 싶어. 전자 기록으로 변하는 건 절대 사양이야. 그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니까”(214면)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기어이 업로드를 택한 아버지를 향한 반발이 자리한다. 하지만 이제 자녀와의 갈등은 화자 자신의 몫이 된다. 그의 딸 ‘루시’는 “새 세상의 원주민”(217면)이 되리라는 화자의 기대와 달리 결국 업로드를 택하고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다 사라졌어. 죽었다고, 끝장났단 말이야! (…) 루시랑 그 애 자식들을 우리가 남긴 쓰레기 더미나 뒤지면서 사는 운명 속으로 떠밀 거야?”(225~26면)라고 항변하는 아내의 동조가 있었다. 만류하는 자신에게 “이건 가 해야 할 선택이에요. 아빠가 아니라”(229면)라며 반박하는 루시의 말에 화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잔류자’와 ‘망자’는 치열한 해석 전쟁을 벌인다. 이제 망자가 되어 이메일을 보내온 화자의 어머니는 업로드 이전의 자신을 부인하며 “네 아빠와 정신 대 정신으로 나누는 친밀감을 어떻게 말로 나누는 대화와 비교할 수 있을까? (…)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 사람 정신의 질감을 경험하는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워”라거나 “우리는, ‘진짜 우리’는 말이야, 언제나 심연을 가르고 쏟아져 내리는 전자들의 패턴이었어”(218면)라며 화자를 회유한다. 하지만 이 해석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어떤 해석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세계의 실질적 황폐화이며, 이것이 정확히 싱귤래리티에 수반되는 결과이자 싱귤래리티가 핵심적인 현실로 부상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소설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예전 생활방식은 지속하기가 불가능해. 우리가 사는 이 행성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를 제외한 모든 생물에게 희생을 요구했기 때문이야”(219면)라는 망자들의 ‘생태주의’는, 데이터 유지가 결코 ‘청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매우 기만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화성 식민지 개척이나 지하벙커 건설 같은 것이 실제 미래 기획으로 추진되는 오늘날의 상황이 “근거로 삼고 있는 무언의 가정”, 다시 말해 그렇게 되리라 암암리에 전제하는 사실은 “목전에 닥친 인류 종말”(apocalypse)이라 지적한 바 있는데,18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포스트휴먼화’는 인간적 세계의 파괴를 무언의 가정으로 삼는다. 여기에 비추면 포스트휴먼 조건에서 가장 위협적인 사실을 휴머니즘의 부활로 보는 것은 다분히 안이한 진단으로 보인다.

 

 

3. ‘모든 게 달라지기’ 위하여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Altogether Elsewhere, Vast Herds of Reindeer, 2011)는 어떤 허구적 설정에도 설득력있는 현실감과 정서를 부여해내는 이 작가의 강점이 한껏 돋보이는 소설이다. 여기서 화자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업로드된 의식이거나 아니면 그 의식들이 자신의 “알고리즘의 일부”를 각각 내놓아 “여러 루틴을 재결합하고 재배치”하여 창조한 “완전한 인격, 즉 우주에 새로이 탄생한 어린 의식”(247면)들이다. SF소설이 이질적인 세계를 그릴 때 자칫 매뉴얼 설명서처럼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소설에서 포스트휴먼의 라이프스타일을 묘사하는 대목들은 그 자체로 상상을 자극하는 즐거운 읽을거리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디지털 세계에서 탄생한 ‘르네’와 그녀의 엄마가 있다. 엄마는 “육체를 지닌 채 26년간 살았”던 경험을 가진 “고대인”(249면)으로 이제 우주비행사가 되어 다른 행성을 탐사할 예정이다. 어디까지나 ‘의식’이니만큼 이 과정은 먼저 실물 탐사선이 25년 걸려 그 행성에 도착해 신호를 보내오면 엄마의 의식이 “강력한 송신장치를 통해 탐사선으로 전송”(252면)된 다음 로봇에 구현되는 식이다. 그 행성에서 다시 지구로 의식을 재전송할 만큼의 연료와 에너지가 탐사선에 실릴 수 없으므로 르네와 엄마는 영원한 이별을 앞둔 셈이다.

르네는 자신을 포함해 수없이 많은 의식들이 거주하는 “데이터 센터라는 이 우주 안에만 해도”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심지어 자기만의 다중 우주도 창조할 수 있”는데 “물질세계에 있는 3차원 행성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지 이해하지 못한다(253면). 엄마는 “가상의 실체(imagined existence)에 대한 영원한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서 인류는 무언가 잃어버렸어. 안으로만 눈을 돌리다 보니 현재에 만족하게 된 거야. 우리는 별들과 저 우주 바깥의 세계를 잊어버렸어”(254면, 원문 병기는 인용자)라고 설명하고, 르네를 위해 비행체에 신체화하여 물질세계를 만나는 여행을 제안한다. 비행체 자체가 몇 남지 않은데다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해본 사람(?)이 극히 드문 이 여행에서 르네는 “겨우 3차원밖에 안 되는 세계는 납작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아름다움이 곳곳에 무작위로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디지털 토박이’답게 나중에 이를 “수학적으로 재창조해 볼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재창조된 세계는 전혀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 것이”라 생각하는 르네에게 엄마는 “하지만 스스로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알잖아. (…)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라고 답한다(259면). 이런 생각이 엄마로 하여금 로봇의 “녹슬고 부패하여 산산이 흩어질 몸”(264면)을 통한 필멸의 삶을 택하게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인간 리즈가 갔던 탈신체화의 방향과 대조를 이루는 포스트휴먼의 재신체화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면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이라는 오랜 주제가 참신하게 변주된다.

르네가 생애 처음으로 실물세계를 접하는 ‘체험’과 그를 통해 갖게 된 ‘감정’이 충분히 실감나게 그려지는 것과는 별도로, 감각의 차이에 호소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엄마의 말처럼 진짜임(real)을 ‘아는 것’만으로 과연 ‘모든 게 달라지게’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런 의문을 심화시키는 작품이 같은 책에 실린 「사랑의 알고리즘」(The Algorithms for Love, 2004)이다. 장난감 회사에서 인형로봇을 개발하는 화자는 여러 과정을 거쳐 마침내 튜링테스트마저 통과한 AI 인형 ‘타라’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화자는 “알고리즘이 지능 흉내를 내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누구 하나 관심조차 안 보이는 것”을 보며 겁에 질리기 시작한다(158면). 화자가 느끼는 두려움은 우리가 흔히 AI에 대해 갖는 불안, 곧 그것이 인간을 능가하고 지배하게 되리라는 불안과는 다른 종류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간이 “타라하고 똑같다면 어떡하지?”라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160~61면)이라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신체화된 존재이고 (가상 아닌) 물질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진짜’지만 그 ‘진짜임’이 인간을 가상적 알고리즘과 결정적으로 구분해주지는 않는다. “인간의 몸은 재현하기 힘든 불가사의”이고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정신은, 하찮은 농담”(155면)이라 해서 몸을 가진 것 자체가 ‘하찮은 농담’이 되려는 정신의 질주를 제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화자를 점점 더 절망하게 하여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만든 것은 “단순한 알고리즘”이야말로 “너무나 인간적”(151면)임을 확인시키는 경험 때문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대화든 행동이든 예상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남편 ‘브래드’가 시연한 ‘사랑의 알고리즘’이다. 거기에 부합하는 알고리즘을 작동시켜야만 둘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끝내 손목을 긋는 순간조차 자살의 “올바른 알고리즘”(164면)을 떠올리는 화자에게 도망칠 곳은 없어 보인다.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리즈가 기술적으로 신체를 파괴함으로써 알고리즘이 되었다면 이 소설에서 인간은 온갖 기술적 실험보다 앞질러 이미 알고리즘이 되어 있다. 화자가 겪는 고통은 ‘비인간-되기’에 대한 찬양들이 좀체 들여다보지 않는 또다른 이면이며, 화자가 그랬듯 이런 종류의 ‘선제적’ 포스트휴먼화가 AI의 비약적 진화보다 더 두려운 일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위한 전제조건인지 모른다.

헤일즈는 정보의 탈신체화가 동반하는 추상성이 “세상의 다양성을 없애”고 이를테면 “숲을 이루는 알록달록한 나뭇잎들, 비슷한 모양으로 점점 갈라지면서 작아지는 나뭇가지들, 독특한 나무껍질의 문양을 놓치는 위험”을 낳게 되리라 비판했다.19 추상성을 향한 그의 경계는 타당하지만 추상화된 정보들이 그 나름으로 현란한 다양성을, 그것도 거의 무한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재의 AI 기술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나뭇잎과 가지들은 물론 다양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기여가 이 ‘생명 물질’들이 추상화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니다. 추상화의 알고리즘이 나뭇잎과 가지가 품은 개별성(또는 그 잠재성)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런데도 켄 리우의 포스트휴먼 소설들이 보여주듯 어찌 된 일인지 인간은 자신의 개별성을 한사코 지우고 싶어하며 그것은 대개 신체를 말살하거나 묵살하는 방식을 취한다.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이 귀에 들리는 듯하므로 여기서 개별성은 관계를 배제하지 않으며 신체란 비인간 신체들을 이미 새겨넣은 신체라고 얼른 덧붙여야 하겠다. 문제는 이때 ‘지우고 싶어한다’는 것이 실은 개별성을 성취하는 일의 어려움을 가리는 하나의 제스처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휴먼 대(對) 포스트휴먼 구도 자체가 어느 지점에선가 분명한 제약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먼과 포스트휴먼을 가리지 않고 켄 리우의 인물들이 각자의 선택을 통해 보여주듯 자기다운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때로 신체의 취약성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끌어안아야 하지만 또 그런 것들을 끌어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 자기다움이란 알고리즘의 가상성에 저항하는 싸움을 요구하지만 또 그 싸움만으로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켄 리우의 포스트휴먼 소설이 갖는 한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알고리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싱귤래리티’(단독성)의 성취가 지극히 ‘휴먼적인’ 삶의 과제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환기해준다. 이 과제가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가상화되지 않는 물질세계를 돌보는 일과 이어져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 물질적 전회 담론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로는 졸고 「‘물질적 전회’와 그에 대한 불만」, 『개념과소통』 2022년 여름호 참조.
  2. Martin Heidegger, The Fundamental Concepts of Metaphysics: World, Finitude, Solitude, trans. William McNeill and Nicholas Walk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177면.
  3. 이런 의미의 세계 상실에 관해서는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참조.
  4. Richard Grusin, ed., The Nonhuman Tur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5, ⅸ면.
  5. 박인찬 「포스트휴먼으로 가는 길: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를 중심으로」, 강우성 외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갈무리 2021, 23, 30면.
  6.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경란 옮김, 아카넷 2015, 9, 81, 126면. 원문과 한자 병기는 인용자.
  7. 인용은 순서대로 같은 책 81, 133, 89~90, 82면.
  8.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2018, 7면.
  9. 『에스에프널 2021 Vol.1』(허블)에 번역본이 실렸다. 원제는 “Thoughts and Prayers.”
  10.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장성주 엮고 옮김, 황금가지 2020, 8면.
  11. Mary Wang, “Ken Liu: “We get to define the stories we want to be told about us”,” Guernica 2020.5.28.
  12. 켄 리우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2023.
  13. 이 글이 다룰 작품은 모두 국역본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 실려 있고 그 가운데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싱귤래리티 3부작’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이하 본문 내 소설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14. 모라베크의 발상에 대해서는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1~22면 참조.
  15. 캐서린 헤일스, 같은 책 22, 498~99면. 원문 병기는 인용자.
  16.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trans. Kevin Attel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참조.
  17. 캐서린 헤일스, 앞의 책 499면.
  18.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2, 239면.
  19. 캐서린 헤일스, 앞의 책 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