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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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4·16운동 10년, 무엇을 바꾸었는가

 

 

박래군 朴來群

인권운동가, 4·16재단 상임이사.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음.

pl3170@gmail.com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그날의 기억을 말한다. 제주도를 향해 운항하던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보도를 들었을 때의 충격, 그리고 전원 구조 오보에 환호하면서 안심했던 순간, 그러다가 결국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배. 단 한명이라도 살아서 돌아오는 기적을 간절하게 바랐지만 결국 476명의 승객 중 304명이 죽음으로 돌아왔을 때 슬픔과 절망, 분노가 일었던 모든 과정을 기억한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를 살아온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과 그들 곁을 지켜온 사람들은 여전히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고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그렇지만, 세월호참사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의 기억도 그전과 같지는 않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다

 

윤석열 대통령은 2월 6일, “세월호참사 피해자 사찰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김대열, 지영관 전 기무사 참모장들과 세월호참사 대통령보고 시각을 조작하고, 국가위기관리지침을 무단 변개했던 김관진, 김기춘 등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1 그가 검찰의 요직에 있을 때 수사해서 기소했던 범죄자들을 다 풀어준 것이다. 해경 지휘부도 대법원까지 이르는 재판과정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로써 지금까지 304명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로 처벌받은 윗선은 아무도 없다. 사건현장에 출동했던 123정 김경일 정장만 3년형을 받아서 형기를 마쳤을 뿐이다. 참담하다.

세월호참사 이후 10년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재난전문가들이 말하는 ‘밀월기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국민을 구하지 못한 나라에 분노했다. 유가족들이 먼저 움직였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천만인 서명운동이 전국에서 불붙었다. 시작한 지 한달여 만에 350만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로 행진해 전달했다. 2014년 11월 진상규명 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될 때까지 서명운동이 계속되어 총 650만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그때 사람들은 말했다. ‘잊지 않을게’ ‘가만히 있지 않을게’ ‘끝까지 함께할게’라고.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도 그때 나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성찰할 기회 또한 찾아왔다. 경쟁과 효율, 돈만 좇는 야만적인 시스템에서 비롯된 참사였음에 공감했고, 우리 사회의 야만성에 대한 성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모두 운 좋게 살아남은 ‘세월호 생존자’라는 자각은 ‘4·16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약속과 다짐으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공감능력을 찾아가던 때였다. 유가족들이 광화문광장에 농성장을 차렸고 유가족 김영오씨는 46일간 단식을 이어갔다. 시민들은 동조단식으로, 노란리본공작소로 함께했다. 전국이 세월호로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처음에는 여야 없이 노란 리본을 달고 애도에 동참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집요하게 ‘해상교통사고’라고 우기던 당시 여당 새누리당은 컨트롤타워 부재를 추궁당하자 돌변해서 유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떼를 쓴다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번져갔다. 뒤이어 ‘일베’들이 단식농성장을 찾아와 폭식투쟁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애도와 함께 한쪽에서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구성되었지만 정부의 방해로 조사활동은 가로막혔다. 그때 여당은 특조위에 ‘세금도둑’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정부는 보상금 액수를 부풀려 발표해서 그에 일조했다. 분노한 유가족들은 집단 삭발을 단행했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행진에 나섰다. 정부가 약속했던 세월호 인양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 박근혜정권의 억압정치는 유신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었고 유가족을 비롯해 노란 리본을 단 시민들은 노골적인 적대의 대상이 되었다.

두번째 시기는 시민의 힘으로 부정한 권력을 끌어내린 승리의 시간이다. 2016년 하반기로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박근혜정권의 국정농단이 하나하나 폭로되기 시작했고 광장은 촛불로 뒤덮였다. 촛불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행진의 가장 앞에는 늘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있었다. 시민들도 그들이 앞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촛불혁명의 결과 박근혜는 구속되고 세월호는 인양되어 뭍으로 올라왔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분노는 사회의 변혁을 바라는 다양한 움직임들과 더불어 탄핵촛불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반면에 태극기집회 세력들도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세번째 시기에는 촛불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정부가 등장했다. 세월호참사 3년 뒤의 일이다. 세월호는 박근혜 탄핵과 함께 인양되었고, 박근혜가 구속되는 날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선체 내부에서 화물차와 구조물, 뻘 등을 걷어내고 실종자 수습에 나섰다. 이전까지 수습하지 못했던 9명의 실종자 가운데 4명의 유해를 찾았다. 선체조사위원회(이하 선조위)는 선체를 정밀조사하고 침몰 원인에 대해 ‘내인설’과 ‘열린 안’ 두가지 안을 종합보고서에 담았다. 결론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진상규명을 원하던 시민들의 기대가 식어버렸다. 능동적으로 정권까지 교체했던 시민들이 문재인정부에 권력을 위임한 상황에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출범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와 함께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동시에 안전사회 대책도 내놓아야 하고 피해자도 지원해야 했지만 인력이나 기간, 권한에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채 3년 6개월간 활동을 전개했다. 사참위는 2022년 6월 조사를 마무리하고 9월에 보고서를 발간한 뒤 활동을 종료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정부는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선조위나 사참위에 맡겨두었을 뿐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임명한 윤석열은 검찰 내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과 특검의 조사활동을 방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가족과 시민들은 책임자 고발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했다. 그런 노력으로 특조위 조사를 방해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고위 책임자들, 구조책임을 다하지 못한 해경지휘부, 유가족을 불법사찰한 기무사 관련자 등이 기소되었다.2 하지만 문재인정부에 대한 원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적폐청산은 물 건너갔고, 여당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주요 의제에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더욱이 문재인정부하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재난참사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과 대응체계의 변화를 요구했지만, 의미있는 변화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네번째 시기,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사참위의 권고사항은 외면당했고 그나마 기소되었던 관련자들이 무죄로 석방되거나 대통령사면으로 풀려났다. 생명안전공원 건립은 지연되고 있고 4·16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은 삭감되었다. 민주당은 여전히 다수당을 유지했지만 개혁은 동력을 잃고 오히려 후퇴했다. 세월호참사의 뼈아픈 교훈을 망각하고 형식적인 안전조차 뒷전으로 밀려났을 때, 거짓말처럼 10·29 이태원참사가 발생했다. 2022년 여름 폭우가 불러온 반지하 침수사고와 2023년 7월 15일 오송 지하차도에서 발생한 참사 등 기후위기와 결합된 새로운 양상의 재난참사도 잇달아 일어났다. 여전히 국가는 부재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요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우리는 지금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야만적인 대응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2월 4일 열렸던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총회에서 김종기 운영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10년을 말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일상을 살아가던 우리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세월호참사로 한순간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고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신분 아닌 신분이 된 것이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하고 왜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했는지, 왜 그 큰 세월호가 갑자기 침몰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자식을 잃은 우리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부모의 도리를 다하고자 치열하게 싸웠던 수많은 흔적들이 어느덧 기억을 더듬어야만 떠오르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3

자식이나 부모를 잃은 유가족, 실종자 가족, 생존자들의 시간은 그들의 말대로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있다. 종종 다른 시간을 살다가도 저도 모르게 그날의 시간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있어야 할 소중한 사랑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수없이 깨닫게 되는 이가 바로 피해자들이다. 그 깨달음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참사로 숨진 생명들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유가족들이 스스로 찾은 숙제이기도 하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건너야 한다. 그러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의 이정표가 된 4·16운동

 

세월호참사 피해자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4·16운동이라고 부른다. 4·16운동은 단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에 머물지 않는다. 세월호참사로 확인된 야만성을 극복하고 모두의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사회까지 나아가겠다는 전망을 포함한다. 그 전망 안에는 재난참사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책임지지 않으려는 정치질서의 변화까지 들어간다. 정치의 변화 없이는 위험사회가 계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4·16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약속과 다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재난참사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따랐다. 재난이 일어나면 초동대처는 항상 미흡하거나 심지어 포기한다. 재난 이후 정부의 책임자들과 정치인들이 나서서 유족들을 회유하고 적당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와 동시에 피해자들을 갈라치기한다. 그러면서 추모와 기억에 대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빨리 장례를 치를 것을 종용한다. 종종 재난이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 국회에서 국정조사도 하고 검경의 수사도 진행되지만 늘 말단만 처벌하는 데 그친다. 진상규명은 뒷전이고 책임자는 빠져나간다. 형식적인 사과와 함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령탑을 세운다. 수없이 많은 약속을 남발했던 책임자나 정치인들은 만나기도 어려워진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이런 공식이 바뀌었다. 유가족들은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았다.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되어 움직인다.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재난을 사회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재난공동체가 형성되어 유지된다. 전국 곳곳에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누고 피켓을 들고 서명운동을 벌인다.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는 피해자와 시민들이 함께 만들고 활동하는 단체다. 다수의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국가의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벌여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받았다. 그 배상금을 출연해서 4·16재단을 만들었다.

집요하기까지 한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운동은 세차례의 진상규명 관련 특별법을 만들어냈고, 각 특별법에 따른 국가의 조사기구를 구성해서 활동하게 했다. 이전의 재난참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과이다. 그럼에도 진상규명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조차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월호참사 이후 재난참사에서는 보상보다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이 우선되었다는 점이고, 그에 따라 기존의 공식 또한 바뀌었다. 이태원참사 피해자들도 바뀐 공식을 따라 움직인다.

4·16운동은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전의 재난참사는 제대로 기록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추모의 공간이나 애도의 상징물도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참사에서는 초기부터 기록 작업이 시작되어 이후 수많은 기록물들이 탄생했다. 이전의 재난참사에서는 기억의 장소 자체가 보전되지 않았지만, 세월호참사를 애도하기 위한 생명안전공원이 안산시민들이 즐겨 찾는 화랑유원지 안에 세워지게 된다. 아직 착공식도 못했지만 공원 부지를 그곳에 확보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다. 생명안전공원은 수많은 시민이 오가는 장소에서 참사의 교훈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아울러 인양된 세월호 선체를 보전하고 활용하는 방안도 확정되어 추진되고 있다. 참사의 흔적과 기억을 지워왔던 그간의 시간을 훌쩍 넘어서는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4·16운동은 우리 사회에 분명한 이정표를 세웠다. 초기부터 ‘피해자의 권리’를 말하기 시작했고, 그런 노력으로 ‘4·16인권선언’을 만들었다. 이 선언은 이후 『피해자 권리 매뉴얼』(4·16재단 2021)로 풍부해졌고,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으로 이어졌다. 2020년 11월 국회에 발의된 생명안전기본법은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규정하고, 안전영향평가제도를 도입하며, 독립적인 중대재난 조사위원회를 상설적으로 운영하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월호참사로 확인된 위험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시민들의 논의와 고민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들과 연결망을 형성하고 공동으로 활동해가기로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이전에 발생했던 삼풍백화점 붕괴(1995),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1999), 인천 인현동 화재(1999), 대구 지하철 화재(2003), 가습기살균제 사건(2011),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참사(2013), 세월호 침몰(2014), 스텔라데이지호 침몰(2017) 피해자들이 함께 모여서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고 전문적인 안전사회운동의 허브 역할을 할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만들어져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러한 활동들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라는 키워드

 

4·16운동은 지금까지 두 축으로 진행되었다. 한 축은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이다. 다른 한 축은 생명존중-안전사회 운동이다.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전자였다면, 세월호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시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중심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후자다.

2021년에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것은 세월호참사 이후 진행된 생명존중, 안전사회 운동이 밑받침된 결과다. 50여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안전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산업재해와 사회적 재난, 자연 재난이 분리되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예전에는 묻혀버릴 수도 있었을 죽음들이 사회적 이슈가 된다.

1월 10일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는 세월호참사 10주년을 100일 앞둔 시점에서 기자회견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우리는 존중받으면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와 국가의 책무에 대해 새롭게 자각했습니다. 시장과 권력은 바뀌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어제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지속적인 만남, 소통, 연대를 통해 다져왔기에 힘이 셉니다.”4

어제의 우리가 아닌 오늘의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우리가 10년 전의 질문에 얼마나 성실하게 답해왔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10년 전, 가라앉는 세월호를 슬픔과 분노로 지켜봐야 했던 그때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라는 배에서 지금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배와 함께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면,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라는 방향에 동의한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기후위기와 결합된 재난이 더 높은 강도로 빈번하게 발생하고 가장 먼저 약자들을 희생자로 만들 것임을 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기후변화는 결코 자연재해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어떤 재난이든 결국 자연재해가 인간을 삼키기 이전에 인간끼리 먼저 삼키겠다는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 분쟁지역마다 높아지는 전쟁위험은 기후변화라는 대격변을 육감으로 감지한 인간들이 레밍 떼처럼 절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자연재해를 재앙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은 그래서 과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정치다.”5 후진적인 정치, 재난참사를 지우려고만 하는 국가와는 결별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를 위한 정치에 투표하는 것부터 시작해 정치를 바꾸고 가장 약한 이들까지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세월호 안에서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느라 끝내 구조되지 못한 이들에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10년 전 4월, 함께 아파하고, 약속하고, 다짐했던 그때를 돌아볼 시점이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험난하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이제 달라진 능동시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월호는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1. 「윤석열 정부의 세월호참사 피해자 사찰 등 중대 범죄자 사면을 규탄한다」,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및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성명 2024.2.6.
  2. 「재난참사 국가 책임자(공직자) 불처벌 실태와 대책: 4·16세월호참사 공직자 처벌 실태를 중심으로」, 국회토론회 2022.12.1 참조. 이후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책임자들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거나 윤석열정부에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3.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제8년차 정기총회 자료집 참조.
  4. 세월호참사 10주기, D-100 기억다짐 기자회견문 「4월 16일, 그날의 약속을 기억하며 시민에게 드리는 글」,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2024.1.10.
  5. 이수경 『기후재난시대를 살아내는 법』, 궁리 2024, 34면.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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